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작 13편

 

 

 

들여다보다


 

돌담 그늘 좇아 고불거리는 길을 돌돌 감으면 감나무 사이사이에 웅크린 초가지붕이 딸려 나온다 외외갓집 부엌문은 아직도 늪으로 열려 있어 엄마 뱃속에 있을 적 내가 엎드렸음직한 부뚜막에 오늘 다시 엎드려 두멍을 들여다본다 큼직한 쇠눈깔이다 어― 소리를 질러본다 어--- 어두움 속에서 누가 맞받아친다


두멍은 샘이 아니다 비워진 만큼 채워야 하는 허공이다 사랑도 매한가지다 마냥 퐁퐁 솟아나는 샘이 아니라 늘 쏟아 부어야 찰랑거리는 두멍이다 손에 닿지 않는, 밑도 끝도 없을 것 같은 사랑도 두멍처럼 밑이 있다

 




날개돋이

 


갈대숲에서 깜박 잠이 들었지

자기 아랫도리로 스며든 어린 부평浮萍들이 안쓰러워

갈대는 서걱거리지도 못하더군



가만, 갈대 속눈썹 들추며 나온 물잠자리

지금 막 허물을 벗고 사부작사부작

날개를 편다



누가

조렇게 꼼꼼하게 접어 편지를 보낸 것일까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없어

눈물 그렁한 사근달못**

콤콤한 슬픔을 여명에 널어 말리니

눈물도 물이라서 물비린내가 나는구나



나도 사타구니 깊숙한 곳에 쟁여두었던 날개를 꺼내

나달나달한 깃털

거짓말처럼 새참하게 펼쳐보았다



―― 사랑은 자꾸자꾸 답을 내놓지, 너를 사랑해

     그리고 너를 미워해*** 





*     너는 곧잘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를 웅얼거리곤 하였지

**   경북 영천시 금호읍 오계리에 자리한 저수지

***  김행숙의「공진화co-evolution하는 여인들」에서

 


 

나는 실이다

아픔이 아가리를 쩌억 벌릴 때마다

상처를 조곤조곤 꿰매는

봉합사縫合絲

색깔이야 까매도 좋고 흐릿해도 무방하지만

이불 홑청처럼 투두둑 터진 맨살을 붙들고

질기게 버텨야 한다

명왕성이 훤히 보일 때까지

이를 꽉 물고 버텨야 한다

지구가 제대로 돌고

딱정이가 지면

툭툭 끊겨지고 쏙쏙 뽑혀

아무렇게나 버려질 테지만



그 때는

혼신을 다해 감쌌던 상처, 아리고 붉게

머금었던 것들 먼저 버리고

잊혀져야지

아물아물한 이승의 살내

타고 남은 재 같은 잊혀지지 않는 것들까지

송두리째 잊은 척해야 하리

그래, 흔적보다 더 깊이깊이 스며

함께 아물 수 있다면




 

 

가령

 

내가

우거진 숲 속 한 그루 나무라면

그대 손에 잘려 벌목장에 켜켜이 쌓여도 무방하겠네



화목火木 되어 성엣장 같은 구들장 데워주거나

침목이나 갱목 되어 무거운 짐 진다 한들 어련할까

어쩜 버팀목으로 먼저 썩어도

좋아



혹시

내 원대로 무엇인가 될 수도 있는 거라면

어느 목공의 손을 빌어

빨래판이 되리



가난살이 찌든 땀범벅과 꼬랑내

온몸으로 비벼 빨고

생면부지 응어리진 고름도 기꺼이 받아낼게



어쩌다 굿판이라도 벌어지면

둥개둥개 어우러질 수도 있겠지

앙상하게 드러난 갈비뼈, 죄목처럼

조목조목 긁으며






잘게 부서지다



머리칼 까만 그믐밤에도

동산 솔숲 아래께가 훤한 것은

새똥처럼 흩뿌려진 추억들이 조곤조곤

부서지고 있기 때문



장대비 멎은 저녁답

끄무레한 벌판을 휙휙 나니는 도깨비불은

누군가를 깊이 연모戀慕하는 넋이

누군가를 향하여 부서지는 것



별들도 

태초의 어둠덩어리가 잘게 부서진 연유로 반짝거리고

오래 옴츠렸던 기다림이 잘게, 잘게 부서질수록

화안해지는 



아가야, 이 저녁 내 얼굴이 환해짐도

먼발치에서 일렁이는 물결에

가슴 속 켜켜이 쟁여진 응어리가 푸석푸석

부서져 내리는 까닭이라면



잘게 부서진 것들은 모두 반짝거리고

깊이 모를 사랑은 늘 서늘한 것이로구나





처녀비행處女飛行


 

탱탱볼처럼 마음이 가뿐해질 때

탱탱, 하늘 높이 마음 쳐올리며

쌍발 경비행기를 몰자



사랑이라는 이름 말고는

텅 빈, 그래서 가득 차 있는

연료 탱크



속리俗離의 오리숲 전나무 우듬지 지나

필리핀 민다나오 해변이나

지구의 배꼽이 들여다보이는 발리 낀따마니 언덕쯤이라도 좋지



신명나게 활공하다

푸륵푸륵, 야자나무 어깨에 방패연처럼 걸리면

이승의 솜털 나슬나슬한 사랑아

허기진 속 다시 채우고

우리, 시동을 걸자



터럭 북실북실한 오랑우탄이나

모자반, 혹은 콩자반 따위의 주문이라도 외며

탱탱, 마음 하늘 높이 쳐올리며





 

 

호랑지빠귀


 

여기 어디쯤에서 참봉골 아저씨가 얼어 죽었지 가마득한 막장 떠돌던 무용담으로 조무래기들을 툇마루 가득 끌어모두던 용복이 형도 이 도랑창에서 밤새 지푸라기 움켜쥐고 뒹굴다 리어카에 실려 온 그해 서산으로 갔어 그 뒤로 여길 지날 때마다 히이, 어디선가 숫총각 홀리려는 듯 흐느끼곤 했었지



그런데 멀쩡한 논바닥에 대추나무 감나무 심고 우물 파고 공그리쳐서 세운 조립식 빈집 빈집 빈집들, 눈먼 화상들 저러다가 진짜 날벼락 맞아 소금기둥처럼 허여멀겋게 서 있게 되는 것은 아닌지 각자 욕심껏 욕보이며 세워놓은 성채 들여다보며 히이이, 이제는 물 간 중늙은이라도 홀리려는 듯 흐느끼는군



어저께는 문경 가은 지나는 길에 석탄박물관에 들렀어 옛 모습 추슬러 놓은 갱도에 들어서니 물큰물큰 풍 치던 이야기들이 되살아나던 걸 여기 어디구석쯤 젖은 행주처럼 쥐어짠 그 땀방울 척척하게 스며있을는지도 몰라 갱 바닥을 쿵쿵 굴러보기도 했어 내친김에 이야기 끄트머리께면 으레 등장하는 전라도라고 했든가 총각딱지 떼었다던 그곳,

화순탄광까지 내닫고 싶어지더라 설마 거기까지 따라와 히이이이, 흐느끼지는 않겠지







소광리*에 다시 가다



바람모퉁이 갈잎 위에 고라니 한 마리 쪼그려 앉아 오줌을 눈다 그녀는 눈꺼풀 척척하게 꿈적이고 나는 멀뚱하게 서서 길을 잃는다 오글쪼글 태엽 같은 산길을 감던 바람이 손바가지를 말아 오줌을 끼얹는다 대책 없는 하늘은 펑펑 눈발을 퍼붓기 시작한다 가마득하다



손가락 쥐락펴락 소광천을 이리 건너고 저리 건너니 애국가처럼 펼쳐지는 솔바다, 드디어 네 가슴에 이르는 길을 알아내었구나 네 밑자락 들추며 쥐똥나무 한 그루 대굴대굴 눈알 굴리거나 말거나 나는 너를 끌어안는다



바닷가 횟집에서 소주 몇 병 마시고 비로소 오줌을 갈긴다 너무 오래 참았다 으으 오줌소태다 여기까지 눈발이 날린다 어떤 녀석은 내 낯짝에 입술에 입맞춤처럼 녹는다 습습, 녹작지근한 어둠이 스스로를 비워 더 짙은 어둠을 빨아들인다




*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그곳에 갔었다


토함산 남쪽 비알 장항리에는

연치年齒 높은 오층석탑

부처夫妻

주무시고 계시다



골짜기 재재바른 물

조심조심 흐르고



하늘을 넘나드는 울새도 떠돌이새도

조신, 또 조신



그런데 모란, 아니 부용芙蓉 …… 저 젖통만 한 꽃, 희디흰 모시적삼, 자주 고름, 연분홍 치마 …… 누이다 어머니다 흥건한 마중물이다 아예 산도 절도 날려 보낼 장약이다



도둑이야!

먼발치에 얼찐거리기만 해도 소스라치듯

풀무치 땅개비 콩중이 팥중이 내닫는 언덕 위에

구름같이 두 양주兩主 살고 계시다

눈 감고 귀 닫은 채 다독다독






*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화전2리





백련白蓮


 

새남골* 농막에

내가 번듯이 누워 있다



식전댓바람부터

생면부지 마을 문전옥답 복판에

클 태 자로 누워 뒹굴 수 있는 것은

어여쁜 그대 덕분



당신이 

나를 여기 뉘어놓고

매콤한 체취 흩뿌려 푹푹 절일 때



장아찌처럼 염장된 나를 안고

거대한 날개 펄럭이며 난바다로 나아가는

범선



연밥 채 여물기도 전에 푸른 하늘을 서찰 접듯 접어

가슴 속 깊이 쟁여 넣고

더러는 논두렁 위로 기어올라

미꾸라지가 간질이던 발바닥 내보이기도 하면서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지산리




적상산赤裳山*을 오르며

 


내 가짓껏 싸마

아니 쏟아 부으마

네 붉은 치마말기 붙잡고

밤새 용쓴다



용을 쓴다는 것은

너와 똑같은 꿈을 꾼다는 것



우리 

둘이서 노 한 짝씩 나눠 잡고

거친 물살 거슬러 하늘로

오르는 것



어쩌다

천길만길 떨어져내려도

툇마루 놋요강에 걸터앉아 볼일 보듯

한사코 제소리를 짚어내는 것



그리하여 쿵쿵 수십억이 한꺼번에 발을 굴러도 옴짝달싹하지 않는 대간大幹, 그 복장腹腸 속으로 누구도 모르게

녹아 스며드는 것





* 전라북도 무주에 있는 산, 해발고도 1034m, 정상 가까운 분지에 무주양수발전소 상부댐이 있음




오동꽃


 

분수 한 쌍이 하늘을 길어 올리는 연못가 벤치에

두 청춘 붙어 있다 여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남자 눈 속을 들여다본다

속눈썹끼리 닿을 만큼 빠짝 들여다보아야만 질겨지는 끈이라도 있나

벌쭉하니 못물 속 구름장 흘금거리던 남자

벌침 같이 뾰족한 채근에 바로 본다

저 여자, 남자 눈 열고

무얼 저렇게 초근초근 녹여내는 것일까



사랑이라는 것이 퐁퐁 솟는 샘으로 위장한 두멍이라면

동글수록 커다랗고 커달수록 서늘한 것은 눈알뿐이어서

대지의 눈알에도 살랑,

바람이 인다



하늘이 녹고

하늘 깊숙이 모가지 들이민 수련 꽃대가 녹는다

나도 우선 허리께까지 녹는다 차츰차츰

시방천지十方天地 집적거렸을 지문이며 눈짓, 내뱉은 말들 모두 녹아

문득 생각조차 녹아버렸으면…… 큼큼,

먼발치에서 쥐죽은 듯 서있던 오동나무가 헛기침을 한다

곡옥曲玉 매단 신라금관이 꽃차례대로 보라꽃등

차랑거린다



 



꽃무릇


 

누가 구겨 던진 그리움

저렇게 독이 올랐나?



산사나무 짙은 그늘 젖히며

빳빳하게 목울대 세우고

혀를 날름거리는

푸독사



―― 날 보고 꽃이라고?

     낮이나 밤이나 매양 촉촉한

     나는 분명 꽃은 아니야

     이깟 헛꽃 갈래갈래 찢어 날개를 짤 거야

     진주홍 날개 달고 죽음을 쓰면

     거기에도 진주홍 날개가 돋아나겠지



까마득한 언덕 아래로 흩날리는

새빨간 비명



쉿!

무슨 풍문風聞이든 송두리째 까발리려고

남 속창새기까지 쏘삭쏘삭 쏘삭거리지는 마

당신 귀청 너머 아늑한 달팽이관 속에서

사소한, 너무 사소해서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소용돌이로

잠시 맴돌다 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