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 앞 흔들의자

 

  

나비들은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 날아다니다가

끝내 화면 속으로 들어갔다

 

아이얀몰 영화관 앞 흔들의자는 노인들 차지다

노인들은 의자에 앉아 젊은 시절을 회고하거나

손자들 자랑으로 영화 관람을 대신했다

항상 불편한 거동과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의 순간을 흔들의자가 지탱해 주었다

얼굴은 달 분화구처럼 거칠고 하얀 몸은

흔들리면서 종일 스크린을 오물오물 씹었다

 

오후의 나른한 시간이 되자 몇은 잠들었는데

한 무리의 나비가 그들 몸에서 빠져 나왔다

나비는 화면 속에서 나풀나풀 날아다녔으며

그들 손자들은 나비를 잡으러 뛰어다녔다

나비들은 영화가 끝난 후 달에 도착했으며

분화구에 들어가 사뿐사뿐 날아다니다가

다시 수빅시에 사는 노인들 품속으로 들어갔다

 

그날 노인들 얼굴에 분화구 하나 더 늘었다

 

  

 

 

타잔은 살아 있다

 

  

  필리핀의 루손섬 어느 밀림에 타잔이 왔다 자본가들은 돈벌이를 위해 무자비하게 밀림안의 나무를 베고 짐승들을 몰아냈다 아프리카의 밀림을 나와 제인과 행복한 날들을 보내던 타잔은 밀림의 파괴를 막으려고 왔다 루손섬 밀림 안에도 타잔의 친구인 치타도 있고 악어며 긴 방울뱀들이 모여 살았다 타잔은 밀림의 모든 동물을 모아 자본가들의 건설 장비를 밀어냈으나, 자본가들은 총을 쏘며 격렬히 저항했다 타잔은 아프리카에서 사자와 표범을 불러 자본가에 대항하여 싸워 마침내 몰아냈다

 

  필리핀의 많은 사람들은 울창한 숲과 목숨을 해칠 수도 있는 사나운 짐승 때문에 밀림 안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날 타잔이 밀림의 평화를 지켜낸 후 밀림은 날로 울창해져갔고 짐승들은 새끼들을 많이 낳아 길렀다 우기엔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가 많아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내렸다 타잔은 그것에 상관없이 짐승들을 데리고 다니며 밀림을 지켰다

 

  나는 어느 날 밤 무슨 일로 밀림 안을 헤매 다녔는데 긴 방울뱀이 미끄러지며 내게 다가 왔으며 악어도 나를 삼키려 왔다 내가 급하게 타잔을 불러 내자 그들은 되돌아갔으며 나는 그들과 사귀어 친구가 되었다 내 마음 속에는 어렸을 적 영화에서 봤던 밀림과 타잔이 또렷이 살아 있다

 

  

 

다국적 커피점이 있는 휴일의 저녁

 

  

수빅시 아이얀몰안에 다국적 커피전문점에 갔다

휴일 그곳에는 어린 학생들부터 노인들까지,

여러 나라 사람들로 북적였다

필리핀 회사원들의 하루치 임금이 오천원 정도지만

그곳 커피 한잔 값이 4천원 정도여서

부유층이나 외국인들이 주로 출입을 했다

 

많은 다국적 기업들은 엄청난 자본을 발판으로

세계의 곳곳에 공장과 상점을 운영했다

그 공장과 상점은 제 나라의 자영업자를 퇴출했고

많은 이들을 다국적 기업의 노동자로 만들었으며

가격을 올려 사람들 사이에 위화감을 만들었다

 

수빅시도 다국적 기업이 많은 자유무역도시라서

외국 기업의 현지인 노동자와 외국인이 많이 살았다

그곳에서 젊은 현지인 여자와 외국 중년 남자가 만나고

상점 밖의 택시들은 계속 그들을 태우고 가곤 했다

몇몇의 은퇴한 외국 노인들도 젊은 여자와 대화 후

자가용을 타고 어디론가 향하곤 했다

 

아이얀몰 밖의 나무엔 낙엽 떨어지고 새순 돋고

화단엔 연신 꽃 피고 지고

해는 그것을 눈치 챘는지 귀가를 서둘렀다

 

 

 

 

공동묘지를 지나다

 

 

 

내 고향 마을 입구에 있던 공동묘지는 없어져

십년 전에 묘지 자리는 군민운동장으로 바뀌었다

어렸을 적 공동묘지 지날 때 들었던 아기울음도

밤에 그 곳 지날 때의 두려움도 없어졌다

그 많던 영혼들과 귀신들은 어디로 갔을까?*)

 

필리핀 이바시 공동묘지는 산을 이뤘다

자동차 도로를 따라 즐비한 묘지 근처에서

귀신을 보았다는 이 많았다

필리핀인은 시신을 화장 후 시멘트로 묘지를 지었는데

지나는 자동차 안의 사람들은 한번쯤 죽음과 삶에 대해

생각해 보는 거였다

 

그 많던 영혼들은 후손들의 가슴으로 옮겨졌다

인간의 환생을 믿지 않는 필리핀들이지만

조상의 기일과 All Soul's day에는 공동묘지를 찾았다

시멘트로 묘지를 만들어 혼이 나오지 못할까 봐

언뜻 걱정이 되었지만 필리핀인들은 상관 안했다

 

고향의 공동묘지 자리에서는 사람들이 열심히 운동 했다

공동묘지 자리에서 옮겨 간 영혼들의 울음 대신

웃음이 운동장 여기저기서 흘러 나왔고

사람들은 처녀 귀신같은 젊음을 위해 뛰고 달렸다  


 

 

 

  

 

*) 박완서의 소설 제목『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변형함

 

 

 

닭싸움을 읽다

 

  

카스틸레우스 리잘공원에서 닭싸움 열렸다

한국에서 거의 사라진 닭싸움은 필리핀에서는

공원이나 사람 모일 수 있는 곳 어디서나 열려

사람들의 눈과 호주머니를 즐겁게 했으나

싸움에서 패하는 닭은 바로 음식이 되었다

 

인류는 생활을 시작하면서 닭을 애완동물보다는

그저 식용으로만 부화시키고 키워 잡아먹었다

닭은 그런 제 운명을 잘 알고 있었기에

사람을 좋아하지도 따르지도 않았다

 

조류독감같은 유행성 질병이 전국적으로 번지면

수십만 마리가 집단으로 땅 속에 묻혔고

중국의 관광객들이 먹을 치맥의 재료로 한번에

수만마리의 닭들이 죽어 나갔다

 

사람에게는 항상 꿩 대신 희생을 당했으며

개에게는 쫓겨다니다 지붕을 보여주었으며

가끔 지붕 위 하늘도 쳐다볼 수 있게 했다

그날 리잘공원에서 사람과 닭이 서로

먼저 저승에 가겠다며 격렬하게 싸웠다

 

 

 

 

  

번함공원에서 점을 보다

 

 

 

 

휴일 번함공원의 호수에서 사람들이 배를 타고

호수 주위엔 늙은 여자 몇이 점을 치고 있네요

그들은 한국 여느 점쟁이같이 출생일과 손금으로

점괘를 진지하게 알려주고 사람들은 듣고 있네요

 

지천명을 바라보며 미래나 운명이라는 낱말과

한참 멀어진 나도 장난삼아 점을 봤지요

한국과 떠 있는 해와 달, 별의 위치가 다르고

점쟁이와 내가 가진 정서와 문화가 다른데

점쟁이가 어떤 점괘를 말해줄지 궁금해지는 시간,

 

우주가 생성되고 지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할 때부터

점쟁이와 나는 다른 문화와 자연에서 살며

산과 들판, 바다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지요

다만 그녀가 전생에 한번쯤 한국인으로 살았거나

내가 전생에 필리핀인으로 살았던 적 있다면

점괘는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날 해발 천오백미터에 있는 바기오시에 갔고

번함공원에서 점을 볼 수밖에 없었던 내 운명은

죽을 때까지 공원 호수에서 머무르는 것일까

이국의 산속 도시에서 펼쳐진 내 운명,

 

수많은 내가 살아 온 수천년의 세월이 스쳐갔네

 


 

까와그 밀림속을 달리다

 

  

내가 달리는 동안 길가 숲속에선 노래 소리와

농구 공 튕기는 소리, 거친 숨소리 흘러 나왔다

십년 전 까와그에 대형 조선소가 들어서면서

조선소 앞 도로가엔 식당과 살림집이 들어섰다

숲속에도 마을이 생겼으며 작은 노래방도 생겨

사람들은 술 마시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도로 옆 나무들은 푸른빛을 화산처럼 내뿜었으며

나는 달리며 푸른빛을 미친듯 마셔댔다

몇 개의 마을 지나고 억새꽃 만발한 하천을 지나

논과 밭이 있는 들녘을 지났다

 

들녘의 한쪽 편 논에서는 모내기가 끝나갔고

다른 편 논에서는 농부가 벼를 베고 있다

밭에서는 바나나와 망고, 파인애플이 익어갔고

남자들은 바나나 잎을 엮어 원두막을 짓거나

여자들은 저녁을 준비했다

 

휴일의 모든 저녁은 슬프고도 황홀했다

밝음과 어두움의 사이에 벌어지는 숱한 이별과

집에서 전등아래 모여 저녁을 먹는 가족이 있다

내 마라톤의 여정도 어두워지면 끝났으며

하루분의 생이 달렸던 길에 한줌 재로 떨어졌다

 

  

 

모롱비치를 기억하는 태양

  

 

적도지방의 햇볕은 건기에 더욱 강렬했다

이바시 모롱비치의 모래알을 밥 끓이듯 달궜고

사람들도 데워 바닷물에 풍덩 빠뜨렸다

 

태양은 모든 것의 결정체, 적도의 모든 생명은

태양을 유일신으로 받들어 왔다

태양은 적도지방에만 일년내내 벼농사를 지내게 해

굶어 죽는 이 없게 했다

겨울이 생기기 않게 해 얼어 죽거나

기나긴 겨울잠 자는 동물이 없게 했다

 

태양은 사람들의 살갗을 빠르게 노화시켜

모롱비치 안 인부의 살갗은 공룡을 닮아갔다

사람들은 공룡처럼 해변에 발자국을 남기려 했으나

바람은 그때마다 지워버렸다

 

사람들의 흔적은 우주에 흩어졌으며

태양은 그걸 기억해 모롱비치에 노을을 만들었다

 

 

 나무들 사이에서 놀다

 

  

크라운피크 마을은 밀림 안에 있다

마을엔 오십 척이 넘는 나무들과 많은 꽃들이

사시사철 자라고 꽃을 피워냈다

그 나무들 사이에 사람이 매단 로프를 사용해서

나무사이를 이동하기도 하고 로프에 매달려

뛰어내리기도 했다

 

창조자가 만든 나무와 사람은 같은 직립의 생물이다

또한 태양의 직계 자손이며 형제사이여서

둘은 지구 생성 후 가장 가깝게 지내 온 사이다

요즘엔 많은 사람들이 수목장(壽木葬)을 해

망자의 영혼을 나무에게 주었으며

나무들은 망자의 영혼을 자신의 몸에 옮겨 놓았다

 

나무는 침묵을 자신들의 첫째 규율로 정했으나

바람을 불러 노래를 부르거나 움직이지 못함의

설움으로 목 놓아 울기도 했다

 

사람들은 트리 탑 어드벤쳐에서 태양 사이를

가로 질러 다니기도 하고 매달리기도 했다

그대 시간이 나면 그곳에 가 보라

어떻게 사람들이 태양을 안고 하늘로 날아다니는지

우주에서 가장 친한 친구의 조화를 보아라

 

 

 

억새풀의 기억

 

  

카와그마을의 억새풀은 빙하기 전 가을을 기억했다

 

빙하기 전 적도지방에도 가을이 있었으며

억새는 자연에 순응하여 꽃을 피웠다고 전해져 왔다

초식공룡들 억새풀을 뜯어먹고 새끼 낳아 길렀으며

억새풀 위에서 잠을 잤다  

 

빙하기 이후 적도지방엔 가을이 없어지고

오직 우기와 건기만이 남았다

억새는 빙하기 때 살아남아 빙하기가 지나자

가을 대신 생긴 우기에 꽃 피웠으나

창조자에게는 가을의 꽃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적도지방의 억새풀은 겨울이 없어도 꽃이 지면

생을 스스로 마감했으며 이듬해 새순을 띄웠다

한국의 억새풀은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나

필리핀인들은 억새풀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다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살아감에

태양은 때로 더 많은 햇볕을 억새에게 줘

너무 말라 서로 부딪혀 불타오르기도 했다

 

적도지방의 억새는 가을의 유전자를 그대로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