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벼리길

 

 

겨우 토끼 한 마리 지날 정도의

좁디좁은 벼랑길

나이 스물, 아직 가진 게 없을 때

그때는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지금은 나이 쉰을 건듯 넘어

집이 있고 가족이 있고 직장도 있고

다시 토끼벼리길 지나려니 떨린다

꼭 가야하나 망설여진다

가진 게, 지킬 게 너무 많다

 

 

 

 

 

 

 

 

 

 

 

 

 

 

 

 

 

 

 

그냥 보고 싶다

 

 

꽃을 꽃으로만 보고 싶다

색깔이니 향기니 자태니

허튼 생각 않고

그냥 꽃으로만 보고 싶다

 

사람을 사람으로만 보고 싶다

성별이니 용모니 직업이니

분별하지 않고

그냥 사람으로만 보고 싶다

 

왜 나는 꽃을, 사람을

다른 무엇으로 보려 하는가

통째로 보지 않고

나눠 보려 하는가

 

그런 나의 게눈엔

꽃도 사람도 살지 않고

 

누군가 먹다 버린

게껍데기만 그득하다

 

 

 

 

 

 

 

 

 

 

 

 

산정무한山情無恨

 

 

천둥이 친다 긴 장마에 지친 탓인지 쿨룩쿨룩 해소 증세가 보인다 비는 아직 출타 중이다 오전 아홉시쯤 산을 나서면서 잠깐 바람이나 쐬고 오겠다더니 어느 선술집 마루에라도 퍼질러 앉아 낮술께나 들이켜고 있나보다 기실 비는 천둥의 둘째 마누라이고 술만 마시면 아무데서나 엉덩이를 까고 오줌을 누는 버릇이 있다 그러고 보니 천둥은 집 나간 마누라를 호출하는 모양이다

 

하늘이 점점 어둑해진다 한 사십여 년 전쯤 외할머니 소개로 시장통 다리께서 사귀어 뒀던 까마귀들이 모처럼 날아든다 반가운 마음에 일어서려니 암자 앞 금강송이 나보다 먼저 묵객 맞아 합장하고 어느새 소슬한 바람은 염불을 시작한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전생이 동자승이었던 솔방울들이 제법 익숙한 모습으로 염불을 따라한다 다음 생에도 제발 사람으로만 태어나지 말길 빌고 또 비는 게다

 

발효차를 마시면서 나도 서서히 썩어가는 중이지만 시정의 잡배로 살아온 터라 인연의 사슬에 치여 발효 속도가 느리기만 하다 고개를 드니 저만치 개울머리 왜가리 날갯짓에 수삼의 버들치들이 자진해서 뛰어올라 이승을 건너고 있다 좋은 일이다 오늘 저 버들치들은 갑갑했던 육신을 벗고 입적하는 중이다 또 하루가 간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폐만 끼친 인간이 그 신세를 갚기엔 산중의 하루가 너무 짧다

 

 

 

 

문득 동풍이 불자

산이 가랑이를 벌렸다

 

지나가던 노루가 슬며시

오줌 몇 방울 보시하시니

노란 산수유꽃 금세 벙글었다

 

천상 오줌색이다

 

연대連帶

 

 

울진군 북면 대수리

외딴 삼칸 오막살이에

일흔 둘의 옥이 할매

예순 여덟의 분이 할매 살았다

옥이 할매 본처이고 분이 할매 첩이었지만

둘은 속 좁은 돌부처처럼

서로를 외면하지 않았다

영감은 일찍 죽고, 자식 없는

분이 할매 당뇨로 시름시름 앓자

자식 덕에 호강하던 옥이 할매,

분이 할매 병 수발하러 찾아들었다

꼭 사이좋은 자매 같았다

입 짧은 분이 할매 밥이라도 남길라치면

옥이 할매, 그래 일찍 죽거라

퉁을 주고 눈을 흘겼지만

달빛이 대추나무에 걸려

가지가 휘영청 늘어지는 밤이면,

죽은 영감 욕이며 모질었던 시엄씨 흉을

실컷 하고서는 서로 마주보며

갓 시집온 새댁들처럼 깔깔 웃었다

그 소리에 잘 익은 대추 몇 알

툭툭 떨어지던 그런 날이 지나고

분이 할매 먼저 눈을 감았다

옥이 할매 친언니처럼 서럽게 울었다

그런 인연이 또 있을까 싶은

오래된 여인들의 질긴 연대였다

 

 

 

 

 

 

 

 

낙동다방洛東茶房

 

 

배달 간 레지는 삼 년째 돌아오지 않고, 한여름 오후 두시의 괘종시계는 나른하다, 1947년부터 자리를 지켜온 산수화병풍 속, 따분하게 늙어가던 산과 강들이 서툰 붓질을 빠져나와 낡은 소파 사이를 기웃거리고 있다, 건조한 어항에선 비늘이 얼마 남지 않은 금붕어들이 구석진 자리, 주름진 남녀의 심상치 않은 밀담이 만들어낸 저기압의 흐름을 힐끗거리고 있다 사팔뜨기의 응시, 한때의 열정 위태로운 사랑이 꺼졌기에 입구의 소화기는 편히 누워 낮잠을 자고 있다, 입술만 붉은 중년의 마담도 졸고 테이블 위에 놓인 볼살 쳐진 핸드백에선 분첩과 립스틱, 구겨진 버지니아 담뱃갑 처녀적의 꿈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식어버린 커피향은 습기와 함께 지층 아래로 가라앉고 퀴퀴한 럭키금성 24인치 브라운관에선 최백호의‘낭만에 대하여’가 잡음처럼 천정의 쥐 오줌처럼 번지고 있다 재방송,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이 천천히 오래된 액자 속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검은등뻐꾸기

 

 

누군가에겐‘홀딱 벗고’

누군가에겐‘머리 깎고’

또 누군가에겐

‘허허허허’실소로 들리는

검은등뻐꾸기 그냥 우는 소리

 

누군가는 사랑하고 싶고

누군가는 입산하고 싶고

또 누군가는 이 풍진 세상에

헛웃음만 나는 게다

그런 마음들이 저 새소리를 타고

초여름의 산천을 떠도는 게다

 

 

돌탑

 

 

산다는 건

저렇게 떨리는 손으로

돌 하나씩을 주워 간신히 올렸다가

한 줄기 바람에도 무너지는 것인가

돌에라도 나무에라도 강물에라도

빌고 또 빌어서야 겨우

유지되는 것인가

 

무너진 자리, 누군가 또 돌을 쌓는다

아슬아슬하다, 바람이 분다

 

 

 

 

이별

 

 

소쩍새가 떠난 뒤에

빈산을 본다

 

사랑이 떠난 뒤에

사랑을 본다

 

나 소쩍새를 보지 않고 밤새

소쩍이는 소리만 들었더랬다

 

나 그대를 사랑하지 않고 종일

사랑한다는 말만 읊조렸더랬다

 

 

동백 지다

 

 

내가 떠나자 그대가 핀다

기별만 하고 오지 않는 봄보다 먼저

잔설殘雪을 이고 그대 피어난다

 

내가 돌아오자 그대가 진다

가장 아름다운 날 봄볕에 목을 매어

툭 하고 미련 없이 붉은 마음 진다

 

그대 지고 한해의 봄도 가버린 자리

뜨겁던 그대 넋이 인장印章처럼 남아

흔들리는 걸음마다 붉게 새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