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오는 밤엔



가을비 오는 밤엔
빗소리 쪽에 머릴 두고 잔다
어떤 가지런함이여
산만했던 내 생을 빗질하러 오라
젖은 낙엽 하나 어두운
유리창에 붙어 떨고 있다
가을비가 아니라면 누가
불행도 아름답다는 걸 알게 할까
불행도 행복만큼 깊이 젖어
당신을 그립게 할까
가을비 오는 밤엔
빗소리 쪽에 머릴 두고 잔다



별똥별


하늘에 자리 잡고 있으면 별
땅으로 추락하면 똥


그래서 별똥별


별들도
하늘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밤마다 홀로 글썽이나 보다
자존심과 절망감과 불명예 사이에서
날마다 엄청난 긴장과 불안에
시달리나 보다
과중한 괴로움 견디다 견디다
가슴에 불을 품고 그만
뛰어내리기도 하나 보다


파도



파도가 으르릉거리는 것은
심장이 요동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묻고 싶은데
아무도 대답 안 해주기 때문이다
파도가 달려가는 것은 부서지고 싶어서다
험한 바위 만날수록 아름다운 파도
보아라 한없이 부서지면서,
부서질 때마다 시원해 하면서
한바탕 흰 물꽃다발을 바다에 던지는 파도를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달려온
아테네의 병사 페이티피페스처럼
너에게 전했으므로
죽을 수 있는 몸이다 마음이다
죽어서 영원을 사는 열정이다




무연고 301호



아무도 모르게 죽은 사람이 있다
아무도 몰라서 누구도 오지 않았다
악취가 담 너머로 무언의 신호를 보냈으므로
흰옷 입은 구더기 떼만 줄지어 왔다
구더기들은 상여도 없이 그의 살을 떼 매고
시간의 저편으로 떠나고 유품처럼 백골만 남겼다
○○○연립주택 단칸방에서
죽은 지 삼 년 만에 발견된 사람
누구를 기다렸는지 눈이 움푹 들어가고
웃는지 우는지 모를 입은 반쯤 벌어져 있다
백골은 경찰을 데리고 가족을 찾아 나선다
어찌 어찌 연락 닿았지만
가족들은 고개 젓고 문을 닫아버린다
오십 년이 넘게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
왜 누구도 안다는 이가 없을까?
외롭다는 말도 못하는 그가
장례 봉사자의 손에 이끌려 화장장으로 간다
잘 구워진 과자처럼 바스라진 그가
항아리 안으로 들어가 담기고 뚜껑이 덮인다
누군가 그의 이름에 붉은 줄을 그어 지운다
무연고 301호, 일련 번호 하나를 적어 선반 위에 보관
한다
그는 죽었지만 연고緣故가 없어 이승의 연緣을 끊지 못
한다



ㄱ자 할부지



내 단골 미용실 앞길에서 이따금 다리쉼 하는 할부지가
있다
삶의 곡절 얼마나 곡진했는지 허리가 ㄱ자로 굽었다
조선낫보다 더 직각인 허리, 폐휴지 수레 끌고 가다
손잡이에 엉덩이 얹고 휴우 날숨 뱉을 때
자신의 날숨에 꼬부라진 그 몸 다 날아갈 것 같았다
어느 날부터 그 할부지 보이지 않았다
미용실에 물었더니 죽었다 한다
인물 멀쩡한 할머니 하나 주워 함께 살았는데
할머니 얼마나 독한지
수입 없이 오는 날은 집안에 들이지 않았다 한다
그날도 집에 들여 주지 않아 추운 골목 배회할 때
너무 춥겠다고 저승이 주워갔다 한다
다 꼬부라진 늙음마저 자본주의 산술법은 피해 갈 수 없
는 동토라서
미용실 유리창 밖으로 때 아닌 흰나비 한 마리
허리 구부린 채 날아갔다



사문진



잃어버린 것이 있다
분명 내 것이었으나
이제는 아닌 것이 흘러가는
나루터에 와서 주막에 앉아본다


바람은 복사꽃 잎 날리며 건너오는데
강물은 봄바람 저어 깊어가는데
가버린 것은 오지 않는다
나루터에서 기다리는 것이
배뿐이던가


무슨 말 하기도 전에
취한 채 떠내려가고 싶다
가슴에 출렁이는 어떤 추억이
다 건너갈 때까지



미장



흙이나 시멘트를 매끈하게 바르는 걸
미장이라 하던데 물결도 한 자루 흙손을 가졌는지
파도가 쓸고 간 모래사장은 미장 된다
낙서도 발자국도 얼룩들도
일거에 지워주는 저 손길


어느 날
당신이라는 사랑이 달려와서
내 가슴의 모든 상처를 지워주었다
눈부시고 매끈하게
새로 부여받은 내 가슴이 부담이다
천만 번 거듭되는 용서와 믿을 만한 윤회에 씻겨
매끈하게 반짝인다 해도, 살아가면서
자국 없는 삶, 상처 없는 사랑 남길 자신 요원하다
용서하시라


산다는 것은 마음에 자국 찍히는 일이다
상처 받는 일이다
그래도 당신 손길 한 번이면
씻은 듯 빛나는 얼굴로 상처 기다리는 일이다



사랑의 척도



모든 걸 다 주어도
아깝지 않으면 사랑이다
아까우면 사랑이 아니다



보슬비



보고 싶고 보고 싶었지만
보고 싶은 것도 죄 될까
말없이 다가갔다가
소리 없이 돌아간다


많고 많은 당신을 보아왔지만
진정 그리운 당신은 못 보고
이 대지 저 하늘 기웃거린 만큼
젖고 젖어서


목마른 마음만 끌고 돌아간다




눈이 녹는 날



쌓인 눈은 설경雪景을 펼치고
내리는 비는 설경을 지운다
함부로 발걸음 내딛기도
조심되게 아름다운 설경
내일 모레 정인情人을 만나
사진 한 장 찍을 때까진
기다릴 줄 알았는데
흰 깁이 깔린 그 숲길을 나란히
걸을 때까진 참아줄 줄 알았는데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가
일시에 지워버린다
좀 더 있어주었으면 싶은 것이
좀 더 머물러줄 것 같은 것이
몇 방울 빗물에 고개 떨구고
소리 소문 없이 떠나갈 때
나도 너에게서 그렇게 지워졌나 싶어
너도 나에게서 그렇게 잊혀졌나 싶어
내 안에 쌓아올린 희디흰 설궁 무너지고
질척거리는 눈물에
내 발목 밟히며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