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라미

 

 

 

 

토마토는 붉게 동그랗다

수박은 초록으로 동그랗다

나팔꽃 나팔 주둥이는 분홍으로 동그랗다

나팔꽃에 입 맞추는 네 입술은

고요히 동그랗다

구름이랑 보름달은 뭉게뭉게 동그랗다

쥐눈이콩은

새알보다 더 콩 만하게 동그랗다

강물을 살짝 떠올리는 물수제비는

날아갈듯 온몸으로 동그랗다

엄마의 정수리에서 대가족을 봉양했던 또아리는

철철이 누런 가난으로 동그랗다

남북으로 왔다 갔다 하는 탁구공은

콩닥콩닥 대책도 없이 동그랗다

바다 한 가운데에 묻힌 아이들의 눈동자가

가만히 있어서* 처절참담 동그랗다

 

스스로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는 동그라미

보듬어서 서로, 기대어 살아야 할 동그라미

뾰족할 수 없어 기어이 동그랗다

 

 

*‘가만히 있으라’는 2014. 4. 16. 세월호 침몰시 안내방송의 말

 

 

 

 

고갱이, 순천만



조계산의 산벚꽃이었네

산벚나무 숲의 뻐꾸기였네

뻐꾸기 알 덮치는 능구렁이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였네

일제히 울어대는 두꺼비 소리 계곡물 따라 흘러가는 때죽나무 꽃잎이었네 그예 도달하는 대대포구의 바람

바람 따라 흔들리는 갈대숲!

그 숲의 바다와 뻘밭 속의 짱뚱어 무리, 그대여 그대가 간질이던 숨가쁜 내 발바닥!

 

 

 

 

 

 

곁이 비었다

그가 집을 나간 그때부터 내 곁의 침대를 껐다

곁이 차갑다

시원섭섭하다던,

내 몸에서 갈수록 온기가 빠져나가나 보다

텅 빈 곁에 다가가다

맘을 허방에 떨어뜨린다

무엇으로 채울까 저 헛헛한 곁을

연신 두리번거린다

내가 아니다 곁이 중심이다

창 너머로 바람 분다

바람 곁에 목련이 흔들린다

목련 곁에 희게 빛 쏟아진다

눈부신 곁, 나비떼 날아든다

날개의 곁 그대, 노르스름한 봄이다

 

별리(別離)도 훈훈하여라!

 

 

 

 

 

가장자리에 이르다

 

 

 

 

수박씨를 뿌려라 그리고 놓아두라

자소엽, 고추 모종이야 어떠랴

세 개의 낭창한 대나무 간짓대를 세워서

하시절을 보내라

세월 속 많은 비가 퍼붓고

누군가 하루이틀 들락거릴 것이다

엉겅퀴 자궁께엔 작은주홍부전나비가 날고

해바라기 대신 둘러친 싸리울타리에

서리서리 메꽃이 고즈넉하다

몇 차례 천둥번개가 다녀가면서

주춧돌 곁을 지키던 나무판은 사라졌다

땡볕의 텃밭에 그대의 마음을 빼앗기고

낫으로 베어볼까도 싶어질만큼

휘적거리는 돼지감자가 함부로 키를 키우는 곳

축축한 항구도시의 젖가슴에 이르면

그곳이 바로 꿈에 그리던 가장자리

어머니는 치매에 들고

홀아들은 그녀를 목욕시켜 치매학교에 보낸 뒤

하염없이 담배를 피며

몇 개의 방울토마토를 따 마루 끝에 놓아두는 날,

모든 것을 감춰버린 잡초의 바다

누구라도 이곳에 닿으면 텃밭의 지극을 넘는다

휙- 휘돌아 맷돌의 한가운데로 함몰 당해버리는 메밀처럼

오다가다 큰길을 버린 그대는

 

황 홀 한 가 장 자 리 에 오 래 토 록 서 있 게 되 는 것 이 다

 

 

 

 

선암매

 

 

 

 

갓 태어나는 올챙이 꼬리짓 같은 향기

 

그녀의 살 아래로 번지고 있다

 

땅 만난 허공 터진다 허공 부른 꽃술 숨는다

 

가운데로 뿌리 솟는다

 

저렇게 육백 년이나 그녀,

 

대설 입춘 눈, 바람으로 버티고 있다

 

쿵더쿵, 황홀놀음 그대 몫이다

 

 

 

 

 

 

 

 

 

 

 

 

 

죽음이라는 밥

 

 

 

 

죽음, 너는 나의 밥이었다

그도 먹을 만했다

몇 술 못 먹을 만큼 작아진 밥통의 허기 사이로

너는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렸다

허기가 진해져 황혼의 개펄 같았을 때 냉큼,

나는 너를 베어 물었다

그 맛, 빛 뒤에 숨어서 오는 참 써늘한 바람

그냥 스쳐 지나가는 그런 바람 아닌

뼈 속 온기를 순식간에 훔쳐 달아나는 번개의 속도를 가진 얼음바람

그 차디찬 죽음의 밥을 먹는 날은

배고프지 않았다

아주 명징하게 죽음과 죽음 사이 나는 앉아있었다

순간의 매일

그대와 죽음에게로 끊임없이 왔다갔다 부딪쳤다

어쩐지 의지의 시간보다

죽음에게로 가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 때마다

솔개가 허기를 달래기 위해 닭 한 마리를 낚아채듯 나도

죽음을 똑바로 보았다 그 다음,

꺼져버린 담뱃재 같은 것을 건져 밥 짓는 연습을 했다

그 밥을 먹고 나에게 힘이 생겼다 그 때, 라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때로는 밥 같은 그리움을 그려주는 죽음이 있다는 걸

알았다 생의 반대편에서 유령의 깃대를 흔드는 그것이

똥도 못 만들고 질질 흘리고 있는 내 육체를

여명의 언덕에 홀로 세울 수 있는 비법을 가르쳐 주었

다고나 할까

 

 

 

쓰레기장에서

 

 

 

 

쓰레기도 못 된 것이

쓰레기인 것처럼 턱

버티고 서 있다

나사못 하나 빠지지 않은 것, 가짜 쓰레기가

저 자리가 어디라고 거만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헐어빠져 형체도 없이 섞여 완전 쓰레기가 된 몸들이 누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너!

저 혹한의 세상으로 다시 가라

간절히 몸을 탕진하고

이 자리에 발걸음도 디딜 수 없이 올 수 있을 테니

언젠가는... ... 쓰레기가 되어야겠다... ... 저 완전한 허허!

제 몸 온통 썩어 나올 때까지 얼마나 험하게 굴렀으며

저토록 심하게 온갖 것에 대항했겠으며

피비린내 벅찬 세상을 맛보았을까

쓴, 고귀한, 처참한, 달콤한 살, 살, 살!

한 머리카락 한 관절 한 심장 한 허파 한 대장까지 철저히 터져나갔을 것!

돌아 돌아온 세월만큼 익고 썩고 문드러졌을 것

아 나도 혹여, 쓰레기가 될 수 있을까... ...

저 비감한 열락!

다시는 복구될 수 없는 육체로 돌아가

서로 부빌 필요 없는 사랑 하나로 썩어든 정염

옛날 옛날 갓날 갓적으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딱 사라짐 하나인 피안!

 

 

 

 

 

 

 

 

 

 

 

 

 

 

생의 비의(秘意)

 

 

산에 오르락내리락 할 때

가까이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

 

전혀 알 수 없는

내 걸어왔고 너 날아갔으나

 

우리 서로 까마득히 모르는

그늘 깊은 곳 들락날락 다람쥐꼬리 같은

기미 사랑

 

연록의 가슴팍을 쫙 펼치는 쪽동백 가지 사이로 든

물안개 봄 물바람의 빛

 

가을, 겨울아침 살얼음 피리 꼬리짓거리

동그란 주먹 안에 쥘 수 없는

언뜻 저녁노을 한 새의 깃털만도 못 한

기미, 기억,

 

내 온전히 모르는 동안에도

골똘히 흐르는 조약돌 아래로 설핏

숨어들어버리는 흠뻑 젖은 바위의 몸

 

속, 그 벗길 수 없는 꽃씨

 

 

 

 

 

 

 

 

오해와 상상

 

 

 

 

오해하고 싶다 슬픔을

오해하고 싶다 먹장구름을

오해한다 찢긴 살의 지독한 통증을

벗겨내는 전제군주를

오해하고 있다 세상의 비릿한 바람을

그 뒷골목 어둑한 신음소리를

바윗덩이의 묵언을

거둬내는 마술사를

너는 오해한다 그리고 상상한다

피리 부는 귀머거리

춤추는 절름발이

연애하는 고자

그 열락의 허공을

오해한다 그리워한다 나는 다만

휠체어에 의지한 목숨의 빛을

그 빛이 날아가 뱉어낸 허공,

발아한 씨앗 한 톨을

여럿이 함께 날개 돋친 숲속의 새들이

볼 수도 들을 수도 걸을 수도 먹을 수도 없이

누워있는 한 광녀의

자궁에게로 떨쳐 넣고 있는 것을

 

 

 

 

 

 

홍시

 

 

 

 

부실해진 위(胃)로는 먹을 게 없고

먹어도 에너지로 바꾸기 어려워진 나는

가을 지난 홍시가 주식이다

 

짜지도

맵지도

거칠지도 않은

이 부드러운 선물

 

핍팔라나무 아래서의 그 분도

아니라면, 누가 내게

이토록 하릴없이 입맞춤하고 있는가

 

목숨을 한바탕 가위질 당하고도

버팅기고 있는 힘은

두려워지던 세상에

다시 한 번 친해질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부드러움 덕분이다

너무 황홀하게 입술에 닿아

순간 사라져가면서 나의 육체가 되는

그것,

위용도 빛남도 거셈도 아니다

살고 싶게 만드는 건 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