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곰이 제 덩치를 키우기 위해 그 발바닥은 얼마나 많이 뛰어다녔을까 생각해 보면 시를 쓰는 일도 그와 비슷한 처지다. 내 정신의 무게가 빈약함에도 일곱 번째 시집을 갖게 되었다. 쓸데없이 덩치만 키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지난 시집 『고래 발자국 』에는 빈 여백의 공간을 독자에게 드렸는데, 이번에는 산문의 글을 통해 길 하나를 더 내어 보았다. 어쩌면 그 길이 가시밭일수도 있고, 향기로운 꽃밭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내 마음에 우담바라와 같은 마음 꽃을 피우기 위해 마음 밭을 가꾸었지만, 우담바라는커녕, 그 흉내도 내지 못한 부실한 꽃만 피웠다.

또 실패를 할 것이다 믿으면서 시집을 낸다.

다음에 제대로 해보기 위한 디딤돌을 놓기 위해서다.

시를 쓸 때 고생한 내 엉덩이에게 그저 고맙다.

 

 

<해설>

 

마음의 낙법(落法)과 시조의 도설(圖說)

 

유종인 (시인)

 

 

1. 마음이 도처로 가는 도중(途中)이니.

 마음이여, 진저리를 쳐라. 이렇게 말해놓고 나는 웃는다. 어찌하여, 마음이여, 진리(眞理)를 구하라, 하지 않느냐고 누군가의 지청구가 스멀스멀 기어 나올 것도 같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저리는 부정의 몸태질이 아니라 포용의 너름새로 가 닿아야지 하는 몸이 마음에 거는 시동 같은 것, 그 신호가 아닐까.

 진리가 화석(化石)처럼 아니 버력처럼 버려져 나뒹구는 시절에 우리는 마음도 외돌토리처럼 천민자본의 휘황한 그늘에서 강퍅해지고 메말라가는 걸 본다. 무용한 쓰레기로 내쳐진 진리의 버력돌과 물신(物神)으로부터 소외당한 마음의 부석돌이 만나도 그때는 이미 서로를 모르기 십상이다. 접촉해도 접근이 되지 않는 이 미망(米妄)의 난장판에서 가장 무용(無用)해진 것을 가장 무용(無用)한 방법으로 얼러내는 노래, 시조 또한 거기에 저촉된 채로 여전히 무용(無用)을 유용(有用)해 내고 있지 않을까.

 다시 그 무력해진 마음에 천민자본의 힘꼴 꽤나 쓰는 팔뚝 문신이나 어깨들이 들이닥친다 해도 주눅이 들 듯한 그 마음은, 그럼에도 여사여사한 사정을 품은 채로 부석돌의 마음을 차돌처럼 아니 대추나무 속살처럼 나름 여물어 궂기지 않고 살려내는 것이 또한 결기이자 알심이다. 

 그러므로, 마음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 마음에는 마음이 든다. 마음에는 묵었어도 진솔의 새 마음이면 그만이 되는 거다. 그러므로 마음에 돈을 들이지 않았으니 마음에는 마음 하나만 순정하게 다시 소낙비처럼 들이쳐도 그 메마름 일단 해갈하겠다.

 임영석은 이 해묵은 마음의 차력을 다시 들고 나온 시조계(時調界)의 역사(力士)다. 기골이 장대하고 숯 검댕이 눈썹에 근골이 우람한 거친 숨소리의 역사가 아니라 구순하고 낫낫하게 삶의 굴헝에 빠진 마음 밖의 마음들을 버릴 수 없어 손바닥과 몸의 터럭과 기름때가 낀 손톱 밑에라도 갈마들어 지니고 다니는 눈썰미가 좋은 차력사(借力師)이다. 그가 지닌 이 마음은 결코 저잣거리 약장수를 낀 차력사가 가슴에 대고 텅텅 두드리는 두꺼운 철판이나 타조알 만 한 차돌보다 가볍거나 간단한 것이 아니다. 마음은 마음을 지나쳐 몸을 축낼 수도 있으니, 마음에 마음을 상하는 일 또한 삶의 도처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오욕칠정(五慾七情)을 한없이 어리석어지더라도 그 마음 자체를 버릴 일이야 있겠는가. 요철(凹凸)의 너덜겅과 서덜의 마음길을 심경(心經)으로 재우쳐 되돌리고 단도리 하려는 몸짓, 이것이 임영석이 마음을 바랑처럼 걸쳐 매고 세상사의 난맥을 걸어가는 첫번째 단초가 될 요량이다.

 

천년을 굶었는데 몸무게는 항상 그대로,

먹지 않고 참는 데는 천년은 더 버틸 자세,

마음 속 소망이라면 봄나들이를 가보는 것.

 

할머니도 아버지도 그 소망을 빌고 살고

소쩍새 소쩍소쩍, 짝 찾는 노래에도

바위는 두 귀를 막고 나들이 갈 꿈만 꿔요.

 

                     -<바위> 전문

 

 마음을 전면에 내놓고 아, 그래 이 마음뿐이야, 하고 순정하고 기품있게 시작하려는데, 여기 턱! 허니 묵은 숙제마냥 가로막는 녀석이 있으니, ‘천년을 굶었는데' 도 쪼그라들지 않고 주눅 들지 않은 산수(山水)의 고전이며 자연의 골동(骨董)이 있다. 그야말로 물신(物神)을 넘어서는 진중히 제자리에 힘주고 좌정해 있는 이 바위라는 역사(力士)에게서, 해묵은 마음을 불러냈으니, 오합지졸 우리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마음자리는 생물이 아니라 실성(失性)의 여줄가리가 아닐까 뒤돌아보게 된다. 이렇게 무끈한 마음자리로 시작했음에도, 그 바위의 ‘마음 속 소망이라면 봄나들이를 가보는' 가벼움에의 몰입이며 그리움이라면 이건 분명 인간에의 친연(親緣)을 아는 탓이다. 비록 ‘할머니도 아버지도 그 소망을 빌고 살고/소쩍새 소쩍 소쩍, 짝 찾는 노래에도/바위는 두 귀를 막' 는 제 물성(物性)을 버리지는 못했지만 무거움이 무거움을 알고 가뿐하고 상쾌한 ‘봄나들이'의 답청(踏靑)을 기약하는 것은 몸을 가진 마음의 현시(顯示)이기 때문이다. 앞서 용렬하게도 내가 ‘아 그래 이 마음뿐이야' 하고 했을 때의 지극히 순진하지만 치졸한 발상이야말로 현실을 무시하는 해묵은 정신주의의 경박함일 수도 있다. 그러니 몸이 마음을 한 수 무겁게 눌러 가르쳤다 해도 되지 않을까. 바위여, ‘천년을 굶었는데도 몸무게를' 보존하는 그 몸의 마음이여. 그 둘을 나눠 무엇에 쓰려는지 나도 몰랐어라. 마음을 오래 눌러쓰고 있는 몸의 무거움이여, 이 얼마나 지극한 항상심(恒常心)인가.

 

오늘 밤 누가 와서 저 달방석에 앉고 갈까

석 달 열흘 바라봐도 얼굴은 안 보이는데

엉덩이 붙인 자리가 날마다 다 다르다

 

사람이야 앉는 습관 거기서 거길 건 데

달방석에 앉는 그분, 엉덩이는 참 묘하게

무엇을 그리워함이 달방석에 배어 있다

 

                    -<달방석> 전문

 

앞서 <바위>가 몸이 눌러 품은 오롯한 마음의 역사(歷史/力士)라 일견 부를 수 있다면, <달방석>은 사물의 운행이 보여주는 마음의 결이나 질감(texture)의 유연성을 보여준다. 바위가 소멸의 운명 묵묵히 견디는 견실한 영원성을 강조한다면, 달방석은 소멸에 생성을 덧대어 생명(生滅)의 어찌할 수 없는 변화의 불가피성(不可避性)을 불러낸다. 일체의 습관과 습벽이 나날이 더께가 져 달라붙는 곳, 그곳이 자리일 것이다. 그 자리는 단순한 앉을깨를 넘어서 우리가 삶에 처해 있는 여러 정황들로 분화(分化)된 정형들을 상정하게 만든다. 한 자리 오래 차지하고 앉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것을 시기하는 마음, 거기에 더하여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적극적인 동참들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권력을 들 수 있다. 크고 작은 권력의 지형에 따라 삶의 정황이 이리저리 바뀌게 된다. 세속의 자리는 항상 그 이권(利權)이 개입된 자리들인데 그 자리에 앉은 혹은 앉다 간 사람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달방석은 그런 변화무쌍한 부침(浮沈)이 이는 세속적인 자리를 일견 비유하면서도 오히려 그걸 포월(包越)의 이미지로서의 달을 불러낸다. 그 불러낸 자리에 우리는 지금 삶의 어느 한 앉을깨를 얻어 앉아 살아간다는 분위기를 드리운다. 차고 기우는 달의 상태가 그러하듯이, 사람의 자리가 결코 어느 한 상태의 궁극적인 지속을 담보할 수 없다는 걸 달의 흐름은 그대로 현시한다. 그러기에 차고 기우는 달의 자리는 ‘석 달 열흘 바라봐도 얼굴은 안 보이는' 흐름 위의 자리일 수밖에 없다. 흐름 속에 녹아버린 얼굴들로 인해서 개별적 존재의 자리는 무색해지기 마련이다. 그저 그 자리에 한시적으로 얹힌 모두의 ‘엉덩이 붙인 자리' 가 유효할 따름이다. 그러기에 달은 모두의, 모든 존재와 사물의 통합적인 자리의 이미지로 갱신될 수밖에 없게 된다. 거기에 개별적인 혹은 개성적인 얼굴이 갈마들 틈이 없는 것이다. 거대한 자연의 흐름에 우리는 얼굴이라는 개별적 기억이나 존재의 각인이란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거기엔 그 무엇을 넣거나 빼도 쉽게 개별화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의 얼굴, 흐르는 달의 유구함만 있을 뿐이다. 그런 달인데, 우리는 달을 통해 절대자와 그 절대적인 경지에 배어든 개별적인 존재의 인연을 그리게 된다. 비록 개별적인 존재의 구체성이 못 박혀 있지는 않지만 거기엔 흐름 속에 얼비치는 개별적인 인생유전의 뒤안길을 가만히 불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사람의 그림으로서의 달이 아니라 모두의 그림으로서의 달이기에, 우리는 그 달에 간구할 수 있고 고백할 수 있으며, 은밀한 기억의 소유로 전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모두의 소유(所有)로 분배되고 또 공유(共有)되는 지경이라니, 저 달이 매순간 달을 낳았다 할 수밖에 없음이다.

 

절벽이 자석처럼 내 발을 꽉 잡고 있어

아무리 발을 떼도 한 발자국도 갈 수 없다

마음은 뒷걸음쳐서 손에 땀만 가득하다

 

두 손에 땀을 쥐고 살아온 나의 생(生)이

얼마나 높았으면 썰물처럼 빠져나가

발아래 텅 빈 허공이 무덤처럼 보일까

 

                     -<절벽 위에서> 부분

 

스치는 인연만큼 허물은 다 있을 터,

얼마나 더 껴안아야 푸른 독을 삼킬 건지

스스로 묻고 답하는 내 마음이 더 쓰리다.

 

        ......(중략)......

 

꽃그늘 부럽다고 꼭꼭 숨긴 그 가시가

저 혼자 글썽이는 눈물이 아니기를

가시 풀 뽑지 못하고 돌아서는 내 맘이다.

 

                       -<가시 풀에게> 부분

 

 무엇 하나 제대로 나를 끌어안아 주는 따스한 품이 없다고 여겨질 때, 그 단단한 반석 위에서도 우리는 절벽을 보고 가시풀 우거진 ‘척박한 땅' 을 보게 된다. 앞서 마음의 오상고절(傲霜孤節)을 은연중에 선언했던 오롯함은 어느 사이 시르죽어 어디 기댈 데 없는 허방을 사방에 풀어놓게 된다. 어찌하여 이리 푹푹 꺼지는가, 마음이여. 이렇듯 은산철벽(銀山鐵壁)처럼 나를 단련시킬 줄 알았던 아니 나의 허물을 비호할 줄 알았던 사위(四圍)는 나의 편만은 아니었던가 보다. 구체적인 나락을 경험하게 하는 생활의 구체성이 생략된 채로 화자가 자신을 허무는 고통의 총량을 ‘가시풀' 이나 ‘절벽' 혹은 ‘무덤처럼' 보이는 ‘허공' 등으로 환유(換喩)한다. 그것은 단순한 수사적(修辭的)인 환유라기보다는 존재의 감각에 육박해 오는 육화(肉化)된 마음의 감각에 가깝다. 그래서 어떤 아픔은 마음의 아픔을 몸으로 연대한 채 그 마음을 오히려 활성화시키기에 이른다. 그것은 ‘내 아픔이 사라지면 스쳐간 그 인연은/무엇을 움켜잡고서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라는 성찰적인 아픔이며 더불어 그 아픔을 통해 연대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연민의 냅뜰성이 스스로를 궂기지 않으려는 자애(自愛)로 읽힌다. 이런 마음이고 보니,

 

그대와 함께하며 나무처럼 살겠다고

엉덩이 붙인 자리가 바늘처럼 보이는데

맨발로 걷기 않으면 그 아픔을 어찌 할까

 

너는 가서 별이 되고, 나는 여기 어둠 되니

빽빽한 이 숲길이 얼마나 헐거운지

풀여치 쓰르라미가 떠날 줄을 모른다.

 

                    -<고독 >부분

 

 여기서의 고통은 개별적인 파편화된 아픔만이 아니다. 하나의 존재를 다른 존재와 연결하는 전신(傳神)의 감각으로까지 톺아드는 지경이다. 일신(一身)이 아닌 소박한 대승(大乘)에의 자처(自處)가 도드라지는 대목이다. ‘바늘처럼 보이는' 그 자리를 ‘맨발로 걷기' 라는 스스럼없음이며, 기어코 ‘너는 가서 별이 되' 게 하고 ‘나는 여기 어둠' 의 살[煞/肉]을 끌어안음으로 해서 삶에는 늡늡한 여백이 생긴다. 그런 존재의 여백(餘白)을 채우는 것이 바로 자연의 지닌 여운(餘韻)인 셈이다. 그냥 허우룩한 데를 채우는 논다니나 가납사니의 지껄임이 아니라 ‘풀여치 쓰르라미가 떠날 줄을 모' 르고 울고 울어서 채워줘야 하는 마음의 천량인 셈이다. 그것이 비록 ‘전생의 업(業)이 뭔지 획(劃)만 느는 삶의 수치(羞恥)'(<날 일(日)자를 쓰며>) 일지라도 그걸 모른 체 하지 않고 나아가려는 알심이 있으니, ‘날 일(日)자 석 달 쓰니 창문 같은 하늘의 집' 을 현시(顯示)하기에 이른 것이 아닐까. 비록 구도(求道)나 수도(修道)의 적극적인 마음수련은 아닐지라도 거칫한 시간의 난처(難處)들이며 되알진 몽니들일지라도 그걸 회피하지 않으려는 순간, 그는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울어보지 않은 사람' 으로부터 멀어지는 자신으로부터 돈오(頓悟)의 심경(心境/心經)에 갈마들게 된다. 그러니 그는 자처하는 마음의 고수련을 몸이 마다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세상이 어리석다 이미 피해간 길 위에서 한바탕 세월의 난장을 치르고 있는 자신을 굳이 더 어리석다 구박하고 자책할 일도 아닐 터이다. 그는 그 남모르는 난처며 난장(亂場) 속에서 이리저리 어찌할 바를 몰라 가면서도 스스로 점수(漸修)해 가는 가운데 도드라지는 가락을, 시조의 외줄에 올려 얼러내는 줄광대의 여력으로 삼고 있지 않은가. 아픔이 마음의 구럭에 이미 여러 차례 들락날락거린 품새가 완연하니 말이다. 

 

골목길에 둥근 거울/ 눈알만 툭 튀어나와

골목을 구부리고/ 하늘을 구부려서

무엇을 하려 하는지/ 둥글게만 보인다

 

세상의 사람들이/ 바라보지 못하는 길

둥글게 끌어안고/ 살겠다는 저 마음

가까이 다가갈수록/더 둥글게 보인다

 

앞 못 보는 맹인 부부/ 둥근 거울 앞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지팡이를 더듬을 때

거울도 눈감은 사람/마음 길을 알려 줄까?

 

                  -<둥근 거울> 전문

 

 그런 측면에서 아픔은 다른 아픔을 그냥 지나칠 리 없고, 그 간과할 수 없는 눈길은 드디어 우리 생활 주변에 마음을 대신하는 외물(外物)로 자리 잡는다. 그것이 이 시편에서는 둥근 거울, 즉 볼록거울(convex mirror)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이 철면경(凸面鏡)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지극한 관심으로 인해서 기꺼이 사물을 긍정적으로 왜곡(歪曲)하기에 이른다. ‘골목을 구부리고/하늘을 구부려서' 봐야하는 속성을 통해 ‘세상의 사람들이/바라보지 못하는 길/ 둥글게 끌어안고/살겠다는 저 마음' 을 읽기에 이른다. 아니 그 구체성을 보기에 이른다. 마음 안에서만 꼼지락거리는 소심한 관심(關心)만이 아니라 너른 마음의 본성, 즉 관심(觀心)의 구체적인 외물(外物)로 세상 골목길에 우두커니 설 수밖에 없음을 현시한다. 그런데 이런 관심이 다른 아플 수 있는 마음과 몸을 배려함에도 불구하고 그 관심(觀心)의 거울로 다 비출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맹인 부부' 앞에 과연 이 볼록거울의 늡늡한 마음이 얼마나 큰 길라잡이가 돼 줄 수 있을까 회의한다. 누구에게나 밝은 눈이 어둑시니 육체의 눈이 감긴 사람에게 얼마만 한 소용이 닿을까 재우쳐 물을 수밖에 없다. 선의(善意)의 의도와 실제의 효용성 사이에서, 볼록거울과 맹인 부부는 드디어 마음이 아닌 몸과 몸이 만나는 사물로써 생소하고 격절될 수밖에 없을 터이다. 그러기 때문에 ‘거울도 눈감은 사람/마음 길을 알려 줄까?' 라는 의문형으로 마지막 구절을 맺는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3수(首) 종장은 재밌는 뉘앙스를 풍긴다. 첫 구의 ‘거울도 눈감은 사람' 은 ‘거울이 눈감은 사람' 과는 분명 다르다. 주체격인 ‘거울' 에 붙는 주격(主格) 조사(助詞)가 ‘~이' 가 아닌 ‘~도' 로 체념적인 동조(同調)의 분위기를 선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양가적인, 즉 양비(兩非)적인 측면에서 보면 맹인부부의 눈과 골목길에 선 볼록거울의 눈은 같은 어둠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마음이 아무리 애를 쓰고 애달파 해도 어쩔 수 없는 지경이다. 그것은 지극한 난처(難處)가 여실하다. 볼록거울이라는 육안(肉眼)으로 맹인부부의 ‘마음 길' 즉 심안(心眼)을 밝혀주기에는 불가항력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화자는 묻는다. 그 마음 길을 알려줄 수 있느냐고 거듭 간구한다.

 선의(善意)의, 선업(善業)으로 우뚝하게 섰어도, 그러한 마음에 ‘눈알만 툭 튀어나와' 있어도, 눈뜨게 할 수 없는 그 마음의 간원(懇願)이 오히려 삶의 도처(到處)에 임영석을 불러 세운다. 아니 임영석의 시조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래서 그의 볼록거울은 ‘볼록' 이라는 사물의 질감이 아니라 ‘둥근' 이라는 사물과 정신의 상태를 동시적으로 수식할 수 있는 포월(包越)적인 지향에 이른다.

 꼭, 이 시편에서뿐만이 아니라 그의 마음은 녹록하게 해결될 수 없는 가상이 아닌 실제의 삶을 도처에서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그는 묻는다. 삶이여, ‘마음 길을 알려 줄까?' 라고 궁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마음이 거느리는 시조는 해결사(解決士)가 아니라 차력사일 수밖에 없다. 그는 끝없이 마음을 불러오고 그 마음 밖에 있는 또 다른 마음을 빌려온다. 빌리는 것, 그것은 치욕이 아니라 삶의 용기이다. 마음은 물질이 아니기에 마음은 여전히 마음을 빌려도 축이 나거나 그늘이 지지 않는다. 해결되지 않은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 바라보는 눈길, 그것은 이미 해결의 도정(途程)속에 몸과 마음을 얹힌다. 이런 평정심이기 보면 조금은 흐리마리했던 정신의 혹은 헤윰의 숨이 트이지 않는가.  

 

2. 마음의 낙법(落法)과 숨을 트는 그림

 숨이 트인다는 말은 몸과 마음에 동시적으로 작용하는 순간적인 해탈의 속언(俗言)이며 큰 쾌락을 모르더라도 끊을 수 없는 삶의 지속을 의미한다. 숨이 트이는 마음과 숨을 얻어 사는 몸이 아니고서야 진정한 가락이라 부를 수 있을 건가.

 여기에 마음이 마음의 방법을 구한다. 마음이여, 진리를 구하라, 가 아니라 마음이여 몸처럼 마음으로 굴러보라, 라고 행동강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아니 마음이여, 조금은 덜떨어져 굴러볼 수도 있지 않느냐, 호기를 부려본다. 그 호기는 크고 작은 절망과 우여곡절을 거쳐온 자가 자신을 한껏 더 부려보고 싶은 기꺼운 생활 속의 수행심이 아닐까.

 마음의 낙법은, 낙망하여 감정의 굴헝에 빠진 감상(感傷)으로부터 자신을 돌려세우는, 즉 심정적인 자기 옹호에만 머물지 않는다. 일상에 대한 도식적인 관념과 편견, 관성적인 감각의 추수로부터의 거리두기에 그 일차적인 마음씀[用心]의 겨를이 생긴다. 즉 일상적인 결핍과 생활 속 상실의 도처에서 마음을 헤쳐 나오는 하나의 방법적 도모, 그런 그의 마음씀이 부딪히는 풍경의 인상과 인간적 관계의 정황들을, 임영석은 하나의 그림으로 환치(換置)한다. 그런데 그런 시조라는 율격의 그림으로 바꿔놓기 위한 방법적인 필법(筆法)이 무엇이냐 하면, 마음을 부딪쳐 나가떨어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경험하고 감각한 사물과 관계들에 절실하게 넘나드는 부딪힘, 그리고 그 부딪힘으로부터 나가떨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용인하는 것이다. 나가떨어지는 존재여야만이 자신만의 감각적 사유(思惟)가 스스로에게 편입되고 치우쳐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가떨어지는 존재를 스스로 즐거이 용인(容認)하는 것, 이것이 임영석의 시조가락이 여는 화법(畵法)의 마음바탕이다. 즉 마음을 낙망(落望)으로 돌려세우지 않고 낙법(落法)으로 되살리는 가운데, 그의 시조가락은 그림 한 폭을 얻어 간다.

 

세상에 등이 굽은 건 다 늙어서 굽었는데

낙타는 자궁 속에서 등이 굽어 태어난다

뜨거운 모래 바람이 휠 수 없는 자세로,

 

예수나 석가처럼 낙타의 쌍봉에는

감춰도 드러나는 마움의 혹, 사랑의 혹

아무리 힘이 들어도 내려놓칠 않는다.

 

            -<낙타는 왜 등이 굽었을까> 부분

 

 낙타의 등은 사막의 지평선처럼 밋밋하지 않고 굽었다. 말이나 소의 등처럼 매끈한 구석이 적으니, 짐짓 몇 걸음 뒤에 물러나 보면 밋밋한 배경의 지평선도 낙타의 굽은 등에 겹쳐 굽이칠 수 있겠다. 그런데 화자는 그런 낙타의 굽은 등은 ‘뜨거운 모래 바람이 휠 수 없는' 본래 태생적인 것이라 한다. 물론 그렇다. 그런데 굳이 이런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의 대비를 굽은[曲] 등을 통해 대비적으로 드러낸 이유가 서서히 마음의 붓질을 시작한다. 그것은 낙타의 ‘등[背部]'을 ‘혹[癭瘤]' 으로 더 완연하게 굽어보는 데서 연유한다. 미끈한 등짝이 굽이치듯 굽어진 데는 혹[癭瘤(영류)]을 이루는 마음의 계절을 그가 떠올리기 때문이다. 낙타의 등을 등의 문제가 아닌 혹의 돌올함으로 보는 시각 때문에, 낙타라는 짐승은 ‘미움의 혹, 사랑의 혹' 을 사막의 밋밋한 모래 지평선 위로 돌출시킨 마음이 유별난 동물로 그려질 수 있음이다. 이는 ‘세상에 등이 굽은 건 다 늙어서 굽었' 다는 통념으로부터 비켜나가는 생각의 여울목을 탔기 때문에 가능해진 눈길이다. 그는 그 여울목에서 사막을 떠도는 낙타를 새롭게 그리기 위해 낙타의 등에 속한 혹을 낙타의 혹에 여울지는 등으로 바꿔놓는 마음을 보인다. 이것이 그가 벌이는 마음의 은밀한 낙법이자 사물의 보는 시적 초식(草式)의 일단이다.

 

어둠은 눈이 없어 소리로만 앞을 본다

아무리 먼 불빛도 어둠의 두 귀에는

소망을 빌고 있다는 소리로만 들린다.

 

어둠은 그대 몸이 불빛으로 타오를 때

그대가 가야 할 길, 그 길만 내어주고

나머지 길들은 항상 어둠 속에 묻어둔다.

 

            -<어둠 속에서> 1, 3수 부분

 

 외부의 현상으로서의 어둠과 내부적인 인식의 어둠을 자연스럽게 갈마든 채로, 인간 중심의 시선이 아닌 어둠을 적극적인 주체로 활유화(活喩化)시켜놓았다. 물론 그 어둠이라는 주체조차도 화자의 독특한 인식이 이미 큰 틀에서 배어있는 상태이기는 하다. 그 어둠이 ‘눈이 없어 소리로만 앞을' 보는 소경의 지경인데, 그럼에도 시각적인 대상인 ‘불빛'을 ‘소망을 빌고 있다는 소리' 로는 귀띔처럼 듣는다. 그러니 어둠은 ‘그대가 가야 할 길, 그 길만 내어주' 는 아량을 보이며, ‘나머지 길들은 항상 어둠 속에 묻어둔다' 는 전언을 회화화(繪畵化)한다. 즉 어둠을 어둠 그 자체로 획일적으로 도배하지 않는 어둠의 심정적 뉘앙스(nuance)를 만드는 것, 이것이 어둠을 대하는 화자의 마음 공법(工法)이다. 어둠을 어둠 그 자체의 맹목적인 상태로 방치하지 않는 채 거기 마음의 여울물 소리를 들이밀어 주면서부터 소리도 빛도 거기에 더불어 공명하는 입체적인 터를 만든다. 그러므로 그림은 그런 도드라지는 기척들, 평면을 일으켜 세우는 기미와 기척의 작당과 봉기로 하여, 다시 평면의 입체성을 간구하게 된다.

 

막, 모를 낸 논 가운데 날아와 앉는 왜가리,

 

어디서 배웠는지 내려앉는 낙법에는

 

물방울 하나 안 튀기고 벼 한 포기 밟지 않는다

 

               -<낙법> 전문

 

 일상적인 평면의 마음 상태에 파문을 열어주는 것, 그것은 시조가 바깥세상 사물들을 향해 율격이 배인 화면(畵面)을 포섭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즉 구미가 당기게 하는 풍경의 인상들, 관계의 도드라진 면면들이 지닌 발작적인 기미(機微)들은 예사롭지 않은 화의(畵意)를 예감하게 한다. 그러니 여기 '왜가리' 는 예사 왜가리이나 예사스런 왜가리를 순간적으로 훌쩍 벗고서 ‘막, 모를 낸 논 가운데' 내려앉는다. 그래 다시 보자, 다시 보여주자, 하며 왜가리는 그동안 숨었던 자세, 포즈를 다시 취한다. 그렇구나, 보려고 하니 다시 보인다, 마음이여. ‘물방울 하나 안 튀기고 벼 한 포기 밟지 않' 고서 공중에서 지상으로 내려앉는 그 왜가리는 날개를 접고 지상을 딛어 보였으니, 그것은 본격적인 마음의 보법(步法)을 예감하는 낙법(落法)의 어감이다.

 사람 같았으면, 아니 나 같았으면 첨벙첨벙 물탕을 튀기면서 어린 벼 꽤나 짓밟았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심신은 지청구를, 세속의 욕(辱)됨을 절감하게 된다. 살아있음 그 자체의 미숙성이 욕됨이라면, 그걸 넘어서고자 하는 마음은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는 왜가리의 낙법에서 경외(敬畏)의 자연을 징험(徵驗)한다. 그런 면에서 인간에 있어서의 자연은 완성되고 완결된 자연이 아니라 숙성되고 고쳐지고 수습되는 자연이 아닐까.

 

괄호도 아니고 반 괄호로 달이 떠서

어떤 말의 의미들을 풀어줘야 할 것인데

앞 문장 깊은 여백에 품은 글이 사라졌다.

 

괄호 () 로 묶어내도 쭉정이가 많을 건 데

어떻게 칠남매를 혼자서 키웠는지

반 괄호 달빛을 보니 그 의문이 풀린다.

 

둥그런 달빛 속을 파고 든 저 그림자

제 몸을 다 내주고 그림자로 채운 마음

서로가 품고 품어서 반 괄호가 되어 있다.

 

불혹의 내 나이도 반 괄호가 되었지만

자식의 숨소리에 쫑긋 세운 내 두 귀는

언제나 초승달처럼 앞 괄호를 열어둔다.

 

              -<초승달을 보며> 부분

 

 일견 인간의 근원적인 미숙성(未熟性)과 자연의 완미(完美)함이 대척적인 관계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것은 외형적인 완결됨의 이미지인 만월(滿月)이나 양괄호(兩括弧)에 대한 선험적인 통념이거나 편견에서 비롯됨을 화자는 일생을 통해 알아간다. 그것이 하나의 깨달음으로 그려지는 것이 바로 '초승달' 이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등진 아버지 대신 ‘콩깍지 속 콩들처럼 칠남매를' '육십 평생' 길러내며 ‘반 괄호' 의 초승달로 살아냈다는 것에 주목하니 말이다. 편모(偏母) 슬하(膝下)라는 이미지는 둥근 보름달처럼 풍족한 것일 수는 없을 터인데, 이는 화자 자신이 자식을 키우는 편부(偏父)의 입장에서 다시 되새김질하게 한다. 결국 결핍과 결손의 문제가 아니라 ‘제 몸을 다 내주고 그림자로 채운 마음'의 경로(經路)를 이해하는 몰아적(沒我的) 관계의 의미, 그 돌올한 자기 나눔이 ‘초승달' 이라는 완미한 달의 변주(變奏)임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초승달은 곧 만월이 자처한 포용적 이미지의 구순한 눈썹[蛾眉]으로 변용될 수 있음이다. 이는 곧 만월을 품고 있는 초승달의 넉넉한 열림의 자세, ‘자식의 숨소리에 쫑긋 세운 내 뒤 귀' 처럼 화자에게 일방적인 결핍의 뉘앙스가 아닌 '품고 품어서' 살아갈 삶의 포월적(包越的) 지향을 품은 구도, 여전히 그려지고 그려가야 할 삶의 그림을 예시한다.

 임영석의 이번 시편들에서는 유독 마음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한다. 그것은 예사스런 일이 아니다. 편의적인 발상의 말만은 아니다. 마음을 그렇게 후려치고 헤살이 들게 하는 굴헝의 대상, 그 세사(世事)를 새뜻하게 감득(感得)하기 위한 재우침에 있다. 그 새롭게 재우치는 가운데 그의 마음은 그의 마음 가운데서 또 다시 태어난다. 아니 또 다시 구르고 일어난다. 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되 낙상이 아니라, 낙법으로 전환된다. 그런 그의 마음에서 그의 그림이 나온다. 수사법상의 이미지(image)만이 아니라 마음의 진솔한 구경(究境)을 불러내는 시조의 가락에 그는 그림의 운(韻)을 띄울 줄 안다.

 

산에서 산을 본다.

산 넘어 산, 그 넘어 산,

 

산이 산을 업고 업어

청산도가 그려졌다.

 

해 지면

업었던 산이

다시 업혀

그려진다.

 

    -<청산도(靑山圖)> 전문

 

 보라, 청산(靑山)을 얼러내는 이 단시조의 가락에 부족함이 있었던가. 화려한 수사가 아님에도 소소한 마음의 터럭 하나도 그늘질 일 없이 청산 앞에 마주하게 된다. 어찌 그러한가. 그것은 ‘산이 산을 업고 업는' 자연스러움과 기꺼움 속에 여울지고 어울리기 때문이다. 임영석이 그토록 많이 불러내 만인 앞에 새삼스레 손겪이하듯 들이댔던 ‘마음' 을 여기 이 ‘산' 에 갈마들어 놓은들 별 버성김이나 무리가 없다. 그러니 그림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그림으로 갈마드는 지경을 어찌 예사롭다 할 수 있으랴. 결국 그는 천민자본의 세상에 시난고난 병들어가는 마음을 당당히 들고 나온 차력사(借力師)다. 어눌해지고 내쳐짐 당한 마음을 되가지고 나왔음에도 그는 쉽사리 주눅 들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그 빌려온 마음을 ‘업고 업어' 새로이 되새김질하고 북돋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번 시편(詩篇)들은 하나같이 마음의 힘을 빌린다. 그 마음은 바로 사랑이다. 케케묵은 마음의 더께를 걷어내고 뭇 사람들의 호기심과 박수를 불러낼 수 있고, 급기야 소리 없이 눈시울을 적시는 마음의 차력, 그것은 바로 사랑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의 진진한 속내에 임영석이 도래샘을 대고 있음이다. 사랑으로 가는, 사랑이 아니었다면 시조의 운(韻)을 탈 수 없는 그림을 그는 그의 시조가락에 기꺼이 ‘업고 업어' 가고 있음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