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또 시가 올까?

 

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

 

이라는 허공의 그늘에 걸터앉아

 

조는 듯 귀를 열어놓고

 

결핍과 자긍사이에서

 

다시 막연해지는 일

 

더 숙연해지는 일.

 

이 또한 나쁘지 않다는 생각.

 

내 외투의 내피는 허무의 허무 속 구름덩어리라니깐!

 

                2016大寒 무렵

                       소백산 기슭에서 박승민

 

 

 

박승민/ 경북 영주출생. 숭실대 불문과 졸업.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작품 활동. 시집으로 『지붕의 등뼈』 가 있음


해설

상생과 포월(包越) 삶의 연대기

 

 

정우영 (시인)

 

 

1.

시집 『지붕의 등뼈』에서 박승민의 시들은 주로 슬픔 젖어 있는 걸로 보인다. 평론가 고봉준도 시집 해설에서 이렇게 쓴다. “‘슬픔 박승민 시를 느리게 관통하고 있다. 슬픔의 정서와 언어가, 고단한 삶의 슬픔과 상실의 비애가 그의 시를 휘감고 있다. 그래서일까? 시인의 시선을 통해서 드러나는 타자의 또한 무방비로 슬픔에 노출되어 있다라고. 적절한 지적이라 여긴다.

그는 시집에서 이처럼 온통 슬픔에 젖어 있었던 것일까. 그의 , 「역류성 식도염」에 연유가 드러나 있다. “혼자서 먹는데/울컥, 무언가 목구멍을친다. 무엇인가, 이것은. “아직 삭이지 못해/마늘 싹처럼 자꾸 올라오는 슬픔들이다. “너는 가고/나는 살아어찌할 없이 터져 나오는 부정(父情) 참담한 슬픔이다.

나는 바로 참담한 슬픔이 그의 시집에 실린 거의 모든 시에 영향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설령, 그가 즐거움이나 기쁨 쪽으로 시심을 옮기려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애조의 정서는 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자식 잃은 상실감과 별리의 통절함은 그만큼 크고 세게 사람들을 비애(悲哀) 쪽으로 몰아붙인다. 아마도 그는 상당히 오랫동안 착잡한 절망적 슬픔에 결박당한 세상과 만났을 것이다. 그러니 타자와 정서적으로 교감할 때조차 도저한 슬픔은 철철 넘쳐흐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이 도저한 슬픔이 철철 넘쳐흐를경우에 시는 감성을 주체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언어와 감성이 적절하게 균형을 맞추기 어려우므로 시가 감상성(感傷性)이라는 함정에 빠질 가능성도 그에 따라 높아지게 마련이다. 시집에서 박승민이 지나치다 싶게 슬픔에 기울어지는 바람에 가족의 등뼈는 부성이 아니라 모성이라 주목할 만한 발견도 이에 묻혔다. 동시에 그가 애정을 가지고 써가는 소외된 삶의 당당한 그늘 같은 덕목들도 숨어버렸다. 가슴에 아이를 묻은 자로서 이는 어쩌면 당연한 노정(露呈)이겠다 싶으면서도 적잖이 안타까운 부분이 아닐 없다.

슬픔이 우리를 끌고 가는 같지만 삶에 어찌 슬픔만 가득할 것인가. 시집을 닫으며 나는, 이후에 그가 우리 삶의 곡진한 세목에 눈과 귀를 기울여주기를 바랐다. 슬픔을 버리라는 아니라, 삶의 자잘한 애환들 속에 슬픔도 따라 섞여 스미어들었으면 하는 희원을 품은 것이다.

 

2.

 

, 이번에 박승민이 펴내는 번째 시집은 어떨까. 처음 스치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바람대로 그는 슬픔을 녹여내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슬픔이 강세일까. 그는 단박에 대답했다. 슬픔을 말리고 있다고. 시집의 표제작 「슬픔을 말리다」에서 그는 자기 슬픔의 변모를 이렇게 내어보인다.

 

체제下에서는 모두가 난민이다. 진도 수심에 거꾸로 박힌 무덤들을 보면 영해領海조차 거대한 유골안치소 같다. 숲속에다가 슬픔을 말릴 1인용 건초창고라도 지어야 한다. 갈참나무나 노간주 사이에 통성기도라도 나무예배당을 찾아봐야겠다. 神마저도 무한 기도는 허락하지만 인간에게 발만을 주셨다. 발씩만 걸어오라고, 그렇게 천천히 걸어오는 동안 싸움을 말리듯 자신을 말리라고 눈물을 말리라고 걸음 이상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말리다 말리다사이에서 혼자 울어도 외롭지 않을 방을 평쯤 넓혀야 한다. 神은 질문만 허락하시고 끝내 답은 주지 않으신다. 대신에 풍경 하나만을 위에 펼쳐놓을 뿐이다.

 

마을영감님이 가득 생을 지고 팔에서 빠져나온 같은 지팡이를 짚고 비탈을 내려가신다. 지팡이가 배의 이물처럼 하늘 위로 솟았다가 다시 땅으로 꺼지기를 반복하는 단선의 봉분. 짐만 번씩 밖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안으로 돌아와서는 간신히 몸이 된다. 짐이 몸으로 발효하는 사이가 칠순이다. 말리다에서 말리다驛까지 가는데 수없이 내다 필생의 가필加筆이 있었던 것이다.

_「슬픔을 말리다」 전문

 

시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는 이제 스스로 슬픔을 말리려 하고 있으며 누군가의 슬픔도 말리고자 한다. 이때 주목해야 포인트는 단연 말리다라는 낱말이다. 알다시피 말리다에는 물이나 물기가 날아가 없어지게 하다 하지 못하도록 막다 가지 뜻이 있다. 그는 여기서 말리다 아주 적절하게 활용한다. ‘말리다 다를 써서 슬픔에 대응하는데 그게 절묘하다. 그는 나와 너의 젖은 슬픔도 말리고동시에 슬픔에 빠져드는 누군가도 막아서려하는 것이다. 여기서 관심 가질 부분은, 그가 슬픔을 말리고자하는 의지를 보이며 이에 개입하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슬픔을 다치게 해서는 되는 까닭에 개입은 조심스럽다. “혼자 울어도 외롭지 않을 방을 평쯤 히는 정도에서 머문다. 그러나 이는 엄청난 변화이다. 시집에서 읽히는 그의 슬픔은 어떤 개입이나 나눔을 허락하지 않을 만큼 견고하게 닫혀 있었던 것이다.

왜일까. 무엇이 그를 이와 같은 능동적인 인간으로 바꾸었을까. 나는 진도 수심에 거꾸로 박힌 무덤들 표상되는 세월호 참사라고 본다. 도저히 있을 없는 막히는 떼죽음들을 접하며 그는 영해領海조차 거대한 유골안치소 다고 자각한다. 그리고 자각은 다시 체제下에서는 모두가 난민이다라는 인식의 변곡점을 이끌어낸다. 난민 의식을 공유하는 순간, 이제부터 그는 이상 개인이 아니다.

 

이때 누군가는 난민을 구해 달라고 신을 찾아 통사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神은 질문만 허락하시고 끝내 답은 주지 않으신다”. “무한 기도는 허락하지만 기도에 대한 응답도 없다. 그러니 그는 무엇을 해야 것인가. “슬픔을 말릴 1인용 건초창고라도짓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모두가 난민 체제下에서” 1인용 건초창고라는 가능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칠십 평생 마을 바깥을 벗어나 보지도 않은 마을영감님이라고 해도 난민 지위를 벗을 수는 없는 터에 이는 너무 소극적인 대처 방안 아닐까.

그러므로 난민을 벗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체제를 지워야 한다. 삶을 온통 난민으로 만들어버리는 체제를 벗지 못하면 그의 도저한 슬픔도 배가될 것이다. 문제는 체제라는 것의 성격이다. 우선은 우리의 삶을 찍어 누르는, 부조리한 정권하의 사회체제를 떠올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고 넘어가자니 보다 직접적인 대상으로서 정권의 실체가 시집에는 거의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좁은 반경으로서의 체제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말하는 체제 넓게 펼쳐, 이를 ()으로서의 체제 부를까 한다. 순행을 거스르는 모든 거역의 움직임들이다. 그러므로 그가 맞서고자 하는 체제는 순행하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모든 거역의 움직임들 대해서이다.

그렇다면 역으로서의 무지막지한 체제를 넘어설 있는 방책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감나무 가지를 잡고 있는 조롱박의

힘줄이 파랗다

 

쉰을 넘는다는

허공으로 사다리를 오르는

 

지상의 낯익은 온기들과 멀어져

바람과 구름의 낯선 사원을 지나

자기만의 별자리를 찾아 1인극 하듯 가는

진짜 우는 배우처럼 역役을 사는

 

흔들려도

잡아줄 손이 이상 옆에 없다는 사실

 

아득한 꼭대기에서부터

 

누군가의 발이 후들거리는지

밤부터 울고 있는지

어깨까지 내려오는

저릿한 통증

 

조롱박의 왼손이 감나무사다리를 잡고

장천長天의 푸른 밤을 혼자 넘고 있다

_감나무사다리 전문

 

사람이 쉰을 넘는다는 /허공으로 사다리를 오르는 이다. “지상의 낯익은 온기들과 멀어져/바람과 구름의 낯선 사원을 지나/자기만의 별자리를 찾아 1인극 하듯 가는 이며 진짜 우는 배우처럼 () 사는 이다. “흔들려도” “잡아줄 손이 이상 옆에 없다는 사실 깨우치며 말이다. 아하, 그런데 감나무와 조롱박은 어떤가. “감나무 가지를 잡고 있는 조롱박의 /힘줄이 파랗다.” 혼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조롱박의 손은 힘줄이 파랗게 기운차다. 조롱박은 또한 아득한 꼭대기에서부터/누군가의 발이 후들거리는지/밤부터 울고 있는지/어깨까지 내려오는감나무의 저릿한 통증 함께 견디며 아파한다. 둘이되 하나인 채로 고통을 나누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롱박이 감나무에 종속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왼손으로만 감나무사다리를 잡고/장천長天의 푸른 밤을 혼자 있다. 감나무에 의지하지만 그는 독자적이다. 삶을 나눈다고 하여 자주성까지 잃어버려서는 됨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밭이 아프다」에서도 삶의 연대는 생생하다. 사물과 사람의 어우러짐이 사람과 사람의 정보다도 깊다.

숨이 오르막에 닿을

명아주 지팡이가 근들근들

해뜨기 전에 언덕을 올라와서

돌밭에 쪼그려 한나절을 나던 파란 함석집 할머니

 

병이 나서 옆집 창창한 일흔 먹은 아재한테 땅을 부치라 했다 한다

다시는 밭에 오지 못할 거라고 마을사람들의 얼굴이 오동 그늘이다

 

사람이 맥을 놓으니 땅도 시름에 빠진다

 

채로 거른 갈아놓은 흙들이 버석버석 낯가림을 하고 있다

군데군데 심어놓은 쪽파들이 허리가 돌아간 여름 해를 넘고 있다

 

밭이 누웠으니 할머니의 병세가 급해진다

_「밭이 아프다」 전문

 

밭은 요물이다. 사람 손길과 맘길을 기막히게 알아챈다. 사람 발길 더디면 온갖 잡풀들 끌어들여 분탕질을 해놓는다. “숨이 오르막에 닿을 /명아주 지팡이가 근들근들/해뜨기 전에 언덕을 올라와서/돌밭에 쪼그려 한나절을 나던파란 함석집 할머니 같은 분을 밭은 반긴다. 이런 사람들에게 밭은 기꺼이 기름진 땅심도 허락하여 넉넉한 소출을 내어주기도 한다. 그러다가 덜컥, “사람이 맥을 놓으 땅도 시름에 지며 흙들 덩달아 버석버석 낯가림을한다. 아니겠는가. 할머니와 밭은 평생의 도반 아닌가. 생기와 의욕 잃는 당연하다. 어찌 밭뿐일까. “군데군데 심어 놓은 쪽파들 허리가 돌아간 여름 해를 긴다. 그런데 문제는, 밭과 교감하고 있는 할머니이다. “밭이 누웠으니 할머니의 병세가 급해지는 것이다. 동병상련의 포월적(包越的) 삶의 연대가 참으로 안타깝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자연의 이치이기도 것을.

그러나 중요한 밭과 파란 함석집 할머니의 같은 포월적 삶의 연대가 저문다 해도 이게 끝은 아니라는 점이다. 자연의 순환은 이어져 밭은 옆집 창창한 일흔 먹은 아재 함께 다른 포월적 상생기를 엮어갈 것이다. 바로 이런 순환이 땅과 민중의 참다운 연대기가 아닐까 싶다.

나는 지점을 소홀히 봐서는 된다고 여긴다. 이와 같은 상생의 연대기라면 체제가 간섭할 틈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이쯤이라면 난민 의식은 그저 접어두어도 좋지 않을까.

그런데 박승민은 여기에 모성의 포란을 더한다. 시집에서 지붕의 등뼈 모성을 발견한 그는 맨드라미에서 포란을 발견하고 포월적 상생의 미래를 열어두는 것이다.

 

맨드라미는 가득 새까만 알들 물고 있는데, 훨훨 속에서 열흘을 얼었다 풀렸다 하면서 어린 새끼들 하나 틔우는데, 방울방울 부레를 달아주고 비늘과 수초와 물비린내까지도 물고 놓지 않는데

 

후박나무 손톱 끝으로 발그레한 물소리 흐르는 , 노랑태처럼 벌려 수많은 새끼맨드라미들 삼월의 숲으로 돌려보내는데

 

마지막 새끼마저 구릉을 헤엄쳐 건넌 후에야 , 목을 꺾는데

_「맨드라미의 포란(抱卵) 전문

 

 

식물도 자식에게는 이처럼 애틋하다. 맨드라미에서 발견하는 모성은 참으로 눈물겹다. 세상의 모든 어미는 이렇듯 처절한가. “ 가득 새까만 알들 물고” “훨훨 속에서 열흘을 얼었다 풀렸다 하면서 어린 새끼들 하나 다음, “방울방울 부레를 달아주고 비늘과 수초와 물비린내까지도 물고 놓지 않는어미가 안쓰럽다. 동안 어미는 아마 먹지도 자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수많은 새끼맨드라미들 삼월의 숲으로 돌려보내 , 꺾일 수밖에. 맨드라미의 포란과 떠나보냄이 동물들의 그것 못지않다. 어쩌면 인간의 자식 사랑보다도 나을 같다. “마지막 새끼마저 구릉을 헤엄쳐 건넌 후에야 , 목을 꺾는데 시가 끝날 참았던 눈물 방울 , 떨어진다. 이는 요즘 내게 좀체 일어나지 않은 감정이입인데 어쩐지 낯설고 설렌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하지 않을까. 세심한 관찰과 정서적 유대를 통해 발견한 그의 시안(詩眼) 덕분에 모성 자락이 새로이 내게로 왔다. 자연이 이뤄가는 생명의 경이는 이처럼 언제나 경외스럽다.

생명을 틔운 맨드라미 싹은 분명 포란의 의미를 몸에 새기고 있을 것이다. 자라나는 세대들은 모성의 포란을 핏줄에 익히며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계승적 포란이 드러내는 뜨거운 삶의 연대기가 여기 펼쳐진다.

이제 알겠는가. 생명 가진 것들이 얼마나 뜨겁게 서로 상생하며 체체를 넘어서는지. 포란과 포월의 연대 앞에서 난민이라는 지위는 섣부르다. 그러니 순행하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모든 거역의 움직임들 체제여, 허접함을 알고 선뜻 물러서야 하지 않을까. ‘마저도 “3 검투사 칼날 겨누어 다시 들어 올리는데. “바람 속에서 흔들리던 자신의 푸른 거웃을 탱탱하게 겨누면서”(「풀」) 말이다.

 

3.

그러나 그가 아무리 말리려고 해도 그의 슬픔이 어찌 마르랴. 자식 먼저 보내는 것은 천형과도 같아서 슬픔이 뼛속에까지 저민다고 한다. 이는 도저히 어찌해 도리가 없는 근원적인 슬픔이 아닐 없다. 그래서 나는 그가 굳이 자기 슬픔을 애써 말리고자 애달아하지 않기를 바란다. 슬픔은 그가 아이와 나누는 지속적인 삶의 대화이자, 기억의 연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집詩集을 강물로 돌려보낸다.

 

봉화군 명호면, 너와 자주 가던 가게에서

과자 봉지 콜라 캔이 오늘의 제수용품祭需用品

 

오랜 바람에 시달린 노끈처럼

세월과 세월을,

간신히 잡고 있는 너의 손을,

이젠 놓아도 주고 싶지만

 

 

나는 살아 있어서

가끔은 죽어 있기도 해서

 

아주 추운 날은 죽은 자를 불러내기 좋은

 

지냈니?”

여전히 아홉 살이네!”

 

과묵했던 나의 버릇은 10 전이나 마찬가지여서

다만 시를 찢은 종이에 과자를 싸서

강물 위로 90페이지 흘려만 보내고 있다.

담배 향香이 빠르게 청량산 구름그늘 쪽으로 사라진다.

 

아무리 시가 허풍인 시대지만

그래도 1할쯤은 아빠의 맨살이 담겨 있지 않겠니?

 

나라는 곳곳이 울증이어서

곁이 편하겠다 싶기도 하고

히말라야나 그런 나라의 산간오지에서나 살까, 궁리도 해봤지만

아직 너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작년처럼 너의 운동장을 구경만 한다.

 

 

손가락 사이로 자꾸만 빠져나가는 뜨거운 살들이 얼음 밑으로 하굣길의 아이들처럼 발랄하게 흘러만 간다.

_12월의 의식(儀式) 전문

 

그가 오늘의 제수용품祭需用品 봉화군 명호면, 너와 자주 가던 가게에서 /과자 봉지 콜라 들고 찾은 명호강. 아이의 뼛가루를 물에 띄운 그곳에서 그는 아들 같은 자기 분신인 시집을 강물로 돌려보낸다. “오랜 바람에 시달린 노끈처럼/ 세월과 세월을,/간신히 잡고 있는 너의 손을,/이젠 놓아도 주고 싶지만” “나는 살아 있어서/가끔은 죽어 있기도 해서너를 보내줄 수가 없다. 그래서 찾은 아주 추운 날은 죽은 자를 불러내기 좋은 ”. 하지만 그가 있는 말이라곤, “ 지냈니?” “ 여전히 아홉 살이네!” 같은 말뿐. “과묵했던 나의 버릇은 10 전이나 마찬가지여서/다만 시를 찢은 종이에 과자를 싸서/강물 위로 90페이지째 흘려만 보내고 있다.” 말로는 그렇지만, 저기 떠가는 어찌 적힌 종이들만일 것인가. 별리의 통한이 함께 흘러가지 않겠는가.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의 슬픔이 여기에 이르러 말갛다. 차갑고 참담한 슬픔이 아니라, “하굣길의 아이들처럼 발랄 같은 스며 있다. 아마도 아빠의 맨살이 담겨 시집 찢어 보내는 제의(祭儀) 통해 그는 스스로 슬픔의 지배에서 다소간 벗어나지 않았을까. 제의는 죽음을 삶으로 끌어들이지만, 죽음에 매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억 재편을 도우며 슬픔의 무게를 벗겨낸다. 기억을 소외시키면 우울에 빠지기 쉬우나 공존하게 경우, 주요한 삶의 에너지가 된다.

나는 박승민의 명호강이 그러한 공간이라 여긴다. 공간은 단순히 아이의 유골을 뿌린 데가 아니다. 아이와 함께 새로운 기억들이 생성되는 곳이자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공존의 지대이다. 그러니 그의 슬픔도 말개질 수밖에. 그의 슬픔은 이제 그가 포월한 상생의 에너지로 가라앉아 것이다. 슬픔이되 슬픔만이 아니라, 심저를 정화하는 시의 마음인 애이불비(哀而不悲), 애이불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