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쓰기

 

 

내가 아무리 받아쓰기를 잘 해도

그것은 상식의 선을 넘지 않는다

백일홍을 받아쓴다고

백일홍 꽃을 다 받아쓰는 것은 아니다

사랑을 받아쓴다고

사랑을 모두 받아쓰는 것은 아니다

받아쓴다는 것은

말을 그대로 따라 쓰는 것일 뿐,

나는 말의 참뜻을 받아쓰지 못 한다

나무며 풀, 꽃들이 받아쓰는 햇빛의 말

각각 다르게 받아써도

저마다 똑 같은 말만 받아쓰고 있다

만일, 선생님이 똑같은 말을 불러주고

아이들이 각각 다른 말을 받아쓴다면

선생님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햇빛의 참말을 받아쓰는 나무며 풀, 꽃들을 보며

나이 오십에 나도 받아쓰기 공부를 다시 한다

환히 들여다보이는 말 말고

받침 하나 넣고 빼는 말 말고

모과나무가 받아 쓴 모과 향처럼

살구나무가 받아 쓴 살구 맛처럼

그런 말을 배워 받아쓰고 싶다

 

  

 

엉덩이를 빌리다

 

 

엉덩이가 때로는 손이 될 때가 있다

양 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 유리문을 밀고 나갈 때

발은 땅에, 손은 무거운 짐에 묶여 있으니

화장실이나 가서 내밀던 엉덩이를 빌린다

그런데 지난 봄, 매화나무 가지마다

하얀 봉우리를 눈꽃처럼 가득 피어 놓을 때

그때도 엉덩이를 빌려 피웠는지

남쪽으로 뻗은 가지가 더 많은 꽃을 피웠다

아무래도 북쪽의 나뭇가지는 매화나무의

엉덩이였기 때문에 꽃망울을 잡지 않고

봄의 문을 밀고 들어섰던 엉덩이였나 보다

양 손에 꽃망울을 움켜잡았던 매화나무나

짐을 들고 있는 내 모습에서

엉덩이 빌리는 것은 마찬가진데

어찌하여 난 엉덩이에 구린내만 나고

매화나무 엉덩이는 꽃샘추위를 녹여 꽃을 피워내는가

꽃 같은 세상 만들겠다는 매화나무의 굳은 의지가

매화나무 엉덩이에 굳은살로 가득 배겨있으니

앉지도 서지도 않고, 평생 제 고집의 한 자세로

손과 발을 대신하겠다는 엉덩이의 다짐,

왠지 어정쩡한데 그 자세가 편해 보인다

작자미상의 모든 매화도(梅花圖) 손과 발을 쓸 수 없어서

그 시절 엉덩이를 들이 밀었던 그림 아닐까

 

 

 

능소화 그물

 

 

 

마이산 탑사에 가면

암마이봉 절벽을 타고 자라는 능소화 넝쿨이 있다

층층 쌓아 놓은 탑보다 더 높은 푸른 잎의 탑을 쌓아 가고 있다

스스로 번뇌의 그늘에서 벗어나 꽃을 피워보기도 하고

묵언수행 중인 산의 입을 물어뜯어

파랗게 살아 있다는 증명을 한다

옆에 서 있는 부처는 그 모습에도 무심지경이다

부끄러워해야 할 암마이봉 엉덩이 같은 절벽을

아무도 바라보지 못하게 가려주고 있지만

입담 좋은 사람을 만났더라면 벌써

암마이봉 치마폭에 놀아난다고 소문이 파다할 것이다

하지만 산은 어떤 소문도 나지 않도록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옆에 제 짝의 숫마이봉이 있기 때문이다

능소화 넝쿨은 암마이봉 마음을 얻기보다는 산속에 숨은

물고기 서너 마리 잡아내겠다는 마음 하나로

오늘도 절벽에 그물을 총총 엮어가고 있다

 

 

 

꽃을 보며

 

 

 

화사한 꽃을 보면 이쁘다는 생각, 참으로 많이 한다

그런데 그 꽃이 질 때 이쁘다는 생각은 온데간데없다

내 마음이 두 갈래 생각으로 나누어져

화사하게 핀 꽃들 앞에서만 이쁘다는 생각을 하고

그 꽃이 질 때에는 추() 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 마음속의 깊이가 깊지 않기 때문이리라

낮은 물은 언제나 제 소리 하나 껴앉고 흘러가기 바쁘고

깊은 물은 하늘을 안고 흘러도 그 무게조차 잊고 흘러가는데

꽃이 피나 꽃이 지나 이쁘다는 생각 못하는 나는

아직 내 마음의 꽃을 피워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꽃이 져야 열매가 달리는데

 

 

 

착각

 

  

서예학원에 가서 붓글씨를 배운다

매일 똑같은 먹물에 붓을 들고 글씨를 쓰는데도 다 다르다

마음에 천 불이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가지 표정을 길들이기 위해 쓰고 쓰고 또 써도 잘 되지 않는다

나를 가르치는 백암 선생은 글씨는 만 불을 다스려야 한다고 한다

붓의 털 하나하나가 글씨 속에 혼으로 살아나도록

천리를 달려갈 용맹이 있어야 하고

천둥 번개를 잠재우는 고요가 묻어나야 하고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처럼 청초해야 한다고 한다

나는 지금 천 길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글씨를 쓰고 있다

글씨를 보면 내 표정이 어떤 모습인지 더 잘 보인다

똥 오줌 하나 못 가리는 아기처럼 붓글씨를 쓰고 있다

때론 그 똥 오줌 냄새에 아직 한 살도 안 된 아기라는 착각을 하며 산다

 

 

 

뻔하다

 

 

 

 

시인은 입속의 말을 되새김질을 잘 해야 한다

작은 가시가 걸려도 입을 벌려 그 가시를 뽑으면 안 된다

입속에서 스스로 가시를 삭히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숲의 나무들처럼 말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강의 물결처럼 결을 이뤄 흘러야 한다

바다의 파도처럼 끝없이 요동쳐야 한다

그 뻔한 것을 못하고 사는 시인이 바로 나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해가 진다고 배웠다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자전을 배웠다

둘 중 하나는 뻔한 거짓말이다

그 뻔한 거짓말을 더 뻔뻔하게 거짓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허허 웃고 넘길 뻔한 말,

시인의 입은 모든 사물을 삼켜 삭혀야 한다

백가쟁명(白家爭鳴)의 말이 섞여도 빛을 잃지 말아야 한다

 

뻔하다 뻔한 말인데도

사람이라 잘 지켜지지 않는다

그래도 시인은 지켜내야 한다​

그 뻔한 말을 삭히는 게 시인이다

 

 

 

고독사(孤獨死)

 

 

입석사 바위 끝에 매달려 사는 소나무가 있다

외로울 틈이 없어 푸르다

그런데 향로봉 가는 능선, 소나무는 잎이 빨갛다

너무 편한 자세로 살아온 탓인지

미련할 만큼 덩치만 키운 게 화()였다

고독할 만큼 항상 그 자세인 입석사 바위 끝 소나무는

고독과 동떨어진 청청한 잎을 내 보이는데

아름드리 기둥을 자랑하던 소나무는

비바람에 넘어져 뿌리를 드러내고 말라죽어가고 있다

한 뼘 깊이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바위를 뚫어낸 입석사 소나무는 청청하게 잘 살고

제 그늘의 넓이로 뿌리내린 향로봉 가는 능선의 소나무는

제 그늘의 넓이만큼 커다란 고독을 않고 쓰러졌다

고독도 청청한 마음이면 행복이다

그러나 커다란 마음이면 병이다

두 소나무가 그 이치를 잘 말해 준다

 

 

 

 

하루

 

 

   

웃어도 하루

 

울어도 하루

싸워도 하루​

 

사랑해도 하루

 

 

 

 

 똥을 싼 별

 

 

 

아름답기만 한 별들도

똥을 싼다

 

그 모습이 마치

참새가 제 새끼의 똥을 물어다가 버리듯

허공에 휙 버린다

 

순간의 일이다

 

똥을 싼 별

아무 일 없다는 듯

빛난다

 

 

 

 만원을 바라보며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어 바라본다

곳곳이 위조할 수 없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해와 달이 하나뿐이라는 일월오봉도,

반으로 접어보니 해와 달이 한곳에 겹쳐진다

음과 양의 기가 한 곳에 만나 통하는 세상

얼마나 많은 문양을 완성해야 이루어진다는 말인가

또한 보는 각과 빛에 따라 나타나는 홀로그램은

그 이치가 사람의 마음처럼 보인다​

이 만 원의 돈이면 한 달 치 소식을 전하는 월간 잡지를 사볼 수가 있고

​어리광 부리는 조카딸의 입을 봉할 수도 있고

시인의 고단한 눈빛이 묻어 있는 시집 한 권을 사 볼 수 있는데

이 만 원이 ​내 삶의 표현을 갉아 먹고 있다

얼마나 많은 이 세상의 말을 압축해 놓았으면

돈 앞에서는 할 말을 잃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