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을 뛰게 하려고 

 

 

 

심장을 뛰게 하려고 당신이 왔네

차가운 심연에서 부는 바람을 재우러

당신이 노래를 부르며 왔네

 

어지러운 이승에

애달픈 사랑 심으러 왔네

얼어붙은 심장을 뛰게 하려고

궁벽한 목숨 한끝으로

밀애를 한 떨기 피우러

붉은 문 열고

당신이 왔네

 

훈훈한 입김에

사무치는 찬기는 서서히 멀어져갔네

영롱한 빛이 사방에 번지고

막힌 숨구멍 열리며 붉은 꽃들이 피어났네

 

 

 

 

 

아날로그 사랑 

 

 

 

당신의 그늘이 너무 깊군요

뭉게구름이 눈부시게 몸집을 부풀려 가는데

저는 당신 주변만 맴도는 혹성이네요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에 꽃을 심어요

내 눈물도 함께 심지요

 

햇살이 서성거리면 바람은 안절부절

당신을 맴돌고

 

아침마다 증발하는 꿈

새들이 포르르 날아가 당신 창가에서 지저귀는데

 

당신은 너무 멀리 있고

당신은 내게로 불지 않는 낯선 바람

 

빗방울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

그립고 아픈 꽃들이 고개 떨구는 소리

 

당신은 너무 멀리 있고

나는 당신을 향해서 부는 붉은 바람

 

 

 

 

 

 

그믐달 

 

 

 

꽃잎이 벼랑에서 팔랑거려요

주인 잃은 거문고 줄에 바람이 스쳐요

적막한 얼굴에 차가운 웃음이 점점 자라요

당신이 무너져 내리는 건

다시 부풀어 오르기 위한 전조인 걸요

 

갈망이 어두워져 흐릿한 얼굴로 사라지려고 해요

당신이 잠자는 동안 태양이 허덕이며 떠올라요

밤은 우리들의 어제를 푸석하게 말려버리기도 해요

 

말라가는 게 당신의 얼굴만 아니에요

당신의 비린내도 말라가요

입술 사이로 번져 나오던 비릿한 신음도 말라가요

고통스러운 파릇한 절망도 누렇게 말라가는 게 보여요

 

파랗게 떨던 울음은 벌써 말라버린 걸요

풋풋한 붉은 사랑은

나방처럼 늙어 바람에 가루를 날린 건가요

핏기 없이 하얀 입술이

허공에 떠 가요

 

 

 

 

 

 

실종된 사랑 

 

 

온통 비늘이 물기에 젖어 빛나고

슬픔에 젖어 빛나고

슬픔을 삼킨 입술이 붉게 떨리는 오후

파도소리는 너무 멀리에 있다

 

푸른 멍은 심연에서 부풀어 올라

울음소리를 사방에 밀어낸다

 

물방울이 아름답고 쓸쓸하게 번진다

출렁거리는 오후 햇살이

나뭇잎을 비껴가고

바람을 흔들며 소리를 낳고 또 낳고

당신의 목소리는 파묻혀

낮은 지붕아래서 울음을 켠다

 

불안하고 우울한 구름이 떠돌고

깊이 숨을 들이쉬며 몽상을 한다

따스한 피는 어디서 오는가

실종된 사랑은 어디서 봉두난발한 채

헤매고 있는가

 

저항하던 정신이 비명을 지르며

포장된 길에서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는 동안

곪은 그리움이 끊임없이 물기를 머금고

햇살에 반짝인다

 

어떤 유혹에도 휩쓸리지 않으려고

스러지고 떠밀려가면서도 지느러미 펄떡이며

바다의 시간을 견디는

아프고 슬픈 뼈가

젖어 눕는다

한생을 흘러 긴 밤을 뚫고 지나가는 검은 눈동자

창백한 입술의 달이 뜨고

달이 진다

 

 

 

 

 

 

샤워기 

 

 

 

조절기만 누르면

나의 소망을 들어주었다

덕지덕지 달라붙은 피로를 씻고

삐져나오는 짜증을 미레질했다

순순히 나는 세례를 받았고

온몸 독 오른 분노와 치욕도

스르르 제 몸 말아 숨었다

 

어느 날

빠득대는 아픔을 눈치 채지 못한 나의

한 순간 완력으로

그만 목이 툭 부러졌다

 

네 아픔보다는 내 불편함이 커서

네 눈물을 보지 못하였다

이제야 비로소 너를 다시 보게 되었다

 

끊임없이 먼지를 씻어내던 네 손

뻑뻑한 쇳소리 감추며 신음 삭이던 입

내 앞에 선

참을성 많은 상처투성이 그대를 보았다

지쳤지만 일상의 걸쇠로 단단히 버티고 있는

그대 땀 젖은 등이

전등불빛에 빛나고 있었다

 

 

 

 

 

 

선운사 

 

 

 

선운사엘 갔지요

동백 보러 갔지요

사월인데도 동백은 몇 개

봉오리로 바람에 흔들리고요

다른 꽃은 피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많데요

 

선운사엘 갔지요

님 찾아 갔지요

동백은 꽃술 감춘 채, 웃지 않았고

흐르는 물소리 냉랭한데

골바람이 치맛자락 날리고

휑하니 가데요

 

 

 

 

 

 

공중전화 

 

 

 

당신의 사랑은 이제 식었는가

 

큰 길 가 꼬집어 뜯는 소음 속에

 

눈자위는 팅팅 부어

 

붓는 동안 서서히 잊혀져

 

관짝 같은 유리박스 안 덩그러니

 

나 진열되어 있네

 

 

 

 

 

 

 

우물 

 

 

 

반달이 두레박을 내린다

낮 동안 누군가 퍼 올린 두레박질에

수위가 낮아져 한결 수척해진 몸으로

있던 가슴 속으로

꿈의 두레박이 내린다

 

내내 뒤척인 꿈속에서

목마른 시간이 붉게 바랜 낙엽으로 뜨고

허기진 밤하늘 한 쪽이 일상에 지친 별들을 데리고

총총 내린다

 

내 안의 우물에는

밤새 차오른 아픔으로

전신을 축축이 적신 새벽이 물안개로 피어나고 있다

 

 

 

 

 

 

갯바위 

 

 

밤마다 소곤거리는

푸른 입술의 여자

 

사랑은 배회하는 것

피었다 흩어지는 꽃송이처럼 눈부신 것

목젖 너머로 사라지는 달콤한 낯선 감정의 꽃

 

질퍽한 바닷바람에 끊어질 듯 이어지는 노래 듣다가

외로워져 뒤척이는데

 

상처를 핥으며 하얀 손 건네는 짠 여자

자갈밭을 달려 거친 손 내미는

고운 여자

 

 

 

 

 

 

꽃의 상처 

 

 

 

꽃들이 손톱을 세운다

향기 일렁이는 나라에 방패는 가시 뿐

소리 없는 도둑의 손을

찌르고 할퀸다

 

외로운 잠을 흔들어 깨우는 손

붉은 밤이 비릿한 냄새를 풍긴다

희롱하는 바람을 슬쩍 품어주는 안개

 

선정적인 것은 쓸쓸하고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멍울진 꽃눈에 흐르는 검은 피.

 

허황한 꿈을 꾸고

미친바람을 사랑하는 유령의 땅에서

흔적마저 구름 따라 지워지는 날

 

그늘이 깊어지고 차가워져

꽃을 꿈꾸지 않는다

가시만 우거지는 그늘의 나라

 

 

 

 

 

 

 

조령산에 내리는 눈

 

 

 

조령관문이 바라보이는 고갯마루에 도착했다

귀를 열어보지만 새 울음도 숨어버린 고갯마루는

눈바람만 숨 가쁘게 흩날렸다

어둠이 배어든 산 속은 저 혼자 속으로 깊어가고

눈바람은 이승을 추억할 자신의 살덩이를

산산이 부수어 흩뿌렸다

장례는 오랫동안 눈부시고 엄숙하게 치러졌다

아무도 없는 산길에 뿌리고 뿌려

봄날 풀포기들 마시고 쑥쑥 자라라고

이승의 봄날을 미리 준비해 주는 것이라고

심연으로 가라앉는 눈바람이

어둠에 젖으며 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를 기념하고 나를 기억하라는

서늘하고도 부드러운 부탁을 드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