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영화 이야기 1               

    - 우랄산맥의 첫눈 

 

  눈이 내렸다.

  서울 경기지방 대설주의보

  힘 있는 권력의 혁명일수록 숨죽여 시작하고

  신속하게 끝장을 본다

 새벽부터 간이역에 집결한 폭력은 

  조용히 수많은 발들을 묶고 입을 틀어막았다   

 

전차에 실린 라라가 떨고 있다           

눈보다 먼저 역사에 도착한 사랑

사뿐 땅에 내린 그녀가 뒤를 돌아본다

하얀 발이 안개 같은 약속 두리번거린다

갈망은 어디로든 휘어지고 싶었을 것이다

슬픔 곁으로 젖어가는 오랜 기다림을

묵묵히 지켜내고 있는 저 눈사람

 

끝내 그녀에게 달려가지 못하고

와르르 쏟아지는 지바고

쓸쓸한 오르막에 천상의 손들 내린다    

 

빗나간 사랑은 유리벽에 우거지는 겨울 숲

겨울 숲이 한 잎씩

발랄라이카의 떨리는 입술을 물고

울음을 부풀리는

자작나무 이마 위에서

우랄산맥의 혹한이 떨고 있다

 

총도 칼도 들이대지 않은 순백의 거대한 힘

막 잠깬 월요일을 덮쳤다 

       곳곳에서 혁명에 맞서는 근력들이

       도로에 붙잡힌 헛바퀴를 발버둥친다  

       첫눈은 죽어가면서 까지 두근거리는 낭만을 낳느라  

       눈사람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흑백영화 이야기 2

         - 바다로 간 젤소미나 

                                             

 

   뒹구는 술병과 컵라면 그릇이 비를 맞는다

   발자국들 꺼져가는 모래톱에서 

   털 빠진 늙은 개가 혼자

   비 맞는 바다를 보고 

   짖는다

 

    길은 바다에 와서 

    비로소 편안하게 누웠다

    둥둥 북을 울린 백치의 길이

    먼지처럼 떠돌던 머나먼 여정이

    봄빛에 소꿉놀이 밥상만 차려놓고

    석류꽃처럼 모가지가 뚝! 떨어져버린

    그 아이의 양지쪽 봄날이

    가볍게 날아와 바다에 누웠다

 

    모래톱에 쭈그리고 앉아

    우산 밖에 웅성대는 빗방울을 듣는다

    너무 가까이 서 있는 눈물의 기척

    아직도 지난날들이

   손가락 사이에서 손톱 밑에서

   음지와 양지를 건너다니는 걸

   오래 모르는 척 했다

   몇 겹의 가슴이

   빼곡한 상처 페이지를 해풍에 넘기며

   짓무른 어둠을 털어내느라

   아까부터 요란하게 옷자락을 뒤집는다

              

    다 놓아 보내야 한다고  

    길 위에서 시작된 것들은

    다시 길 위로 돌려보내고  

    오래 만지작거린 슬픔들 손을 놓자고

    바다로 달려 나가는 소사나무 숲에

    꼬불꼬불 겨울비 내린다

  

 

 

         흑백영화 이야기 3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들의 시간도 흘러갈 거야

늙은 노먼의 낚싯줄에 드리워진 은빛 포물선이

허공에 그리고 가는 기억처럼 그렇게  

가물하게 멀어져가는 소실점 위에 그렇게                

네가 열 두 살적 옥상에서 며칠을 퉁탕거리며

꿈으로만 짓던 띄울 수 없는 큰 배

그 무모하고 지루한 희망의 기억들처럼

모두 그렇게  

  

너무 늦을 때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정말 모르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영화감독은 소감을 말 했었지 아마

 

수인번호 1393번

우리들의 면회 십분은 너무도 길어서

너와 나의 가슴 밭에 빼곡히 심어야 할

고향의 마늘씨 같은 얘기들은 다 덮어둔 채

일상만 씨잘 데 없이 혓바닥에 올려놓고

실없이 이리저리 굴리며 만지작거렸지

 

갈라터진 시멘트벽 사이에서 

웅숭깊은 네 꿈은 너무 젖어 있어서

온기 빠져나간 얼부푼 너의 겨울을

꾹꾹 찍어 눌러 내게로 스미게 하고 싶었지 

너를 다시 콘크리트 벽 속에

밀납인형처럼 봉인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등덜미가 너무 시려

잠시 내 희망의 프로그램이 헝클어졌지

            

투명하게 잘 벼린 겨울햇살

악! 소리 한번 못 내게

목젖 깊숙이 찔러오고

 

달리는 창유리는 왁왁대며

겨울나무들의 직립을 넘어뜨렸어

아무래도 우리의 겨울이

너무 더디 흘러갈 것만 같은

안타까운 예감 하나가 

끝내 따라오던 차창

 

 

 

   

 

 

 

 

  

       흑백영화 이야기 4

        -모던 타임즈

 

 

  검은 굴뚝나비 한 마리가 컨베이어벨트 속도에 끼인 가쁜 숨을 훔쳐서 탈출을 합니다 지팡이를 들고 오리걸음 기우뚱대며 날아갑니다 그 곁에 날개가 찢긴 꼬마흰점 팔랑나비가 팔랑팔랑 말없이 따라갑니다 주위를 돌아보던 팔랑나비가 길에 덜퍽 주저앉아 웁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돼요 이젠 다 소용 없어요 끝은 이렇게 가까이 있었다는 걸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거죠? 아뇨 그렇지 않아요 힘내세요! 결코 죽는다는 말만 하지 말아요 우리가 찾아가는 달콤한 꽃밭을 믿어 요 오래 기다렸잖아요 우린 해낼 수 있어요 길이 끝날 때까지 가보는 거에요 더 이상 슬픔을 욱신거리지 말아요 우린 너무 많은 것들을 조이기만 했어요 피 흘리는 기계도, 무례한 기계가 먹어버린 나비들도 이젠 잊어줘야 해요 우린 좀 더 정중하게 우리 스스로에게 예의를 갖추고 꿀을 따러 가야 해요 그리고 꿀을 따려면 해가 뜨는 꽃들에게 가야해요

 

해바라기가 노랗게 피어나는 신도시 여름밤

바로 옆 공단에선 검은 눈을 켠 다이옥신이

밤새 굴뚝을 탈출해서 꽃들에게 가고 있다

 

 

 

 

  

 

             이발소 그림 1

    -호랑이

               

               

남쪽 어디쯤 골 깊은 산자락이었을 거야 하늘을 뭉텅 끌어당긴 바위 아래 제비집처럼 깃든 암자가 있었지 그곳에서 서른 살 명자아줌마를 만났어 눈이 깊어 눈물샘도 깊던 여자 무(巫)병 들어 딸 하나 낳자마자 시집에서 쫓겨나, 실성실성 산으로 왔다는 소문만 분분하던 그녀 잠시도 쉬지 않고 굴러가는 바퀴였지 절 마당에 그녀가 심었다는 봉선화와, 이름도 알 수 없는 꽃들이 어깨를 기대어 시간을 넘겨가고 있었어 생이 너무 화끈거릴 때마다, 산으로 내닫는 그녀의 야성은 거침없었어 온갖 산나물을 뜯어오고, 버려진 자갈밭 풀을 매며, 아욱이며 근대며 쑥갓 그 소소한 것들 앞에서는, 깍듯하게 진지하고 공손하던 그녀의 바퀴 새벽 네 시면 도량석을 치는 스님 따라, 암자 뒤 높은 바위는 산이 흔들리도록 우렁우렁 울었어 동도 트기 전 벌써 산왕대신! 산왕대신! 포효하던 한 마리 짐승 그녀의 통성 기도가 날마다 달구어 놓은 노을 먼 하늘 먼 산의 이마를 아침마다 붉혔지 하늘에 대고, 허공에 대고, 산에 대고, 닳고 오그라진 두 손을 합장하던 그녀의 구원 그녀의 영원이고 목숨이던 호랑이 산왕대신 낮은 하늘이 산빛의 고요를 첩첩이 끌어안고 풀들이 흔들림을 멈춘 어느 아침, 석불 같은 그녀의 명상이 너럭바위에 앉아, 바람 따라 온 내 손을 붙들어 앉혔지 시간 더 축내지 말고 어서 산을 내려가라고, 그래도 이왕 사람살이 살 바엔, 사람한테 부대끼며 사는 저 아래 세상이 낫다고 이 시대의 바리대기 자청하던 그녀의 눈, 아득한 산 아래로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이 젖고 있었지 억지로 떼어놨던 젖먹이도 개 같은 남편도 보고 싶다고 바르르 떨리던 눈썹 그 때 내 목울대를 밀고 올라왔던 이물감은 무엇이었는지 다만 내가 자꾸 바닥으로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며 산 아래 마을로 슬픔들을 부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긴긴 장마가 시작되었을 거야 난 겨우 몇 개월을 더 그 바위에 붙어살다 산을 내려오고 말았지 그 후 몇 번의 계절이 돌아나가고 내가 다시 산을 찾았을 때, 그녀의 바퀴는 굴러가 버리고 없었어 흔적조차 따라갔는지, 산만 덩그러니 남아서, 가죽뿐인 산왕대신을 지키고 있었어 낯설고 차가운 사람 몇 송이 피어 있는 암자를 뒤로 한 채, 터벅터벅 걸어 내려오는 산길을, 안개가 삐그덕! 열어 주었어 그 때, 그녀처럼

             

 

 

 

 

     

             이발소 그림 3

              -이브의 보리밭

 

뚜깨는 언청이에 반벙어리였단다 중늙은이 다 되도록 장가도 못 간 제 폭폭한 속 안 들키려 밤낮으로 소처럼 일만 해댔지 뚜깨는 돈을 제법 모은 알자배기 부자라고, 사람들은 은근짜 시샘 반 부러움 반 입질들을 했어 농사철을 종횡무진 갈고 다니는 뚜깨의 쟁기질과 소를 부리는 재주는 동네에서 단연코 으뜸 이었어 암! 으뜸 이었고말고 억센 소를 천군만마이듯 기운차게 호령했지 입술을 씰룩대고 콧소리 킁킁대며, 고삐 틀어쥔 팔로 소의 옆구리 바람소리 나게 후려치며 발을 굴렀지 그 등등한 기세와 고삐 쥔 손끝의 남다른 재주는, 콧김 아무리 씩씩 불어대던 억센 뿌사리소도 꼼짝 못했으니까 그런데 여자 후리는 재주는 젬병이었던가 봐 그런 뚜깨의 가슴에도 봄바람은 불었어 먼먼 송이도 섬에서 적잖은 돈을 치르고 색시를 데려왔다는 소문이 동네에 왁자했거든 가무잡잡한 얼굴에 볼우물 쏘옥 패인, 초사흘 달처럼 갸름한 눈으로 웃음별이 뜨는, 어른들 말에 의하면 제법 농익은 섬색시였다지 병신에게 딸을 내줄 수 없다던 동네 사람들도 송이도떡!~이라 부르며 모두 제 식구처럼 다독였지 거 왜 있잖아 시집 온 친정 동네 이름 따서 해남떡! 임실떡! 간골떡! 하며 붙이던 호칭 말야 서사리 보리밭은 늦은 오월을 맞으며 한창 무르익어 갔어 보리알들이 툭툭 붉어질 탐나는 유월을 목전에 두고 보리 모가지들이 잘 여물어 가고 있었다니깐! 그러던 어느 날인가 우리들이 참새처럼 재잘대며 학교를 가는 아침 이었어 시집 온 지 얼마 안 되는 뚜깨 아내가 이슬 촉촉한 보리밭에서 엉금거리며 나오는 거야 글쎄! 부스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넘기며 젖은 치마를 단도리 하는, 그 이른 아침부터 흥얼대며 노래를 부르는 그녀가 우린 이상하고 무서웠어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야 보리밭에 전에 없던 길이 나기 시작한 건 우리들은 학교 가는 길에 이상한 뚜깨 아내를 보기 위해 아침마다 보리밭 지나는 먼 길을 돌았단다 큰 달래를 뽑아 크기를 겨루며, 가방 들어주기, 업어주기, 연필주기 온갖 내기란 내기는 다 하면서 말야 그때부터 보리밭은 우리들 새 놀이터가 되었어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 동네 아저씨들도 씨름을 하는 놀이터가 된 거야 아침이면 보리밭 여기저기가 제멋대로 뭉개져 있었거든 이른 아침 동네아저씨들이 고개를 외로 꼬고, 우리들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바쁘게 걸어 나가며 등을 돌렸거든 그러던 어느 한 날, 학교에서 난리가 났지 구령대 앞에서 길길이 뛰는 보리밭주인과 쩔쩔매는 선생님께 우리들 아침 수업은 몽땅 잡혀버렸어 "서사리 아그덜은 구령대 앞으로 한나도 빠진 사람 읎이 다 집합해라 잉”선생님의 노여움은 마이크를 집어 삼킬 듯 웅웅거렸지 대가리 박고 엎드려뻗쳐, 제자리 쪼그려 뛰기, 오리걸음으로 축구골대 돌아오기, 1,2,3등만 빼고 다시 돌아오기 온갖 벌로 그날 아침 선생님 분이 좀 삭은 다음, 우린 또다시 당장 하교 길부터 신나는 보리밭 놀이터로 돌아가지 않았겠어? 서사리 보리밭은 갈수록 길이 더 잘 나서 번들거리고 그녀는 나날이 더 신비로운 우리의 구경거리가 되어갔어 사람들이 우물가에 모여 앉아 수군거리기 시작했지 날마다 머리채 쥐어뜯는 엄마들 싸움이 났는데도 우리들은 그녀를 보면 무언지 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혔어 보리모가지를 뽑아 뱅글뱅글 돌리며 웃음을 풀어 보내던 갸름한 눈, 말을 닫고 발갛게 상기된 웃음, 치렁하게 늘어뜨린 까만 머리칼이 우리들 혼을 쏙 뽑아갔거든 그날 밤은 내가 몹시 배앓이를 했었을 거야 아마! 달이 참 환했었어 마당을 한참이나 질러야 하는 텃밭 끝의 치깐은 너무도 멀었고 무엇인가 등덜미를 덥석 챌 것만 같은 무서움에 오금이 저렸지 하지만 나는 급해서 무작정 마당을 질러 달렸지 담장 밖의 가죽나무가 길게 늘어진 제 그림자를 우멍히 들여다보고 있었어 그들은 금방이라도 나를 덮칠 것처럼 큰 팔을 벌리고 서 있었지 그 때 담장너머로 히끗, 골목 안 달빛아래 커다란 물체가 서 있는 거야 글쎄 사람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아무튼 나는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수도 없이 온몸이 얼어붙었어 그리고 힘도 없이 설사는 줄줄 바지 속으로 흘러내렸지 그래! 그 우직하게 큰 등치에 구부정한 허리하며, 고목처럼 고요하고도 청승스럽게, 서늘하고 괴기스럽게, 또는 비장한 각오나 있는 사람처럼 섬뜩하게 우뚝 서 있던 그는, 정말 뚜깨였을까?. 사실 꼭 그였다고 억지를 쓸 수는 없어 잠결이었으니까 난 그때 배가 너무 아파 온전한 내 정신이 아니었을 수도 있으니까 어쨌든 그 다음날부터 동네에 뚜깨도 그의 아내도 보이지 않았다는 거야 그가 살던 오두막집 방문은 꼭 닫혀 입을 열지 않았지 동네에는 소문만 무성하게 유월에 실려 가고 보리알들이 툭툭 불거지기 시작했어

 

 

 

  

 

 

 

        이발소 그림 4

        -가화만사성

 

욕심 많아 심퉁 맞은 변영감네 단감 밭 귀퉁이 사철 바람이 머물 러 우는 오두막 있었어 벽이랄 것도 없이 제멋대로 주먹돌 쌓고 대 충 흙을 바른, 벌어진 틈새마다 찢어진 걸레쪽 나부랭이 물고 있 는 집 금방이라도 우르르 무릎 꺾고 말 것 같은, 바람 든 슬레이 트 지붕 잡초들이 움켜쥐고 있는 집 더러워서 동네 우세스럽다고 달달거리는 변영감 심사를 맘껏 볶아치던 집 모자란 머슴 내외와 일곱 명 아이들 오글대며 살았어 어떤 애가 사낸지 계집앤지 똑같이 머리를 치켜 올려 깎아버린 올망졸망 돌멩이들 먼 친척뻘이라고도 하고 그냥 머슴이라고도 하고 저게 어디 사람 사는 꼬라지냐고 동네에 말들 푸짐했지 한 쪽 팔다리와 입까지 심하게 비틀어진 장애부부에게는 말이 반쪽만 만들어지고 걸음걸이 무게중심이 늘 공중에 있었지 변영감은 "아이고 저 병신들" 온갖 욕설 잘근잘근 물고도 그나마 없으면 아쉬운 것들, 농사철 거저 부리는 아랫것들 쫒아낼 수는 없이 성에 안 차는, 사나운 성깔 수시로 담장을 넘었지 석유등잔 하나 맘 놓고 켤 수 없는 캄캄한 굴방에서, 아홉 식구 오소리처럼 서로의 소통과 불투명한 미래 비벼댔어 익숙한 냄새가 어깨를 감싸 안으며, 뒤틀리고 야윈 등을 찔리며, 그냥저냥 목숨 붙어 변영감의 밥상부스러기 걷어온 양푼에서 머슴살이 등뼈가 휘었지 돼지우리 오두막 하나 얻어 든 새경 없는 머슴살이도 사람 좋은 이북이아버지 허허거렸지 즈 에비 에미 닮아 굼뜨다고, 성깔대로 부려먹지 못해 안달난 변영감이 비꼬아 지은 큰아들 이름 이북이, 거북이의 거,자를 이북이로 바꿔지어도 일자무식 내외는 주인어른 하사한 이름 황송 했어 일이 없는 겨울철에 먼 곳으로 먹을 것을 빌러 나가는, 이북이아버지 휘어진 가랑이에 골목길은 모퉁이까지 뒤뚱거렸고 그런 날 밤에는 밤새 눈이 내려 커다랗고 둥근 달덩이오두막 환하게 떠올랐지 겨울만 지나면 이듬해 이북이는 때 절은 옷가지를 쭉쭉 찢어 만든 띠에, 검은 머리 다복솔 같은 갓난아이 받쳐 업고 나왔지 우리 동네 염병이 돌던 그해 여름도 이북이 동생들은 온 동네 차돌같이 굴러다녔어 장사치가 금사를 가장 잘 쳐주는 변영감네 단감만큼이나 실하고 야물게. 어른도 힘없이 넘어가고 아이도 지게에 얹혀 가던 그 징허고 캄캄했던 때에, 음산하고 흉흉했던 여름 지나고 아침마다 회관에 스피커 터지게 새마을 노래 피어나던 그때에, 동네는 나날이 새얼굴 단장을 해가고 있었지 이북이네는 공동묘지 옆에 움막 한 칸을 지었어 엄밀히 말하면 동네 이장 말발에, 흉물스런 이북이네 집과 변영감 똥고집이 그만 허물어지고 만 거지 새마을 사업이 한창 물오르던 그 때

 

 

 

 

 

이발소 그림 5

-고향

                                             

   호박죽 기억들 건너가는 유년의 강 있다 할머니 집 겨울은 호박죽으로 시작해서 이듬해 봄 호박죽으로 끝이 났다 할아버지가 풍수에 맞춰 물길도 내고, 뒤란에 바람막이 대숲을 눌러 앉혀 겨울이 대파람소리 소란했던 집 동구 밖까지 길이 열리지 않아 산자락 아래 엎드려 늙는 외딴집 사계절은 느리게 외딴집을 찾아오고 떠나가고, 풍경은 철마다 새 옷을 갈아입는, 봄이 열리는 울타리에 복사꽃 살구꽃 뛰어오르면, 집 한 채를 덩실 떠메고 있던 꽃그늘 마당귀 백합이 봄밤 내내 향기를 개울로 풀어 보내는 겹겹의 침묵 껴입은 계절의 변방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는 익숙하게 노년 일기를 썼다 몇 그루 과수나무 채전 밭 재롱을 보며, 호젓한 해질녘이면 마루 끝에 정좌한 신선이, 젊었던 날들 유랑을 평시조로 읊으며, 늘그막 여생의 수묵을 외딴집 화폭에 그렸다 밤이 길고 낮이 짧은 봉창 밖의 겨울은, 퍼얼펄 날리는 떡눈들을 겨울나무 빈 가지 사이에 채워 넣고 나를 애태웠다 외딴집 찾아줄 기약 없는 손님이 그리워져 마냥 문 밖을 기웃대면, 올 사람 없다 봄이나 오면 모를까 망연한 기다림의 꼬리를 툭! 끊어내던 할머니. 할아버지는 씹을 것 없는 호박죽을 겨우내 즐겁게 오물거렸다 대청 질그릇 동이에서 밤새 언 호박죽이 잠 덜그럭거리는 등불 아래로 건너오면 일찍 자리 펴고 누운 할아버지 둥근 잠은 즐겁게 금이 가고 놋수저가 달그락거렸다 호박을 타고 발라낸 호박씨에는 할머니의 예술이 깃들었다, 두 분이서 등불 아래 도란도란 잠도 없이 호박씨를 까서는 작은 자루에 담아 아랫목에 제멋대로 굴려 두었다가 딱딱해지면 볶아서 아주 몽글게 부서지지 않도록 찧었다 음식솜씨 좋기로 소문 푸르던 할머니가, 늦가을 뽑아버린 고춧대에서 푸르붉으죽죽하게 말라진 고추를 따, 굵게 빻아놓으면 서늘한 뒤란의 시렁에 앉은 호박씨 양념통과 고춧가루는 봄을 기다렸다 개울가에 놓아기른 오리들이 빠뜨려 놓은 알을 할머니는 아침마다 오목한 사기 탕기에 깨어 넣었다 미리 마련해둔 고춧가루 호박씨가루를 솔솔 뿌리고 무쇠솥 밥이 한 벌 푸르르 넘은 다음, 밥 위에 얹어 한 소끔을 쪄냈다 또한 그 이듬해 봄이 되면, 텃밭에서 눈 뜬지 얼마 안 되는 상추를 솎아, 호박씨가루를 듬뿍 뿌리고 겉절이를 무쳤다. 아랫목에 잘 익어 실이 줄줄 늘어지는 청국장과, 참기름 고추장 한 수저에 겉절이와 비벼 넣는 밥이, 할머니 돌아가신 지 십 수 년이 되어도, 오빠는 달콤하다. 겨울방학은 길고 읍내의 엄마 집으로 내 목도 길어졌다. 담장을 넘어오는 대파람 소리에 잠을 쫓기던, 문풍지만 긴 겨울밤을 울어서 좀처럼 날이 새지 않던, 유년이 아직 거기 걸려 있다.

   

무척 경건한 보양식        

                              

무척 경건한 보양식                        

          

          

            무척 경건한 보양식

                             

무척 경건한 보양식         

 

          마취화살 총구가 열리고

          우리 안 사슴은 한사코

          엉덩이를 산 쪽으로 밀어간다

 

          쇳소리울음이

          짚불처럼 넘어진다

          버둥대는 뜨거운 목줄기에

          서둘러 빨대를 꽂는 남자

 

          거친 사자 발톱 같은 빨대 입구에

          사슴의 두려움들 모여든다

          남자의 입술을 적시고

          식도에서 잠시 울컥거리는 선홍색 피가

          바르르 떨며 남자의 목구멍으로

          흘러드는 사슴의 붉은 울음 

          참혹한 울음이 기억하는 슬픔을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

          개기름 흐르는 남자의 피둥피둥한 배가

          한껏 경건하다

 

          날마다 새 죽음이 생성되는 사슴피는

          또 수위가 조금 낮아지는데

 

          질펀하게 맨땅에 누워

          눈 감는 일과 숨 쉬는 일 조차

          자본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개 같은 죽음

          비명 지르는 뜨거운 피를

          젖 물리듯 수혈하고 있는 

          저 슬픈 화엄의 한낮이 춥다

 

 

 

   

 

 

 

 

 

 

 

     숫바다                          

    

             꼬부라진 혀가 수상하다 

             푸른 욕설들이 입술 끝에

             철썩 부딪칠 때마다

             입 밖으로 물살이 넘쳐난다

 

             있는 것들이 더 해 니미럴 꺼~~억 꺽

             오늘은 또 어느 입에 털어 넣은 것일까

             간신히 꾸려 맨 몇 낱 그의 자존심

             그래도 당신은 날 믿지             

             내가 너무 등신처럼 살았다고

             생각하지 마

                           

             입안에서 가슴에서 주머니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푸른 멍

             안으로만 출렁이던 숫바다가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넘쳐나

             그를 타넘는다 

             마침내 그는 오래 된 슬픔들을 방류한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아이 발등이

             까맣게 먼저 젖고

             무릎 닳아진 바지를 적시고

             날깃한 소맷부리 자켓을 적시고

             테이프 붙여놓은 장난감들이

             질퍽질퍽 젖는다

 

             그는 너무 오래 제 가슴을 재운

             잔잔한 바다였을 것이다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방바닥에 엎질러지는 그의 퉁퉁 불은 속앓이들 

             넘실거리는 파도를 재우느라

             잠속에서도 훌쩍거린다 

 

 

 

      꽃 이야기 7      

     홀아비꽃대  

   

                                                         

연립 지하 끝 방 4호에서

향기는 막무가내 피어올랐다

향기는 멀리까지

소문을 따라 걸어 나갔다

 

쓰러진 술병들 속으로

벽을 타고 오른 검은 곰팡이들 속으로

작당의 음모가 교감하고 있다

뜯겨나간 일력들이

몇 날이나 멈춰 있었는지  

선풍기가 연속으로 돌고 있는

어둠 속의 대화

둔중한 침묵 근은 좁은 창틀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환하게 눈을 열어 둔 채 

가슴만 닫고 방바닥에 누운 사내 

콘크리트 숲 속에  잠이 든

사내의 얼굴은 평온하다

검은 꽃잎들 소복이 내려앉은

발등 위로 손등 위로

벌써 숲이 들어서고 있다 

 

그의 방목은 오래오래 향기로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