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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바다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1

 

손만 대면 덧날 것 같은 상처를 안고 살얼음 딛듯

위태위태하게 늘 추위를 타며 살아가는 나는

봄이 와도 썰렁한 겨울 태생이다

일본 땅 후지깽(縣), 1946년의 겨울

추위가 깊어가는 섣달 초열흘

또아리 튼 어둠의 한 가운데쯤에서 멀리

쩡쩡 몸 비틀며 울부짖는 겨울 바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아득한 미궁으로부터의 탈출

 

이름도 잃어버리고 비명도 잦아들어버린 짓밟힌 조국,

살아남기 위하여 피로 물 든 나날을 보내야하는 조국,

그 눈물겨운 이름 앞에

드높은 파고의 바다를 감싸 안아야 하는 고난의 역사가

새로이 시작되는 막간에

바다는 끝없는 외로움으로 얼어붙었을 것이고

유민(流民)의 하늘은 막막하기만 한 칠흑이었을 것인데

징그럽게도 춥던 그 겨울의 잠 속에서도

도전의 자맥질로 잠 이루지 못한 정충 한 마리

내 영혼을 잉태한 목숨을 싣고

끝없는 모색 끝에 자궁을 탈출했을 터인데

아마 그 때도 백제의 마지막 하늘처럼 매캐했을 터이다

 

 

 

넘치지 않음은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49

 

끝없이 넘어지며

뜨겁게 일어서는 바다

 

우리가 닿아야 할 푸른 시간들이

거기에 모여 출렁이고 있다

 

높이 높이 솟아오르는 꿈도 잠재우고

끓어오르는 혈압도 끌어내리고

낮게 낮게 속사기며

때로는 불끈거리며,

 

절망할 줄도 알고

부서질 줄도 아는 바다

 

그러나 바다가 넘치지 않음은

언제나 가장 낮은 곳에

몸을 두기 때문이다

 

 

 

삶의 원론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3

인생론(人生論)의 원서(原書)를 읽으러

바다에 간다

 

열어놓은 넓은 책장마다

수만 비트의 기록들이 내장되어 있는

바다는 삶의 원론(原論)이다

 

갖가지 상형문자로

온갖 몸동작으로

 

읽어낼 수 있는 만큼은 펼쳐 보이고

나머지는 묻어두고 있다

 

파도의 갈피갈피 묻힌 뜻을

깨닫기 위해

깊은 심중에 쟁여있는

지혜의 초록 비타민

그 푸른 옷을 얻어 입기 위해

바다에 간다

 

 

 

고산죽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11

갖고 싶었네

보길도 같은 익명의 섬 하나 쯤

나대지(裸垈地)로 누워있는 빈터

묵밭 일궈낼 내연의 섬 하나 쯤

찬바람만 들이치는

내 생애의 깎아지른 해안

그 끝없는 기다림을 붙들어 맬

심지 푸른 사내 하나 쯤

숨어서도 곧은 고산죽(孤山竹) 한 그루

가꾸고 싶었네

 

 

홍어 좆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19

 

우리는 맥없는 공

만만하다는 홍어 좆만도 못한 공이다

 

높은 사람들이 휘두르는 골프채에 맞아

그들의 목표대로 날아가 주어야하는,

때로 빗나가기도 해서

짭짤한 힘의 맛을

 

그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알아서 튀거나

맞고 튀거나

튀는 건 다 같은 튀는 거라고

흰소리로 가슴 쓸어내리는

좆도 아닌 공

 

고상한 사람들이 즐기는

테니스 라켓의 그물 망 위에서

튀는 햇살에 뭉쳐져

치는 대로 통통 튕기는, 튕겨지는

때로 빗나가서

게임의 묘미를 더해주는

소프트 혹은 하드

 

 

 

자맥질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6

 

밀물의 그리움과

썰물의 허무

그 끝없는 자맥질에

무정란(無情卵)의 알을 배는

밤바다

 

파도가 쓸어간 진흙 뻘밭 가슴

빈 가슴에 채워지는 갯바람에

늙어버린 바다의 아낙

드높은 폭풍 아래 엎드려

외눈박이 새끼를 깐다

 

 

산호도시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21

 

산호도시에 새벽이 오면

청소부 놀래미가 다시마 가로수 길을 쓸고 간다

환경미화원 박씨가

우리들 머리맡에 쌓인 새벽어둠을 쓸고 가듯

대기업의 엘리트사원으로 젊음을 쏟아 붓는 애들 삼촌처럼

등 푸른 고등어와 가자미들이 이른 출근을 하고 나면

게으른 배불뚝이 복어가 느릿느릿 집을 나서고

중소기업체를 운영하는 손사장이나 공무원 김씨

느긋한 출근길에

야간근무를 하고 돌아오는 공단근로자 순태씨와 마주친다

상습적으로 병목현상이나 교통 채증을 일으키는

영등포 로터리나 남부순환도로 혹은 88도로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서울시민들의 짜증나는 아침처럼

산호도시 주민들의 아침도 분주하다

유난스런 디자인과 튀는 색깔의 무늬 옷을 걸치고

개성을 주장하는 x세대 물고기들

우리의 아이들 김건모나 투투 서태지와 아이들이 그렇듯,

분홍색으로 치장한 마오마오

밤만 되면 압구정동이나 방배동 카페거리의 오랜지 족처럼

눈부신 조명 아래 모여들고

미식가 꽃도미

플랑크톤만 먹는 편식증의 물고기들

뾰족한 무기와 독소를 지닌 지존파도 있지만

밤을 낯 삼아 불면의 시간을 보내는 시인들처럼

혹은 적은 임금과 쥐꼬리만 한 수당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잔업으로 땀 흘리는 근로자들이 초롱초롱 불을 밝히는

야행성의 주민이 있어 아름다운 산호도시,

해저타운 산호도시 산호거리에

오늘도 보이지 않는 질서의 하루가 피고 진다

 

 

포경, 그 무렵에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29

 

포경, 포경, 포경, 포경, 포경········그 무렵엔 신문만 펼쳐들면 바다가 넘쳤다 날마다 명함 크기만 하게 찍혀 나오는 바다, 웬 고래가 그리도 많이 잡히는지, 우리나라에선 장생포에서만 고래가 잡힌다고 책에서 배웠는데 신문만 펼치면 네모 칸에 갇혀 끊임없이 실려 나오는 포경, 포경, 포경, 포경······, 지구가 네모 아닐까 헷갈렸지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때부터 혼자서 터득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와 세상 사이에는 엄청난 굴헝이 비리처럼 가로막혀 있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는 장부와 보이지 않는 비밀장부를 따로 만들어야 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기는 누구에겐가 보이기 위한 일기이며 진짜 비밀일기는 가슴에 쓴다는 것을,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어지러웠다

 

그 후로는 내내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끼어들었다 끼어들어서, 나와 세상 사이에, 나와 친구 사이에, 나와 시 사이에, 심지어는 나와 나 사이에 괄호나 블랭크를 만들어놓아서 갈팡질팡 흔들려야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꿈과 현실 사이에서, 도리와 명분 사이에서, 가식과 진실 사이에서, 앞모습과 뒷모습 사이에서, 겉과 속 사이에서, 말과 행동 사이에서, 웃음과 혀 사이에서 나의 어지럼 증세는 깊어져갔다 알수록 모르겠고 믿을수록 못 믿겠는 세상살이에 서툰 나머지 곧잘 두통을 동반한 현기증을 일으키곤 했는데, 두통이 평생 지병이 되리라는 걸 그땐 몰랐다

 

생각해보면 포경과 고래잡이를 혼동했던 그 무렵부터, 바다는 늘 그렇게 내 안에 스며들어서 멀미를 앓게 했고, 바람 잘 타는 나에게 세상공부를 시켜주었는데 그 후로 나는 익사하지 않는 방법까지,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 낙법까지 터득하기 시작하면서 『슬픔』이라는 만성지병을 얻기는 했지만 푸르고 단단한 지느러미로 바다를 거느리며 때려눕히는 고래 떼들을 보고 힘을 얻었고 그 중에서도 바다를 헤엄쳐 가는 향유고래가 되기로 작정했다

 

 

인생론 집필 중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48

 

바다는 오늘도

인생론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격렬한 필치의 서사시도 인용하고

수채화 같은 서정시도 펼치면서

끝도 없이 고쳐 쓴다

 

시궁창에 처박혀 숨도 쉴 수 없었던 일

사탕발림에 속아 간도 쓸개도 다 넘겨주고 나서

돌아설 때 등을 치며 날리던 헛웃음

길 잘 못 들어 허덕이며 가슴 치던 절망마저도

어느 것 한 가지 약 아닌 것 없고

한 번도 잘나본 적 없던 남루한 시간들이

모두 엉겨 진하게 달여진 잉크,

피를 삭여 쪽빛을 내는 잉크를 찍어

응달과 양달을 뒤섞는 펜 끝에

온 세상이 줄줄이 매달려 휘날린다

 

바다가 촘촘히 써나가는 인생론을

읽고 또 읽어 가면

첩첩 쌓인 삶의 숨겨진 언덕들이

한 켜 한 켜 때 묻은 살 껍질들을 벗겨낸다

 

 

동네북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47

 

둥둥둥

만선을 알리는 북이었다면 오죽이나,

주름진 가슴 활짝 펴고 휘날리는

오색 깃발이었다면 오죽이나,

그런 날이 평생에 몇 번이나 있을까

 

우리는 먼지 뒤집어 쓴,

더러 똥바가지도 뒤집어써야 하는 북이다

길거리에 놓인 자판기처럼

창녀처럼

싼값에 속을 뱉어내야 하는,

몇 닢의 동전으로

전자오락실 앞 길거리에 나앉은

두더지처럼

고개를 쳐들면 두들겨 맞고

두들겨 맞아가며 실팍해진 고개를

맞기 위해 쳐들어야 하는 맷집

심심풀이로 팡팡

하릴없이 펑펑

시도 때도 없이 텅텅

까닭 모른 채 얻어맞다가

쓸모없이 버려진

우리는 북,

헛 북 이거나 동네북이다

 

 

바람앓이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12

 

떠나면 돌아오고, 돌아오면 떠나는

사는 곳이 확실치 않은 사람

그러나, 말을 타고 삼지창을 들고 바다 위를 달려

나에게로 오는 사람

오늘도

청동의 말굽과 황금 갈기를 휘날리며 나에게로 온다

한사코 머물지 않는,

그러나 온통 나를 묶어 버린 밧줄의 고삐를 쥐고

감고 풀고, 감고 풀고, 감고 풀고···

그가 떠나면

바다를 뒤엎던 파도 위에서 깊었던 멀미가

조가비 부스럼으로 돋아나고

그가 하얀 수염을 날리며 말을 타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풍(風)을 앓는다

 

 

빈 섬 집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46

 

바람 떠나 듯

사람들 바람 따라 떠나고

 

혼자 남은

빈 섬 집

 

파도소리 들어와 쉬었다 가고

울음소리 집세 삼아 세 살겠다는 갈매기

가끔씩 계약하러 들를 뿐

 

이승의 살림 꾸려

나 떠나고 나면

내 자리 누가 들어와 살까

 

바람, 파도, 햇볕 ············

아무나 들어와 쉬어가라고

안방이건 대청마루건 모두 비워놓고

초록 비타민까지 마련해 놓은

빈 섬 집

 

떠날 때처럼

바람에 이끌려 돌아올

안부 기다리며

오늘은

문짝까지 떼어낸다

 

 

섬에 가는 이유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25

 

벗어나고 싶어

바다에 간다

 

갇히고 싶어

섬에 간다

 

 

도시 탈출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26

 

자, 이제 떠나기로 한다

공시지가 표에 시달리는 땅을 내놓고

오존냄새 맡으며

알레르기성 피부염을 치료하러

물새소리 들리는 곳으로

그린벨트로 묶어놓은 자연을 찾아서

 

우리를 겁주고 위협하는

공포의 단어들

교보문고의 사전류 갈피에나 묻어두고

흑단 같은 머리칼을 잘라 내버린

칼날의 시간

황음의 사타구니에서 뿜어내는

욕정의 거리

그 매연의 밤을 떠나기로

 

솟아오르는 고층빌딩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는 해를 만나고

싱싱한 자외선을 쬐러

잿빛 도시를 잠시 비워두기로

 

 

유리문 중년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45

 

파란 유리문을 밀고 들어선다

투명하게 빛나는 햇빛들이

지느러미를 털고 있다

산호 숲 물 그늘 아래

눈부신 시간들이 모여

빛의 알갱이들을 줍고

물살의 푸른 근육들이 서로 엉겨

유리(琉璃) 기둥을 휘감아 올린다

 

사십 넘어 다다른 언덕길

일단 정지!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서

모든 것을 정지시켜 놓고

바다가 여는 파란 유리문 안으로 들어가

인생의 한 나절을 조율하고 있다

 

 

동침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41

 

바다에서 보면

뭍도 섬이다

 

내겐 그가 섬이듯

그에겐 내가 섬이려니

 

바다와 뭍

오랫동안 서로 할퀴며 휘날리고

여전히 살 섞으며

바람 한 가운데서 멀미를 앓고

 

그와 나

상처를 덧나게 했던 아픔들이 벗어놓은

허무의 껍데기를 깔고 누워

여전히 살 섞느라

살앓이만 무성하다

 

오늘밤도

반짝이는 슬픔 내 곁에 앉아있고

바다는 오랜 침묵 끝에

마음의 불을 끄고 눕는다

 

 

괴테의 과수원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57

 

중년이 되어서야 알았다

 

부용(芙蓉)집 담 넘어 반월리(半月里)로 굽어지는 괴테네 과수원 탱자 울타리에 밤새 내려와 집을 짓고 등을 밝히던 별들은 날이 밝아도 떠날 줄 모르더니,

수밀도(水蜜桃) 익어가던 복숭아나무 아래 앉아서 떠나버린 통학열차가 유강리 쪽 모퉁이로 돌아설 때 꼬리 흔들어 내던 기적(汽笛) 소리 들으며 두근두근,

늘 안부가 궁금한 괴테를 꿈꾸며 소설을 구상하던 소녀시절을 소설처럼 끌어안고 있는 덧없는 세월의 가시,

하얗게 하얗게 덮어주는 탱자꽃 구름처럼 일어나는 이 흔들림이,

가시에 찔린 상처에 쑥부쟁이 꽃잎 말려 붙이던 추억이,

지병(持病)이 된 두통이

모두 외로움이라는 것을

 

찻잔에 동동 떠오르는 쑥부쟁이 꽃잎차를 마시는

중년의 아침이 되어서야 알았다

 

괴테의 과수원엔 지금도 눈이 내릴까

 

 

먹이사슬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55

 

상어 떼는 참치 고등어를 떼로 잡아먹고

참치 고등어는 멸치를 잡아먹고

멸치는 새우를 잡아먹고

새우는 플랑크톤을 잡아먹고······

 

플랑크톤은 크릴새우님에게 먹히고

크릴새우는 멸치씨에게 먹히고

잔챙이는 중간치에게 먹히면서

크든 작든 가리지 않고 먹어치우는

고래등살에 넓디넓은 바닷길 피해 다니지만

 

무적(無敵)의 고래 놈은 결국

바다에게 통째로 먹히고 만다

 

먹고 먹히고

먹히고 먹고

바다는 늘 피투성이다

 

 

 

관음(觀音)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58

 

해문(海門)에 기대어 귀 기울이면

들린다

지구가 회전하는 소리

 

등대가 없는 곳에서도

부챗살처럼 퍼지는

빛의 소리

 

소리가 보인다

 

물살 층층 쌓여 단단해진

바다 밑 진펄 속

세월을 파고들어 파묻힌 나무토막이

천근만근 침묵으로 허물을 삭히는

백단향

 

투명한 향기가 들린다

보인다

 

 

멍텅구리배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60

 

땟국 낀 손금 사이에서 출렁이는

바다의 길

눈먼 짐승이 되어

희망과 절망 사이를

수없이 오가며

업만 가득가득 실어 나르는

바지선

 

슬픔마저 마모되어 가는 슬픔에 잦아져

드디어 일궈낸 무심(無心)

누추하나 묵직한 추(錘)가 되어

바다의 무게를 가늠하는

몸 하나로

오늘도 그 바다 위

운명처럼 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