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첫 시집 이후

십년 만에 시집을 묶는다.

결코 짧지 않은,

어쩌면 지극히 짧은 그 시간동안

많은 것들과 다투었고

너무나 많은 것들이 나에게서 떠나갔다.

두려움과 막막함에서

내가 나를 견디었던 것은

비루였다.

 

나의 詩는

그 비루를 빌어 지은

한 칸,

누옥이다.

 

 

 

자선작     10편      

 

 

비ː 읍

 

지금은 저승의 아버지가 엄마 손을 꼭 잡고

이승으로 건너 왔다 다시 돌아갈 시간

제수를 차려 놓고 형제들은 예를 올렸겠지

지척의 거리가 마음속엔 구만리보다도 멀어

귀신도 모르게 숨어 지내는 밤

어느 집에선가 컹컹컹 개가 짖는다

모두 잠든 시각

잠들지 못하는 나를 용케도 알아보고

컹컹, 어둠을 업고 찾아오는 소리

통 모른 체 하기가 만만찮다

어제 낮 골목길에서 설핏 마주친

트럭 짐칸에 목줄이 묶여 가던

강아지 너 댓 마리 자꾸 떠오른다

컹컹, 컹컹

저 서러운 소리는 모원단장도 넘나?

살아생전 이미 창자가 녹아 내렸을 엄마의 혼백은

지금의 나를 위해 또 무엇을 버리시는지

 

섣달 열엿새, 나를 허물고

저승과 이승의 경계에서 맴도는 울음

 

 

축생일기

 

입의 호사 따위는

꿈속에서라도 바라면 죄가 되는 처지로

여러 해 지나는 동안

아이는 자라서 철이 들어갔는데

후회막급인 결혼, 기념하라고

정례인양 받던 꽃바구니 대신

백세주 두 병과 쇠고기 한 덩이

택배로 왔다

원수끼리 마주 앉아

짠-, 술잔 부딪히고

고기 한 점 입안으로 서로 넣어 주는데

꽃보다 먹이!

게걸스레 열리는 목구멍

 

 

깡,

 

꽃잎을 반이나 뭉텅 뜯기 우고도

시들지 않은 수레국화가

뜯긴 꽃잎의 무게만큼 땅 쪽으로 기우는 몸을

끙, 들어 올린다

무심하게 놀린 누군가의 손짓거리가 분명해

바라보는 내가 참 불편하다

차라리 깔끔하게 지고말지, 무슨 깡을 부리나

생각하는 사이

벌 한 마리 날아와 꿀을 빤다

꽃의 목대가 파르르 떨린다

수레국화가 완성을 위해

반편의 얼굴로 매춘하는 지금

꽃의 뿌리는 깡,깡,깡 울 것 같다

반편인 내가 살아 보겠다고

파르르 떨 때 마다 저 까마득한 곳에서

깡,깡,깡 우는 엄마처럼

살아오는 동안 무엇을 위해, 무엇에 의해

목울대가 눌리어 파랗게 질릴 때

내가 내미는 히든카드는 깡,

울어서, 울어서 눈물이 말라버린

내 뿌리의 마른 울음인 그 깡,이다

 

 

법칙

 

치자꽃나무가 죽었다

내가 약간의 풍요와 약간의 오만과

약간의 관계들로 이루어진 숲에서

간벌 되어

단칸방으로 밀려날 때

얼렁뚱땅 화분으로 옮겨져

따라 온 치자꽃 나무

죽었다!

저 나무 화분 속 팽팽하게 뿌리 뻗어

눈 오는 날에도

빳빳하게 푸른 잎 세우고선

살아있다고 대들던 놈이었는데

나 또한 저 놈의 눈치 보느라

살아있음에서 부동의 자세로 견디어야 했는데

이젠 저도 인정한 거다

뿌리의 집이였던 화분이 실은

뿌리의 감옥이었다는 거,

깨트릴 수 없다면, 벗어날 수 없다면

결코 대지에 가 닿을 수 없다는 것을

 

 

행운

 

내가 ‘행운’이라 말하며 뚝 꺾었을 때

악! 하고 새파랗게 질렸을 그 순간이

빳빳하게 정지 된 채 있습니다

토끼풀 一家는 원하지 않은 일족을

어떻게든 내쳐야 했겠지요

생각해 보세요

하늘은 맑죠 햇살은 눈부시죠

아롱아롱 여울지는 초록의 촘촘함에서

행운이라 명명되어진 특별히 다른 하나를

가져가라는 유혹

얼마나 매혹적이었겠는가를

하여, 이제는 부끄러운 내 싸구려 취향은

 

토끼풀 가의 음모에 휘말려

그들이 축출시킨 가문의 기형아와 함께

깔끔하게 코팅처리 되어 책갈피를 관장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 그 늦은 봄날

나는

토끼풀 일가가 찾은 행운이였던 거지요

 

 

꽃들의 팔뚝

 

연뿌리 두어 개를 사왔다

뽀오얗게 다듬어 얄팍얄팍 썰어 놓으면

꽃 모양 반찬이 되는 그것 이전의,

팔뚝같이 생긴 연꽃의 뿌리

흙 털고 껍질 벗기는 중에 스치는 생각

뿌리가 뿌리 이전의

한 알의 씨앗이었을 때의 설레임이

꽃을 피우는 일은

깜깜한 진흙 속에 파고들어

통뼈인양 시치미를 떼고 버티는 노고

숭숭숭숭 바람 든 이력을

짜-잔 하고 꽃모양으로 변해주는 눈물겨운 결단

깨끗이 다듬어져 도마 위에 나란히 뉘인

백골 같은 그 뿌리 겨냥해 칼 갖다 대다가

해 본 생각

진흙구렁텅이인 이 땅덩어리에 피어 있는

꽃들의 팔뚝

 

 

매화나무 바깥에 서다

 

골짜기까지 휩쓸고 간 태풍 나비에게

굵은 가지 하나를 잃고서도

고요, 고요하던 묘적암 매화나무

찢겨나간 가지의 아픈 자리와

가지를 빼앗긴 몸통의 슬픈 경계에

꽃을 피웠습니다.

매향향梅香香 꽃 피웠던 가지의 기억 같은 거,

가지가 있던 자리의 휑한 통증 같은 거

다 내려놓았다는 것이지요

봄 보다 먼저 꽃이 와서

온 몸의 숨구멍이 전부 꽃 피는 자리인

저 매화나무의 말인즉슨

상처도 고요를 지녀야 꽃이 된다는 것인데

빼앗긴 자리와 찢겨진 통증 위에

여전히 광풍이 몰아치는 여기는

아직도 고요의 바깥입니다

 

 

경배,

 

그 절집 뜨락에

불두화 피었습니다

등애……,나비……, 진딧물 까지

도나 개나 다 모여 들었습니다

와중에

꿀벌 한 마리 그만 코 박고 죽었습니다

둥글고 환한 불두佛頭가 감춘 건

꿀이며 독이었던 것

부처도 아닌 것이 부처의 형상만 훔쳐

야단법석, 난장을 펼치는

저것을 우러러

손 모아 절한 이 어찌 저 꿀벌뿐이겠습니까

밥줄이거나 사랑이거나

오체투지로 가 닿아 절명한 곳이면

그도 성지 아닐런지요

 

 

접견하다

 

서울 사는 오모시인이

부처님 오신 날 즈음해서

부처님의 자비가 가득하길 기원 합니다, 라는

문구가 들어 있는 안부를 전자 우편으로 보내 왔다

아내와 함께 도봉산 산행 길에 들렀던

관음암에서 찍었다는 사진 한 장도 따라 왔다

현판도 주련도 보이지 않는 당우

햇살이 사선으로 비켜 가는 섬돌 위에

나란히 계신 흰 고무신 한 켤레

닳고, 닳아서 찢어진 뒤꿈치를

이제는 사라진 일거리 인, 이불호청 꿰맬 때나 쓰는

굵은 흰 무명실로 꽁꽁 꿰맨 고무신 한 켤레

나도 모르게 두 손 가슴에 모우고

모니터를 향해 꾸벅 절했다

 

 

차경借憬

 

이제 막 피고 있는 석류꽃

 

꽃 진 자리가 불안한 늙은 산능금나무

 

어제처럼 그렇게 지는 해

 

어제 보다 조금 더 비켜서 눕는 내 그림자

 

가, 있는 마당에

 

흰나비 한 마리 왔다가 가네

 

왔다가 그냥 가네

 

 

그래, 그래

 

태양아, 똑바로 앉아 봐라

오늘은 나하고 철학을 한번 논해보자

야, 임마 피자만 날름날름 받아 묵지 말고

내말 잘 들어 보거래이

플라톤이 이렇게 말했다

건강한 국가를 위해서 ‘시인’은 추방되어야 한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뭐 국가까지 갈 것도 없다.

건강한 가정을 위해서 시인은 추방되어야 한다.

니는 어떻게 생각하노?

아, 그리고 니체라는 양반이 말했다. 신은 죽었다!

동감한다. 아니 입증한다

여기 봐라, 니 보이나? 밑바닥이 다 닳아빠진 이것,

니가 보기에도 신은 분명히 죽었제?

그런데 태양아, 죽은 신을 부활시킬 전지전능한 자!

지금 우리 곁에 있데이, 니도 잘 알제?

 

해 종일 아지랑이 아롱거려

밥하기도 싫고, 멍 하고 싶은 날

피자 한판 시켜 와서는

빛바랜 파라솔 아래

나보다 더 반기는 견공을 앉혀 놓고

너스레로 또 하루, 건너 주는 저 화상의 낡은 슬리퍼

내일은 꼭 새것으로 사다 놓아야겠다,

생각하는 봄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