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치명적인 내 시를 꿈꾸던 적이 있다.

누군가 내 시를 보면서,

그런 느낌을 가지길 바랐던 적 있다.

극단적인 생각에 젖어 살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슬픔이 깊은 사람이 주는

또 다른 슬픔은

종종, 슬픔만으로도 위로가 되기도 한다.

 

박살난 유리꽃병 조각들처럼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시...

내 시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 바람은 지금도 유효한가,

우기의 적도는 슬프기만 한가,

 

꿈꾸던 감옥 살이를 시작한지 일 년이 다 되어간다.

이국이란 낯설음이 주는 느낌이 좋다.

계절의 변화 없이 비슷한 환경 속에서 사계를

산다는 것도 기분 좋은 경험이다.

 

태생적으로 떠돌이별의 운명을 타고 났다.

늘 어딘가를 떠돌다 온 느낌이 있을 때,

시는 발아를 시작한다.

그것은 더러는 육체적 병으로

마음의 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혼돈과 슬픔은 인간이기에 느낄 수 있는

축복이라는 걸 오래전에 알아버렸다.

 

내 속에 흐르는 피의 유전자는 유목민에 가깝다.

대륙으로 바다로 끊임없이 떠돌고 있다.

멈춤을 모르는 플래니모처럼...

그래서인가, 나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끝내 모르고 살다 갈 것 같다.

 

인니에 와 살면서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지는 건 묘지다.

늙은 깜보자 하얀꽃 나무와 네모난 무덤.

무덤 안에서 자라는 키 낮은 풀과 꽃...

이방인들의 이름과 묘비에 적힌 짧고 낯선 글귀들.

수마트라섬 여행 중에도 내 눈길을 끌었던 건

마을 가까이에 있는 묘지들이었다.

 

이 나라의 풍경은 밀림의 나무들을 조금씩 베어 낸 후에

약간의 집을 지어 사람들이 그 숲 속에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수도인 자카르타조차도, 뒷 골목을

지날때마다, 울창한 숲 속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다.

 

치명적이고 싶어하던 나의 시가

이렇게 밀림속을 거닐듯이

약간의 불편과 쉼표가 되기를

바라는 또 다른 욕심이 생긴다.

 

인니의 하늘은 오늘도 흐리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우기의 긴 빗 줄기는

이국의 여자에게 소풍같은 선물이다.

 

소풍의 나날이 끝나는 날.

보물 찾기에서 찾은 선물 보따리

당신 정원에 풀어 놓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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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강원도 삼척 출생. 1990년<시와비평>등단. 시집 '푸른 징조', '바다에게 의탁하다', '키 작은 나무의 변명'. 제13회 한국해양문학상(시)수상.해양문화살판대표. 긴 휴가를 받아, 인니에서 바다의 본적을 찾아 여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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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녀 시집『푸른 징조』서평

 

 

통증과 동행하기 혹은 그리워하기

 

 

김남호(시인)

 

 

 

김길녀의 세 번째 시집『푸른 징조』는 아픈 시집이다. 몸이 아프고, 기억이 아프고, 풍경이 아프다. 아프다는 말을 서정적으로 표현해놓은 게 이번 시집이다. 그래서 시집을 읽는 독자는 원하든, 원치 않든 그의 통증에 동행할 수밖에 없다. 통증과 동행하는 일은 문학에서 종종 있는 일이다. 텍스트가 깊은 통증에 허덕일수록 동행하는 자의 감동이 깊어지는 탓에 감동을 강요하기 위해 엄살이 횡행하기도 한다. 특히 시에서는 엄살이 문학적 감동을 위해 꽤 요긴하게 작용할 때도 있다. 물론 그 ‘엄살’이 감동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엄살 이전에 숱한 ‘몸살’의 시간이 전제가 돼야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김길녀의 시는 엄살을 부리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통증을 바라보며 통증에게 말을 걸거나 통증을 마중 나간다. 하도 평온하게 말하는 바람에 그가 지금 말하는 대상이 그를 수시로 찾아와 괴롭히는 통증인지 가끔씩 기다리던 친구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다음 시를 천천히 읽어보자.

 

그가 가끔씩 안부를 물어온다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부는 날이면

오른쪽 가슴께로 안개비처럼

조심스럽게 흘러내리는

오래된 협곡의 낮은

숨소리를 듣는다

 

삐걱이는 시간의 뒤란에서

떨어져 나온 투명한

햇살에 기대어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 속삭인다

 

아주 느리고 침착하게 주문을 외운다

 

붉은 망토 속 숨겨진 희디흰

손길의 유혹과

숨결 잃어버린 길 찾기의

수고로움이 헛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먼 대륙 흙먼지 묻혀 온

바람의 상처들도 기꺼이 반기며

수레에 실려 있는 들꽃 무더기에

오래된 안부를 얹어보낸다

-「오래된 서랍」전문

 

이 시에서 ‘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가끔씩 생각나는 ‘옛사랑’으로 읽는 게 자연스러울까? 아니면 ‘유방암’으로 힘들어했던 시인의 병력을 감안해서 ‘통증’이나 ‘죽음의 공포’ 쯤으로 읽는 게 자연스러울까? 전자로 읽어도 전혀 터무니없는 독법은 아니겠지만, 나는 후자로 읽기를 고집한다. 그쪽이 훨씬 아파하면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에게는 미안하지만 타인의 아픔만큼 ‘나’에게 감미로운 위로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를 이렇게 풀어서 이해하기로 한다.

통증은 잊을 만하면 찾아온다. 그런 날은 주로 마음이 심란하고 불안한 날이다. ‘그’는 오른쪽 가슴께로 안개비처럼 서늘하고 눅눅하게 스며든다. 늑골 사이로 오래된 내 숨소리가 들린다. 생사를 가르는 “삐걱이는 시간의 뒤란에서” 가끔은 투명한 햇살 속에 평화가 찾아오고, 내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 속삭인다. ‘아직도 너는 살아 있었구나!’라고. 그리고 그가 소리 없이 다녀가기를, “붉은 망토 속 숨겨진 희디흰 손길의 유혹”과 “숨결 잃어버린 길 찾기”의 수고로움이 헛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이때 ‘붉은 망토 속 숨겨진 희디흰 손길의 유혹’은 아무리 다르게 읽으려 해도 죽음으로밖에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숨결 잃어버린 길 찾기’는 당연히 살고 싶은 욕망으로 읽힌다. “먼 대륙 흙먼지 묻혀 온/ 바람의 상처들”이란 일차적으로 황사(黃砂)를 지칭하는 것이겠으나, 삶을 막막하게 휘저어놓는 가슴의 통증이거나 병이 데려올 죽음의 뿌연 공포를 가리킨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그래서 “수레에 실려 있는 들꽃 무더기”는 지시하는 그대로 읽는 것보다는 엑스레이상에 나타난 종양사진으로 읽는 게 더 드라마틱하다.

물론 이런 식의 독법은 지나치게 시인을 염두에 둔 탓에 텍스트를 자유롭게 해석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차피 모든 독서는 오독(誤讀)이라고 했듯이, 좀 더 핍진하게 고통의 신음소리를 만들어 읽는 것도 재미있는 독시(讀詩)의 한 방법이거니와 이 시집을 ‘창조적으로 오독’할 수 있는 주체적 독법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쓴 구모룡 교수는 ‘몸’과 ‘바다’ 두 개의 이미지로 시집 전체를 꿰어서 읽었지만, 나는 ‘아픔’과 ‘그리움’이라는 두 개의 정서로 이 시집을 읽어볼 참이다. 먼저 아픈 시편들부터 보자. 아픈 시편들은 시집의 2부에 주로 수록되어 있다.

 

나의 삶이 죽음 근처에 가까워졌을 때

비로소, 시간에게도 죽음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찬란했던 한 생애를 찰나에 마감할 때도

떫디떫은 울음 끝에 매달린 홍매화

붉은 꽃망울처럼 많이는

울지 말아야지

얘야, 꽃잎에 매달린 지난겨울, 깊은 밤

못다 핀 중얼거림이 나무 뼛속까지

스며드는구나

갈라진 바위의 전설이 숨어 있는

천 개의 문을 지나 그가

오고 있단다

혀가 잘린 네 어미의 말[言]들이

매화나무 가지마다 주저리

주저리 붉은 향기로

열렸구나

기억이 사라진 집의 뿌리를

찾아, 자작나무 우거진 숲

얼음의 땅을 찾아

그가 멀리

떠나고 있다

-「시간의 죽음」전문

 

시간에게도 죽음이 있다. 시간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리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 생명체가 태어나는 순간 그의 시간도 같이 태어난다. 그가 누리는 시간은 그와 생사를 같이 하는 법. 어찌 시간만 그렇겠는가. 이 우주가 그러할 것이다. 나의 우주는 내가 태어나는 순간에 생겨나서 내가 소멸하는 순간 같이 소멸한다. ‘존재론’이란 결국 ‘인식론’에 다름 아니다. 화자도 깨달았나 보다. ‘나의 삶’이 죽음 근처에 가까워졌을 때 비로소 ‘나의 시간’에게도 죽음이 있다는 것을.

병마에 시달리는 자는 그것이 주는 ‘통증’에만 시달리는 게 아니다. 통증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죽음의 공포다. 죽음의 공포로 진저리치지 않는 투병이 어디 있으랴. 하여 투병이란 병고와 싸우는 게 아니라 죽음의 공포와 싸우는 일이다. 지금 화자가 얼음장 위에 맨발로 올라선 듯이 선뜩하게 깨닫는 것은 바로 죽음의 그림자인 것이다. 모든 것을 흡수해버리는 블랙홀처럼 죽음은 그 다음을 상상할 어떤 여지도 남겨두지 않는다. 그러니 나를 따라오던 시간도 거기서 끝날밖에.

이제 화자는 죽음을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한다. “홍매화 붉은 꽃망울처럼 많이는 울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못다 핀 중얼거림이 나무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아무리 피하려 해도 죽음의 신은 “천 개의 문을 지나” 오고 있고, 자식을 앞세운 어머니의 비탄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주저리 주저리 붉은 향기”로 열릴 뿐이다. “기억이 사라진 집의 뿌리”를 찾아, “얼음의 땅”을 찾아 나도 알지 못하는, 내가 왔던 그곳으로 더듬더듬 되돌아갈 뿐이다. 구체적 투병기록으로 읽히는 다음 시는 이 시집에 편재하는 아픔의 진원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그 여자 몸 속에는 너무 많은 여자가 살고 있다

 

얼굴이 없고

팔이 없고

발이 없는

몸뚱이뿐인 여자가

매일 매일 여자 안에서 죽어간다

 

여자 속 여자 방으로

하얀 꽃송이 날아들 때마다

와글와글 피려던 붉은 상사화

꽃봉오리들이 일제히 문을 닫는다

 

그 여자 몸속에는 정말 많은 여자가 살고 있다

 

한 달에 한번 꽃피는 절정을 잃어버린

여자의 절규가 열리지 않는 시간의

문고리를 흔들다 웅크려 잠이 든다

 

부빙처럼 떠도는 그 여자 몸속의 얼음꽃잎들……

-「화레스톤」전문

 

화레스톤(Farestone)은 유방암 치료제이다. 유방암 세포는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에 의하여 성장하고 증식하는 걸로 밝혀졌다. 유방암 세포는 세포질 속에 에스트로겐 수용체(Estrogen Receptor)를 가지고 있어서, 이 수용체와 에스트로겐이 결합하여 암세포를 성장시킨다고 한다. 화레스톤은 유방암 조직의 에스트로겐 수용체에 결합하여 에스트로겐에 의한 유방암 세포의 증식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며, 억제한다고 한다.(네이버)

쉽게 말하자면 이 약은 여성호르몬의 분비와 활동을 억제하는 약이다. 대부분의 유방암 환자들이 이 약을 하루에 한 알씩 5년 정도 복용해야 한다고 한다. 여성호르몬 억제제인 탓에 이 약을 복용하면 당연히 생리가 끊기고, 몸으로 겪는 여성으로서의 징후들이 같이 사라진다고 한다. 이런 약리학적 혹은 병리학적 지식들을 참고해서 이 시를 읽는다면 이해하는 데 크게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그 여자’ 안에는 너무 많은 여자가 살고 있다. 아내로서, 연인으로서, 엄마로서, 딸로서, 시인으로서 수많은 관계들이 저마다 만들어낸 여자들로 그 여자의 속은 붐빈다. 그러나 화레스톤을 투약하는 동안은 ‘얼굴이’ ‘팔이’ ‘발이’ 없는, 토르소처럼 정체성을 상실한 동체(胴體)뿐인 여자가 매일매일 죽어간다. 참담한 것은 얼굴/팔/발이 없는 육체는 표정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고, 표정이 없는 육체는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정체성이 없는 존재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죽음이 한 존재의 소멸이라면, 정체성이 없는 것의 존재는 어떻게 현현할 수가 있겠는가.

“와글와글 피려던 붉은 상사화/ 꽃봉오리들이 일제히 문을 닫”고, 생리가 끊기고 정체성을 잃어버린 절규가 “열리지 않는 시간의 문고리를 흔들다 웅크려 잠이” 드는 게 일상이 된다. 화레스톤을 투약하는 그 투병의 시간은 “부빙처럼 떠도는” “얼음꽃잎들”을 견디며 살기 위해 죽어야 하는 극명한 모순 속에 스스로를 던지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런 절박하고 적막했을 시간을 견디는 시인의 모습이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진 시가 있다.

 

덜컹거리는 마을버스를 타고 창문으로 흘러드는

미루나무에 온몸을 기대고 앉으면

바다로 떠나간 지난여름

상처들이 붉은 부표가 되어 발바닥을 적셔옵니다

 

두꺼운 아픔이 해일이 되어 덮쳐와도 울 수 없는

갯메꽃 넝쿨을 따라가다 보면 하루 종일 바다를

베고 누워 있던 햇살이 슬레이트 지붕 위로 저린

걸음을 옮기는 낯익은 풍경이 다가옵니다

 

오랫동안 내 몸속에 세 들어 살았던 늙은

세포의 잎사귀들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저물녘 바다의 등에 업혀 흘러 흘러만 갑니다

-「저녁 바다」전문

 

읽을수록 참 적막한 시다. 지난여름, 병든 몸을 끌고 바닷가로 피접을 갔던 모양이다. 덜컹거리는 마을버스를 타고 병원을 다녀오는 길, 차창으로 미루나무 그림자가 허리를 꺾어 내 옆에 앉으면 그때의 절망이 부표(浮漂)가 되어 떠오른다. 두께를 알 수 없는 아픔이 해일처럼 덮쳐오고, 그때 나는 울 수도 없었다. 운다는 건 출구가 보이는 자의 투정 같은 것, 큰 절망 앞에 선 자에게는 그런 투정의 기회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바다를 바라보다 “햇살이 슬레이트 지붕 위로 저린 걸음을 옮기는” 저녁이 오면 나는 내 시간의 빠듯한 잔고를 헤아려볼 뿐이었다. 그런 시간이면 “오랫동안 내 몸속에 세 들어 살”면서 내 몸의 주인인 양 행세하던 “늙은 세포”들이 내 몸을 빠져나와 저문 바다의 등에 업혀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 흘러만 가버리고, 나는 어둠 속에서 한 방울 잉크처럼 내 영육(靈肉)이 풀어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여름의 바다는 주체할 수 없는 관능과 낭만으로 뒤채는데, 그곳을 병든 육신을 끌고 찾은 자의 심사는 어땠을지 이 한 편의 시로 다 말하는 듯하다. 어조는 회상의 애조를 띤 채 담담하게 이어지지만, 그 이면은 말할 수 없는 격정으로 일렁인다. 몸이 병든 자에게는 모든 풍경이 아프고, 모든 기억이 처연할 따름이다. 내 몸이 곧 세계를 바라보는 필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에게 언제까지 끌려 다닐 수는 없다. 병과 서서히 친해지면서 죽음과도 안면을 튼다. ‘적과의 동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야 죽음을 앞세워 협박해오는 공포를 잠시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꼬박 꼬박 병원에 오고

꼬박 꼬박 약사를 만나고

꼬박 꼬박 환하게 웃고

 

꼬박 꼬박 꼬냑을 마시고

꼬박 꼬박 불량음식을 먹고

꼬박 꼬박 불면증을 즐기고

 

꼬박 꼬박 바다를 보고

꼬박 꼬박 타라수를 마시고

꼬박 꼬박 잦은 통증과 함께 밤을 새우고

꼬박 꼬박 아무도 없는 집에서 귀신놀이를 하기도 하는

-「적과의 동거」부분

 

이 시는 “내 보물상자에는 알약이 가득 차 있어”로 시작된다. 아픈 자에게는 약이 곧 보물이다. 가장 소중한 게 보물이라면 환자에게는 약이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에게 약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방편만이 아니라, 아직도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명확한 물증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대미술에서는 종종 알약이 훌륭한 오브제가 된다. 약에는 두 개의 상반된 얼굴이 있다. 하나는 희망이고 하나는 절망이다. 저 약으로 내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희망과 결국은 저 약과 더불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모든 약의 기능이란 죽음을 유예시키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의사라는 ‘갑’ 앞에서 환자는 속수무책 ‘을’이다. 내 병을 그가 관할하는 한, 나는 그의 착한 백성이 될 수밖에 없다. ‘꼬박꼬박’이라는 부사는 이럴 때 제자리를 찾는다. ‘꼬박꼬박’ 병원에 가고, 약사를 만나고, 명랑을 가장한다. 왜? 갑으로부터 잔소리와 협박을 듣기 싫으니까. 그러나 의사는 내 병의 대변인일 뿐 신이 아니다. 의사라는 가면(假面) 뒤에 숨어 있는 그들의 진면목은 소심하고 비겁하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모범학생은 금세 문제학생으로 바뀐다. ‘꼬박꼬박’ 꼬냑을 마시고, 불량음식을 먹고, 불면(不眠)한다. 목숨을 인질로 병에게, 그의 대리인인 의사에게 끌려 다니는 스스로가 너무 혐오스러워서이다. 내가 내 몸의 주인임을 독립선언이라도 하듯이 ‘꼬박꼬박’ 바다를 보러가고, 커피를 마시며 병이 나에게 요구하는 금기를 범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잦은 통증과 밤을 새우거나 귀신놀이를 한다. “지난 봄에는 천 년 전 바다였던 카타토키아 괴뢰메 골짜기에” 알약상자를 몰래 묻어두고 오기도 한다. 어떻게든 살고 싶다는 욕망과 그만 놓아버리고 싶다는 체념이 어지럽게 교차한다.

 

사람의 정신은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바닥에 스며있다며 일흔 살 처녀할머니 살아생전 어린 손녀를 무릎에 앉혀 놓고 툇마루 끝 부엌 달린 외양간 늙은 황소에게 붉은 눈길 보내며 중얼거리셨다 늦여름 땡볕이 끝 몸살 앓던 가을, 홍시 따려다가 말벌에게 뜯겨버린 손가락의 벌침독 어린 손녀 온몸 발갛게 부풀게 하였을 때, 아홉 살짜리 계집아이 몸 발가벗긴 채 처녀할머니 왕소금으로 생살을 문지르면 소름처럼 돋아나던 발바닥의 정신들이 해질녘 마당 귀퉁이에 피어난 붉은 맨드라미 살결처럼 보드라웠다 아홉 살 추석을 하루 앞둔 밤사이 옆자리에 누운 할머니를 데려간 보름달의 긴 팔이 처녀할머니 발바닥을 억세게 간지럽혔다고 위안했던 아침이었다 곰소테, 곰소테 뒷산 돌배나무 숲에서 불어오던 붉은 노랫소리, 일흔 살 그대로 처녀인 할머니 꿈을 찾아서 보름달 속으로 떠나셨다

-「푸른 징조」전문

 

아픈 자에게 추억처럼 가혹한 것은 없다. 미래의 시간이 닫히면 과거의 시간 열린다. 병마로 신음하던 시인은 어릴 적 “처녀할머니”의 추억 속으로 자신을 데려간다. 추억으로 회귀하는 자는 대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자이다. 삶의 원형이라고 해도 좋을 아홉 살의 시공간으로 자신을 기억을 조준한다.

처녀할머니는, ‘처녀성을 가진 할머니’라는 뜻의 호칭에서부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인물이다. “사람의 정신은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바닥에 스며있다”는 통찰부터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그런 처녀할머니가 관장하는 그곳에서조차도 고통은 존재한다. 말벌에게 쏘여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치료하는 할머니의 사랑으로 ‘머릿속의 정신’(이성)이 아닌 ‘발바닥의 정신’(감성)이 잠시 피어났지만, 할머니는 그만 죽고 만다. 추억 속에서조차 죽음이 주는 고통을 피할 길이 없다.

할머니를 신격화하고 싶은 시인의 욕망은 할머니의 죽음을 “할머니를 데려간 보름달의 긴 팔”처럼 매우 신비롭게 그린 장면이 인상적이다. 화자는 처녀할머니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보름달이 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 처녀할머니의 가피(加被)로 나는 이 고통에서 구원받으리라는 희망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보름달은 가능성으로 충만한 ‘푸른 징조’가 아니겠는가. (참고로 이 시는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 중에서 이야기시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서사가 가장 잘 응축되어 있는 시다.) 겨울이 깊으면 봄이 가까운 법. 어둡고 추었던 시절이 가고 마침내 봄은 왔다.

 

뜻밖에 눈을 만난 삼월 언저리

기차는 강원도로 가고 있다

펄펄 내리는 시린 햇살 속

―삼월에 웬 눈이람―

나한정역과 홍정역 사이에서

풍경들이 덜컹거리자

건너편 여자가 흰 지팡이를 꼭 쥐었다

여자의 눈이 된 지 오래인 듯

흰 지팡이는 닳아 있었다

여자는 귀로 무언가를 보는 듯

창밖으로 오랫동안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가끔 여자의 미간이 섬세하게 흔들렸다

두 눈 뜨고도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

여자의 볼우물에서 피어나는

복사꽃 꽃잎, 꽃잎

기차는 비로소 고개를 넘는다

-「곧, 봄」전문

 

강원도는 시인의 고향이다. 길고도 지루했던 겨울을 넘기고 고향을 가고 있다. 철늦은 서설(瑞雪)이 내리는 삼월 언저리다. 기차가 “나한정역과 홍정역 사이에서” 잠시 덜컹거리자 건너편 시각장애 여자가 지팡이를 꼭 붙잡는다. 그러고는 두 귀로 덜컹거리는 풍경을 본다. 귀로 무엇을 보았는지 “여자의 미간이 섬세하게 흔들”린다. 여자의 볼우물에서 복사꽃이 핀다. 기차는 비로소 고개를 넘는다. 곧, 봄이다!

이 시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시 한 편만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이 시를 고르겠다. 아픔의 틈새에 박혀 있는 희망의 빛깔이 눈부셔서 좋고, 그것을 시로 형상화한 방식이 아름다워서 좋다. 새로운 봄을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맹인을 통해서 본다는 게 눈부시다. 두루 알다시피 봄이란 ‘봄’, 즉 보는 행위가 감각의 주를 이루는 계절이다. 그만큼 약동하는 대지는 볼거리로 충만하고, 그것들에서 희망을 본다는 뜻이리라. 그 봄이, 그 희망이 얼마나 간절했기에 눈먼 여자가 귀로 봄을 보는가.

지금까지 김길녀의 세 번째 시집『푸른 징조』를 아픔과 그리움이라는 두 정서에 기대어 읽어보았다. 물론 이렇게 읽기에는 이 정서에 포섭되지 않는 시편들이 적지 않다. ‘한국해양문학상’을 받은 시인답게 이번 시집에도 바다를 직접 노래했거나 바다에 기대어 자신의 사유를 펼친 시편들이 많다. 그럼에도 시인의 근황과 세계를 읽어내는 한 방법으로 이 두 정서에 기대는 것도 의미 있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읽었다.

한 권의 시집을 몇 개의 낱말로 규정하거나 특정한 정서로 읽는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읽고 싶은 욕망은 매우 유혹적이다. 그리고 그만큼 폭력적이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시인과 시에 대한 내 나름의 존경과 애정의 표현 방식임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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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호 경남 하동 출생. 2005년 《시작》으로 작품활동. 시집으로 『링 위의 돼지』『고래의 편두통』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