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마음 한 귀퉁이에

소를 키운 지 어느새 30년이 넘는다.

아내와 함께한 시간보다 길다.

그런데,

소를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


소는,

삶이었고, 한편

우울이었다.


2015년 봄에

오형근




1955년 서울 출생. 1978년 《시문학》 주최 전국대학문예 시 당선, 1988년《불교문학》과 《불교문예》로 등단. 시집 『나무껍질 속은 따뜻하다』, 『환한 빈자리』, 『소가 간다』 등이 있음




소의 비유를 통한 자아 찾기

― 오형근 시집 『소가 간다』

 

안현심(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기

 

  오형근 시인은 계간 ≪불교문예≫로 20044월에 필자와 같이 등단한 등단 동기이다. 인사동 조계사의 현대불교문학상 시상식장에서 신인상을 수상할 당시 혜문스님과 손진수, 오형근이라는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후 혜문스님은 국외로 밀반출된 문화재 찾기 운동에 전념하는 것을 텔레비전을 통해 알게 되었고, 손진수 시인 또한 만나지는 못하지만 시 쓰기에 최선을 다하리라고 생각한다. 세 사람의 등단 동기 중 유일하게 교류하는 사람이 오형근 시인이다.

  오형근 시인은 말수가 적고 사람 앞에 나서기를 싫어해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사람이다. 중등 교단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며 체득한 정직성과 치밀함은 소리도 없이 큰일을 해내는 장점이 되어 현대불교문인협회의 사무국 일을 빈틈없이 해내기도 하였다. 그의 성실함은 유난히 작은 눈과 연계되어 내게 각인된 이미지이다. 우리는 협회의 주요 행사에서 맡은바 일을 수행하면서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오형근 시인의 이번 시집은  연작 46편과 無題」 연작 1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왜 ‘소’와 ‘無題’인가? 」를 연작으로 쓰게 된 것은 소가 지닌 함의들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를 닮고 싶은 간절함이 소의 생태미학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형상화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無題’는 또 무엇인가. 무제는 제목을 붙이지 않겠다는 것인바, 이것은 곧 있음이 없음이요, 없음이 있음이라는 불교적 가르침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한다. 구태여 시에 제목을 붙일 필요가 있겠느냐는 ‘비움’의 철학이 반영된 것이다.

 

 

2. 소의 비유를 통한 자아 찾기

 

  심우도는 인간의 본성을 소로 비유하여 목동이 잃어버린 소를 찾는 과정을 열 단계로 그린 선화(禪畵)이다. (본성)를 찾기 위해 산속을 헤매던 목동은 마침내 도를 깨닫게 되고, 마침내는 이상향에 도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많은 동물 중에서도 소를 인간의 본성에 비유한 이유는 무엇일까.

  서정주는 마지막 시집 『80소년 떠돌이의 시』에서 황소를 이렇게 형상화하고 있다. 내 어린 눈에 처음 뜨인 이 나그네는/ 아주 점잔하고 깨끗하고 믿음직해서/ 우리 집의 누구보다도 더 어른다워 보였다./ 여름밤엔 마당가의 모깃불 옆에서/ 풀을 먹으며 새김질을 하다가는/ 한숨을 후우 내쉬었는데/ 이것은 할머니 것보다도 훨씬 크고 높아서/……/ 그가 사실은 우리 집 주인인 것만 같았다./ 이 세상 사람들과 가축들 중에서/ 가장 구리지 않은 푸른똥을 누던 소”(「우리 집의 큰 황소」).

  서정주의 증언에 의하면, 할머니는 집안을 일으켜 세운 장본인으로서 집안사람 모두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시 「우리 집의 큰 황소」에 등장하는 황소는 할머니의 권위보다도 높은 자리에 위치한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구리지 않은 푸른똥을 누는 동물로 환기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서정주뿐만 아니라 그 시대 대부분 사람들의 공통된 인식이었을 것이다. 산업화 이전의 농경사회에서 소가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은 대단했는바, 농사일을 도우며 삶의 희비를 나누는 가족의 일원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의 이러한 인식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소의 비유를 탄생시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리움마저

죄가 될 줄이야

 

누렇게 타버린 소

 

― 「소 1」 전문

 

  한국의 토종 소는 검정색과 누런색이 호피무늬처럼 얼룩진 ‘칡소’였다. 박목월이 1930년에 작사한 동요 ‘얼룩송아지’에서의 ‘얼룩소’도 칡소를 지칭한 것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토종 한우의 씨를 말리고자 누런 소를 권장․보급시켰다고 한다. 이 사실을 말해주는 이 없으니 후대 사람들은 누런 소를 한우라고 믿으며 살아왔고, 우리의 정서 깊은 곳 역시 누런 소가 차지하게 된 것이다.

  60~70년대 아이들은 학교에 다녀오면 소꼴을 베기도 하고, 소를 몰고 다니며 풀을 뜯겼다. 담력이 센 아이들은 소잔등에 올라앉아 호기를 부리기도 했는데, 그러한 모습은 한 폭의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인용시가 형상화하는 “그리움마저/ 죄가 될 줄이야”에서의 그리움은 그런 종류의 그리움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생성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움을 사전적으로 해석하면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이라고 정의된다. 여기서 그리움의 대상을 자칫 ‘사람’으로 한정할 수 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지적인 욕구에 대한 갈망, 이상세계에 이르고 싶은 소망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감정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이때의 기다림은 그리움으로 환기될 수 있다. 따라서 유한하고 결핍된 인간에게 그리움은 숙명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시인은 왜 그리움마저 죄가 된다고 형상화했을까. 그리워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마음이다. 따라서 비움()을 추구하는 종교적 관점에서 생각하면 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비운다는 생각마저도 비워야 하는 진리 추구의 과정에서 인간은 늘 죄인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은 누렇게 타버리고 말았다. 소의 털빛을 누렇게 타버린 부끄러움으로 환기한 것이다.

 

소의 눈은

 

노승만이

낚싯줄 드리울 수 있는

 

호수

 

― 「소 9」 전문

 

  유사 이래 시인들은 크고 맑은 눈을 호수에 비유해왔다. 소는 유난히 크고 순박한 눈빛을 지니고 있다. 마음속에 티끌이 있는 사람은 만들어낼 수 없는 맑고 평온한 호수이다. 이렇게 맑고 깊은 호수에 누가 감히 낚싯줄을 드리울 수 있으랴. 평생을 수행 정진해온 노승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이 시는 절차탁마의 흔적이 깊다. 소 눈을 ‘노승만이 낚싯줄 드리울 수 있는 호수’라고 은유한 기교가 참으로 눈부시다. 소 눈을 ‘호수’라고 형상화할 사람은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승만이 낚싯줄 드리울 수 있다’는 형상화는 오형근만의 사유라고 장담할 수 있다. 소에 대한 깊은 천착이 없었다면, 그리고 자신에 대한 오랜 성찰이 없었다면 결코 표현해낼 수 없는 형상화이다.

 

선한 의지도

때가 아니면 꺾이는구나

 

벼락 맞은 못난 소의 뿔

 

 ― 「소 14」 전문

 

  앞에서 기술했듯이, 소는 불교적․도교적 관점에서 많은 의미를 함의한 동물이다. 그처럼 신성하고 선한 동물이 벼락을 맞는다는 상상은 꿈에서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은 소의 뿔이 뭉그러지고 비뚤어진 것이 벼락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형상화하고 있다. 벼락하고 거리가 먼 소가 벼락을 맞았다는 형상화는, 선한 의지도 때가 아니면 꺾일 수밖에 없다는 형상화와 대응을 이룬다.

  삶이란 예측할 수 없는 길이다. 의지를 세웠다고 해서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착한 일을 했다고 하여 부자가 되거나 권위 있는 사람이 되지도 못한다. 누가 삶 앞에서 장담하며 큰소리칠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우리는 때로 기뻐하고, 때로는 좌절하면서 삶이라는 고해의 강물을 건넌다. 시인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희로애락을 겪으며 삶을 견인해왔을 것이다. 그러한 절망감이 “선한 의지도/ 때가 아니면 꺾이는구나”라는 형상화를 낳은 것이다.

  결코 길지 않은 시구에 깊은 절망과 탄식과 슬픔이 내재되어 있다. 선한 의지로써 뜻을 세웠으나 때를 잘못 만나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악한 사람을 징벌한다는 벼락까지 맞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여기서 벼락 맞은 소는 시인 자신이다. 뜻을 세웠으나 여지없이 뭉그러지고 만 시인의 자존심이 못난 소의 뿔로 환기된 것이다. 자신이 못났다는 사실을 여실히 들여다볼 때처럼 참담하고도 부끄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소가 간다

눈 감고 간다

감아야

길 환하게 보인다

 

아파서

잘 보이는

 

― 「소 41」 전문

 

  생물체에게 눈은 세계, 즉 타자를 조망할 수 있는 기관이다. 눈이 볼 수 있는 대상은 사물이거나 더욱 확대하자면 자연이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불가시의 세계, 영혼의 세계까지 볼 수 있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사색한다는 것이고, 사색에 들어가면 불가시 세계의 온갖 물상과 마음들이 보인다. 물리적 세계의 모습은 눈을 떴을 때 볼 수 있지만, 삶의 길은 눈을 감고 명상에 들었을 때 더욱 훤하다.

  눈을 감아야 길이 훤하게 보인다는 형상화와 함께 “아파서/ 잘 보이는/ 길”이라는 형상화는 애상을 자아낸다. 아파보지 않은 사람, 즉 시련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삶의 깊이를 인지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삶의 깊이는 직접체험으로만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절절하게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슬픔이 승화되어 만든 길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한이 승화되었을 때만이 열리는 사람의 길, 해탈의 길에서 만나는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훤할 것이다.  

 

 

3. 제목 없는 시

 

  시에 일일이 제목을 붙여야 한다는 것은 곤혹스러움을 낳기도 한다.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피력하면 되었지, 꼭 제목을 붙여야만 하는가. 선대의 시인들도 ‘무제’라는 제목 하에 시를 쓴 사람이 많다. 그들이 ‘무제’라고 이름붙인 시를 살펴보면, 형식적인 측면이나 내용적인 측면에서 시가 요구하는 규정을 벗어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시론이 요구하는 긴장이나 함축, 상징, 이미지, 비유 등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형근의 『무제』 연작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잘, 밀봉되어있어서난살아갈수있네내안의험악한생각들나도놀라고마는끔찍한상념들이겉으로는나타나지않아남들은눈치채지못하네그것들내밖으로터져나오기만하면으 으으, !

  나는늘감사하고있네.

  흐흐웃네.

 

          ― 「무제 3」 전문

 

  인간은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닌 채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특수한 상황에서 선이 활성화되면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고, 악이 활성화되면 나쁜 사람으로 평가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특정한 가면을 쓰고 있을 때라도 내면에 잠재해 있는 본능의 얼굴을 자신은 적나라하게 인지할 수 있다. 그래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꼭꼭 숨겨놓고는 그 험악함의 위력에 흠칫흠칫 놀라기도 하는 것이다. 이 시는 내면에 들어찬 사악함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띄어쓰기까지 무시하고 있다.

  속내를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시는, 잘 밀봉된 내면에 감사해하다가도, 그것들이 터져 나오는 순간을 상상하면서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남들을 완벽하게 속였다는 생각에 이르면 음흉한 웃음을 짓기도 한다. 적당한 가면은 인간생활에서 꼭 필요하다. 때와 장소에 어울리게 가면을 썼을 때 교양 있는 사람, 예의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때와 장소를 안 가리고 본능이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면 세계의 질서는 파괴되고 말 것이다.

 

  자살한 사람이 남겨 놓고 간 개를 구조했다는 소식을 듣고 엉뚱하게도 오래전에 일기장들을 태울 때 남겨 놓은 그 일기장을 마저 태워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은근슬쩍.

 

― 「무제 10」 전문

 

  유품은 기려야 할 유품이 있는가 하면, 남기지 말았어야 할 유품이 있다. 자살한 사람이 두고 간 개는 주인을 잃고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을 것이다. 요즘은 동물보호단체의 구조 활동이 활발하여 많은 유기견이 구조되지만, 방치된 개들의 야생에서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시에 등장하는 개는 남기지 말았어야 할 유품이 아니라, 죽지 않고 책임졌어야 할 가족이었다. 시인의 상상력은 엉뚱하게도 태우다 만 일기장을 마저 태워야겠다는 데 이른다. 남은 일기장이 산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가 될는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한때 자신의 진솔한 삶을 기록한 일기장이 남은 사람들에게 동일한 의미로 남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 시를 읽으며 소중하게 간직했던 일기장을 태운 기억이 떠올랐다. 꼭꼭 싸맨 보따리를 어머니께 맡겨놓았다가 끝내 안심이 안 되어 마당가에 쪼그리고 앉아 태웠던 기억. 죄 지은 일도 없이 죄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부른 참극이었다. 시인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일기장을 태우려고 하지 않았을까.

 

 

4. 나가기

 

  오형근 시인은 불심이 깊은 사람이다.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시집의 제목 『소가 간다』는 아주 그다운 발상이라고 하겠다. 소는 걸음걸이가 여유롭고, 속세의 티끌이 묻지 않은 순박한 눈을 지니고 있다. “마음 한 귀퉁이에 소를 키운 지 30년이 넘는다.”고 말하는 소, 오형근. 그가 천착해가는 삶의 길이 시작품으로 형상화되어 빛을 발한다.

  소가 가는 길, 이것은 오형근 시인의 길일 뿐만 아니라 진솔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길일 것이다. 소와 함께 걸어가는 시인의 길이 훤하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