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모르포시스, 또는 정숙의 변신이야기

 

 

 

 변학수(문학평론가, 경북대 독일어과 교수)

 

 

 

정숙의 시에 에로티시즘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독자나 본인이나 누구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시인이 쓴 시들이 그런 소재를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거니와, 시인이 그간 보여준 시극에서의 모습 또한 그런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데 일조했을 것이므로. 그러나 나는 일체 그런 소재주의적 비평의 행위를 증오한다. 그렇게 되면 장미를 좋아한 릴케를 장미의 시인이라고 부르고 사투리로 시를 쓴 상화를 방언의 시인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에서의 소재는 삼라만상일 수 있지만 시가 오로지 겨냥하는 것은 신들이나 귀신들, 정녕과 요정들에게 보내는 무녀(巫女)의 구원과 탄원, 소원과 저주의 글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정숙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볍다.

 

자꾸 가벼워진다.

 

언젠가 한 마리 새가 되어

 

 날아가게 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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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바람처럼 나를 가벼워지게 한다.

 

어얼쑤!

 

모든 사물들이 살기 위해

 

 매순간 몸부림치면서 춤을 춘다.

 

나의 처용무는 엄마의 춤이면서

 

 애간장 태우는 기도다.

 

 

 

<시인의 말>은 산문이지만 오히려 시의 특성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우선 시는 기도다. 신께 드리는 기도다. 그리고 시를 쓰는 순간 시인은 사람이 아니라, 영매() 즉 셰키나의 순간을 맞으며 신적 지위를 획득하는 무녀가 된다. 처용무가 아니라 처용 스스로 무당이 아니던가! 처용이 입은 옷이 바로 새의 날개를 한 무당의 옷이고(선비의 도포도 그와 같은 날개다) 그의 춤이 바로 구원과 탄원 소원과 저주의 춤이다. 신은 날개를 타고 내려오기 때문이다. 시인 스스로 “알바트로스”를 인용하며 말한 그 날개(「시인의 날개」)는 시인 하이네가 “노래의 날개위에...”라고 노래한 그 날개, 즉 신을 의미한다. 아마도 신은 한 마리 새처럼 가볍게 날아간다고 하여 이런 은유와 상징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시인 정숙이 정숙하게 말하려는 변신은 결국 영매가 꿈꾸던 변신이자, 서양의 신화가 꿈꾸던 마법의 세계, 곧 변신이다.

 

 

 

먹물처럼 속 깊은 저 그림자

 

 다소곳이 따르는 그늘인 척

 

 제 색깔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안으로 몰래 주인 빛깔 다 빨아들이면서

 

 

 

 

 

 

 시시로 산란하는 시, 여름 한낮 연꽃이 누드로 일어서는 낯 뜨거운 늦바람 그림들, 제 주인의 혼신을 모두 내면으로 받아들이다가 어느 순간 세상을 향해 고자질도 한다.

 

― 「그림자를 위한 파르마콘」 부분

 

 

 

 피타고라스가 말했듯이 모든 것은 변할 뿐이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머리에 가끔씩 깃털 꽂힌 모자를 쓰고, 처용의 아내 입술을 물고, 찬란한 무지개 망토를 걸친 정숙 시인의 현상학적 모습은 “먹물처럼 속 깊은 저 그림자”의 변신일 뿐이다. 그러기에 시인의 구원은 2연에서 드러나는 “고자질”하는 모습이 아니라, 묵향 가득한 “내면”에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약국이라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는 “파르마콘”이라는 말은 이중적이다. 병과 약이라는 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이 말은 이 시에서 정숙 시인이 그려내고자 하는 존재와 변신의 이중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말과 글의 이중성, 생각(이상)과 삶(존재)의 모순성이다.

 

이런 모순성이야말로 신(시인으로 읽으라!)들이나 감지할 수 있는 비의적 풍경이리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냥꾼 악타이온 같은 형상을 한 시인 말이다. 악타이온이 하루는 사냥개 50마리를 이끌고 키타이론의 산속에서 사냥을 하다가 순결의 상징인 처녀신 아르테미스가 목욕하는 광경을 엿보게 되었다. 순결에 상처를 입은 아르테미스는 화가 나 사슴으로 변하게 하였는데, 결국 자신의 사냥개에게 쫓기다가 물려 죽었다. 시인은 아마도 “안으로 몰래 주인 빛깔”을 다 빨아들인 “사슴으로 변한” 악타이온 같은 마음으로 “시시로 산란하는 시”를 표현한 것이리라. 그러니까 시인 정숙에게 인생은 곧 변신이다.

 

 

 

의자 하나 끌고 가려다

 

 의자에 끌려 다닌다

 

 

 

 엉덩이 하나 제대로 걸칠 수 없는

 

 이 작은 의자

 

 

 

 평생 마음 편히 앉아 보지 못한 채

 

 내가 끌려가는 이 의자    ― 「의자」 전문

 

 

 

 그렇다. 시인은 “의자”가 되고 만다. 그러니 “의자”가 끌고 다니고 “의자”가 말을 하며 “의자”가 인생을 조종한다. 사물에 몸을 대는 순간 그 사물이 변한다. “의자”라는 사물은 인생으로 바뀌어버린다. 시인이 “의자”에 앉으려고 “의자”를 따라 다니는 순간, 신은 (그것이 아르테미스 신이었다면) 그를 “의자”로 바꾸어 버렸을 것이다. “의자”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밥이요, 명예요, 권력이 아니던가! 키르케가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맞이하여 음식으로 환대한 다음, 지팡이로 때려 모두 돼지로 만들어 버렸듯이 시인은 자신을 의자로 바꾸어 버린다. 단순한 소박함의 최고 수준을 달리는 이 시는 짧지만 분명하게 변신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시인이 변신이라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사용하는 소재는 보편적인 인류문화의 DNA를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늑대 인간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다.

 

 

 

보름달 뜨면 그리움이 깨어난다

 

 은근한 눈빛 그득 차오른 달은

 

 늑대를 깨우고, 늑대는 징을 두드린다

 

 

 

 

 어둠을 잠재우는 저 은근한 눈빛이 

 늑대의 야성을 왜 깨우는가

 

 우, , 우 거친 숨소리가

 

 내 몸 속 신전에 횃불을 밝힌다   ― 「달, 늑대 깨우다」 부분

 

 

 

 누구나가 알고 있듯이 우리의 어원은 알타이에서 유래한 듯하다. 그래서 초원의 늑대에 대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으로 보존하고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을 나무랄 때 “늑대 나온다”는 말을 하는 것이나 구미호의 변신 이야기는 모두 이런 원시 인류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에서도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저주로 7년이나 반인반수 생활을 했다는 것이나, 로마의 왕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인류의 원시성을 말해준다. 어디 그뿐인가. 영화 늑대의 사랑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나자리노>는 보름달이 뜨면 인간이 의지에 상관없이 늑대로 변한다는 소위 말하는 낭광증의 근원을 말해주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시인 정숙의 변신 의지는 원시성에까지 미친다. “징”소리로 대변되는 신의 부름, 신과의 동일시, 계시의 발화, 이 모든 것이 시인의 육체성과 그 육체의 변화, 즉 변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시인은 “늑대의 야성”이야말로 바로 그리움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육체의 거친 숨소리로 독자를 흔들고 있지 않은가! 그녀가 그려내는 늑대의 야성은 시베리아 벌판에서 공중으로 울어대는 늑대가 아니라 수많은 이성과 시각으로 우리를 제압하는 근대적인 계몽, 억압의 체계, “관리되는 사회”다. 마치 카프카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바퀴벌레 같은 갑충으로 변신하듯이, 그리하여 그 모든 식구들이 변신하게 만들 듯이 주변의 세상을 무섭게 변신시킨다.

 

 

 

저벅 저벅 발소리, 시간의 방울 달고

 

 내 뒤를 따라온다

 

 범어구민운동장의 오월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싶은

 

 장미들의 짓인가, 얼른 뒤돌아본다

 

 돌담에 기대선 찔레들이 제풀에 놀라

 

 칭백한 낯빛으로 손사래 친다

 

 

 

[]

 

 

 

장미꽃잎들이 시든다

 

 다급해진 발소리!

 

장미 가시는 더 억세게 발톱을 세운다

 

 무작정 쫓기며 시의 바짓가랑이에,

 

처용무 그림 옷깃에 밤새 매달린다     ― 「외간에 중독되다」 부분

 

 

 

 

 

 

 시인의 능력이 돋보이는 시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유희라는 것을 직조하는 능력이 탁월한 시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술래가 된 아이는 외치고 순간 뒤를 돌아다본다. 그때 그 아이는 겁을 낸다. 두려워 한다. 누군가 죽으면 어떡하나, 하고. 그 순간 자기가 술래라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기실 술래를 벗어나려면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 시에서도 그렇다. “얼른 뒤돌아보”는 순간, 아니라고 “찔레들이 [] 손사래 친다”. 말하자면 제풀에 놀란다. 그런데 정작 놀라는 것은 누구인가, 찔레인가, 아니면 “나”인가? 시인은 참으로 이런 아이러니한 두려움을 시적으로 변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장미나 찔레들은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이상과 아름다움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더 억세게 발톱을 세우는 장미 가시”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무작정 쫓기며 시의 바짓가랑이에 [] 매달리는”는 우리의 행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존재의 모순에 시달리는 카프카처럼 시인도 섬뜩한 변신을 잡아내고 있다.

 

시인 정숙이 구조화해내려는 이런 “섬뜩함”은 프로이트가 그의 논문 <섬뜩함>Das Unheimliche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섬뜩함이란 우리가 친숙하게 느끼는 어떤 것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다시 말해 이 말은 매우 모순적인 말로서 고향 같은 데서만 섬뜩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정숙 시인에게 “범어구민운동장”은 익숙하고 친숙한 곳일 것이다. 마치 처음에 가족들에게 그레고르 잠자가 느낀 것과 같은 어떤 곳일 게다. 그런데 그곳에서 당혹감, 불안을 느끼다니! 우리는 가끔씩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을 보고 놀라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인은 자기가 느낀 이 친숙함의 당혹감을 시적 구조화를 통해 내면화하고 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보면 베 짜는 재주로 이름을 날린 아라크네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의 오만함이 도를 넘자 미네르바(그리스 이름 아테나)가 찾아와 타이른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듣지 않고 결국 신과 인간이 베 짜기 경연을 벌인다. 미네르바는 12신을 중심으로 신의 권능을 강조하지만 아라크네는 유피테르(그리스 이름 제우스)의 비행을 폭로하고 조롱한다. 그러나 여신의 더 큰 분노를 산 것은 아라크네의 베가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분노한 미네르바는 그녀의 베를 찢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녀를 거미로 만들어버린다.

 

혹시 시인 정숙이야말로 자기의 재주 때문에 거미로 변신한 이 “아라크네”가 아닐까? 이제  시인은 시집 『청매화 그림자에 밟히다』로 아라크네를 포기하고 새로운 변신을 꿈꾼다. 그것은 완벽한 변신보다는 어떤 자유를 찾는 것, 하나의 새로운 단계로의 변신이리라. 마치 시인이 눈길을 준 “전등사의 나부상”이 지닌 눈빛과 같은 어떤 것이리라.

 

 

 

고통이란 금세 길들여지는 것

 

 쪼그리고 앉아 절 추녀 받들며 끙끙대는 것도

 

 잠시, 필요할 땐 언제라도 사랑이란 도구를

 

 쓰는 세상의 남정네들 비웃는 벌거벗은 여인

 

 돈 몇 푼에 마음까지 바칠 줄 믿었던 도목수의

 

 어리석음 바람에 흘려보내고 밤이면 부처님

 

 신심의 높이 눈 맞추려 꿇어앉는다

 

 발등에 입맞춤한다

 

 나무 속에 갇힌 주모는 몸과 마음

 

 아낌없이 천 년 불공을 드리는지 그러나

 

 눈빛만은 날마다 싱싱하게 되살아난다     ― 「나부상의 눈빛 –전등사 1」 부분

 

 

 

 

 

 

 자신의 돈을 가지고 달아난 주모를 벌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나부상”의 변신은 곧 “돈 몇 푼에 마음까지 바칠 줄 믿었던 도목수의 어리석음”이라는 의미로 전이되고 있으니 우리는 다시 파르마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데리다가 말한 대리보충(supplement), 이멘(hymen), 산종(dissemination)이라는 말로 대변될 수 있는 파르마콘의 이중성이 여기 “나부상”에 형상화되어 있다. 모르긴 몰라도 그 “나부상”을 바라볼 수 있는 자는 “죄 없는 자”일 뿐, 우리네 도목수 어느 누구도 그 나부를 편하게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다. 고맙게도 육신의 나부가 남긴 변신의 “나부상”은 오랫동안 부처님 발등에 “입맞춤”하며 “싱싱한 눈빛”으로 살아간다. 그것이 바로 시인이 허두에서 말한 대로, “애간장 태우는” 기도이자 절대자에게 간구하는 소원이다. 이상적인 여인을 조각으로 만들고 제우스신에게 그녀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졸랐던 피그말리온과 나부상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면 갈라테이아로 변신한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은 결국 아무것도 모른 채 “나부상”을 만든 어리석은 도목수의 무의식 속에 자리한 사랑일 지도 모른다.

 

정숙의 시는 더 이상 설득하고 노래하지 않는다. 그는 변신하고 계시한다. 그것은 일종의 사물들이 노래하는 변신의 형식으로서, 말하자면 모순의 경계 영역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마치 그가 「비무장지대」에서 말한 “그와 내 방 사이 거실엔 온갖 잡초들이 꽃을 피우는 곳‘에 있기도 하고, ”경계선 제멋대로 지우고 날아다니는 콩새들의 자유로운 하늘”에 있기도 하다. “비무장지대”에 원시적 수목이 다시 울창해지듯, 그리고 그곳에서야 비로소 긴장이 자유로 바뀌듯 시인에게 주어진 예술적 자유는 온갖 것들을 넘어서 새로 태어나게 하고 또 죽게 한다. 태어남이란 하나의 물상이 자기를 버리고 새로운 형상을 지님을 의미하고 죽음이란 그 형상 그대로 있기를 그만 둔다는 뜻이다. 시인 정숙이 바로 이런 무한한 모습으로 변신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