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세 번째 시를 정리하고 십년 만이다.

십년 동안 시를 많이 쓰지 못했다는 의미다.

나에게 십년은 어떤 시간이었나?

상주란 곳에 와서 정착하고

복직하여 하고 싶었던 학교생활하고

촌집을 사서 또 다른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고

그리고 지역사람들과 지역문제 해결을 위해 단체를 만들어

일을 했다.

바빴다. 열심히 살았다.

그 사이 두 딸이 결혼을 하고 손녀 손자가 탄생하고

가족 사랑의 절정을 누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 삶의 활력소는 ‘떠돎’이었다.

여럿이서, 둘이서, 아니면 혼자서

나는 끊임없이 삶터를 떠나 또 다른 삶을 살려 했다.

떠돌아서 충만함에 시가 들어 설 자리가 없었고

문득 절실히 혼자를 느낄 때 시가 찾아 왔다.

마음 속 시의 자리가 너무 커서 시를 쓸 수 없었고

쓸려 떠나는 것들을 겨우 붙들어 한 두 마디 할 수 있었다.

그런 삶의 흔적들.

그런 십년에 좀 대견한 것은

미움 때문에 마음을 다치지 않으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밤하늘의 별과 바람과 함께, 그것도 사막에서

나는 참 많이 울었기 때문이다.

그 울음들이 키 낮은 꽃으로 피어 기쁘다.

  


  

약력:


1953년 부산에서 태어남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하여 교사생활을 하다

1989년 전교조 가입으로 해직되어 10년간 학교를 떠나 있음

1998년 복직하여 영주 상주에서 근무

작은 학교 살리기 활동을 하고 ‘강과 습지를 사랑하는 상주 사람들(강습사)’이라는

환경운동을 하고 이것저것 하느라 바쁘게 살고 있다.

 

1990년 시집 『해직일기』 발간 후 『멀어지지 않으면 닿지도 않는다』, 『꽃의 황홀』 을 펴 냈음




(해설)


바람의 언어, 텅 빈 충만

 

1.

조영옥 시인의 시집을 읽는다. 나를 위한 ‘노래’로 시집의 문이 열리고, 나의 ‘평화’로 마무리되는 시집에서 시인은 세상과 세계를 향한 사랑의 몸짓을 노래라 말한다. 평화를 찾아가는 노래, 평화를 부르는 노래를 포기한 적 없는 시인의 삶. 그 곡진하고 간절함을 얻어 들을 수 있는 기회로 삼으며 이 시집을 읽어 간다.

시를 읽는 내내 시간에 묻은 흔적과 시간 안에서 만나고 부대끼던 사람들과의 상처와 사랑이 찐득거린다. 가족을 돌아보든, 의지를 발휘하고 선택한 삶을 확인하든, 시집의 현재는 먼 뒤안길을 돌아보는 목소리이다. 그 목소리가 몽골까지 이어져 초원의 바람과 별을 불러내기도 하며 이야기를 풀고 있다. 시집을 관통하고 있는 몽골시편은 굵게 맥을 잡고 흐르면서 시인의 일상을 함께 연결시켜 중년을 넘어 노년에 접어든 자취를 펼친다. 시간, 세월, 시절 등, 맥락마다 달리 부딪혔을 언어들. 우리가 시간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이 현상계에서 시인은 시간에 대한 절절한 깨닫기를 해 왔던 듯하다. 시인은 순간순간 간절하게 살아왔으므로 시간언어를 이미 넘어서서 시간 밖 세계를 불러내고 있는 중임을, 그래서 그 세계를 솔직히 말해 달라 하고 싶다. 그걸 룽(바람)의 언어라고 물어봐도 될까?

 

2.

시는 언제나 세상을 감동적인 드라마로 만드는데 집중해서 그 결과 감동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가. 깊은 배려와 헤아림으로 내미는 손처럼 시의 손길이 세계의 조화를 그려낼 수 있기를, 시인 스스로를 향해 노래 부르는 일 역시 시인을 넘어 세계로 흘러가는 일임을. 흐르는 세월, 지나가는 바람, 모든 것이 단지 지나가는 일임을 시인은 나무의 심정이 되어 헤아린다. 파도가 스스로 달려와 하얀 포말로 부서지지만 여전히 바닷물로 흐르고 있음을. 그러므로 나무도 파도도 되어보면서 몸의 구속을 넘어서자 수많은 내가 반긴다.

시인은 사물과 자연, 헐벗은 이웃을 위한 그동안의 노래에도 텅 빈 충만을 만나지 못해 그만 대상을 향한 노래를 멈추고 ‘나를 위한 노래’로 노래의 방향을 바꾸기로 한다. 나를 노래하는 것으로 진짜 내 노래를 부르겠다는 의지를 발현한다. 나를 노래한다는 것에서 발현되는 내면의 성찰과 소우주의 자신을 만나는 일, 세상을 다시 노래할 힘을 얻는 일까지를 포함해서 나를 노래하는 일을 시도한다. 내가 주변을 향해 기울이는 관심은 온통 나를 향해 노래하는 일과 다르지 않게 되면서 나를 위하는 길이 세상과 소통하고 함께하는 일로 이어진다. 텅 비어서 충만하게 되는 시점이 바로 모든 노래가 나를 향해 있을 때, 그때이다.

나를 노래하는 구체 현장이「나무가 되어」에서 보인다. 시인은 나무가 되는 일은 깊은 뿌리의 울림을 닮아가거나 열매를 우아하게 맺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달빛 흘리고 바람 보내는’ 일이라 한다. 한 줌의 달빛도 담지 못하고, 천지에 가득한 바람도 품지 못하여 우우 바람소리로 우는 울음을 닮는 것이 삶이라 한다. 뭐든 찰나에 머물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흔적을 안으며 그 안에 거주하는 삶에서 시인은 나무의 말과 마음과 하나가 된다. 나무가 되어보자는 의도에는 나무가 맞이하고 보내는 바람과 달빛이 너무 은은해서 솔깃해진 마음이 묻어 있다. 뿌리를 든든하게 땅에 댄 의지나 깊은 그늘과 열매가 부러워서가 아니다. 묵묵히 맞이하는 바람, 달빛으로 텅 빈 존재가 가진 자유로운 삶을 닮으려는 데 있다.

우리들이 안고 살아가는 추억도 가끔씩 파도처럼 깊은 흔들림을 만나며 잊었다 생각한 상처들과 맞대면 한다.

「서해에서」파도가 몰아온 물살은 바위를 적시고 굴 딱지를 다닥다닥 붙인 수면 아래의 몸을 들춘다. 이미 오래 전에 버려둔 상처라 여겼으나 파도가 치면 어김없이 그 통증이 살아나 바다의 울음처럼 깊은 울음이 온 몸으로 번진다. 포말로 부서지는 바다는 눈물이 된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곧 삶의 의지이므로 그냥 확 믿고 마는 일 말고 사는 일이 따로 있지 않음을 그래서 어떤 변명도 필요없이 막, 확 믿는 일을 감행하라고 가르친다. 한번도 실망한 적 없는 사람이어도 되고, 늘 실망한 사람이어도 그 믿음의 순도는 전혀 다르지 않다.

 

3.

손자 손녀를 안은 시인에게 아버지 혹은 어머니는 마치 한 세대를 함께 살아가는 동료처럼 애잔하고 특별해진다. 가족이라는 사회에서 감당했던 짐이 세월과 함께 사랑으로 무르익는 지점에 이르면 가족은 또 하나의 고향이 된다. 고향의 여유로운 시간 앞에서 삶의 가장 근원적인 것들을 다시 소중하게 불러내고 그 아픔과 상처도 이제는 추억의 한 장면으로 이해한다. 어린시절 한없이 따뜻했던 아버지를 기억하는 일은 동네 산책도 조심해야하는 연로한 어머니로 이어진다. 어머니가 보낸 세월 무게 못지않은 딸의 시간도 할머니로 진입해 누구에게나 생의 무게는 비등비등하고 나란하다는 걸 다시 일깨운다. 부모와 자식으로 맺은 인연의 시간은 할머니, 할머니, 또 할머니의 세월을 살더라도 그 특별한 지상의 인연으로 우리는 겨우 삶을 배우고 살 수 있는 거라 말한다.

아버지와 함께 「풀」 쒀서 벽지 바르던 그 시절의 추억은 지금 아버지 빈자리로 더 생생하다. 아버지의 따뜻했던 목소리는 늘 사랑을 확인하는 자리이지만 그 지점엔 통증이 함께 수반된다. 아버지와의 추억 자락에 남은 벽지 바르기는 그래서 더욱 소중해진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나면 남는 후회란 왜 좀 더 오래 함께 있지 못했는가에 있고, 시인 역시 딸의 목소리로 그 아쉬움을 어쩌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교복을 다려 주시던 자상한 아버지를 현재의 자리로 불러 기억해내는 아쉬움 안에 놓인 그 마음이 풀 쑤다 불쑥 밖으로 드러난다.

아흔이 다 된 노모가 환갑이 멀지 않은 딸을 배웅 나온다. ‘아흔을 바라보는 엄마와 환갑을 바라보는 딸이 애틋하게 손을 흔든다.’「할미꽃 두 송이」의 풍경이다. 먼 길 갈 딸의 등이라도 몇 번을 더 볼까 하는 마음을 딸은 이미 헤아리고 흐린 눈이 된다. 핸드폰도 무거운 당신이 지하철역까지 딸을 바래다주러 나오는 길은 불안하지만 어머니마음을 받는 일이니 딸은 그 길이 따뜻하고 소중하다. 천천히 엄마 보폭에 발을 맞춰 걸으며 어린 딸이 되어 본다. 길 끝에서 서로 헤어져 걸으며 돌아보며 아픈 이별을 하는 풍경에서 시인은 고운 할미꽃이 두 송이 핀다고 했다.

「유년풍경」에서 시인은 소녀시절 영화를 보면서 천변만화를 알게 되는 문화충격을 겪거나, 배곯던 시절의 상처도 거리를 두고 멀리멀리 흘러온 자신을 반추한다. 「유년풍경」에서 열 살 소녀는 삼류극장 관람석 통로에서 인생을 배운다. 세속의 그 흔한 사랑과 불륜을, 정의로운 사람 유관순 누나의 고문을 영화가 가르쳐 준다. ‘세상은 깊은 우물로 내 속에 잠기’고 말았다. 혼자서 울고, 웃고, 놀고, 보며 영화는 어린 소녀를 키웠다. 배고프던 시절 술찌개미 끓여먹던 시절, 달작지근한 맛에 취해 집으로 돌아갈 길을 잊어버렸던, 이제 그 어린시절을 추억하는 시인도 다시 그 어린 소녀로 돌아갈 길을 잃어버렸다.

시를 쓰다가 시인은 그만, 소회를 솔직히 밝히고 만다.「귀향」은 단지 빈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일만이 아니다. 딸이 되어 어머니, 아버지에게로 마음이 가닿는 일에서부터 고향의 오래된 빈 집까지 연결된다. 오래 비어둔 빈 집으로 돌아와 잡초와 가을벌레 소리 한 가운데서 그 자체로 위안을 얻는다. 이제 오래 비워둔 빈 집은 고향이 되고 있다. 가족과 추억은 고향이 되어 텅 비어 있는 충만을 드디어 발휘하기 시작한다.

 

 

4.

몽골을 노래하려면 몽골의 초원을 만들어온 바람과 별을 빼고 어떻게 감히 입을 열 수 있겠는가. 시인 역시 몽골시편 곳곳마다 바람과 별을 담아두고 혹은 보내두고 그립거나 찬란한 몽골을 이야기한다. 그러니 시에서는 별과 바람이 묻어있지 않은 몽골시편은 없을 정도이다.

어두운 사막 고비에서 밤을 밝히는 별빛은 단순히 명맥만 유지하는 별빛이 아니다. 사막의 밤을 온전하게 밝히며 몽골의 고유함을 전하는 빛들이다. 시인은「세이항고비에서 별을 보다」에서 몽골 밤하늘의 별을 본 자들은 별의 진짜 이름과 의미를 다시 되새겨내는 거룩한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거라 한다. 별의 존재들, 그들이 스스로 빛을 밝히며 한밤을 빛내는 까닭들을 더듬는다. 강처럼 흐르는 별빛들 그 무수한 빛의 행렬 속에서 두고 온 모든 것들, 사람도 하나의 사물이 되어 모든 자연물의 존재의미를 다시 이해시켜주는 별의 위력을 감지한다. 높고 낮은 곳 어디나 훤히 비추며 스스로 빛나며 존재하는 별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되새김한다.

발음으로도 낯설고 까마득한 초원,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별밭을 헤매는 시인이 있다. 시「별을 길어」에는 별을 한 국자씩 떠서 닫힌 가슴에 부으면 가슴에 별이 달릴 거라 한다. 그럼 그 가슴은 환하게 빛을 내면서 활짝 열리게 될 거다. 몽골의 저 이름 긴 초원에 서면 누구나 가슴에 별 한 국자씩 담지 않을 수 없을 거다. 그 별을 가슴에 담아둔 사람은 언제나 열린 가슴이 되어 빛나는 동화를 살 수 있을 것 같다. 시인은 그 마음으로 이 시를 쓴 것 같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몽골시편을 읽다보면 곧 찬란한 별이 될지 모를 일이다.

몽골의 별빛에 취한 시「도룬고비에서 길을 잃다」는 칭기스 보드카를 마시고 초원에 누웠지만 알콜 기운은 어디로 가고 온 몸이 별빛을 흡수한 체험언어들로 가득하다. 수많은 별 사이에서 길을 잃은 그 발길은 초원 위에 몸을 누이고 있었으나 시선은 한 순간도 별밭을 떠나지 못한다. 길 잃은 시인의 눈길은 새로운 별빛을 받아 마시느라 취기를 앓는다.

몽골초원의 별은 바람과 함께 흐르며 바람과 함께 빛난다. 바람은 단순히 공기의 이동만이 아니다. 공기가 한번 움직이면서 몽골의 초원을 흔들어 순리를 일깨워준다.「바람을 만나다」에서 첫 바람은 숨결로 들리다가 좀 더 귀 기울이니 살아있는 소리로 울린다. 그 소리 따라 더 침잠해 들으니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진다. 시인은 사막의 한밤, 별 빛이 초롱초롱 별밭을 이루는데 그 틈새에서 바람과 만나고 바람의 마음이 되어 보는 중이다.

몽골에 오면 우선 순서도 바람만이 알고 바람의 순리대로 흐른다. 「바람만이 아는 대답」처럼 먼지와 갈증이 심한 돌자갈 길에서 우물을 만나면 가장 먼저 낙타가 마시고, 그 다음 말, 양이 차례로 마신다. 이들은 먹을 만큼만 먹기에 우물물로 충분히 갈증을 녹인다. 못 마시는 녀석 하나 없이 골고루 마신다. 이 풍경 앞에 인간의 욕망을 떠올리며 반성하는 목소리,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냐고 묻지만 바람은 영원히 대답하지 않을 것임을 시인은 안다. 그 대답 역시 시인이 스스로 던지고 있는 숙제임을.

몽골초원의 사물 하나하나에는 바람결이 묻어 있다. 돌멩이 하나까지 바람의 무게가 실려 있다. 천년의 바람에 깎이고 깎인 돌멩이 하나 주워 들고 바람따라 흘러온 시간을 더듬어 보다가, 다시 제 자리에 돌을 놓는다. 「돌 하나 주워」에는 막 불어서 지나가는 바람, 수억 년을 쉬지 않고 불어오고 있는 바람, 몽골초원을 만들어 오고 달래러 오는 바람, 그 사이사이, 수많은 역사의 단위와 시간 속에서 말없이 불어오고 불어가는 바람이 있다. 인간에게 시간이란 만나다, 헤어지다를 반복했을 상태이지만 돌에게 물어보면 겨우 호흡 몇 번의 짧은 순간이다. 돌은 제자리에서 그냥 바람을 맞이할 뿐이다.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나를 구성해온 영혼의 자화상은 다시 돌처럼 깎이고 다듬어진다.

모든 바람이란 바람은 다 몰아서 불어오는 초원에서 꽃은 납작 엎드리는 삶을 선택한다. 그 애처로움이 다시 살아있는 생명력으로 발휘되자면 스스로 초원의 바람을 맞아보는 일이 현명하다. 그 바람 다 맞으며 가슴에 담아두고 초원의 꽃들을 위로하자고 덤비는 시인이 「초원에서1」에 서 있다.「초원에서2」에서 하늘과 땅이 반반 섞여 있고 그 빈틈으로 바람이 사정없이 몰아 불어대는 곳에서 바람의 거친 소리를 피해 땅에 납작 엎드린 풀과 꽃들의 숨결을 귀대고 들으며 그 숨결을 기억하려 애쓰는 시인이 있다. 초원은 지친 사람들이 잠시 그 마음을 달래는 길이거나 다시 충전하려는 허공 같은 곳이다.

초원의 꽃들은 허공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하여 그 허공을 가르며 피어나서 텅 빈 충만을 가득 피운다. 사막의 꽃들, 비 오면 그 응집된 힘으로 피어나 바람에 흔들리며 씨앗을 퍼뜨려 꽃들의 존재 목적을 완전히 연소해낸다. 누구나 한 시절 곱게 피어나듯이 고비의 사막에도 생명은 찬란하게 피고 핀다. 「고비에서」에서 피는 꽃은 바람을 받아내거나 밀어내거나, 혹은 아예 바람에 스며들면서 더 멀리 더 오래 살아있을 방향을 향해 뿌리를 눕히고 또 일어서면서 초원을 아름답게 물들인다.

「하톤 볼럭 가는 길」은 지평선과 맞닿은 넓고 넓은 땅으로 구름이 피어오르고 그 구름 속으로 차가 달려들면 차가 일으키는 먼지와 구름은 꽃밭을 만든다. 그 가운데 사람인 듯한 생명들 다 녹아들어 구름이 되기도 하고, 먼지가 되기도 한다. 그러다가 바람에 날리는 한 줌 재가 되는 일이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채로 겪어볼 수 길이 하톤 볼럭 가는 길이다.

「딜기르 무릉강을 지나며」분명히 몽골 평원의 풍경을 보고 있지만 시인은 그 풍경에서 치열한 생존현장을 읽어낸다. 순간의 아름다움에 다시 절감하는 작품이다. 양이 풀을 뜯는 평화로운 풍경에서 양의 입은 안간힘을 내는 생존의 현장을 그대로 보여준다. 아르갈을 줍는 여인, 아이락을 젓는 여인, 아롤을 만드는 어린 처녀, 이 몽골의 여성들은 사실 한창 노동 중이다. 이방인의 눈에 들어올 여유와 낯선 풍경이 시인에게는 진땀나는 생의 한 가운데를 관통한 노동이 된다. 우리 문명의 이름 앞에 약간은 낯설게 보일지 모르나, 엄연한 생존의 맨살, 문명의 속살은 진지하다.

몽골 초원을 걷거나 혹은 달리는 먼 여행자는 사소한 몽골의 일상에서 깊은 지혜를 배운다. 묵직한 교훈의 언어가 아니라 초원의 바람처럼 스치듯 가장 가벼운 무게로 흐르는 삶에서 신비에 가까운 충만을 배운다. 그 여운이 가벼워질수록 더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 삶은 거리를 회복하는 일로부터 충전할 수 있는 것일까.「테르킹 차강 노르」 차강 노르 하얀 호수까지 거리이동은 바로 여행의 완급을 조절하는 그 배경이 된다. 이 곳 호수에서 보이는 게르는 풍경이 된다. 또 다른 곳으로 옮겨 앉을 천막 사람들의 삶이란 짐 풀고 챙기는 일상의 반복일지도 모르지만 그 짐을 풀고 다시 싸며 삶이 여행 자체임을, 그리고 길더라도 하루를 반드시 살아서 다시 하루를 이어갈 뿐임을 그 묵직한 일상과 하루를 먼 시선으로 일깨운다.

몽골에서 반성문 쓰듯, 몽골풍경이 마음으로 박힌 내면을 읽는다. 늘 부족했고 모자란 성찰도 몽골에 발 디디면 가능해지는가. 고개 숙일수록 세상에 자그마한 꽃들까지 자세하게 볼 수 있고 꽃들 밟을까 피하며 발을 멈추는 사이사이, 잠시 멈추며 세상의 움직임, 몸의 흔들림, 바람까지 감지해낸다. 「아래를 보며 걷다」에서 천천히, 느릿느릿, 나지막하게 걷는 일의 놀라움이 발견된다.「부끄러운 계산법」, 「약간의 참음에 대하여」등은 초원이 사람의 욕심을 야단치기라도 하고, 돌멩이와 풀 한 포기에도 그 생명의 위대성에 무릎 굻게 만드는 신비함이 있는 깃들어 있다.

시인에게 몽골은 연대의 대상임이 분명하다. 몽골초원의 별, 바람, 사람이 모두 분명한 너였던 것이 아니었다고 고백한다.「알타이산맥 끝자락에서」‘신도 없이 삶의 이전도 이후도 없이 오늘만이 전부인 나에게 너는 뿌리처럼 내 몸을 비집고 들어온다.’감각의 한계 안에서 알타이로 통칭되는 이 어눌한 연대의 정서를 말로 풀어내지도 못하고 그냥 알타이로 오랜 시간의 친화와 동질성을 위로해 본다. 신을 불러올 신성도 사라진 시대, 단지 현재 지금 당장만 겨우 시각을 의지해 현상을 볼 뿐, 알타이로 함께 묶이는 어느 고대사 한 자락이 편안한 귀향의 또 다른 모습을 갖고 있을 거라 기대한다.

 

5.

마지막 장에서「나는 평화」라는 시를 놓고 중얼거린다. 평화는 시간이 완미하게 천천히 흐르는지도 모르게 흐를 때 찾아오는 손님이다. 놀고, 쉬고, 또 놀고, 즐거운 먹을거리를 사이도 두고, 또 영혼이 살아나는 이야기를 나눌 때, 내가 내다워질 그 때 비로소 내 중심이 자리를 잡고, 내가 왜 살아있는가를 몸으로 기쁘게 확인할 때, 그 한가함 가운데 내 길이 보이고 그 길을 언제나 한결같이 걸어갈 때, 그 자유로움 안에서 숨 쉬는 일을 시인은 평화라고 쓴다.

“혼자 누워 외로워도 사람이 그립지 않을 때 오직 나만을 슬퍼할 수 있을 때 그때 나는 평화이다.”외로움을 외롭게 감지하고 그 안에서 외로움을 읽어낼 때, 그때 시인의 평화는 찾아온다. 오직 혼자여서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을 앓는 내가 슬퍼함을 감지할 때, 그 안에서 평화가 온다고 시인은 쓴다. 오롯이 혼자 있기는 또 얼마나 힘든가. 혼자가 혼자가 아닐 때, 고요를 만들지 못하고, 어수선한 소음 속에 놓여야 할 때, 엉거주춤 섬으로 섬 옆에 있어야 할 때를 다 떠나보내고 혼자 남는 시간은 평화의 흐름이 이어진다. 그 시간을 살아낼 수 있는 공간이 몽골이었다 고백하는 글이다.

시인은 몽골을 찾아가 초원의 넓이로 숨결을 느끼며 바람을 맞고, 하늘의 높이로 별을 노래한다. 그러니 나를 위한 노래라고 하지만 바람에 맡겨둔 나는 이미 세상의 평화에 그냥 녹아든다. 몽골초원의 그 거침없는 바람, 절대 쉰 적이 없었던 바람의 시간을 시인은 평화의 시간으로 다시 썼다. 살아있음의 구차함에서 진지한 성찰에 이르기까지, 유년에서 노년까지 긴 호흡이 어떻게 각 마디마다 힘을 얻어 살아낼 수 있었던가를 보여준다. 어느 시기인들 온전한 자신의 의지로 결행하지 않은 시간이 있었을까만 몽골초원에서 바람의 말은 끝없이 이어진다. 초원의 바람이 건네는 말은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의지의 언어가 되어 다시 초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의지가 묻어있는 바람에는 시간이 보태져 텅 빈 충만을 부르는 바람길이 다시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