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아프다,

온통,

몸마저

 

2015년 가을

남태식

 

 

 

남태식 인은 2003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속살 드러낸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내 슬픈 전설의 그 뱀』『망상가들의 마을』 리토피아문학상,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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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다시 힘을 얻은 맨 언어의 새로움

― 남태식의 시세계

황정산|문학평론가

 

 

 

 

1. 들어가며

근대 이후 시들은 상투성에 저항하는 언어라고 정의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언어의 상투성과 그 언어로 표현된 일상의 상투성에 저항함으로써 모든 것을 숫자로 환원하는 근대 사회의 권태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일상어에 각인된 상투적 인식과 그것으로 야기되는 허위의식 또 그 저변에 깔린 현실은폐와 지배권력의 음험한 기도까지 시인들은 언어의 조작과 인위적 왜곡을 통해 그런 것들에 흠집을 내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시와 시어의 힘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의 현대시는 이러한 힘을 상실해 가고 있다. 또 다른 상투성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언어의 추구는 새로운 의미 형성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난삽한 산문과 요설이 난무하는 언어파괴로 귀결되고 언어유희에 가까운 새로움의 추구는 스스로의 언어적 힘을 포기하고 있다. 맥락을 벗어난 과도한 환유는 언어를 사소한 삶의 단편들로 환원하여 스스로를 현실과 유리시키고 무의미에 다가가는 시적 은유들은 스스로 헤어나지 못하는 비유의 동굴 속에 빠져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남태식의 이번 시집은 충분히 주목을 받을 만하다. 이 시집의 시들은 다시 어떻게 이 언어의 힘을 회복시킬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2. 주체의 언어

언어는 생각의 집이다, 라는 흔한 말을 다시 되뇌지 않더라도 언어는 말하는 주체, 즉 화자의 생각을 표현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하나의 주체를 형성하고 그 주체의 존재 자체이기도 하다. 하지만 또 한편 주체의 언어는 타자의 언어이기도 하다. 내 말은 사실 나의 말이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 규정되고 정의되고 강요된 말이다. 이렇게 언어란 타자화된 기호들의 무수한 기표일 뿐이라는 것이 최근의 언어에 대한 이론이기도 하다.

그래서 최근의 시들 역시 이러한 언어의 타자성을 드러내는 것이 주류가 되고 있기도 하다. 타자에 의해 정의된 언어를 까발리고 그 언어의 무의미성을 강조하는 시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을 통해 언어로 만들어진 현대사회의 상투성과 억압성을 드러내고 고발한다는 점에 있어서 이러한 시들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삶의 주체성을 상실한 언어는 그 자체가 언어파괴이고 주체의 실종에 복무한다. 현대 사회의 모순과 자본의 억압을 말하지만 또 한편 그것이 주는 복잡성 속에 주체를 숨기고 자신의 주체적 언명을 회피하는 방식이 된 것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남태식의 시들은 바로 이 주체의 목소리를 복원한다. 그중 하나를 들어보자.

 

무덤의 나라에는 아니오가 없다.

 

아니오가 없는 무덤이

허물고 쌓고 허물고 쌓는 것들은

모두 무덤

 

무덤들 위에 새로 피우고 돋우는

꽃들도 무덤

풀들도 무덤

 

무덤이 된

꽃들이 슬프다.

풀들이 슬프다.

 

아니오가 없으면

아니오가 없는 나라도 무덤

그 나라의 산천이 모두 무덤

 

아니오가 없는 무덤이 슬프다.

아니오가 없는 나라가 슬프다.

그 나라의 산천이 모두 아프다.

―「아니오」 전문

 

부정은 한 존재의 가장 주체적인 표현이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타인과 외부 세계에 대한 명백한 자기표현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이 ‘아니오’가 사라진 지 오래이다. 세상의 가치에 사람들이 모두 승복하여 그것을 추수하는 것이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삶의 요령이 되고 세상을 사는 지혜가 된다. 많은 자기개발서들이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긍정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하지만 이 ‘아니오’를 말하지 못하면서 우리 모두는 주체를 상실해 가고 있다. 내 생각이 사라지고 그것을 표현할 내 말도 사라지고 누군가 만든 말 누군가 재구성한 용례 다른 누군가가 규정한 의미로만 말을 반복해서 사용할 뿐이다. 시인이 이러한 현실을 모두 ‘무덤’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주체가 다 죽었기 때문이다.

남태식 시인은 바로 이러한 현실에서 주체적 언어의 부활을 꿈꾼다.

 

한 때는

 

불편했다.

어긋나던 길들이

삐걱대던 걸음이

체증으로 막힌 명치 뚫리듯 터지던 말들이

 

……(중략)……

 

지금은

 

불안하다.

불편을 넘어

멎은 시계가

동시에

동시에 우는 자명종이

 

……(중략)……

 

불안하다.

 

!

―「악!」 부분

 

비명은 어쩌면 가장 주체적인 언어이다. 주체의 가장 직접적인 반응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체 밖의 외부 세계에 대한 가장 강렬한 대응이고 또한 저항이다. 이 비명을 가장 적극적으로 내지를 수 있는 것이 바로 시인의 언어이지만 세상은 그것을 불편과 불안으로 느낀다. 거스르고 반대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고 세상을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럴 때 시인이 낼 수 있는 것은 “악!”이라는 한 마디 비명이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시대 시인이 낼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소리인지 모른다. 이 시에서 이 비명이 상징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언어의 주체성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비명으로 시작한 주체의 언어를 모색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가 너무도 오래 자신의 언어를 잃고 미망 속을 헤맸기 때문이다.

 

안개가 짙다. 안개가 짙으면 안개에 집중해야만 한다.

 

안개의 몸피를 더듬어 가늠하고 손가락 발가락의 수를 세어보아야 한다. 안개의 표정은 맑은가 어두운가, 입술은 여태껏 앙다문 채인가 배시시 열리는 중인가, 안개의 속살은 두꺼운가 부드러운가 또 얼마나 깊은가 음습한가 헤아려보아야 한다. 안개의 속살 사이에 들앉은 나무와 풀과 집과 그 안의 숨결들, 웃음들, 빈 들판의 눈물들, 쉼 없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한숨들을 코로 귀로 숨으로 느껴야 한다. 감전된 듯 감전된 듯 온 몸을 떨어야 한다. 언젠가는 걷힐 안개에 뒤따르는 햇살, 뒤따라 날아오르는 새떼들의  날갯짓 따위는 잠시, 어쩌면 오래도록 잊어야 한다.

 

바야흐로 때는 안개가 짙을 때, 어김없이 안개가 짙고, 지금 우리는 오직 이 안개에만 집중해야 한다.

―「집중」 전문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안개에 휩싸여 있다. 자본과 그것이 만들어 놓은 추상의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숫자로 환원되는 자본의 가치가 지배하고 우리는 삶의 구체성을 보지 못한 채 그것이 만든 지표 속에서만 살아가고 있다. 이 안개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집중”해야만 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안개는 우리의 시각과 판단을 흐리는 외부의 힘이다. 그 외부의 힘에 눌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생각과 언어를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시인은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바로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는 안개에 집중해야 한다고 한다.

집중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의 모든 감각을 열어야 한다. 그래서 그 안개가 가진 모든 것을 “코로 귀로 숨으로 느껴야 한다.”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주체로서의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감각마저 빼앗기고 산다. 자본이 쳐놓은 촘촘한 그물에 갇혀 그것이 요구하는 것을 맛보고 느끼고 소비한다. 그래서 결국 캄캄한 안개 속에 헤매고 미망에 사로잡혀 산다. 자신의 언어를 회복한다는 것은 주체로서의 감각을 되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모든 세상의 추상적 의미를 구체적 감각으로 환원하는 시어가 바로 이것을 위한 가장 유효한 수단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남태식 시인이 시를 통해 주체를 회복하고자 하는 고투를 선택한 이유를 우리는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3. 날 것의 언어

시는 가공된 언어이고 만들어진 언어이다. 그래서 “시는 언어에 가해진 조직적인 왜곡”이라는 말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가공, 꾸밈을 통해 일상어가 가진 상투성을 거부하고 그것에 잠재되어 있는 권태와 억압을 부정한다. 시에 부과된 비유나 리듬이 이 모든 꾸밈을 담당한다. 하지만 꾸밈이 다시 상투성이 되어버리는 것이 시의 운명이기도 하다. 최근 시에서의 상투성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모든 언어가 상품의 장식과 포장이 되어 버린 사회에서 시어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원래의 의미를 떠나 길을 잃은 은유와 사소한 삶의 편린에도 다가가지 못한 환유들이 난무하여 언어의 힘을 스스로 상실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지금 현대 한국 시단의 상황이기도 하다.

남태식 시인은 새로운 언어 새로운 비유 새로운 리듬으로 언어의 새로움을 창조하는 대신 과감하게 이들을 벗어버리는 것으로 또 다른 새로움을 만들어간다. 그의 시에 있어서 리듬은 단순하고 비유는 최소화한다. 그리고 그 비유는 원관념의 그것을 강조하는 단순한 형태로 제시된다.

어떤 이에게 사랑은

벼랑 끝에 핀 꽃이다.

 

굳이 숨기지 않더라도

숨은 꽃이다.

 

사랑의 절정! 같은 말은 어울리지 않아라.

가슴 깊숙이 감춘 손은 오래 전에 자라기를 멈추었으니.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 사랑은

―「숨은 꽃」 전문

 

사랑을 숨은 꽃으로 비유하고 있다. 다소 상투적일 수 있는 이 비유에 남태식 시인의 시어의 비밀이 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설명하면 사랑을 꽃으로 비유할 때 그것은 숨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많은 비유를 통해 표현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 사랑을 “사랑의 절정”으로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은 존재하지도 어울리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은 “손닿지 않는 꽃이다.” 그것은 수식하거나 꾸미거나 장식할 수 없을 때 가장 순수한 언어가 된다는 것이다. 남태식 시인은 이 순수한 언어의 힘을 믿는다.

 

무덤에 안 드니 경칩 지난 눈바람도 무지 매섭다. 골골 휘저으며 눈발로 등성이를 내리 뭉개니 시려 가슴을 웅크려 오므린다. 눈밭에 몸을 숨기니 겨울은 아무래도 못 건넌다.

 

무덤에 드니 한겨울의 칼바람도 다소곳하다. 찬 기운 오래 일도록 밤새 빚은 눈의 뼈 굳히지 않고, 잠깐 든 햇살에도 모두 삭힌다. 무덤에 몸을 묻으니 겨울은 아무튼지 건넌다.

 

무덤에 들어 겨울을 건너니 느닷없는 봄이 오고, 드디어 무덤마저 다 벗는다.

―「벗다」 전문

 

이 시에서 무덤은 다의적인 의미를 갖는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는 가장 처연한 방식일 수도 있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모든 자본의 힘들을 거부하는 노력이기도 하고 그 자체가 이 모두를 포함하는 삶의 죽음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무덤을 벗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의 삶을 겨울로 만들고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어쩌면 언어로서 언어를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다. 봄은 그렇게 오는 것이다.

그런데 남태식 시인은 왜 언어의 힘을 회복하고자 할까? 그것은 바로 오늘을 위해서이다.

오늘은 꿈이 자살처럼 솟는 날이다.

오늘은 꽃이 기절처럼 터지는 날이다.

오늘은 봄이 비명처럼 틔는 날이다.

 

오늘은 저 먼 길의 끝을 당겨

우뚝, 절벽을 세운 날이다.

짧고 뜨거운 봄 여름 가을 꿈결인 듯 지나쳐

차고 거친 긴 겨울을 문득, 덥석, 안은 날이다.

돈에 휩쓸려 애써 잊은 만성두통을 찾은 날이다.

 

우리 미처 잠을 다 깨지 않은 날이다.

우리 미처 봉오리를 다 빚지 않은 날이다.

우리 미처 화음을 다 맞추지 않은 날이다.

당긴다고 당겨온 길의 끝이 벼락처럼 꺼져

오가는 길 모두 돈처럼 가르는 날이다.  

 

오늘은 잠도 꿈도 아닌 잠에서 깨어

다시 깊은 잠을 자는 날이다.

올곧은 꿈을 꾸는 날이다.

사철 숨과 숨을 이어 환하게 터지는 꽃,

다시 씨앗을 뿌리는 날이다.

오래 함께 환호하며 부를 봄노래,

다시 목청을 가다듬는 날이다.

 

꿈이 이미 자살처럼은 솟지 않는 날이다.

꽃이 이미 기절처럼은 터지지 않는 날이다.

봄이 이미 비명처럼은 틔지 않는 날이다.

돈으로 일찍 늙힌 민주 회춘하여  

오늘은 굽은 머리카락 허리 펴는 날이다. 이런,

생각을 자꾸 해보는 날이다.

―「오늘은」 부분

 

시인이 오늘 바라는 것은 꿈이고 꽃이고 봄이다. 그것은 그가 바라는 이 땅의 민주주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기절처럼은 터지지 않”고 “비명처럼은 틔지 않는” 것이다. 그런 날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이다. 이 모든 절망의 뒤에는 “돈”이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늙게 만들고 우리의 허리를 굽게 만들었다. 시는 바로 이 오늘의 언어이고 오늘을 위한 언어이다. 존재하지 않는 하늘의 뜻을 얻어 초월을 꿈꾸지 않고 안온한 과거로 돌아가는 퇴행을 꿈꾸지 않는다. 남태식 시인이 날 것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 오늘에 대한 실천적 힘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 힘은 다음과 같이 벽을 무너뜨리는 데 복무한다.

 

잠의 강에 빠져 비몽사몽 하는 아이들을 향해

한때 함께 설치던 잠은 무엇이었나

한때 함께 쓰리던 속은 또 무엇이었나

대답 없는 물음을 묻고 또 묻는 사이

안개무덤을 감싸는 벽은 차곡차곡 견고하게 쌓이니

오래된 아이들을 향한 물음은 그만 멈추고

오래된 아이들을 향한 바라기도 그만 멈추고

이제 다시 촛불을 든다.

 

일어나자!

솟구치자!

벗기자!

무너뜨리자!

우우우 함께 외치니

앞에 보이는 건

 

갈라져 솟구치는 잠의 강

부서져 흩어지는 무덤의 먼지

벗겨져 물러서는 무덤의 안개

무너뜨리지 않으면 감옥이라고 불릴

, 막아서는, 무너지는, !

―「다시, 촛불」 부분

 

벽은 모든 꿈에 대한 단절이다. 새로운 삶으로 가는 행진을 막고 갇힌 아이들을 죽음으로 삼키고 세상을 어둠 속에 빠뜨리는 감옥이고 권력의 성이다.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은 바로 촛불이고 시인에게 촛불을 켠다는 것은 바로 시를 쓰는 일이다. 남태식 시인의 시들은 바로 이렇게 언어를 통해 우리 삶을 가로막고 있는 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힘이 되고자 한다. 물론 그것은 지난한 길이고 실현되기 힘든 환상의 길이기도 하다.  

 

4. 맺으며

남태식 시인의 시는 직정적이기도 하고 거칠기도 하지만 거침이 없다. 이를 두고 혹자는 생경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런데 ‘생경하다’는 익숙하지 않고 어색하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꾸며진 언어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이런 시를 보고 생경하다고 표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태식 시인은 언어는 생경한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날 것 그대로의 언어이고 꾸미지 않는 언어이다. 꾸며진 언어 타인의 시선에 갇힌 언어 세상의 가치에 순응하는 언어 그리하여 자본의 힘에 의해 상품으로 변질된 언어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남태식 시인의 시는 바로 이러한 언어를 거부하고 맨 몸의 언어로 저항한다. 그것을 통해 주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목소리를 회복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제 언어는 소통의 수단과 소통의 복잡한 미로 속에서 그 날 것의 생생함을 잃고 잘 포장된 상품으로만 존재한다. 꾸밈이 없는 맨 언어, 인의 육성이 그대로 들리는 이 시집의 시어들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