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1982년 고금중학교(전남 완도)로 첫 발령을 받았다. 지도를 보니 남쪽 끝 섬이었다. 이불 보따리 하나 들고 먼 길 나섰다.

광주행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에서 강진까지 직행버스를 타고, 강진에서 마량까지 비포장도로를 달려서 마량 선착장에서 고금도까지 철부도선을 타고 가교리 선착장에서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소재지에 도착하니 벌써 땅거미 지고 있었다.

교단생활 33, 되돌아보니 첫 발령지로 가던 하루처럼 짧기만 하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지나온 학교들이 징검다리처럼 놓여있다. 함께 했던 선생님, 아이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이 시집은 전교조 교사로 살아왔던 교단의 기록이다. 입시위주의 교육을 타파하고 교육민주화를 염원했던 시대의 에너지였고 학교를 학교답게 하고자 했던 검붉은 지층이기도 하다.

사실 처음 교육운동 할 때만해도 힘써 싸우면 옥죄는 교육모순이 곧 사라질 줄 알았다. 우리 아이들이 즐겁고 행복한 학교에서 꿈꾸는 세상을 열어갈 줄 알았다. 하지만 아직도 학교 현장은 변하지 않았다. 아직도 학교는 불야성이고 아이들은 대학 가는 동아줄에만 매달려 있다.

이 시집이 이루지 못한 자의 풀씨였으면 한다. 힘써 이루려는 자의 노래였으면 한다. 이 시집을 꿈꾸는 선생님들에게, 깨어있는 학부모들에게, 별 같은 우리 아이들에게 그리고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아이들에게 바친다.

 

 

최기종 약력

1956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국문과와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했고, 1989년 전교조 문제로 해직되었다. 1992년 교육문예창작회지에 「이 땅의 헤엄 못 치는 선생이 되어」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나무 위의 여자』, 『만다라화』, 『어머니 나라』, 『나쁜 사과』,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가 있다. 현재 교직을 떠나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


이루지 못한 꿈, 아직 길은 끝나지 않았다

 

박일환(시인)

 

 

1. 아이들에게 가 닿기 위하여

 

첫 발령지

완도군 고금도 

광주행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에서 강진까지 직행버스를 타고

강진에서 마량까지 비포장도로 달려서

마량에서 고금도까지 철부도선 타고서 거기

가교리 선착장에서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면소재지에 내리니

벌써 땅거미지고 있었다.

-「첫 발령지」 전문

 

선생님, 첫 발령을 참 먼 곳으로 받으셨군요. 버스와 버스를 거쳐 배로, 배에서 다시 버스로, 그렇게 갈아타고 또 갈아타며 찾아간 남쪽 바다 끝에 선생님을 기다리는 섬마을 아이들이 있었겠지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 뭔가 아련한 낭만이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선생님이 어떻게 교사생활을 하며 보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초임 시절이었으니 만큼 의욕도 충만했을 테고, 섬 마을 아이들과 알콩달콩 정을 나누며 지내지 않았을까 짐작해 볼 따름이지요. 물론 간간이 외로움도 찾아들었을 테고, 그럴 때면 바닷가를 거닐며 시를 생각하기도 했을 겁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풍경을 마음에 담으며, 자연과 일치된 혹은 되도록 자연 상태에 가까운 삶과 교육의 궁극을 꿈꾸기도 했을 테고요.

 

밤이 되면 텅텅 비지만

날이 새면

갈숲에서 솔숲에서 샛섬에서

크고 작은 생도들이 무리 지어

활강하며 내려앉았다.

달이 가고 해가 가도

날이면 날마다

바람이 바람을 낳고

노래가 노래를 낳는

그런 바닷가 학교가 있었다. 

-「바닷가 학교」 중에서

   

그런데 선생님, 저는 첫 발령지로 가는 먼 여정이 어쩌면 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참된 삶 속으로 들어가는 길의 요원함과 통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르친다는 건 아이들을 만난다는 것이고, 그러한 만남을 통해 교사와 학생 모두의 삶이 바뀌는 걸 전제로 해서 성립한다고 믿습니다. 교과서에 담긴 지식을 전달하는 게 교육의 본질이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겠지요. 아이들을 만나서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머리로 이해하고, 말로 사랑한다고 하는 거야 무에 그리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삶과 삶이 만나서 서로를 변화, 발전시킨다는 건 그런 표면을 벗겨낸, 한층 깊어진 관계를 형성하는 어떤 지점에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을 만나서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한 생을 걸어야 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야 겨우 제대로 된 교육이 추구하는 길의 한 자락을 부여잡을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선생님이 꿈꾸는 교육 혹은 교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다음과 같은 시에서 선생님이 품었던 생각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겠군요.

       

아이들을 은어 떼로 여겼더니

내린천에서 퍼덕거리는 은비늘로 여겼더니

내 썩은 가슴에서 새살이 돋아났다.

내가 강물이라고

아이들의 여린 등을 밀어주는

내가 잔잔한 강물이라고 다짐했더니

아이들의 등에서 지느러미가 자라났다.

이렇게도 빠른 불씨가 있을까

내가 강물이고 아이들이 은어 떼라고

두 손 모아 기도했더니

내 덧난 생채기 아물고

아이들이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

내린천이 봄물처럼 불어나고

아이들이 거친 바다를 꿈꾸었다.

아이들을 은어 떼라고

내가 강물이라고 여겼더니

하늘과 땅이 백지장 하나 차이였다.

-「은어 떼」 전문

 

‘아이들의 여린 등을 밀어주는’ ‘잔잔한 강물’과 같은 교사가 되고 싶다는 다짐을 하자 자신의 ‘썩은 가슴에서 새살이 돋아’나고, ‘덧난 생채기’가 아물었다고 했습니다. 교사라면 누구나 그와 같은 꿈을 꾸고 비슷한 경험을 했을 법합니다. 그런 치유의 힘이 교사의 길을 가는데 상당한 에너지를 제공해 주었으리란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 또한 어렵지 않게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학교 교육이란 게 교사와 학생이 일대 일로 만나는 관계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섬마을 학교라고 해서 교육청의 공문이 하달되지 않을 리 없고, 교과서에 진실만 담겨 있지는 않았으니까요. 또한 일류 학교 진학을 향한 부모들의 열망과 그런 계층 상승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해서 학교 교육을 통제하는 입시 체제 등 이른바 교육 모순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을 뚫어내지 않고는 제대로 된 교육을 향해 한 발짝도 움직이기 힘든 게 엄연한 사실입니다.

바닷빛처럼 푸르게 넘실댔던 청년 교사의 꿈은 종종 현실의 벽에 부딪치곤 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다른 길을 향한 모색의 시간을 갖기도 했겠지요. 그리고 운명처럼 교육운동의 길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의 많은 교사들이 걸어갔던 그 길 앞에서 고뇌하던 선생님은 마침내 함께 강물이 되어 흐르기로 마음을 먹게 됩니다. 그 길은 아이들에게 가 닿기 위한 먼 여정의 일부였으며, 새로운 방식의 만남을 시도하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2. 교육노동자의 길에 서서

 

1989528, ‘교사도 노동자다’라는 선언과 함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깃발을 올린 날입니다. 하지만 창립의 감격도 잠시, 가입한 모든 교사를 해직시키겠다는 문교부의 협박이 목을 죄어오기 시작합니다. 결국 탈퇴냐 해직이냐는 양자택일을 강요당한 끝에 1,500여 교사들이 학교에서 거리로 쫓겨나게 되지요. 이때부터 선생님도 교육노동자이자 교육운동가의 삶을 살기 시작하셨고요. 아이들에게 더 이상 거짓과 굴종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은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전교조 집회장에서 다 함께 부르는 <참교육의 함성으로>라는 노래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굴종의 삶을 떨쳐 반교육의 벽 부수고

침묵의 교단을 딛고서 참교육 외치니……

 

역시 해직교사 시절을 거쳐 온 저는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콧날이 시큰해지곤 합니다. 아마 선생님을 비롯해서 해직교사 경험을 가진 분들은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교육’ 세 글자를 앞세운 해직 교육노동자로 살기 시작하면서 가진 것은 없어도 마음만은 풍요롭고 자부심 넘치는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과거의 나를 벗고 이제는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아이들아!

이젠 가르칠 것 있구나

교과서, 참고서만이 아니라

옳은 것 옳다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이젠 세상을 가르칠 수 있구나

나를 가르칠 수 있구나

-「교육노동자」 중에서

 

‘옳은 것 옳다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달리 덧붙일 말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배교사이자 시인으로 활동하시던 김진경 선생님은 ‘가르치는 것은 싸우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그러고 보니 올해는 『민중교육』이라는 제목을 단 무크지가 세상에 나온 지 30년이 되는 해로군요. 지금 보면 별것도 아닌 내용을 다룬 책인데, 그로 인해 김진경 선생님을 비롯해 몇 사람은 감옥으로 끌려가고, 필자로 참여한 교사들은 모두 학교에서 쫓겨났지요. 다음 해에 있었던 5·10 교육민주화선언은 또 어땠습니까? 역시 많은 교사들이 쫓겨나고 저 멀리 백령도로 강제전출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거짓 교육을 버리고 참교육을 하겠다는 교사들의 뜨거운 열망이 전국교사협의회를 거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으로 이어진 것이지요.    

 

반공 웅변대회 하는 날에는

학생 연사가 무섭다.

누가 써 준 연설인지 몰라도

깊은 적개심 가지고

기관총 박격포 대포를 쏘아대고

금속성 전투기소리 요란하기만 하다.

멸공해서 통일하자는

날선 비수들이 가슴을 찌르고

솟구치는 울분들이 휘젓고 다닌다.

흙장난 하던 아이들도

“옳소! 옳소!

덩달아 박수를 쳐대니

우리들만이 죄인이다.

머리가 천근만근인

우리들만이

-「반공이라는 것」 전문

 

반공교육이 아닌 통일교육을 해야 하는 이유가 위 시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전교조 창립을 준비하던 무렵 문익환 목사님의 방북 사건이 있었고, 그로 인해 다시 반공 이데올로기가 극성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교실 뒤편에 백두산 천지 사진을 붙였다가 교장에게 곤욕을 치렀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동안 잘못 가르친 죄인으로서, 더 이상 그런 교육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죄가 되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도 한참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종북’이라는 말이 횡행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선생님, 그 무렵 전교조와 참교육을 지켜내겠다는 교사들의 열기는 대단했습니다. 정부의 탄압에 맞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결의를 다지며 명동성당에 모여 집단으로 단식투쟁을 하기도 했지요. ‘외딴 섬이 되어서/주린 교육이 되어서/땡볕더위 비바람과 싸’(「명동 단식」)우던 기억, 그리고 ‘학교를 떠나올 때/아이들이/2층 창가에 떼로 몰려/선생님! 힘내세요.(「종이비행기」) 소리치며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려주던 기억들이 오랜 해직기간을 버티게 해주는 힘들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이자 시인이고자 했던 선생님, 해직이 되면 시를 쓸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을 거라고 믿으셨다지요? 그런데 무너진 조직을 일으켜 세우고 복직투쟁을 하는 일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라서 오히려 시와 멀어진 시기였다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몸으로 버텨낸 시간들이 그냥 대책 없이 흘러가기만 한 것은 아닐 겁니다. 나를 통과해 간 모든 시간들이 새겨놓은 기억의 무늬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시간의 기억들이 새롭게 아이들을 만나고, 더 깊어진 시를 찾아 나서도록 부추기는 힘이 될 수도 있는 거겠지요. 어느 한 순간도 선생님의 마음이 아이들과 시를 버린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요.

 

3. 사라진 고래를 찾아나서는 길

     

복직을 하고도 선생님은 조직활동에 열심이셨습니다. 활동가 한 사람이 아쉬운 터에 한 번 들여놓은 발을 빼기가 어려웠을 테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을 겁니다. 현장에 복귀하고도 지회장 등을 맡아 동분서주하는 동안 건강을 해치기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지친 몸을 추스르기 위해 다시 외딴 섬으로 갔고, 거기서 새롭게 시를 만났다고 하셨지요. 그렇게 시는 찾아왔지만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입시는 아이들을 짓눌렀고, 경쟁 체제에 붙들린 아이들은 ‘머리 치켜들고/필살의 눈물로/필살의 웃음으로/필살의 동아줄을’(「하늘말라리아」) 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해직교사 시절이 더 나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싸워야 할 대상이 눈앞에 분명히 존재했으니 다 함께 어깨 걸고 앞에 놓인 전선을 밀고 나아가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복직 후에는 싸움의 양상이 다양해졌습니다. 싸워야할 대상으로 교실 안팎에서 부딪치는 일상이 추가되었고, 그 사이 부쩍 힘이 커진 자본의 공세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옛날처럼 노골적으로 거짓을 가르치라고 종용하는 일은 드물어졌지만, 대신에 은밀하고 교활한 신자유주의의 손아귀가 학교의 멱을 틀어쥐기 시작했습니다. 국제고가 생기고 외고가 늘어나더니 급기야 자사고라는 것까지 생겨나면서 서열에 따른 줄 세우기 교육이 굳건히 자리를 잡게 되었지요. 결국 물신(物神)과 경쟁이 지배하는 세상의 흐름에 아이들마저 깊이 침윤되어 갔고, 자연히 저항보다는 순응을 체화한 아이들이 교실을 채우고 있는 형국입니다.

잠시 대비되는 교실 풍경을 다룬 두 작품을 함께 놓고 살펴볼까요?

 

우리아이들이 나의

편백나무라는 걸 몰랐네.

교실이 피톤치드 내뿜는

편백나무 숲이라는 걸 몰랐네.

새로이 허파를 달고

숨을 길게 주다 보면

가지마다 등롱이 흔들렸네.

새로이 눈을 달고

눈을 펑펑 쏘다 보면

아이들의 머리 위로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네.

날마다 만나는 아이들이

새떼처럼 날아오는

솔향이라는 걸 몰랐네.

내 찾던 꽃밭이라는 걸 몰랐네.

-「교실에서 2」 전문

 

가르치다 보면

아이들이 미워질 때도 있다.

가르치다 보면

울화가 치밀고 작아져서

때려 치고 싶을 때도 있다.

사랑하고 이별하는 것만 아픈 줄 알았는데

잡아 앉히고 가르치는 게 더 아플 줄이야

지적하고 톤을 높이는 게 더 아플 줄이야

아이들은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아이들이 아니다.

아이들은 이제

비틀거리는 아틀라스 거인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도 예전처럼

교탁을 내리치면서 떠들지 말라고 졸지 말라고 지각하지 말라고

일방통행 명령어만 남발해야 하니

이렇게 고무줄만 팽팽하게 붙잡고 있어야 하니

한 달이 아득하고 하루가 멀기만 하다.

선생도 사람이다.

어제의 교실에서

내일의 깃발을 올려야 하는

이 땅의 선생도 사람이다.

-「선생도 사람이다」 중에서

 

두 작품의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지요? 교실은 ‘피톤치드 내뿜는/편백나무 숲’일 때도 있지만 악다구니 들끓는 도떼기시장이거나 엎드려 잠이나 자는 숙소로 전락할 때도 많습니다. 교실 안에서 사랑과 우애가 아주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런 풍경이 점점 밀려나고 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시집 안에는 「선생도 사람이다」 처럼 선생살이의 고달픔과 힘겨움을 토로한 작품이 여럿 보입니다. ‘어깨를 넘어오는 아이들이 미워지고/거듭되는 일상이 지겨울 때가 있’(「기침소리」)으며, ‘아이들의 축구공이나 되어서/이리저리 뻥뻥 차일 뿐’(만만한 선생)인 초라한 교사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선생님의 이러한 고백이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을 세상의 거대한 악으로만 설정해서는 이 세상 밖으로 나가는 출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일상의 소소함 속에 숨어서 우리들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리는 것들을 제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고 이별하는 것만 아픈 줄 알았는데/잡아 앉히고 가르치는 게 더 아플 줄이야’라고 하는 인식이 있어야 지금의 현실에서 한 발짝이라도 더 떼어놓을 수 있을 겁니다.

선생님,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그 고래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모양입니다.  

   

학교에서 고래는 사라졌을까?

고래를 찾는 아이들의 눈들이

외눈박이 집어등이 되어서

장생포구를 환하게 밝혔지만

어디에고 고래는 보이지 않는다.

고래는 다 어디로 갔을까?

어른들이 마구 포획해서 씨를 말렸다고도 하고

크릴새우를 따라서 남극으로 갔다고도 했으나

아이들은 고래를 기다렸다.

 

학교에서 고래는 사라졌을까?

고래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눈들이

청어 떼가 되어서

저 멀리 수평선까지 넘나들었지만

고래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 아이들은 고래를 탈 수 없을까?

 

학교에서는 고래가 산다는데

아이들의 난바다에는

물을 품는 고래가 있다는데

어디에고 고래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고 그리운 남방은 보이지 않는다.

 

책상에 엎드린 아이들이

고래소리를 타전한다.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 전문

 

교실에서 꿈을 잃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건 분명 괴로운 일이지요. 고래는 끝내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책상에 엎드린 아이들이’ ‘타전’하는 ‘고래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아이들을 태우고 갈 고래를 불러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이 땅의 교사와 어른들 몫이겠지요. 물론 현실은 암담합니다. 그럼에도 ‘유리창을 닦’듯 ‘푸른 세상 덧칠하고 덧칠’(「유리창」)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아이들의 참된 삶 속으로 한 발씩 들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4. 같으면서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

 

선생님, 지난해에 33년 간 이어온 교사생활을 접으셨으니 선생님이 이루고자 애썼던 꿈들은 이제 후배들의 몫이 되었군요. 그 동안 선생님을 버티게 해 준 힘은 점점 망가져 가는 이 나라의 교육을 조금이라도 바꿔보고자 했던 열망에서 비롯된 것도 있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을 겁니다.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이 없었다면 교사로서의 존재 의의 자체를 찾지 못했을 테니까요.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참 다양합니다. 맞춤법이 틀렸다고 점수를 깎는 게 어디 있느냐며 따지는 수남이도 있고, 학급에서 기르던 금붕어가 죽었다고 눈물을 뚝뚝 떨구는 단발머리 소영이도 있고, 도둑으로 몰린 게 억울해서 한 달간 결석했다 돌아온 한은경도 있고, 자퇴를 면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고 떠나보낸 강수자도 있고, 선생님 실내화가 낡았다며 몰래 새 실내화를 갖다 놓는 채미선도 있지요.

그 모든 아이들이 어울려 이루어내는 풍경 속에서 선생님은 때론 웃음 짓고, 때론 자책을 하고, 때론 껄껄 웃기도 했겠지요. 학교를 떠나는 순간에 수많은 얼굴들이 스쳐갔을 텐데, 가령 다음과 같은 시를 읽고 있노라면 어린 나이에 지고 가야 할 삶의 무게가 전해져 저 역시 가슴이 아려옵니다.

   

네가 보낸 편지

또박또박 써내려간 글씨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한다고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잔다고

그런데 나는 네가 가엾기만 하다.

상습 폭행하는 홀아버지 피해서

부산 산업체학교 간 네가

‘그려 핵교도 잘 댕긴다는디’

나는 네가 아프기만 하다.

학비도 대주고 숙식도 제공한다지만

공장일이 얼마나 힘들까

그 먼 타지에서 얼마나 외로울까

또박또박 써내려간 글씨에서

묻어난다. 깊은 정

네가 보낸 만년필로

답장을 한다. 꾹꾹 눌러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그리운 건 품고 가는 거라고

-「김신순」 전문

 

교사가 아이들의 삶을 책임져 줄 수는 없는 일이지요. 다만 작은 바람막이나 잠시 기댈 수 있는 언덕은 되어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서로 고단하고 힘겨운 삶을 이겨나가야 하는 거 아닐까요? 잘못된 교육 정책을 바로잡는 일도 중요하지만, 시름에 빠진 아이에게 썰렁한 농담이라도 건네면서 웃음을 찾아주려고 애쓰는 것, 그게 바로 교사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네가 막 입학했을 때

활기찬 웃음이 좋았다.

환경정리 계획을 세워서는

“결재를 바랍니다.

당당하게 다가올 때

내 마음은 흐뭇했다.

그런 네가

중간고사 끝나고부터

웃음도 자신감도 사라졌다.

말수도 줄어들고 멍땡이가 되었다.

 

“주라야, 나 좀 주라.

“뭘요?

“그것, 배시시 웃는 주라 좀 주라.

“선생님, 장난해요? 남 죽겄는디.

-「양주라」 전문

 

중간고사를 없애줄 수는 없지만 주라에게 농담이라도 걸어서 웃음을 되찾아주려는 선생님의 마음이 잘 전해져 옵니다. “선생님, 장난해요? 남 죽겄는디.”라고 했던 주라도 아마 선생님의 마음을 충분히 받아 안았을 겁니다.   

저는 이번 시집에서 이렇듯 선생님과 아이들 사이에 있었던 일화들을 갈무리한 시편들이 참 좋았습니다. 총체성도 중요하지만 그 총체성이란 것도 실은 하나 하나의 개별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때, 구체성을 띠고 다가오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목소리가 소중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전체로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닌 개별자들의 삶이야말로 주목받아 마땅한 소우주들일 테니까요. 아이들의 이름을 시 제목으로 삼았듯 나에게 다가왔던 얼굴과 목소리를 놓치지 않는 것, 거기서 공감을 이끌어내는 생동감이 생겨나는 거라고 믿습니다.

 

5. 진실이라도 돌아오라

 

몇 년 전 저와 함께 제주도로 가는 배 안에 있었던 것, 기억나시지요? 강정마을을 살리고 구럼비의 파괴를 막기 위한 평화대행진에 참여하기 위함이었지요. 목포에서 교육문예창작회 모임을 마치고 아침에 서둘러 목포항을 찾아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며칠에 걸쳐 한여름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걸으며 우리는 무엇을 생각했던 걸까요? 생명, 바로 그것 아니었을까요? 구럼비조차도 신성이 깃든 생명체임을 생각하며, 구럼비가 내지르는 신음소리를 외면할 수 없어 찾아간 길이었던 거지요.

우리가 다녀온 제주로 가는 바닷길, 그 길을 미처 다 가지 못하고 차가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버린 어린 영혼들이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416일 이후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멈춰 버렸습니다. 다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진상 규명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정부는 막무가내로 버티며 유가족들의 눈물을 닦아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진실을 은폐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선생님,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뒤 어떤 선배교사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이 나라에서 선생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걸 생생하게 깨닫게 되었다고요. 누구 못지않게 이번 참사에 교사들이 충격을 받았고, 그건 선생님도 마찬가지였을 테지요. 내가 가르치는 학교의 학생들이 아니라고 해서 책임을 비껴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대한민국을 이 지경으로 만든 모든 어른들이 죄인이듯, 꽃다운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잘못된 교육에 동참하거나 방관한 교사들 역시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이건 가르쳐야 하는데

차마 가르치지 못한 게 있다.

이건 알려줘야 하는데

차마 알려주지 못한 게 있다.

누구의

눈치를 보아서도 아니다.

이해가 얽혀서도 아니다.

위험한 물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추운 눈발 속으로 내몰고 싶지 않았다.

그게 책상을 뒤집는 것이라서

그게 교실을 버리는 것이라서

차마 가르칠 수 없었다.

차마 알려줄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

가만히 있지 말라고

바닥에서 어서 탈출하라고

그렇게 가르쳐야 하는데

그렇게 알려줘야 하는데

아무래도

학교를 깰 수는 없었다.

세상을 깰 수는 없었다.

-「차마 가르치지 못한 것 – 세월호 참사 30일」 전문     

               

선생님 말씀처럼 학교와 세상을 깨지 못한 죄가 큽니다. 후회는 언제나 뒤늦은 법이지만, 이제라도 제대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보상금 액수를 흘리며 돈으로 진실을 덮어버리려는 세력은 이제 그만하자고 말합니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어서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에게는 아직 돌아갈 일상이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만 눈물 거두라고 한다.

이제 그만 제자리 찾아가라고 한다.

이 눈물 쉽게 거둘 수 있는 거라면

백 번 천 번 그리하겠는데

그 자리 원대로 돌아갈 수 있는 거라면

어절씨구 그리하겠는데 아직은

아이들이 아파서

아이들이 떠돌아서

이 눈물 거둘 때가 아니라고 한다.

이 슬픔 달랠 때가 아니라고 한다.

-「아직은 눈물을 거둘 때가 아니다-세월호 참사 140일」 중에서

 

정말로 아직은 아니지요. ‘눈물 거둘 때’도, ‘슬픔 달랠 때’도 아직 오지 않았지요. 밝혀진 진실이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하는 집회에 나가니 한 목소리로 ‘진실을 인양하라’는 구호를 외치더군요. 그래요. ‘물살 치는 맹골수도/수장된 아이들/어서 돌아오라고/풍등 하나 띄’우는 마음(「풍등 하나-세월호 참사 100일」)을 간직함과 동시에 진실을 인양하기 위한 싸움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시집의 마지막 작품 제목이 「진실이라도 돌아오라」 로 되어 있군요.

새삼 진실이라는 말의 무게를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껏 감추려는 자, 회피하려는 자들이 지배해 온 세상에서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싸움은 늘 패배하는 듯 보였습니다. 선생님이 교단에서 쫓겨나면서까지 외쳤던 것들도 결국은 거짓을 버리고 진실을 구하기 위한 목소리였습니다. 그렇게 목소리 높여 외쳤건만 여전히 학교는 억압의 상징으로, 체제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떠받치는 도구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진실을 향한 싸움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포기하는 순간 스스로의 삶을 버리고 노예의 길을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눈물의 힘을 믿으며 우리는 다만 우리의 길을 갈 뿐입니다.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의 곁에 한 발짝이라도 가까이 가기 위해서 말이지요.    

선생님은, 이제 교단을 떠나셨으니 아픈 이웃들이 있는 새로운 현장을 찾아 바쁜 발걸음을 옮기고 계시겠군요. 거기서 다시 뜨거운 언어를 길어올리시기 바라며, 어느 자리에서건 변함없이 강건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