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여름 한철을 내설악에서 보냈다

저잣거리를 떠나서 산중에 드니

꽃이 꽃으로, 나무가 나무로 보였다

무엇보다 내가 나로 보였다

세상에 진 빚이 너무 많은,

그러나 갚을 길은 막막한 인간이

걸어온, 아니 걸어와야만 했던

끝 모를 착시의 잔도 棧道가 보였다

……

이젠 그 길에서 벗어나고 싶다

2012 가을

한양명

 

 

약력

한양명시인 연락처

E-mail : ludence@andong.ac.kr

 

1987년 ≪나아가는 문학≫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 <한 시절>이 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해설

 

 

‘시린 반성’의 언어를 위하여

 

 

고인환(문학평론가)

 

 

 

 

 

우리는 반성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라는 성찰의 목소리가 넘쳐 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답변이 녹록치 않다. 늘‘어떻게’를 건너뛰고‘앞으로는 잘 살아야지’라는 추상적 다짐으로 반성의 과정을 마무리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리고는 반성을 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스스로의 삶을 다독이곤 한다.

구체적이지 않은 성찰은 결코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렇다고 절실한 반성이 삶과 사회를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속적이고 끈질긴 반성을 통해 세계를 조금씩 변모시켜 나갈 수 있을 따름이다.

한양명의 시는 성찰의 지난한 과정 그 자체를 집요하게 탐색한다. 그에게 시는 세속적 삶을 성찰하는 주요한 도구이다. 그의 시는 꿈을 상실하고 초라한 현실을 견디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소시민의 삶을 웅숭깊은 성찰의 언어로 길어 올리고 있다. 시인은 세속적인 삶 너머를 되비추는‘시린 반성’의 언어로 독특한 서정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성을 서정의 무늬로 직조하는 과정의 하나이며, 이상의 세계와 세속적 현실 사이에서 동요하는 내면적 갈등을 갈무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시인에게 시는 과거의 열정과 현재의 세속적 삶이 길항(拮抗)하는 치열한‘전장(戰場)’이다.“ 나이 스물”에“망설이지 않고”걸어갔던“좁디좁은”“토끼벼리길”로부터 도망쳐야 하거나,“ 가진 게, 지킬 게 너무 많”아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가 망설여질 때(「토끼벼리길」) 시인은 시를 찾는다. 아니, 시가 시인을 찾아온다.

하여, 그에게 시는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지표이다. 현실 너머의 세계를 염원하지만 결코 거기에 다다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모순된 운명이다. 다만, 한양명 시인의 시가 투사하듯, 세속적인 삶 너머의 세계를 되짚어보며‘지금 여기’의 현실을 성찰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삶을, 나아가 세계를 조금씩 바꾸어 간다. 두 번째 시집을 상재했다고 해서 시인의 삶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시를 음미하는 독자들의 삶 또한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의 삶과는 조금 다를 것이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시인의삶, 아니 우리들의 삶은 조금씩 변화한다. 이번에 내놓은 시편들을 관통하는‘부끄러움’의 시학이 세속적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슬픈 초상과 포개지며 순도 높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냥 보고 싶다」라는 시를 감상해보자. 자칫 색깔 없는 ‘다짐’의 반복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다짐에 얽힌 속내를 들여다보면 사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꽃을 꽃으로만 보고 싶다

색깔이니 향기니 자태니

허튼 생각 않고

그냥 꽃으로만 보고 싶다

 

사람을 사람으로만 보고 싶다

성별이니 용모니 직업이니

분별하지 않고

그냥 사람으로만 보고 싶다

 

왜 나는 꽃을, 사람을

다른 무엇으로 보려 하는가

통째로 보지 않고

나눠 보려 하는가

 

그런 나의 게눈엔

꽃도 사람도 살지 않고

누군가 먹다 버린

게껍데기만 그득하다

―「그냥 보고 싶다」전문

 

시인은 자신이“꽃”과“사람”을‘있는 그대로’보지 못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불가능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물을“그냥”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이 역설적 상황이야말로 그의 시편들을 지배하고 있는 주된 정서이자, 한양명 시인이 추구하는 서정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의 시는 자본의 논리에 순응하면서도 짐짓 문학의 논리로 이를 거부하려는 태도를 취해 온 우리들의 내면을 사정없이 들쑤신다. 시인은 우리들이 자발적으로 소외시킨 무의식의 내밀한 초상을 집요하게 심문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 마주한‘불편한 공감’이야말로 한양명의 시가 조준하는 과녁이다.

내친 김에 한 편을 더 불러와 보자.

 

 

길러지면서부터

쏘가리는 이미 쏘가리가 아니다

지느러미에 달린 침이 무뎌졌다

지킬 것이 없기 때문이다

 

늙은 주모는 자연산이라고

억지를 쓰지만 나는 안다

지켜야 할 것이 없어진 자의

공손하기만한 살점을

사랑을 버린 살들의 쓸쓸함과

남겨진 뼈들의 외로움을

 

접시에 누운 쏘가리

그 등뼈에 붙은 몇 점의 살들이

소주를 타고 헤엄쳐 온다

유영하는 자세가 부드럽다

마중 나간 내 혀도

부드럽게 움직이기는 마찬가지다

 

지금 이 시간

쏘가리의 살점을 씹으면서 나는 천천히

한 마리의 순한 짐승이 되어가고 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양식당하고 있음을

한 점 또 한 점씩 음미하면서

―「쏘가리」전문

 

“쏘가리의 살점”을“음미하면서”시인은 자신 또한“누군가에게 양식당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시인의 시선은 정확히“자연산”“쏘가리”와“양식”당한‘쏘가리’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의 서정은 길러진 한 마리의“순한 짐승”을“마중 나”가는 부드러운 혀로 직조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 대한 자의식이 구체적 실감으로 형상화될 때, 그의 시는“사랑을 버린 살들의 쓸쓸함과/ 남겨진 뼈들의 외로움”을 애틋한 여운으로 거느리며 읽는 이의 가슴에 스며든다. 여기에는“흐르는 물, 떠도는 새, 구르는 돌만 봐도 가슴이 뛰었”던 젊은 시절의 열정을 세속적 가치에 가두고 어느덧“꼼짝 않는 나무 또는 바위가 되어” “메밀밭에 눕는 대신 메밀꽃을 보고 있”는 중년의 삶「( 역마살驛馬煞」)이 드리워져 있다.

 

겨우 토끼 한 마리 지날 정도의

좁디좁은 벼랑길

나이 스물, 아직 가진 게 없을 때

그때는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지금은 나이 쉰을 건듯 넘어

집이 있고 가족이 있고 직장도 있고

다시 토끼벼리길 지나려니 떨린다

꼭 가야하나 망설여진다

가진 게, 지킬 게 너무 많다

―「토끼벼리길」전문

 

시인은 그의 작품에서‘스물’과‘쉰’사이에 머물고 있다. 여기에‘부끄러움의 시간’, 즉“공들여 탑을 쌓고 다시 무너뜨려온/ 지난 삶과도 같은 그런 시간”「( 숙취의 아침」)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인생은 젊은 시절에 가졌던 꿈을 하나씩 실현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꿈을 조금씩 버려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이 조금씩 포기한‘되찾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이야말로 지긋지긋한 일상을 견디게 해주는 동력이라고, 시인은 넌지시 속삭이고 있다.

문제는‘어떻게’기억하고‘어떻게’버리느냐에 있다. 시인은‘그리움’을 낭만화하지도, 그렇다고 지긋지긋한 일상을 회피하지도 않는다. 다만, 자신을 발가벗기는 가차없는 자의식만을 돌올하게 부각시킬 따름이다. 스스로의 삶을‘날 것’으로 성찰하는 시선으로 인해 그의 시는 부정적 현실을 감싸는 동시에 질타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내가 먹은 막국수는

메밀과 밀의 비율이 삼대 칠인 것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조리한 삶은

참과 거짓을 삼대 칠로 버무린 것이었다

 

씹어보면 부드럽게 끊어지는

순도 백 퍼센트의 허여멀건 막국수

삶의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게 단련된

내 질긴 식성으론 감당하기 버겁다

―「막국수를 먹으며 ―인제 전씨네 막국수 집에서」부분

 

“순도 백 퍼센트의 허여멀건 막국수”는“삶의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게 단련된”시인의“질긴 식성으론 감당하기 버겁다.”

그렇다면 시인이‘조리’할 수 있는 삶의 무게는 어느 만큼일까?

 

이맘 때, 칠월하고도 초순께면

웃자란 콩순을 쳐줘야 한다

아끼지 말고 시원스레 잘라줘야 한다

그래야만 콩깍지에 콩이 제대로 박히고

콩대도 튼실해져 넘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대와 나는 어떠한가

웃자라 겉보기는 멀쩡하지만

소갈머리는 텅 빈 것 아닌가, 자칫

놀러 나온 바람에도 휘청대는 건 아닌가

아뿔사, 머리칼이 너무 자랐다

우선은 이발이라도 해둬야겠다

―「콩순을 치며」전문

 

“우선은”“웃자라 겉보기는 멀쩡하지만/ 소갈머리는 텅빈”자신의“머리칼”을 자르는 일. 시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콩깍지에 콩이 제대로 박”혀“콩대”를“튼실”하게 하기 위해서는“웃자란 콩순을 쳐줘야 한다.”말은 쉽다. 하지만 이러한 자연의 순리를 인간의 삶 속에‘버무’리기는 쉽지 않다. 이미‘콩순’이 자랄 대로 자라“놀러 나온 바람에도”‘콩대’가“휘청대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다만‘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묵묵히 실천할 수 있을 따름이다. 시인의“이발”이 아름다운 이유도,‘ 오래된 미래’를 향한 그의 성찰이 소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인은“이 기막힌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한 자”「( 미분양」)로서의 부끄러움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으며,“ 그대를 사랑하지 않고 종일/ 사랑한다는 말만 읊조렸”던( 「이별」)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응시하고 있다. 또한“생계형 몸짓과 격식”“예의”등을 몸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도“별 다를 게 없을”또 다른“하루를 기다리며” “잠을 청”하는 자신의 무력한 모습( 「반신욕」)을 애처롭게 들여다보고 있지 않은가.

“뒤돌아보지 말고 앞도 보지 말고/ 다만 바로 앞에 놓인 하루나/ 속속들이 깨끗하게 닦아내라고/ 그러고는 경건히 또 하루를 기다리라고”, ‘시린 반성을 촉구’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우리들의‘흔들’리는‘생’을“툭툭 건드리며” 가슴을 후벼 파는( 「풍치風齒」) 지점도 바로 여기이다.

한편, 한양명 시인이 연출하고 있는 또 다른‘시린 풍경’이 있다.

 

문득 동풍이 불자

산이 가랑이를 벌렸다

 

지나가던 노루가 슬며시

오줌 몇 방울 보시하시니

노란 산수유꽃 금세 벙글었다

 

천상 오줌색이다

―「봄」전문

 

시인이 수놓은‘봄’의 풍경이 눈부시다. 시리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그 어떤 언어도 사족(蛇足)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의 작품은 어떠한가.

 

누군가에겐‘홀딱 벗고’

누군가에겐‘머리 깎고’

또 누군가에겐

‘허허허허’실소로 들리는

검은등뻐꾸기 그냥 우는 소리

 

누군가는 사랑하고 싶고

누군가는 입산하고 싶고

또 누군가는 이 풍진 세상에

헛웃음만 나는 게다

그런 마음들이 저 새소리를 타고

초여름의 산천을 떠도는 게다

―「검은등뻐꾸기」전문

 

“초여름”“산천을 떠도는”“검은등뻐꾸기”의 울음“소리”를 전유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경쾌하고 발랄하다. 그 어떤 속박도 없다. 시인은“이 풍진 세상”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애틋한“마음”을“새소리”에 슬그머니 싣는다. ‘새소리’와“마음들”은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다. 다만 자유롭게 공명(共鳴)하며“초여름의 산천”을 떠돌고 있을 따름이다. 맑고 투명한 여운을 남기는 이“그냥 우는 소리”야말로 황폐한 현실을 풍요롭게 적시는 시의 메아리가 아니겠는가.

시인에게 자연은 경배해야 할 그 어떤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돌아가야 할 고향도 아니다. 자신의 삶을 구체적으로 성찰하는 매개체, 즉‘사람’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파트너이다.

 

한때는 내가

그들과 친한 줄 알았다

말이 통하는 사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그건 어릴 적

외가의 대숲에서 자라날 때 뿐

부모 없이 자라는 내가 가여워

자연이 잠시 귀와 입을 열어준 것뿐이었다

 

너무 멀리 너무 오래 떠돌다가

가뭇없는 길에서 내려 대숲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말할 수 없고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

배은망덕하게도, 나를 키운 햇빛과 달빛

댓잎 수런대는 소릴 아예 잊은 채

사람의 말만 하고 사람의 말만 들었기에

마침내 그들이 나를 버린 것이다

―「마침내 그들이 나를 버렸다」부분

 

“자연”은 외로움에 떠는 인간이 가여워“잠시 귀와 입”을 열어 주는 친구이다. “사람의 말만 하고 사람의 말만 들”으면‘자연’은“귀와 입”을 닫고“마침내”“사람”을 버린다. 그렇다고 자연의 말로 인간 세상을 물들일 수도 없다.

 

나는 난 지 두 달도 안 된 강아지를 사람처럼 다루었다 오줌똥을 가리게 하고 내 말에 무조건 복종하게 했다 나는 팟쇼였고 강아지는 영문도 모른 채 인간계의 말단이 되었다

(중략)

나는 그놈을 인간으로 키웠지만 그 놈은 인간이길 거부했고 새끼들 역시 제 피대로 개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알았다 개는 개일 뿐 인간이 아니란 걸 사람은 사람이지 아무에게나 꼬리치고 정조를 바치는 개가 아닌것처럼

―「개에 관한 명상」부분

 

“강아지”를“인간으로”키울 수는 없다. 그렇다고 사람이‘강아지’처럼 살아서도 안 된다.“ 개는 개”이고“사람은 사람”이다. 서로를 존중해야 할 소통의 대상일 뿐이다.

그동안 시인은 그가 원하는 삶으로부터“너무 멀리 또는 가까이”있었다.

 

한 잔 또 한 잔 술잔 비우니

멀어진 인연들은 가까이 오고

가까운 인연들은 멀어져 간다

 

그 동안 나는 너무 멀리 또는 가까이 있었다

―「낮술」부분

 

시인이 떠나자‘그대’가 피고,‘ 그대’가 지자 시인이 돌아온다. 하여, 시는‘그대’가 진‘자리’를 응시하며“뜨겁던 그대 넋”의 붉은‘인장(印章)’을‘흔들리는’시선으로 음미하는 행위( 「동백 지다」)에 다름 아니다. 시인이 자신이“아닐 때에야 비로소/ 살아 있”는( 「나는 살아 있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아닌”자신을“더 분명하게 확인”하는 언어를 꿈꾸는( 「산티아고 가는 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깨달음은 늘 한 박자 더디게 온다. 한양명의 시는 이 ‘늦은 각성’을 부여잡고 현재의 삶을 심문함으로써‘오래된 미래’에 접속한다.‘ 시린 반성’의 언어가 ‘퍼석퍼석한’대지를 적시며 우리들의 삶을 꿈틀거리게 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