∥해설∥

 

 

생뚱맞게 느물거리는 말의 비늘

하재영 시인

 

 

울림에서 진동의 횟수는 소리의 높낮이와 밀접하다. 같은 시간 내 진동의 횟수가 많을수록 소리는 고음이 되고, 적을수록 낮은 음이 된다. 시인의 언어는 분명 세상을 향해 울리는 소리의 진폭을 지니고 있다. 차영호 시인의 세 번째 시집『바람과 똥』에 담긴 시와 시의 연결고리는 철길을 달리는 기차처럼 일정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아울러 속도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다양한 모습의 풍경을 바탕으로 울림을 만든다. 더욱이 편편의 시 안 풍경에는 내내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것은 차영호 시인만이 갖고 있는 시의 독특한 개성이면서 그 특징은 새로운 시의 울림이 되어 우리의 눈과 귀를 이웃의 살림 속으로 안내하고 있다.

 

뜬금없이 소꿈을 꾸었어

도회 한 복판에 살다보니

먼발치에서라도 소 본 적 아득하고

소해 소달 소날 소시도 아닌데

암창난 소 여러 마리 데불고

읍내로 나가 주사기로 접붙이다가

약, 떨어져 한 놈만 붙이고

나머지는 그냥 내버려 두었지

버려진 것과 버려지지 않은 것들

쇠새끼인지 모본단 치맛감인지 둘치들까지

뜸베질하며 어깨춤 추어대더라고……

 

히히히힝 쇠 뱃구레에서

말랑말랑 피어오르는 말울음

정체모를 해파리 같은 그 것

세상 떠들썩한 줄기세포라는 게

요 미역귀같이 꼬들꼬들한 거여?

 

두멍보다 더 큰 눈 두렷거리는

소,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인지 몰라

꿈속에서조차 연구하기 시작했지

흘레붙는 감조차 앗아간 인간들

도대체 무슨 욕을 얼마나 더 얻어 처먹어야

쌀까

―「소꿈」전문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를 비판하는 시인의 목소리가「소꿈」 에 담겨 있음을 보게 된다. 소꿈을 꾸게 되는 장소는 도회 한복판이다. 자연의 섭리라고는 쉬이 접근할 수 없는 곳에서 시인은 엉뚱하게 소를 데리고 읍내로 빠져나가 한 놈에게만 접붙이게 된다. 수정액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들리는 소리는 소울음이 아니라 말울음이다. 어찌된 일인가. 인공수정이니, 줄기세포 배양이니 하는 것들의 근본에 의심을 품는 시인의 눈에는 ‘흘레붙는 감조차 앗아간 인간들/ 도대체 무슨 욕을 얼마나 더 얻어 처먹어야/ 쌀까’라며 자조적 지청구

를 한다. 그 이면에는 인간 역시 그와 같은 상황에 언제 도래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자연의 섭리이며 쾌락의 한 즐거움인 성생활도 빼앗기고, 자기의지가 아닌 타인의 강요에 의해 출산이 짓밟혀지게 됨을 경고하고 있다. 출산의 저쪽에 시인이 염려하는 ‘인공수정’ ‘세포배양’은 이미 인간의 세계에 와 있음을 우린 곳곳에서 보고 있지 않는가.

세상의 비상식적이며 비논리적인 상황에 대한 시인의 신랄한 꾸짖음은 시 곳곳에서 드러난다. ‘천만의 말씀/ 뒷바람에 화라락/깃털 날려 똥칠하면 흉하잖아요/ 우리네 새대가리 깜냥으로도 낯 뜨거운/ 세상, 여기 앉아 조감하면 빤히 들여다보이지요’(―「바람과 똥」부분)에서 인간들의 생각에 대해 조롱하듯 갈매기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KTX/ 속 시끄러운 우리말 젖혀놓고/ 속 편하게 KTX, KTX……/ 영문도 모르는 영문약자를 곱씹으니/ 보이는구나/ 한강 밤섬이 라그랑자트나 오리노코의 언덕쯤으로/ 장독대도 똥간도 이국풍물로’(―「시장기」부분)에서 보듯이 시인의 목소리는 우리 사회의 빠른 변화 속도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기도 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한다. 더욱이 각종 이슈, 명칭 등 도나캐나 우리식의 이름을 버리고 외국어를 차용해 쓰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 함은 그의 시 전편에 흐르는 우리말에서 역설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

 

그렇기에 시인은 우리 이웃에 자라는 많은 식물의 이름을 통해 자연과 교감하려고 한다. 참 다양한 식물 이름이『바람과 똥』에 자생한다. 생김새를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등장하는 식물들의 출발점은 아무래도 생기 넘치는 봄에서 출발한다. 자연과 교감의 출발지를 봄으로 삼고 있음을 그의 시「봄비」에서 볼 수 있다.

 

봄비는 용한 족집게를 가지고

봄을 뽑아 올린다

살구나무 등걸에서 살구 꽃망울

제비꽃 불탄 자리에는 제비꽃

어두컴컴한 물 속 갈대 우듬지에서도 갈대

여린 싹을 쏙쏙, 용하다 참말로

박수보다 용해서 겨울도 암팡진 칼날

누굴누굴 누그러뜨리고

벌이랑 풍뎅이, 제비, 송사리 떼

한눈팔아도 걱정 없다

―「봄비」전문

 

봄을 뽑아 올리는 족집게를 봄비는 가지고 있다. 살구나무 등걸에서 살구 꽃망울을 끌어올리고, 제비꽃 불탄 자리에는 제비꽃을 섬세하게 올리고 올린다. 그 모습이 용한 박수무당보다 훌륭하다. 결국 벌도 날고, 풍뎅이도 등장하고, 제비와 송사리 떼가 봄비의 한 줄기에서 생명을 드러내며 숨 쉬고 있다. 시인의 시선에는 봄비에서 시작된 생명이 그 끄트머리에 인간이 있음을 아이러니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 시가「풀밭 위의 점심」이다. 마네의 그림「풀밭 위의 식사」를 연상시키는 이 시에는 여러 종류의 식물 이름 앞에 동물 이름을 차용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닭의장풀, 쇠무릎, 강아지풀, 개불알꽃, 꿩의비름 등을 비롯해 동물이름과 합성된 47종의 식물이름이 등장하는데 제일 끝에 사람을 끌어들이고 있다. 그 가정 아래 새로운 식물이름 ‘사람큰도둑’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유익함을 떠나 편리함을 위해 자연을 훼손하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다. 특히「풀밭 위의 점심」은 단순해 보이지만 많은 것을 시사한다.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E . 마네(1832~83)의 작품「풀밭 위의 식사」는 나체와 반라의 여인, 그리고 정장 차림의 남자 2명이 풀밭 위에서 식사하는 풍경을 그린 작품으로 이 그림은 근대의 남성우월사상을 반영한 작품이라고 많은 여성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즉 낮은 것과 높은 것의 이분법적 사물인식에 대한 통렬한 아이러니가「풀 밭 위의 점심」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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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똥』에 등장하는 시들의 편편에서 간과해서 안 될 것이 그가 살고 있는 주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여러 편의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시에는 다양한 풍경이 담겨 있다.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에 있는 한밤마을이 등장하기도 하고, 멀게는 설악산 대청봉, 경남 사천시 바닷가도 등장한다. 하지만 제1부에 있는「포항중성리신라비」,「옥녀봉」,「한달비문재를 넘으며」,「오월 구만리」,「오리온 목장에 가다」,「고석사 석감미륵불의좌상」,「통점재를 다시 넘다」,「하옥에서 달산까지」,「기청산 일우」,「대도동 512번지」등에서 보듯이 한국의 대표적 명소가 아닌 그의 주변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지명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은 문학인으로서 그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해 빚을 지고 있다고 스스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그가 살고 있는 주변인에게 식상할 수 있는 것을 새롭게 재인식시키고 있다.

 

죽장 상옥에서 청송 부남으로 넘는 고개

십여 년 전 하정*선생과 둘이 넘을 때

뗏장이 엉금엉금 길 가운데 까지 기어 나오기도 하고

아카시나무가 가풀막진 길 복판에 쭈뼛쭈뼛 서있기도 했지

68번 지방도로라는 이름이 무색하던

돌투성이길

 

새참하게 단장된 오늘을 나 홀로 넘는다

저 갈나무 황금물결 속 어디쯤 자드락길 있어

선생은 휘적휘적 가고 있을까

투명한 손 내밀어 내 어깨를 툭툭

― 어이, 퍼뜩 마시고 깨거든 가자

― 예

대답부터 하고 하늘을 본다

 

붉다, 산자락을 우려낸

진국

 

통점재,

통점痛點이란 아픔을 느끼는 감각점

도나캐나 아픔 감지하며 넘어야 제격이지

엄연히 다른 글자를 두고 어깃장부리며

 

부남 쪽에서 상옥으로 되넘으니

나른한 포장도로가 찰찰

차바퀴도 소주를 홀짝홀짝 마시더군

 

―「통점재를 다시 넘다」전문

 

 

\하정 선생은 동화작가 손춘익 선생을 가리킨다. 2000년 9월에 돌아가셨으니 차영호 시인이 하정 선생을 모시고 통점재를

넘은 때는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 포항의 오지(지금도 오지지만 도로가 잘 포장되어 있음)라 할 수 있는 죽장 상옥에서 청송 부남까지 가는 길은 가파른 산판 길을 가는 것과 별반 다를 리 없는 길이었다. 필자는 그 고개 이름이 ‘통점재’ 임을 이 시를 통해 알게 되었으며, ‘통점痛點’이란 의미가 피부 표면에 퍼져 있어 자극을 받으면 아픔을 느끼는 감각점이란 것을 새롭게 알았다. 이는 시인의 시어 선택의 폭이 예사롭지 않음을 발견케 하는 대목이다. 그냥 지나치지 않는 뛰어난 관찰력에서 찾을 수 있는 언어다. 그의 시어는 한자어보다 순우리말을 사용하는데 더 빛난다. 사장되어 가는 독특한 언어의 시어 활용은 시를 생경스럽게 하여 흔히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이 주장했던 ‘낯설게 하기’에도 오히려 충실하게 하는 장점이 된다.

 

된비알 너머 마루금 이어지고 ―「옥녀봉」부분

늦사리 눈물겨워 돌아눕는 까끄라기 보리바람 ―「오월 구만리」부분

낡삭은 틀니 같은 가슴에도 ―「거울에게 묻다」부분

생뚱맞게 느물거리는 말의 비늘 ―「에러」부분

어기뚱한 몸 추스르며 맞바람에 날리는 ―「정동진」부분

실은 노린재같이 옹송그리고 잠을 청하는 거야 ―「여수旅愁」부분

별쭝맞은 천둥벌거숭이 ―「별나라 통신」부분

요기 몇 군데만 호비작거려 봐라 ―「보물창고」부분

 

시집을 넘기며 임의로 뽑은 시행이다. ‘된비알’, ‘늦사리’, ‘낡삭은’, ‘생뚱맞게’, ‘어기뚱한’, ‘옹송그리고’, ‘별쭝맞은’, ‘호

비작거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오늘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우리말을 시어로 사용함으로써 조금은 낯설어 보이기까지 한다. 이는『바람과 똥』전체에 관통하는 큰 물줄기이며 이 시집의 장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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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가 타인의 가슴을 크게 울리게 하는 울림봉이 되기 위해서는 시인과 독자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공유면적이 넓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시라도 그것이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외국어로 쓰여 있다면 그 시는 그냥 글자일 뿐이다. 생산자와 소비자, 시인과 독자 사이에는 고무줄처럼 당겼다가 풀어주는 긴장미를 제공할 수 있는 언어의 끈이 묶여 있어야 한다. 공교롭게도 차영호 시인과 나는 태어나 자란 곳도 같고 일한 일터도 비슷하다. 그러다 보니 서로 알고 있는 언어의 공유면적(사투리, 유년 시절의 지명)도 넓은 편이다. 그런데 차영호 시인이 운용하는 빼어난 시어들을 발견할 때마다 차영호 시인의 가슴에 머문 유년의 서정을 놀랍게 발견하게 된다. 이는 시인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시를 통해 자서전적인 이야기를 전달하려 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초록이 대굴대굴, 철 따라 하늘을 깁는 새떼’ (―「꼼수」부분)의 표현처럼 그가 겪은 체험을 시어로 깁는데 정성을 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삼십년 넘게 골짜기로만 굴러다녔다

골곡 谷자를 벗어나야 신수가 풀릴 괘라는데

여태 골 안에서 뒹구는 자갈이다

―「골 곡 자에 붙여」부분

 

나는 쇠새낍니다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봉산리 268번지에서 태어나 붙박이로 살아온 근우 할배네 목매깁니다

―「추석」부분

 

인용한 시에서 보듯이 그가 주로 근무한 곳은 골 谷 자가 붙은 곳이다. 곡은 골짜기를 의미한다. 연곡連谷, 용곡龍谷, 월곡月谷, 지곡芝谷. 그 곡자로 향하기 위해 그는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봉산리 268번지에서 태어나 쇠새끼처럼 자랐다. 그런데 그 고향을 떠나 우연에 기대 곡을 찾다 보니 ‘눈을 질끈 감고 내달려/ 나 예 섰다’(―「좌사리도」부분)에서 보듯 그런 곳과는 별개의 바닷가 마을에 그는 지금 머물게 되었다. 예전에 그가 그리던 바다는 현재의 시간 안에서 곁에 있고, ‘이제는 돌아가 뼈를 묻을/ 내륙이 없다’(―「좌사리도」부분)고 한다.

이러한 진행은 그의 시를 새롭게 변모시킬 모종의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사실 많은 독자들이 차영호 시인의『바람과 똥』에 등장하는 고유어, 낯선 지명, 다양한 식물에 대한 새로움으로 시 자체를 어렵게 생각하고, 건조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시인과 독자의 언어 공유면적이 협소하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시인의 많은 언어에 익숙해 있지 않은 현상 에서 나타나는 불편함이다. 시의 울림이 크기 위해서 시인은 앞으로 보다 새로운 곳으로 시의 열차를 향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시인의 자아의식이 일반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인구밀도가 낮은 시 변두리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인구밀도 높은 그가 살고 있는 도시 한복판으로 향할 때일 것이다. 충분히 그는 그러한 것을 스스로 알고 지금 시의 열차 방향을 조금씩 틀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