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필

 

비 오는 날이면

분필이 잘도 부러진다.

눌러 쓰는 버릇이 있는 나에게

분필은 조심스런 존재다.

 

분필의 생애는 짧지만

그 쓰임에 따라서

수명이 길어지기도 한다.

딸각발이 딸각딸각 걸어가듯이

써레질 논에 모 심어 나가듯이

분필은 몸보시로 길을 낸다.

 

분필은 백악질 어둠이지만

미망을 깨치고 파안을 만나서

창공을 나는 새가 되기도 한다.

()바다에서 나비가 춤추듯이

벌겋게 참꽃들이 피어나듯이

분필은 침묵에다 빛을 뿌린다.

 

봄날, 졸음이 오면

분필의 행각은 더욱 조심스럽다.

()이 청동경으로

지난 세기의 환영들 보여주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뚝 부러져서

날으는 화살이 되기도 한다.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

 

학교에서 고래는 사라졌을까?

고래를 찾는 아이들의 눈들이

외눈박이 집어등이 되어서

장생포구를 환하게 밝혔지만

어디에고 고래는 보이지 않는다.

고래는 다 어디로 갔을까?

어른들이 마구 포획해서 씨를 말렸다고도 하고

크릴새우를 따라서 남극으로 갔다고도 했으나

아이들은 고래를 기다렸다.

 

학교에서 고래는 사라졌을까?

고래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눈들이

청어 떼가 되어서

저 멀리 수평선까지 넘나들었지만

고래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 아이들은 고래를 탈 수 없을까?

 

학교에서는 고래가 산다는데

아이들의 난바다에는

물을 품는 고래가 있다는데

어디에고 고래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고 그리운 남방은 보이지 않는다.

 

책상에 엎드린 아이들이

고래소리를 타전한다.

 

 

 

은어 떼

 

아이들을 은어 떼로 여겼더니

내린천에서 퍼덕거리는 은비늘로 여겼더니

내 썩은 가슴에서 새살이 돋아났다.

내가 강물이라고

아이들의 여린 등을 밀어주는

내가 잔잔한 강물이라고 다짐했더니

아이들의 등에서 지느러미가 자라났다.

이렇게도 빠른 불씨가 있을까

내가 강물이고 아이들이 은어 떼라고

두 손 모아 기도했더니

내 덧난 생채기 아물고

아이들이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

내린천이 봄물처럼 불어나고

아이들이 거친 바다를 꿈꾸었다.

아이들을 은어 떼라고

내가 강물이라고 여겼더니

하늘과 땅이 백지장 하나 차이였다.

 

 

 

농부와 교사

 

교사가 농부에게 말했다.

농부들은

곡식 자라는 재미가 있어서 좋겠다고

씨앗 뿌리고 싹이 나고 자라서 결실을 맺어서 좋겠다고

줄다리기 하며 싸울 필요도 없이

정직한 흙에 땀 흘릴 수 있어서 좋겠다고 했다.

 

농부가 말했다.

교사들은

아이들 커 가는 재미가 있어서 좋겠다고

손 잡아주고 불 밝혀서 큰 바다로 인도해 줄 수 있어서 좋겠다고

자연재해도 인재도 겪지 않고

지혜의 숲에서 열변을 토할 수 있어서 좋겠다고 했다.

 

교사가 말했다.

교육현장이 예전과는 다르다고

교사는 교사대로 가르치는 것만 있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배우는 것만 있어서

하루해만 바라본다고 했다.

 

농부가 말했다.

농자천하지대본이 흔들린다고

농군은 농군대로 기르는 것만 있고

정책은 정책대로 내리는 것만 있어서

먼 하늘만 바라본다고 했다.

 

교사나 농부가 말했다.

가르치고 기르는 것이

잘못되어서

세월만 기다린다고

하늘만 쳐다본다고 했다.

 

그래도 커 가고 자라는 재미는

서로 놓지 말자고 했다.

 



 

장래희망

 

아이들의 꿈에는

도무지 땀 흘리는 게 없다.

땡볕에서 얼굴이 시꺼멓게 타는 건

도무지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손에 물을 묻히거나 기름밥 먹는 건

작업복 걸치고 먼지 뒤집어쓰는 건

도무지 격에 맞지 않는다고

농부가 되고 어부가 되고 화부가 되는 꿈

석공이 되고 목수가 되고 잡역부가 되는 꿈

도무지 돈이 되지 않는다고

그래도

의사가 되거나 법관이 되거나

책상에 앉아서 펜대를 굴리거나

아이들의 꿈에는

도무지 흙을 묻히는 게 없다.

도무지 함께 가는 게 없다.

밑바닥이 되는 꿈

다리가 되고 허리가 되는 꿈

세상을 눈물로 색칠하는

노동자는 보이지 않는다.

 

 

 

종이비행기

 

학교를 떠나올 때

아이들이

2층 창가에 떼로 몰려

선생님! 힘내세요.

(꼭 돌아오세요, 다시 만나요, ㅠㅠ, ;;)

아이들이 공중을 날아서

내게로 왔다.

언 몸 풀어주는 바람이었다.

()이 되게 하는 바람이었다.

교정의

나뭇가지에도 피가 돌고

, 단단한 교실이 흔들렸다.

 

 

 

하늘말라리아

 

숲속의

작은 아이들이

하늘에서 살려고

하늘계단 오른다.

서로 먼저 오르려고

어깨로 밀치면서

몸뚱이 길게 늘이고

용을 쓰면서

하늘계단 오른다.

머리 치켜들고

필살의 눈물로

필살의 웃음으로

필살의 동아줄을 탄다.

숲속의

하늘말라리아 아이들이

 

 

 

고구려를 배우는 시간

-철새 도래지에서

 

나도 너희 속에 들고 싶다. 너희들과 나란히 물살도 짓고 자맥질도 하고 깃털도 쪼아주고 장난도 치고 싶다. 틀림없이 너희들은 머나먼 북방에서 찾아 왔을 거다. 너희들이 외치는 소리 소리에서 그 옛날 고구려적 호기를 느낀다. 틀림없이 시베리아를 지나서 몽골, 만주벌판을 가로질러 내려왔을 거다. 너희들이 몰고 온 눈보라 속에서 내 잊었던 고향의 냄새가 난다. 짙푸른 바이칼호수가 출렁이고 동으로 레나강이 흐르고 슈쉬키노 석벽에서 제천의식하고 순록을 쫓아 말 달리던 곳,

 

틀림없이 너희들 내 부족의 혼령을 받아 여기까지 왔을 거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머릿속 자기장을 펼치고는 광활한 국경을 넘어 왔을 거다. 먹구름에 휩싸여도 돌풍에 휘말려도 어김없이 따뜻한 땅으로 날아 왔구나. 북방색으로 무장한 너희들에게서 내 그리운 유목의 냄새가 난다. 틀림없이 너희들 일흔섬의 샤만이었을 거다. 틀림없이 코리족의 후손이었으며 오색 당기였을 거다. 너희들 비상하는 날갯짓에서 내 잊었던 옛날의 바람 냄새가 난다.

 

동으로 동으로 몰아치던 동이의 자손처럼 너희들 하늘에서 거침없이 군무를 추는구나. 수십만 편대를 이루고 까마득히 멀어졌다가 불현듯 되돌아오고 문득 청천을 가리다가 새 ‘밝’을 열기도 하는구나. 나도 너희들 속에 들고 싶다. 너희들과 나란히 저 하늘 끝까지 날아가고 싶다. 말발굽소리 요란하게 저 노을 속으로 진격하고 싶다. 내 호령하던 옛날의 수만 년 전 암각이 되살아나고 국경선 너머 광활한 평원이 펼쳐지는구나. 지금은 고구려를 배우는 시간, 내 잊었던 제국의 냄새가 난다.  

 

 

 

풍등 하나

 

어머니,

풍등 하나 띄운다.

물살 치는 맹골수도

수장된 아이들

어서 돌아오라고

풍등 하나 띄운다.

 

허리 굽은 어머니,

고체연료 되어서

푸른 불 타오르다 보면

풍등 하나 하늘 높이 오르려나

이렇게

눈이 빠지고

목이 빠지고

물이란 물 다 빠지면

풍등 하나 멀리곰 빛추려나

 

바람 부는 팽목항

이렇게 곡비 되어

소원하고 소원하면

풍등 하나 어두운 바다 노을 지려나

이렇게

굽은 깃발 날아가고

굽은 노래 날아가면

풍등 하나 물 아래 깊어지려나

풍등 하나 만인의 소원이 되는 것인가

 

 

 

이불 한 채 보내노라

 

이불 한 채 지어서

보내노라

한숨으로 솜을 틀고

눈물로 베를 짜서

이불 한 채 보내노라

이것 고이 덮으면

깊은 바다 속이 춥지 않겠지

이것 고이 덮으면

드센 물살도 무섭지 않겠지

옥양목 볕에다 숭숭 널어서

풀물 들이고 발로 꼭꼭 밟아서

이불 한 채 보내노라

이것 고이 덮으면

허허벌판도 아늑해지겠지

이것 고이 덮으면

노자 없이도 쉬이 갈 수 있겠지

집집이 다듬이질 소리

집집이 시침질 누비질 공고르기

이불 한 채 보내노라

이것 고이 덮으면

무기력한 어른들 용서가 되겠지

이것 고이 덮으면

무책임한 대한민국도 품어 줄 수 있겠지

다시는 이런 아픔이 터지지 않도록

한 땀 한 땀 금으로 수를 놓아서

이불 한 채 보내노라

이것 고이 펴지면

눈물도 한숨도 가시겠지

너희들, 하늘의 빛나는 별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