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내 영혼의 무게는 몇 g일가?

 

여기, 그 무게를 달아본다.

 

오늘도

 

세상에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2014. 가을

 

 

 

최순섭 약력

 

1956년 대전 출생, 1978년『시밭』동인으로 작품활동, 중앙대학교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에코데일리 문화부장, 가톨릭독서아카데미상임위원, 서울특별시교육청근무(현).

mail:css03@naver.com,

 

 

 

 

 

 

최순섭의 시세계

 

 

 

‘일상’을 내파內波하는 언어의 직관들

 

 

 

박성현

(시인)

 

 

 

 

 

어느 여름날이었을 것이다. 혼자 영화 보는 재미에 빠져 그날도 사람이 드물게 앉아 있는 극장을 찾았다. 유럽의 어느 호텔을 배경으로 한 영화였는데, 낯선 이미지들이 생경한 언어와 몸짓, 소리들에 섞여 어둠 속으로 빨려들었다. ‘이미지’도 명백한 물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영화관을 나왔을 때였다. 고막에는 여전히 둔탁한 소리가 남아 있었고, 귀를 막아도 그것은 밀폐된 좁은 통로를 따라 더 크게 진동했다. 세상의 모든 소리란 소리들이 단 하나만 남겨두고 모조리 증발해버린 것처럼, ‘울림’은 분명했으며, 또한 분명한 만큼 모호한 악력을 가졌다─고막을 내파內波하며 몸의 안쪽을 집중했던 소리의 마지막 흔적들, 곧 아직 소화되지 못한 소리의 잔여와 여백.

생각해보자. 그때 내가 감각한 것은, 용융된 ‘액체 납’과 같은, 소리에 내재된, 혹은 소리를 주조한 어떤 ‘물질성’이었으리라. 여름의 무더운 공간을 가득 채운 매미 떼처럼, 고막을 움켜쥔 그것은 ‘듣는다’라는 동사를 순전히 소리의 공간적 밀도와 크기로 바꿔놓았던 것이다. 생각해보자. 이 소리의 잔여와 여백은 묵언默言에 잠긴 수도승의 거칠고 부르튼 입술과 동일하지 않은가. 언어가 사라져버린 얼굴에는 오로지 표정만 남아 있고, 고행자는 자신의 표정에 발화되기를 거부하는 ‘언어-소리’의 은밀한 집착을 새겨 넣는다. 고막이, 귀를 통과하는 소리의 파장이 아닌, 그 소리가 분절되는 형식을 기록하는 것처럼, 묵언으로 남겨진 ‘소리-의-없음’은 통사統辭에서 밀려난 육체의 순수한 내적 형식을 투사한다. 의미가 실현되는 순간, 그 문장이 생성된 언어의 근육 속으로 되돌려지는 소리의 껍질들, 혹은 “내 몸의 유전자들이 매양 털리고 있”(「따발총」)는 그 환장할 기억 같은.

그러한 어느 여름날이었을 것이다. 고막을 울리던 소리가 사라진 것은 을지로에서 명동으로 접어들 때였다. 이상하지만, 사람들의 발목에는 느린 걸음이 붙어 있었고, 그것과 기묘하게 대조되는 강마른 상체들은 가파르게 기울고 있었다. 중국대사관 쪽에서 바람이 불자 여름은 조금 더 높아졌고 냄새는 그만큼 단단해졌다. 바람은 거리를 습격하면서 자신이 만들어낸 생채기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흔적에서, 고막을 움켜쥐던 소리의 악착齷齪과 같은, 나는 “한 무더기 어린 꽃들이 몽글몽글 피어나고 있”(「참꽃」)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 알록달록한 색채들은, 제각각 소리의 굴곡을 파내며 스며들고, 내파되는 균열을 통해 내 소리의 먼 곳을 지워갔던 것.

하지만 그것은 사라지기보다는 뭔가 다른, 새로운 형식으로 분열하는 것이다. 소리는 ‘소리’에 덮여 사라짐으로써, 육체의 알려지지 않은 부분에 그 흔적과 방향을 남긴다. 마치 밤이 낮을 끌어당겨 사물을 어둠 속에 잠기게 하지만, 그것이 사물의 또 다른 형태를 이끌어내는 것과 같다. “어둑새벽 인력시장에 서성이는 사람들”(「드럼통」)처럼 그 소리는 장소를 떠나지 못하며 시간을 잡아두었던 것이고, 그럼으로써 미래를 한없이 연기시켰던 것이다. 나는 그 소리와 “오래오래 함께 흔들리고 싶”(「겨울 비구승」)었거나, “서걱대며 흰머리 흔드는 갈대처럼/ 나도 골똘해”(「샹들리에」)지고 싶었던 것일지 모른다. 하여튼, 명동의 건조하고 거친 빌딩들이 무심코 내려다보는 중국대사관 쪽에서, 그리고 소리들이 도처에서 꿈틀대는 ‘일상’이라는 세계의 축지縮地에서 나는 서둘러 몸을 감추는 언어의 직관들을 본 것이다.

 

 

*

 

우리가 ‘시’라고 부르는 것은 ‘일상’을 통해 고통스럽게 소환했던 소리들이 부패하고 절멸絶滅한 뒤에 남아 있는 결정結晶이다. 그 소리가 고막을 흔들었을 때는 이미 손끝에서 언어가 만들어진 후이며, 시가 명징한 근육을 드러낸 다음일 것이다. 그만큼 시는 일상의 직관을 내면화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온다. 다시 말하자. 일상은 소리들을 작동시키고, 작동된 소리는 언어로 분절되면서 좀 더 명징한 의미를 획득한다. 그리고 언어는 좀 더 날카롭거나 혹은 상당히 이완된 문장 속에서 시로 재생산된다.

당연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고 집중하는 대부분의 감각적 현상들은 ‘일상’이라는 세계 속에서 발현된다. 그 일상은 언어-구조의 거대한 매커니즘에 의해 작동되기 때문에, 우리는 감각적 현상을 문장으로 통할統轄하고 시로써 직조할 수 있다. 언어와 삶을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시와 일상도 그러하다. 일상을 떠난 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면 과언일까 싶지만, ‘일상을 떠난 시’가 있다는 것도 분명 지나친 말이다. 일상, 곧 생활세계란 ‘모든 학문적이고 철학적인 범주에 선행하는 근원적인 경험’이라는 후설의 말을 빌리면, ‘시’라는 범주에 선행하는 근원적인 경험도 바로 일상이라고 얘기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바로 여기가 최순섭 시인이 집중하고 또한 묘파하는 언어의 결이 시작된 지점이다.

그는 일상의 감각적 순간을 포착하는 언어의 직관에 대해 발군의 솜씨를 발휘한다. 예컨대, “미로의 길에 접어들어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나 한강 다리를 건너가는 숨 가쁜 포클레인/ 거대한 상아를 이고 해체의 계곡을 찾아가는 늙은 코끼리의 신성한 귀향을 본다”(「꿈길」)에서 ‘포클레인’을 ‘늙은 코끼리’로 묘사하거나, “시원하게 스포츠머리로 깎아 드렸더니/ 산뜻한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풀빛 적삼 입으시고 큰절을 올리고 계십니다”(「성묘하는 날」)에서 생전 스포츠머리처럼 산뜻한 아버지의 모습을 벌초에 빗대거나, “듬성듬성한 머리칼에 허리가 휜 그녀는/ 투명한 유리 병실 한가운데 서서 밥을 먹고 있다.// 앉을 수 없어/ 아, 앉을 수가 없어서”(「갈겨니」)에서 병과 맞서 싸우는 어머니의 모습(직립!)을 암시할 때, 우리는 시인이 갈고 다듬은 일상의 고결高潔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쩍쩍 마른 북어 몸 찢는 소리에 쿵쿵 마늘 다지며 조용히 하라고 고래 아버지 주무신다고 어머니는 해장국 폭폭 끓는 바다에 콩나물 넣으신다”는 「해장국 칸타타」나 “대문 열고 뛰어 들어와 툇마루에 가방 던져 놓고, 자전거 타고 오신 아버지도, 밥그릇 탱탱 불은 검둥이도, 바구니 가득 나물 캐고 돌아온 누이도, 구둣방 털보 삼촌도, 홍옥 노점상 아제도, 약국집 고모도, 마늘 고추 무 파 놓고 푸성귀 파는 꼬부랑 할머니도 무릎 괴고 앉아 후루룩 후루룩 먹는다”는 장면이 인상적인 「라면」도 일상의 소소한 단면을 명랑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들이 시인 내면에 펼쳐진 역동적인 풍경의 집중이며, 생활세계를 표상하는 시인의 세계관이 축약된 것임은 물론이다.

 

가로등 아래 꾹꾹 쌓이는 눈

휘적거리며 돌아오는 늦은 저녁

마중 나온 아내가 깔깔대며 눈덩이를 던진다

아스란 시절 그대가 던진 눈은 첫눈,

참 새큼하고 보드레했지

이제 불혹 넘어 그대가 던지는 눈덩이는

돌멩이처럼 아프기만 하다

하기야 거친 세월 군살 박힌 손아귀에

돌 잔뜩 쥐었겠지 죄 많은 내게 언젠가

던져야 할 주먹돌 가득가득 담았겠지

― 「눈싸움」 부분

 

일과를 마치고, 시인은 집으로 돌아간다. 두 팔이 이물異物처럼 휘적거리는 고된 일상을 암시하듯, 밤새 내린 눈도 “가로등 아래 꾹꾹 쌓”여, 단단하게 빛나고 있다. 그런데, 눈뭉치가 그에게 떨어진다. 마중 나온 아내가 “깔깔대며 눈덩이를 던”지는 것이다. 눈뭉치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일 년 내내 반복되는 일상의 동선動線이 균열되었음을 암시하는 부분으로, 시인은 프루스트의 ‘마들렌 과자’처럼, 삽시간에 ‘아스란 시절’로 돌아가 버리며, 그때 아내가 던졌던 “참, 새큼하고 보드레”한 ‘첫눈’을 기억해낸다.

시인은 ‘눈뭉치’를 통해 과거를 회상하지만, 단지, 그 ‘아스란 시절’을 추억하지 않는다. 그는 ‘불혹 넘은’ 아내가 던지는 눈뭉치와 먼 옛날, 아내와의 풋풋한 사랑이 시작되던 무렵의 첫눈과의 대비를 통해, 그와 아내가 감내했던 시간들을 고통스럽게 형상화한다. “돌멩이처럼 아프기만 하다”라는 문장에 함축된, 표현될 수 없는 시간의 무늬들이 얼마나 많은가. 시인은 “거친 세월 군살 박힌 손아귀에/ 돌 잔뜩 쥐었겠지 죄 많은 내게 언젠가/ 던져야 할 주먹돌 가득가득 담았겠지”라며, 아내가 버텨온 쓸쓸함과 상흔傷痕들을 위로한다.

이 시의 또 하나의 특징은 사물에 의한 의식의 전환이다. 이것은 최순섭 시인이 직조하는 독특한 화법 중의 하나로, 이미지를 불러내고, 그것의 미끄러짐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일상, 생활세계)를 풀어내는 작시법作詩法이다. “도레미파 노래 파는 노점상 할머니가 소나무 등피 손마디로 사과 궤짝 펼칠 때 두만강이 흐릅니다”(「파」)라는 구절에서 ‘사과궤짝’은 ‘두만강’에 직립하고, “오늘은 누가 죽어서 양식이 된 걸까/ 날마다 밥상머리에 앉아 드리는 제사/ 거룩한 밥상에는 파도치는 하루가 들어 있다/ 농부의 소금창고가 들어 있다/ 초록 숲에 뿌리내리는 무덤/ 날마다 죽는 사람들의 뼈와 살이 고봉으로 들어 있다”(「밥상」)라는 구절에서 ‘밥상’은 ‘소금창고’, ‘숲’, ‘무덤’, ‘뼈와 살’ 등의 내적 환유를 이끌어낸다. “지금도/ 그 탱자나무 집 지날 때면/ 시큼시큼 침이 고인다”(「숙자」)에서 ‘탱자’를 매개로 기억-이미지를 물질화한다. 또 “침목 깔고 달린 긴 시간 그 언덕 위에는/ 달콤한 기적 소리 덜컹덜컹 들려올 때/ 헛구역질 토하고 굴러가는 바퀴는/ 너의 몸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심장 뛰는 소리 듣고 있었네/ 지금도 들려오는 기적 소리 이끌고 오는 얼굴들”(「기찻길」)은 어떤가. ‘바퀴’의 맹렬한 속도와 기차의 기적 소리가 시인과 관계했던 ‘얼굴들’을 불러내고 있다.

 

한참을 찾아다녔다.

 

골동품이 되어버린 보기 드문 말똥

한적한

아스팔트 길 위에서

말라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걸 아버지께 드렸다

 

요강 위에 앉아

하혈 자리

말똥 연기를 쐬면 고통이 죄 사라진다며

어기적어기적 아기걸음 걸으셨다.

 

말똥말똥

훈제가 되신 아버지

푸른 연기 타고 날아가셨다.

― 「말똥」 전문

 

‘말똥’이라는, 이제는 거의 사라진 낯선 사물이 시인의 눈앞에 있다. 그가 한참을 찾아다녔지만, ‘말똥’을 발견하는 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을 듯하다. 그도 “골동품이 되어버린 보기 드문 말똥”이라 말하지 않는가. 그는 말똥 앞에서 하혈하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버지는 통증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아무 일 없는 척하지만, 당신의 몸은 그것을 말하고 있다. 누군가 말똥을 태울 때 솟는 연기가 통증을 완화시키는 데 좋다고 한다. 검증되지 못한 민간요법이라지만 마음이 있으니 길도 있을 것.

아주 낯설지만 절박한 사물인 ‘말똥’이 시인의 눈앞에 있다. 그가 기록했던 모든 사물보다 더 철저한 문장이고, 혼돈과 연민이 중첩된 빗장과도 같다. 상상해보자. 말똥이 타오를 때, 아버지의 표정은 어떠했을까. “한여름 밤 아파트 입구 슈퍼 앞// 노을 주점을 지나 고단한 항해를 끝내고 돌아온 배들이// 후미진 벤치에, 더러는 흙바닥에 철퍼덕 닻을 내”(「선착장」)리는 풍경과 같았을까. 아니면 “가풀막 오르다 잠시 숨 고르는 작은 별 하나”(「분홍빛으로 오시네」)와 같았을까. 하지만 시인은 그 장면을 “푸른 연기 타고 날아가셨다”라는 문장으로 압축한다. 상당히 중의적이고, 그만큼 무겁다.

앞서 우리는 일상(생활세계)이 시가 만들어지는 근원적 경험임을 살펴봤다. ‘일상’에서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수많은 사람들과 사물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생존하며, 여가를 보내고, 정치와 문화 같은 심미적이고 도덕적인 가치판단을 실행한다. 엄밀히 말해, “주체는 자신의 환경 세계를, 지금 이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가지고 있다”(후설)는 것이다. ‘일상’이란 자칫 간과하기 쉬운 삶의 조건은, 그것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졌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도 삶의 근원적 고독과 숭고가 결집된 곳이다. 예의 「말똥」만 하더라도 일상을 통해서 발견되는 숭고를 핍진하게 옮긴 시가 아닌가. 버려진 ‘첼로’를 보고 “너와 나 하루하루 버리고 가는 生”(「첼로」)을 떠올리는 것도, 또한 “깊은 그늘 싣고 온 종착역에서 무기력하게 졸고 있는 폐기물들/ 무가지 수거하는 노인의 분주한 손이 흥얼흥얼 이정표 달고 있다// 그래, 진정 고장 난 삶의 조각 그러모아/ 재생의 길 열어주며 신바람 일으키는 저 손놀림// 참 눈부시다”(「눈부신 저 손놀림」)의 무욕無欲도 마찬가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노인’의 손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움트게 되는지.

 

우리 집엔

들국화 꽃잎 닮은

밥상 하나 있지요.

 

도란도란 일곱 식구 둘러 앉아

저녁 밥 먹던

일곱 개의 수저가 일곱 개의 꽃술이 되어

향기 내뿜던

들국화 밥상.

 

언제부턴가

여섯 식구만 앉아서 밥을 먹다가

네 식구만, 두 식구만 앉아서 밥을 먹다가

지금은 어둑한 한 사람만

먼 산을 보며 수저를 드는

 

이제 그만 시들어서

내일이면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을 서늘한

들국화 밥상.

― 「들국화 밥상」 전문

 

‘일상’을 노래하며 시로 옮겨 쓰는 시인에게 ‘가족’에 대한 기억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에게 가족은 단지 소재에 한정되는 것이 아닌, 바로 시인의 정체성을 되살리고 일깨워주며 자신을 미래로 투사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일상의 가장 내밀한 장소인 ‘방/집’을 중심으로 가족을 소환한다. 그런데, 그 장소가 “들국화 꽃잎 닮은/ 밥상 하나”로 치환되고 있다는 점에서 소박한 듯하지만 매우 절실하게 다가온다.

밥상에서 ‘일곱 식구’는 둘러 앉아 저녁밥을 먹는다. ‘일곱 개의 수저’가 달그락거리며 밥상 위를 분주히 오가는데, 마치 활짝 웃는 들국화의 ‘일곱 개의 꽃술’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곱은 여섯이 되고, 넷과 둘로 작아진다. 시끌벅적하던 밥상 풍경은 식구들이 하나둘 떠나며 을씨년스럽게 변해 가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여섯 식구만 앉아서 밥을 먹다가/ 네 식구만, 두 식구만 앉아서 밥을 먹다가/ 지금은 어둑한 한 사람만/ 먼 산을 보며 수저를 드는” 적막한 ‘방/집’. 시인에게 기억이 환기하는 풍경은 집요하리만치 쓸쓸하다(쓸쓸해서 더 적막하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시인이 환기하는 가족의 기억이 우리 대부분이 겪었던 삶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7∼80년대의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가족의 유대가 끊기는 경험은 비단 시인만의 것이 아니다. ‘들국화 밥상’도 어느 가정에나 흔했던 밥상이다. 보편적 정서란 거대하고 대규모로 형성되는 무엇이 아니라, 시인이 겪었던 사소한 일상의 경험에서 오는 것이다. 시인의 독특함은 오히려 일상을 그대로 제시함으로써 정서의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있다. 요컨대, “구불텅한 흙길 따라 아버지가 비틀거리며 돌아오는 저물녘/ 밭둑에는 어깨 축 늘어진 수심 깊은 수양버들이 서 있습니다”(「호드기」), “저요, 저요 손 내미는 어린 새들/ 마당 한구석이 왁자한 장날이다/ 오늘은 식구들과 사진을 찍는 날/ 언제 다시 모일까/ 훌쩍 떠나버린 어머니 묵정밭을 걸어가 보니/ 갈비뼈만 남은 가시나무가 숨 쉬고 있다”(「샹들리에」), “불혹 이후 생긴 물혹/ 어머니는 자식들아 알까 쉬쉬/ 뱃속에 꽃망울 지뢰 하나 키우며 살았다”(「부레옥잠」), “거울에 비친 눈이 마주치자/ 돌아서서 빙긋 웃었다// 치약으로 범벅이 된 우스꽝스런 얼굴을 보자/ 마주보며 크게 또 웃었다”(「재린이」), “슬몃 아셨는지 헛기침하시며/ 손을 꼭, 꼭 잡아주시네/ 푸른 시절 잡으시던 그 천하장사 기운으로/ 단칸방 주머니에 후끈후끈 난롯불 피우시는 어머니/ 아,/ 마른 가랑잎, 뼈 장작 타는 소리”(「햇살 부신 겨울 아침」), “놀빛으로 부푼 가난한 아버지 품속에/ 한 봉지/ 따스한 사람들 부둥켜안고 돌아오는 골목길에는/ 파릇파릇한 풀빵”(「풀빵 집」), “초록 비 내리는 오월/ 가시넝쿨 담장 따라 어머니는/ 붉은 보따리 머리에 이고 오시네/ 어둑한 세상 구석에 쪼그려 앉아 훌쩍이는 사람들/ 어머니, 어머니, 부르는 소리가/ 살 찢는 가슴에 피눈물 밀어 올려 장미꽃을 피우네/ 눈시울 적신 그 향기 낱낱이 주워 담아/ 뒤뚱뒤뚱 오시는 어머니”(「천하장사 어머니」) 등의 구절을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에 무엇인가 새록새록 쌓일 것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최순섭 시인은 일상을 가장 ‘일상답게’ 읽어 내리는 보기 드문 시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산에 들면 세상 다 잊을까

 

이른 아침 배낭을 멘다.

 

탁 트인 하늘만 뵈는 산속에서 푹 쉴 거라고

 

산 나무가 수액 떨구며 안간힘을 쓰다가

 

가파른 능선 오른다는 걸

 

오늘도 까무룩 잊고 살아가는 산 아래 사람들

 

어디 앞산만 산인가

 

칼국수 먹고 자고 나면 오르는 물가

 

막막함도 산이다. 그대와 내가

 

날마다 오르는 산 넘어 산

― 「산」 전문

 

‘산’에 간다. 세상을 다 잊기 위해서다. 이른 아침, 간단한 먹거리를 주섬주섬 구겨 넣고 집을 나선다. 발목을 단단히 묶은 탓인지 다리가 무겁다. “탁 트인 하늘만 뵈는 산속에서 푹 쉴 거라고” 다시 마음을 동여매지만, 어지간해서는 삶을 잘라내기는 쉽지 않다. 시인은 능선을 오르면서 두어 번 앉았다가 다시 비탈을 오른다. 가쁜 숨이지만 아직 뱃속에는 힘이 남아 있다. 그는 나무를 보고, 그 나무의 방향을 본다. 그런데,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나무들도 무척 분주한 듯 보인다. 정상을 향해 조금씩 길어지기 위한 것일까(“산 나무가 수액을 떨구며 안간힘을 쓰다가// 가파른 능선 오른다는 걸”). 그 순간 문득, 생활도 그러함을, 시인은 깨닫는다. “어디 앞산만 산인가// 칼국수 먹고 자고 나면 오르는 물가”, 곧 ‘막막함도 산’인 것이다. 세상을 잊기 위해 올랐던 산도 스스로 치열함으로써 삶을 지속하고 있으며, 이와 동일하게 우리의 삶도 ‘날마다 올라야 하는 산’이다.

한편, 시인은 환경이나 외국인 노동자, 가난에 대한 문제도 등한시하지 않는다. 우포늪의 생명력의 끈질김과 그 소란스러움을 담은 「우포 클럽」에서 그는 “카트 끌고 서빙하는 검정 옷, 하얀 나비넥타이 종업원들 따오기, 댕기물떼새, 생이가래, 살사 춤추는 쇠물닭, 해오라기 자매, 꼬마줄물방개, 대칭이, 긴꼬리투구새우, 늪반딧불이, 마름, 소금쟁이, 애기부들, 창포, 개구리밥…” 등을 불러내고 있으며, 「白紙 한 장」에서는 인도네시아에서 온 노동자의 질박한 삶을 그리고 있다; “고향 떠나온 우리는 부둥켜안고/ 더는 발목 잘려 우는 일 없어야 한다고/ 고향에 보낼 편지를 쓰면서 사랑을 생각했지/ 누구를 사랑한다는 건, 생성과 소멸의 늪에서/ 불끈불끈 일어나 다시 한 번 불태우는 거/ 아낌없이 쓰고 죽어야 해, 너덜거리는 몸 하얗게/ 지울 수도 지워지지도 않을 고향/ 모든 걸 담을 수 있는 빈숲으로 부활하는 거.” 그리고 「개미」에서는 “검정 양복을 입은 개미가/ 동료의 시체를 입에 물고 걸어간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누대에 걸쳐/ 뒤따르는 수많은 개미들/ 사슬처럼 엉긴 몸이 서로 먹이가 되어/ 꼬물꼬물 걸어간다”라며, 현대의 무한경쟁 사회(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도 엿볼 수 있다. 「책밥」에서는 폐지를 수집하는 노인과 손녀의 절박하고 애틋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달밤이다/ 전봇대 옆 쓰레기 하치장/ 집에서 쫓겨나온 중3 참고서가 엉엉 울고 있다/ 아비 없이 손녀와 둘이 살아가는 할머니는/ 우는 소리를 들은 것일까/ 뒤적뒤적 파지 속에서 책을 발견하고/ 소나무 껍질 손바닥으로 쓰윽쓰윽/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중략)…/ 내일 밥상 위에 펼쳐놓고/ 손녀와 함께 먹을 /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책밥”). 이처럼 최순섭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해 일상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집약하고 있으며, 또한 그 의미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펼치고 있다.

 

이제 시인의 내면에서 한 무리의 ‘고요’를 읽어야 한다. 일상 속에서 꺼낸 고결한 시인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물빛 자리가 고요하다

경계할 대상도 없고

밤사이 적막을 넘어 물소리만 들리는

시냇가에 밤이 오고, 물속에는

물속 세상의 사연만이 찰랑거린다

모두 가버린 빈자리에

별빛으로 채워진 물빛 마을

― 「물소리 민박」 전문

 

물빛 자리가 있다. 그것은 흔적이므로 기억의 먼 곳을 향하고, 또한 투명하므로 수많은 형체를 왜곡하지 않는다. “경계할 대상도 없”다는 말은 그런 뜻을 가진다. 때문에 그것은 고요가 아니면 안 된다. 그리고 아주 고요한 물빛 자리에 시인이 있다. 그는 사물과 통通함으로써 화和하여, 경계할 대상을 가지지 않는다. 마음과 몸이 무욕하여 투명해지고, 고요가 더 큰 고요 속으로 잠기어 적막은 밤의 심연이 된다(“밤사이 적막을 넘어 물소리만 들리는”). 그가 사는 삶의 물빛 자리에 “밤이 오고, 물속에는/ 물속 세상의 사연만이 찰랑거린다.” 고요하고 적막한 듯하나, 그 속에는 삶의 오롯한 물결이 가득하다. 고요가 오히려 소리의 촉수인 것이다. 별빛과 물빛이 서로 상응하며 반짝이는 그 순간의 아름다움. 그것은 일상을 직관하는 언어의 다정함과 충만함이며, 바로 최순섭 시의 요체다.

 

 

*

 

영화관을 나온 몇몇 사람들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다. 소리(이미지)를 밀폐하려는 듯, 손목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우리는 ‘액체 납’을 떠올리며, 아마도 소리가 고막의 안쪽을 투과하고 몸속으로 스며들기 직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길의 한 복판에서 소리가 한꺼번에 타오르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아마도 무척 더운 여름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