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시가 財貨였다면 나에게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빈한한 순정을 사랑하였다


해 설
교감과 상응, 아날로지의 시학
이병철(시인, 문학평론가)
이해리의 시선은 한순간도 자연에서, 사물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그녀에게 사물과 자연은 시의 불꽃이자 숨이다. 하
나의 자연물은 시인의 꿈이며, 시인이 모르는 세계, 수십
억 개의 메타포를 거느린 은하계다. 자연물에 대한 이해리
의 천착은 단순한 관심이나 애정을 뛰어넘는다. 그녀는 자
연물을 통해 구토하고 배설한다. 자연물을 통해 신열에 다
다르고, 상상임신한다.
옥타비오 파스가 말하는 시적 순간은, 존재의 본질적인
이질성, 즉 타자성을 포용하려는 시도이다. 파스는 이것을
‘치명적 도약’이라고 불렀다. 이해리가 하나의 자연물을 시
의 오브제로 삼는 순간, 치명적 도약이 일어난다. 대상의
타자성이 시인의 내부에서 전혀 뜻밖의 것으로 변화하며,
시인 역시 자기존재의 본성이 새롭게 전환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자연물이 촉발시키는 시적 순간을 이해리는 어떻게
감각하고 또 기록하고 있을까?


1. 교감과 상응의 아날로지
가을비 오는 밤엔
빗소리 쪽에 머릴 두고 잔다
어떤 가지런함이여
산만했던 내 생을 빗질하러 오라
젖은 낙엽 하나 어두운
유리창에 붙어 떨고 있다
가을비가 아니라면 누가
불행도 아름답다는 걸 알게 할까
불행도 행복만큼 깊이 젖어
당신을 그립게 할까
가을비 오는 밤엔
빗소리 쪽에 머릴 두고 잔다
―「가을비 오는 밤엔」 전문


위 시에서 이해리가 펼치는 ‘교감과 상응의 아날로지’ 시학
을 확인할 수 있다. “빗소리 쪽에 머릴 두고 잔다”는 고백은,
자연을 향해 기울어지려는, 자연과 교감하려는 본능적·의
지적 표현이다. 빗소리 쪽에 머리를 두면 ‘가을비’의 ‘가지런
함’이 ‘나’에게 전이된다. 그때 “산만했던 내 생”이 ‘빗질’되는
‘치명적 도약’이 일어난다. 외부의 자연물이 나의 내부에서
새롭게 의미화되는 것이다. 그때 시인은 “불행도 아름답다”
는 것을, “불행도 행복만큼 깊이 젖”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
다. 시인이 ‘가을비’와 교감하며 그것을 내면에 채워 넣는 순
간 가을비의 가지런하고, 아름답고, 젖는 속성이 곧 시인 자
기존재의 속성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마틴 부버는 “나는 너와의 만남을 통해 성숙한 인격으로
비약한다”고 이야기했다. ‘너’는 모든 타자를 뜻한다. 나라
는 인격체는 타자와 교감하고 상응할 때, 타자의 이질 특성
을 수용하고 인정하며 상호간 동질성으로 어우러질 때 성숙
해진다. 아래의 시편에서 이해리는 그 ‘만남’의 비밀스런 가
치를 우리에게 귀띔해준다.



나의 어여쁨도 나의 미움도
나의 젊음도 나의 늙음도
남이 먼저 아네 나는 모르고
자신인데도 나는 모르고
내 마음인데도 나는 못다 알고
남이 먼저 나를 아네
나는 남의 말을 듣고 나를 아네
남의 눈을 보고 나를 눈치채네
이로부터 떨리도록 두려운 건 남이었네
남보다 두려운 건 나였네
―「나와 남」 전문

사람은 누구나 자기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나를 잘 아는 건 내가 아닌 남, 즉 타자다. 사르트르는 “타자
는 지옥”이라고 했지만, 타자에 대한 이해리의 신념은 “타자
로부터만 존재가 이해될 수 있다”던 레비나스의 타자윤리학
으로 기울어져 있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과 만나는 것
은 특별한 초월의 경험과 경이로운 무한 관념의 계시를 가능
케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나의 어여쁨도 나의 미움도/ 나의 젊음도 나의 늙음도”
‘남’이 먼저 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를 타인이 알게 해준
다. 시인은 “남의 말을 듣고 나를 아”는 ‘경이로운 계시’를
경험한다. 타자를 받아들이는 순간, 자기존재의 본성이 새
롭게 전환되는 ‘치명적 도약’과 ‘너’를 통해 성숙해지는 ‘인
격의 비약’이 동시에 완성되는 것이다.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는 믿음은 미성숙한 자기중심적 사고다. 이해리는 자
기중심적 사고에서 멀리 떨어진 타자지향의 태도로 이 세
계와 상응하는 시인이다.
현충일 무렵 안강들에 서 본다
넓은 들 전부가 무논이다
반듯반듯한 수면에 하늘이 비친다
지상의 논 위에 하늘논이 한 들판 더 생긴다
하늘논에는 푸른 하늘이 담겨 있고 흰 구름도 고여 있다
흰옷 입은 농부가 지상의 논에 들어가 모를 심으면
하늘논에도 꼭 같은 농부가 모를 심는다
흰 구름 속에 새파란 벼 포기를 찔러 넣는다
물에 비친 새의 날개에도 한 포기 넣고 손을 뺀다
농부의 손에 하늘이 묻어 있다
벼농사는 지상의 일만이 아니라는 듯
몰래 내려와서 일 해놓고 돌아가는 하늘논
농사를 지어본 적 없지만
내가 먹은 밥 속에도 저런 논에서 나온
쌀이 있었으리, 가끔 쌀을 씻으면
싸그락싸그락 별 씻기는 소리가 난다
밥을 함부로 먹은 날은 괜히
하늘이 두려웠던 건 그 때문일까
날마다 섭취하면서도 무심했던 경이로움
우연히 지나던 들에서 느낄 때
논두렁마다 피어난 풀꽃에도 엎드리듯
마음이 절을 한다
―「하늘논」 전문
이 시는 이해리의 시 세계를 압축해 보여주는 수작으로
서 교감과 상응의 아날로지, 타자지향의 성숙한 세계인식
을 모두 잘 보여주고 있다. “흰옷 입은 농부가 지상의 논에
들어가 모를 심으면/ 하늘논에도 꼭 같은 농부가 모를 심는
다”는 잠언이나 “농부의 손에 하늘이 묻어 있다”와 같은 감

각적 은유, “벼농사는 지상의 일만이 아니라는 듯/ 몰래 내
려와서 일 해놓고 돌아가는 하늘논”이라는 눈부신 통찰은
모두 소우주인 인간과 대우주인 자연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
를 맺고 공생하는 세계, 인간과 자연이 ‘협화음’의 리듬 안에
함께 숨쉬는 ‘아날로지’를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농경사회에서 우리 선조들은 조상을 어떻게 모시느냐에
따라 풍년과 기근이 나뉜다고 믿었다. 그래서 장례를 치를
때 망자를 지극히 배웅하고, 제사 또한 예와 격식을 갖추어
엄숙하게 지냈다. 농사는 지상의 농사꾼이 혼자 짓는 게 아
니라 ‘죽음’을 통해 이미 자연의 일부가 된 조상들과 협력하
는 일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죽음과의 화해, 죽음에의 긍정
적 수용이 필수적이다. 여기서 이해리의 성숙한 타자지향
적 세계관이 나타난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영원한 타자다. 도무지 화해할 수
없으며, 함께 어우러질 수도, 넘어설 수도 없는 절대불변
의 경계이자 한계다. 그런데 이해리는 ‘논’이라는, 의식주衣
食住로 대표되는 인간 삶의 가장 상징적인 공간에다 ‘하늘’
을 대입하며 죽음에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한다. 죽음을 인
정하고, 죽음의 타자성을 수용할 때 죽음과 더불어 삶이 가
치를 얻는다.
논은 진흙 웅덩이다. 진흙은 고여서 썩은 것처럼 보이
나 실은 끊임없이 숨쉬며 변화하는 유기농과 발효의 세계
다. 진흙에는 죽음과 부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양
분 삼아 새로 태어나는 유기물과 미생물이 있다. 이 세계의

첫 생명체는 물과 공기와 흙에서 스스로 탄생한 유기물들이
다. 모든 생명체는 이 유기물에서부터 진화되었다.
논은 유기물과 미생물들이 발효와 부패를 거듭하는 조
화로운 생태계다. 논은 생명의 징후와 예감으로 우글거리
는 태초의 대지이자 삶과 죽음이 상호작용하는 세계, 신생
과 소멸의 반복이라는 리듬으로 화음을 이룬 하나의 우주
다. 삶과 죽음이 살갑게 이웃하고,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룬 곳, 내 조상과 나의 죽음마저 ‘진흙’의 질서로 편입되
어 새로운 탄생을 예비하는 과정임을, 자연과 우주의 일부
가 되는 통과의례임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곳, 그곳
이 바로 논이다.
이해리의 시에는 죽음을 포괄한 삶 자체를 위대하고 아
름다운 것으로 여기는 태도, 자연의 질서가 내면화된 성숙
한 세계 인식이 있다. 이 땅에서의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고, 죽음의 외적 현상일 뿐인 부재와 소멸에 겁먹지 않는
의연함이 바로 정신으로서의 ‘하늘논’이다.
2. 자연의 실종, 인공 자연을 향한 직시
이해리의 시는 자연과의 교감과 상응을 끊임없이 도모하
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전근대적 낭만주의로 치닫지는 않
는다. 자본주의와 물질문명 사회가 자연을 잠식해버린 오
늘날 ‘자연의 실종’을 제대로 마주보며 그 비극적 양상을 시
로써 감싸 안는다. 자연의 실종과 인공 자연이 자연을 대

체하는 현실을 덤덤히 인정하지만, 모방과 재현의 대상으
로서의 자연을 상실한 시인의 고통스런 신음이 시 곳곳에
서 새어 나온다.
내가 소녀였을 때
네 잎 클로버 찾다가 풀밭에 누우면
내 몸 받은 풀이 향기를 풍겼다
산들바람 불어 하늘을 보면
내 눈길 받은 하늘이
하얀 목화 구름을 뭉게뭉게 풀었다
저 산 너머 새파란 하늘 아래는
무언지 그리운 것이 강물로 흐르고
사공의 삿대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교정에 새로 지은 음악실에선 소녀들의 합창이
보리밭 종달새 되어 반공에 솟구쳤으므로
내 삶은 맑고 향기로운 것으로 가득 찰 것 같았다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고
누구에게나 사랑 받을 것 같았다
그 때 그 느낌 그 때 그 향기
그 때 그 순정에 때 묻을까
두려워하며 살다 보니
지금도 소녀 같단 소리를 듣는다
찬사인지 독설인지 모르지만
푸른 초원처럼 막연한 그리움으로도

가슴 부푼 아련한 꿈 밀어 올리던 풀밭,
어디로 갔을까
살인 진드기, 슈퍼 박테리아
풀밭에 마음대로 눕지도 못하는 세상 넘겨주고
그 맑고 향기롭던 것들은 어디로 갔을까
어디로 갔을까
―「풀밭」 전문
이 시는 자연과 교감하며 자연의 모방과 재현을 “가슴 부
푼 아련한 꿈”으로 삼았던 시인이 자연의 상실을 목도하고
절망하는 양상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내가
소녀였을 때/ 네 잎 클로버 찾다가 풀밭에 누우면/ 내 몸 받
은 풀이 향기를 풍겼다”고 회상한다. 그 때 “삶은 맑고 향
기로운 것”이었으며, “누구에게나 사랑 받을 것” 같았다.
그 충만감을 시로 옮기는 행위는 자연을 모방하고 재현
함으로써 우주의 조화로운 리듬에 동참하는 일이었다. 그
러나 자본주의와 산업화 사회에 의해 인간과 우주 사이 리
듬에 불협화음이 생긴 이후 자연은 더 이상 모방하고 재현
할 원전으로서의 힘을 잃어버렸다. 벤야민이 이야기한 ‘아
우라의 상실’은 본래 사진과 영상 예술의 발달로 인한 회화
예술의 위축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자연과 인공 자연, 즉
전근대의 낭만적 세계관과 근대의 물신주의 간 균열의 문제
까지를 함의하고 있다.

우주와 유기적 관계를 맺는 아날로지의 한 부분으로서 자
기존재의 충만감을 만끽했던 시인은 완전한 낭만이자 이데
아인 자연, ‘풀밭’을 상실해버렸다. “그 맑고 향기롭던 것들
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물음에는 깊은 탄식과 절망이 침투
해있다. 이제 자연은 더 이상 풍요롭고 친근한 ‘에덴’이 아
니라, ‘살인 진드기’와 ‘슈퍼 박테리아’가 우글거리는 ‘소돔’
일 뿐이다.
이러한 아날로지의 붕괴, 자연이 실종된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인공 자연’을 향해 이해리는 눈을 돌린다. 자본주의
가 만들어낸 상품들이 자연의 자리를 대체하는, 보드리야
르가 말한 시뮬라시옹이 바로 인공 자연의 세계다.
빌딩에 매달린 현수막이
미친 듯 울부짖는다
바람 세차게 부는 날
귀신 곡하는 소리를 낸다 퍽퍽
벽을 때리며 돌덩이 던지는 소리를 낸다
어마어마하다 무섭고 괴상하다
―「바람과 현수막」 부분
대숲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 새들의 지저귐, 풀벌
레 울음 등 자연의 소리가 사라진 도시엔 “빌딩에 매달린
현수막이” “귀신 곡하는 소리”가 가득하다. 시인은 인공 자
연의 소리를 “벽을 때리며 돌덩이 던지는 소리”라고 표현한
다. 소음공해인 셈이다. 그 소리는 “어마어마하”고, “무섭
고 괴상하”다. 그로테스크는 인공 자연의 특징이다. 철근,
콘크리트, 전선, 송전탑, 댐 같은 것들이 기괴한 모습으로
자연을 대체한다.
인공 자연이 일으키는 공포와 이질감을 거부하면서도 이
해리는 그마저도 세계의 한 부분으로, 아날로지의 일부로
수용하려 한다. 마치 보들레르가 도시 외곽 변두리의 넝마
주이에게서 미적 가치를 발견했던 것처럼 말이다. 보들레
르가 말한 근대성은 우연하고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아름
다움을 추출하려는 정신이다. 이해리는 제조 목적이 분명
한, 그래서 역할을 마치면 용도 폐기되는 수많은 일회용,
인스턴트 인공물들에서 시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흙이나 시멘트를 매끈하게 바르는 걸
미장이라 하던데 물결도 한 자루 흙손을 가졌는지
파도가 쓸고 간 모래사장은 미장 된다
낙서도 발자국도 얼룩들도
일거에 지워주는 저 손길
―「미장」 부분
‘시멘트’는 인공 자연의 가장 중요한 재료로써 이미 흙,
나무, 풀밭, 자갈, 바위 등 많은 자연물들을 대체해버렸다.
그 시멘트를 고르게 펴 바르는 작업을 ‘미장’이라고 부른다.
공사 인부가 시멘트 미장 작업을 하는 장면은 어쩌면 산업

화 근대, 인공 자연의 상징적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해리는 그 미장의 이미지를 자연에다 덧입힌다. “물결도
한 자루 흙손을 가졌”다고 표현하거나 “파도가 쓸고 간 모
래사장은 미장 된다”고 묘사할 때, 낭만주의적 자연의 시대
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이미지가 탄생한다. 자연과 인
공 자연이 조화를 이뤄 “낙서도 발자국도 얼룩들도 일거에
지워주는 손길”이 되는 것이다. 자연을 대체한 인공물들이
인류의 생활을 편리하게 만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다. 자연의 상실도, 인공 자연도 모두 인간의 편리를 위해
인간 스스로 초래한 결과일 뿐이다.
이해리는 “언제나 나는 영혼의 난민”(「어느 초저녁에」)이라
며 인공 자연의 시대에서 위축된 자기존재를 성찰한다. 그
러면서도 여전히 “구름이 되어 바람이 되어 살고 싶다”(「염
전」)고, 낭만적 자연과의 유기적 아날로지를 꿈꾼다. 하지만
결국 “변하는 것만이 영원이고 변해야만 산다는 것”(「감포」)
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이해리는 이상과 현실의 길항 가운
데서 끊임없이 고뇌하며, 때로는 상실된 이데아의 회복을
도모하고, 때로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면서 시
인이라는 자기존재의 항존성을 유지해나가고자 한다. 그녀
의 시는 이 치열한 내적 고투의 빛나는 상흔들이다.
3. 자연을 잃어버린 인간의 소외와 타락
시는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해리 시의 참

된 미덕은 감동에 있다. 구체적 체험의 진정성과 인간 존재
를 향한 연민의 눈길이 감동을 담보한다. 이해리의 시는 낭
만적 자연에서 인공 자연으로, 그리고 그 인공 자연을 배태
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위축되고 고통 받는 인간 소외의 양
상을 향해 가닿는다.
내 단골 미용실 앞길에서 이따금 다리쉼 하는 할부지
가 있다
삶의 곡절 얼마나 곡진했는지 허리가 ㄱ자로 굽었다
조선낫보다 더 직각인 허리, 폐휴지 수레 끌고 가다
손잡이에 엉덩이 얹고 휴우 날숨 뱉을 때
자신의 날숨에 꼬부라진 그 몸 다 날아갈 것 같았다
어느 날부터 그 할부지 보이지 않았다
미용실에 물었더니 죽었다 한다
인물 멀쩡한 할머니 하나 주워 함께 살았는데
할머니 얼마나 독한지
수입 없이 오는 날은 집안에 들이지 않았다 한다
그날도 집에 들여 주지 않아 추운 골목 배회할 때
너무 춥겠다고 저승이 주워갔다 한다
―「ㄱ자 할부지」 부분
시인은 “삶의 곡절 얼마나 곡진했는지 허리가 ㄱ자로 굽”
은 ‘할부지’를 바라본다. “단골 미용실 앞”에서 자주 마주치
는 걸 보니 몇 집 건너 사는 이웃으로, 폐휴지 주워 겨우 생
계를 잇는 노인인 듯하다. 폐휴지 줍는 노인은 자본주의의
폐해 중 빈부 격차와 고령화 사회의 단면을 뚜렷하게 보여주
는 상징적 이미지다. 앞서 언급했던, 근대 도시 파리의 외
곽에서 넝마를 주워 먹고살던 넝마주이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노인이 눈에 띄지 않는다. 궁금하
던 차에 시인은 노인의 부음을 전해 듣는다. 사연인즉슨 동
거하는 ‘할머니’가 “수입 없이 오는 날은 집안에 들이지 않
았”고, 결국 “추운 골목 배회할 때/ 너무 춥겠다고 저승이
주워갔”다는 것이다. 야생의 정글과도 같은 자본주의의 냉
혹함은 가장 내밀한 체온의 연대이자 사회의 최소단위인 가
정에서마저 그 붉고 희뜩한 이빨을 드러낸다. 낭만적 자연
의 시대에 인간은 농경과 목축 등 자연에서 얻는 것들로 나
름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지만, 인공 자연의 시대에선 자신
들이 만든 물신에 종속되어 스스로 상품이 되어버렸다. 폐
휴지와 맞바꿀 만큼의 노동력을 갖지 못한 대가는 춥고 쓸
쓸한 죽음뿐이다. 폐휴지보다도 쓸모없다고 인간을 죽음으
로 내모는, 타락한 세상이다. 이해리는 시대의 이 비극적
풍경을 시로서 뜨겁게 끌어안는다.
아이섀도 빛 네온사인 아래 여인은
새빨간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손님들은 여인을 건성으로 반가이 맞고
여인은 남자의 그것 같이 생긴 마이크를 들고
신청곡을 받아들인다
하필이면 곡목이 ‘우리 어머니’다
다섯 남매 배고플까 허리띠 졸라매고
이 대목에 와서 노래 울컥 멈춘다
돌아서서 한참을 울먹인다
어머니가 그리운가
어머니로 은유된 그 무엇이 서러운가
어제는 2차를 나갔다가
몸만 뺏고 화대도 안 주던
남자에게 뺨까지 맞았다
여자는 울어도 반주는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노래도 아닌 노래를 밤마다 부르며
그녀가 구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노래방 도우미」 부분
이 시도 마찬가지다. 이해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어둡고
습한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무심코 지나치지 않는다.
노래방 도우미 역시 폐휴지 줍는 노인처럼 자본의 논리에
서 소외된 존재다. “아이섀도 빛 네온사인”은 고도로 성장
한 우리나라 자본사회의 ‘마술환등’이다. 그 마술환등 속 노
래방이 시의 배경이다. 노래방 안에서, 이미 상품과 상품의
구매자가 되어버린 ‘여인’과 ‘손님들’의 태도는 다분히 거래
적이다. “손님들은 여인을 건성으로 반가이 맞고/ 여인은
남자의 그것 같이 생긴 마이크를 들고/ 신청곡을 받”는다.
그런데 손님의 신청곡 제목이 「우리 어머니」 다. 노래에
“다섯 남매 배고플까 허리띠 졸라매고”라는 대목이 있던 모
양이다. 그 대목 앞에서 도우미는 “노래 울컥 멈춘”다. “어
머니로 은유된 그 무엇이 서러”워서 그러는데, ‘그 무엇’은
아마도 ‘어머니’로 함의되는 가족 공동체의 안정감, 고향
의 목가적 전원, 노래방에서 일하지 않고도 풍족했던 유년
의 행복 같은 것들이리라. 아이러니컬하게도 상품으로서
의 여성을 구매하러 온 중년의 남자들이 그 노래를 신청했
다. 그 남자들 역시 ‘어머니로 은유된 그 무엇’이 그리운 것
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미친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으려 기
를 쓰고 남을 짓밟으며 돈 버는 기계처럼 굴러가는 삶, 자
본의 논리 안에서 타락한 영혼을 ‘어머니’에의 그리움으로
겨우 정화하려 하는 안쓰러운 존재들이다.
아무도 모르게 죽은 사람이 있다
아무도 몰라서 누구도 오지 않았다
악취가 담 너머로 무언의 신호를 보냈으므로
흰옷 입은 구더기 떼만 줄지어 왔다
구더기들은 상여도 없이 그의 살을 떼 매고
시간의 저편으로 떠나고 유품처럼 백골만 남겼다
○○○연립주택 단칸방에서
죽은 지 삼 년 만에 발견된 사람
누구를 기다렸는지 눈이 움푹 들어가고
웃는지 우는지 모를 입은 반쯤 벌어져 있다
백골은 경찰을 데리고 가족을 찾아 나선다

어찌 어찌 연락 닿았지만
가족들은 고개 젓고 문을 닫아버린다
오십 년이 넘게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
왜 누구도 안다는 이가 없을까?
―「무연고 301호」 부분
“아무도 모르게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큰 문제인 고독사 이야기다. “악취가 담
너머로 무언의 신호”를 보낼 때, “흰옷 입은 구더기 떼만 줄
지어 왔”다. 인공 자연의 시대에서 쓸쓸히 혼자 죽은 인간을
거두어가는 것은 다시 자연이다. “연립주택 단칸방에서/ 죽
은 지 삼 년 만에 발견된 사람”은 나와 무관한 타자일 수 없
다. 그 주검은 곧 내 주검이다. 휘황찬란한 서울 강남이 전
국에서 고독사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이라면 믿을 수 있
겠는가? 우리는 이미 사회가 펼친 죽음의 네트워크에 붙들
린 자들이다. 언제 어디서든 “아무도 모르게 죽”을 수 있는
확률에 노출된 자들이다.
“가족들은 고개 젓고 문을 닫아버린”다. 이 장면은 너무
도 비극적이다. “오십 년이 넘게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인
데 아무도 “안다는 이가 없”다. 오직 시인만이 그 죽음에 의
미를 부여하고, “무연고 301호”라고 호명해줄 뿐이다. 이해
리는 이 쓸쓸한 주검 앞에서 다시 아날로지의 회복을 꿈꾼
다. 인간의 주검을 구더기와 시간이 해체하고 떠메어 자연
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장면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다. 이
해리는 자연과 인간이, 모든 사물들이 우주의 동일한 리듬
안에서 조화를 이뤘던 세계를 희구한다. 폐휴지 줍는 노인
도, 노래방 도우미도, 도우미의 살을 주무르는 사내들도,
무연고자도 모두 ‘이웃’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협화음으
로 유기적 관계를 맺는 공동체를 소망한다.
이해리의 시는 끊임없이 아날로지를 추구한다. 옥타비오
파스가 말한 ‘아날로지’는 자연과 사람, 세계를 구성하는 모
든 사물들을 하나의 유기체적 우주로 바라보는 인식이다.
이해리의 시는 자연을 향해, 인공 자연을 향해, 소외 받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향해 지속적으로 기울어지며, 그 모든
것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고자 시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녀의 시를 교감과 상응의 시학이라고 마땅히 부를 수 있
을 것이다. 벌써부터 다음 시집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