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안개가 짙다. 안개가 짙으면 안개에 집중해야만 한다.

 

안개의 몸피를 더듬어 가늠하고 손가락 발가락의 수를 세어보아야 한다. 안개의 표정은 맑은가 어두운가, 입술은 여태껏 앙다문 채인가 배시시 열리는 중인가, 안개의 속살은 두꺼운가 부드러운가 또 얼마나 깊은가 음습한가 헤아려보아야 한다. 안개의 속살 사이에 들앉은 나무와 풀과 집과 그 안의 숨결들, 웃음들, 빈 들판의 눈물들, 쉼 없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한숨들을 코로 귀로 숨으로 느껴야 한다. 감전된 듯 감전된 듯 온 몸을 떨어야 한다. 언젠가는 걷힐 안개에 뒤따르는 햇살, 뒤따라 날아오르는 새떼들의  날갯짓 따위는 잠시, 어쩌면 오래도록 잊어야 한다.

 

바야흐로 때는 안개가 짙을 때, 어김없이 안개가 짙고, 지금 우리는 오직 이 안개에만 집중해야 한다.

 

 

 

 

무너져라, !

큰 집 대문과 무덤 사이에

벽이 있다.

 

귀를 잃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벽은

눈을 잃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벽은

입을 잃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벽은

 

번듯한 군대마냥 나름 꿋꿋하고

도시에 쏟아진 폭설처럼  

호들갑스러우나 시방 더 이상 자라기를 멈춘

피로한 식물이다.

 

가로막은 벽 이 편 무덤가에는

큰 집 대문을 향해 나아가는

무덤을 뛰쳐나온 거듭 거듭나는

여러 무리의 새 아이들

 

벽을 무너뜨려라.

 

!

한 무리의 아이들이 앞서며 땅을 밟으니

! !

또 한 무리의 아이들이 뒤이어 땅을 밟고

! ! !

또또 한 무리의 아이들이 연이어 땅을 밟는다

 

무너져라, !

 

무너진다, !

 

 

 

 

벗다

무덤에 안 드니 경칩 지난 눈바람도 무지 매섭다. 골골 휘저으며 눈발로 등성이를 내리 뭉개니 시려 가슴을 웅크려 오므린다. 눈밭에 몸을 숨기니 겨울은 아무래도 못 건넌다.

 

무덤에 드니 한겨울의 칼바람도 다소곳하다. 찬 기운 오래 일도록 밤새 빚은 눈의 뼈 굳히지 않고, 잠깐 든 햇살에도 모두 삭힌다. 무덤에 몸을 묻으니 겨울은 아무튼지 건넌다.

 

무덤에 들어 겨울을 건너니 느닷없는 봄이 오고, 드디어 무덤마저 다 벗는다.

 

 

 

 

아니오

무덤의 나라에는 아니오가 없다.

 

아니오가 없는 무덤이

허물고 쌓고 허물고 쌓는 것들은

모두 무덤

 

무덤들 위에 새로 피우고 돋우는

꽃들도 무덤

풀들도 무덤

 

무덤이 된

꽃들이 슬프다.

풀들이 슬프다.

 

아니오가 없으면

아니오가 없는 나라도 무덤

그 나라의 산천이 모두 무덤

 

아니오가 없는 무덤이 슬프다.

아니오가 없는 나라가 슬프다.

그 나라의 산천이 모두 아프다.

 

 

 

 

앓는 강

막무가내 모래를 퍼 올리는 기계소리에 꿈이 어지럽다. 없는 무덤에서 고려장 당한 주검으로 웅크려 숨을 졸인다. 물길을 막으니 오탁에 썩어 찌든 눈언저리의 검은 그림자가 두껍다. 오랜 선잠에 샘이 끊어진 마른 눈이 쓰라리다. 인공샘물을 채우고 더듬거리며 꺼풀을 찢는다. 보일락 말락 언뜻번뜻하는 눈동자는 맑은 하늘을 담지 못 한다. 오래 하늘을 품지 못한 눈동자는 녹이 슬어 벌겋다. 인공샘물은 밑 빠진 독이다. 묻지 마 관광에 묻지 마, 미래를 저당 잡아 당겨쓰는 이 누구인가. 마침내 밑 빠진 시멘트 독에 취해 실명하니 첫 키스의 풍경을 다 잃는다. 미래가 가뭇없다.

 

 

 

 

 

 

 

 

복제

이 강에서 투전을 벌여 보물을 낚은 자들은

다 먹튀다.

 

먹튀들이 낚시를 던지고 있다.

장미꽃잎들을 흩뿌리며 투전판을 늘리고 있다.

애초의 속셈대로다.

 

저 장미꽃잎들!

어김없다.

낚싯밥이다.

 

늘린 투전판에서 보물을 낚는 자들도

여전하다. 언제나

그 먹튀다.

 

남은 것은 모두

무덤이다.

 

생명의 물을 정화하다 투전으로 밀려난

강모래들로 쌓아올린 모래무덤이다.

속이 빈 깡통 같은, 그런,

 

무덤이다.

 

 

 

 

오늘은

오늘은 꿈이 자살처럼 솟는 날이다.

오늘은 꽃이 기절처럼 터지는 날이다.

오늘은 봄이 비명처럼 틔는 날이다.

 

오늘은 저 먼 길의 끝을 당겨

우뚝, 절벽을 세운 날이다.

짧고 뜨거운 봄 여름 가을 꿈결인 듯 지나쳐

차고 거친 긴 겨울을 문득, 덥석, 안은 날이다.

돈에 휩쓸려 애써 잊은 만성두통을 찾은 날이다.

 

우리 미처 잠을 다 깨지 않은 날이다.

우리 미처 봉오리를 다 빚지 않은 날이다.

우리 미처 화음을 다 맞추지 않은 날이다.

당긴다고 당겨온 길의 끝이 벼락처럼 꺼져

오가는 길 모두 돈처럼 가르는 날이다.  

 

오늘은 잠도 꿈도 아닌 잠에서 깨어

다시 깊은 잠을 자는 날이다.

올곧은 꿈을 꾸는 날이다.

사철 숨과 숨을 이어 환하게 터지는 꽃,

다시 씨앗을 뿌리는 날이다.

오래 함께 환호하며 부를 봄노래,

다시 목청을 가다듬는 날이다.

 

꿈이 이미 자살처럼은 솟지 않는 날이다.

꽃이 이미 기절처럼은 터지지 않는 날이다.

봄이 이미 비명처럼은 틔지 않는 날이다.

돈으로 일찍 늙힌 민주 회춘하여  

오늘은 굽은 머리카락 허리 펴는 날이다. 이런,

생각을 자꾸 해보는 날이다.

 

 

 

 

꽃과 새가 있는 집

1.

꽃들이 창백하다.

이 집에 든 꽃들이 창백하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이름만으로도

앞뒤 어떤 꾸밈말 없이

색깔만으로도 어울림만으로도

어여쁘고 빛나는 이름들이

이 집에 들어 창백하다.

하늘의 무지개

하늘의 별도 이 집에서는

경쟁이다!

전쟁이다!

모두,

창백하다.

 

2.

일요일, 봄맞이 산행을 갔다. 마른 나무껍질을 비집고 틘 어린 새들을 보았다. 무엇을 버티는 것일까, 날개를 한껏 오므린 어린 새들. 내려올 때 보니 올라갈 때보다 더 날개를 말며 웅크리고 있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뒤집힌 계절의 깡 추위와 오랜 가뭄이 이 어린 새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감옥이구나, 무덤이구나. 뒤이어 떠오르는 아이 생각. 0740 0730 0720 0710 0700 에서 2300 2310 2320 2330 2340 까지. 아이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학교에 갔다.

 

3.

나의 꽃잎, 너의 꽃잎, 나의 깃털, 너의 깃털,

하나만이라도,

 

창백한 꽃잎, 오므린 깃털,

그러하더라도, 하나만이라도,

 

내밀어,

내밀게 바꾸면,

자꾸 내밀고 또 내밀게 바꾸면,

 

처음엔 한 이파리 스치듯 지나는 가벼운 바람일지라도,

내민 꽃잎 내민 깃털 함께 꼭 잡게 바꾸면,

 

협력의 물결 고요하게 일렁이고,

공생의 바람 반란처럼 온 이파리 흔들어,

 

마침내 바뀌는 집,

마침내 따라 다 바뀌는 세상.

 

우선 하나만이라도,

내밀어,

내밀게 바꾸면,

 

 

 

 

30Km

재난의 중심부

 

반경 30Km 안에

나는 있다.

 

30Km

 

경주 월성 나아리 해변에서

52만의 시민과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까지의 거리

 

시속 60Km로 달리면

30분 거리

 

맹골수도 세월호 가라앉은 지점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섬 병풍도에서

진도 팽목항까지의

직선거리

 

컨트롤타워가 작동하지 않는 거리

컨트롤타워를 작동시키지 않는 거리

 

해프닝이 참사가 되는 거리

해프닝을 기어코 참사로 만드는 거리

 

수명을 연장하여 가동 중이던

후쿠시마 노후 핵발전소

반경 30Km

후타바마치 오쿠마마치 도오오카마치 나라하마치……

 

이곳은 그들이 태어난 곳

이곳은 그들이 자란 곳

1의 고향 제2의 고향 제3의 고향……

숨을 모아 결을 짠 삶의 터전

 

2011311

이 노후 핵발전소가 폭발했다.

 

그리고 그들은 추방되었다.

 

반경 30Km

 

재난의 중심부에서

재난의 주변부로

 

안전부재의 중심부에서

안전부재의 주변부로

 

안전불감증의 중심부에서

안전불감증의 주변부로.

 

이곳은 이제 버려진 땅

죽음의 중심부

그들은 버려졌다.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으리.

 

다시는 볼 수 없는 아이들

맹골수도의 아이들도

버려졌다.

 

재난의 중심부

컨트롤타워가 작동되지 않는

안전부재의 중심부

 

경주 월성 나아리 해변

노후 핵발전소

반경 30Km 안에

 

나는 있다.

 

나는 추방될 것이다.

 

나는 버려지리라.

 

 

 

 

숨은 꽃

어떤 이에게 사랑은

벼랑 끝에 핀 꽃이다.

 

굳이 숨기지 않더라도

숨은 꽃이다.

 

사랑의 절정! 같은 말은 어울리지 않아라.

가슴 깊숙이 감춘 손은 오래 전에 자라기를 멈추었으니.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 사랑은

손닿을 수 없는 벼랑 끝의 영원히 손닿지 않는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