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꽃밭

 

 

여름 햇살 따가운 앞집 돌담 밑

붉은 샐비어 꽃그늘 아래 꽃뱀 새끼들

꼬물꼬물 소꿉놀이 밥상 위로

부지런히 더위를 실어 날랐다

검붉은 초록 몸은 단지 사람에 대한

경계의 무늬일 뿐

혀 속에 독을 키우진 않았다

고 어린것들 데려다가

푸른 사금파리 접시 위에

몸 눕히면

툇마루 끝에 처녀할머니,

마당가에 가득 핀 보라색 수국처럼

환하게 웃으셨다

 

 

 

 

 

 

 

 

 

 

 

 

 

 

 

 

 

 

백야의 바다

 

 

바다에 와 바다를 그리워하는 일이 나의 일이다

 

내가 가진 뭍의 기억은 밤이 길어질수록

더 먼 전설이 되어 물고기 전망실 창틀

담배꽁초 더미에 묻혀져 간다

 

다시 칠월이 시작되었다

 

새벽 3시의 박명 따라 남빙양 바다는

백야를 거느리고 느리게 시간의 발바닥을 딛고 있는 중

이다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나의 바다로

깊은 잠에 빠진 나의 여자가 오고 있다

그녀의 흩날리는 머릿결에서 배롱나무꽃 긴 여름 향기

가 난다

 

백파로 얼룩진 스커틀을 두드리는 그녀, 그녀 등 뒤로

백야 속에서 몸이 야위어 가는 물고기들의 외침이

물고기 전망실 계단을 필사적으로 튀어 오르고 있다

 

나의 바다에 나의 여자가 오고 있다

 

천천히 천천히 스크루 발자국에 힘주어 가며

백야를 헤치고 나의 여자가 부푼 바다를

데리고 나의 바다를 찾아오고 있다

 

 

 

 

 

 

 

 

물결에 관한 보고서

 

 

칠월 장맛비, 시퍼런 초록 골짜기를

흘러나오는 오래된 옛집,

나보다 먼저 죽어간 이들의 저녁을 위하여

슬며시 문고리를 열어둔다

저물녘 강둑에 스며든 적막감이 한기로

다가와 스멀스멀

경전 속 숨은 비밀이 되어

방안 가득 똬리를 튼다

주술에 걸린 듯 박태기나무 팝콘 같은 꽃잎들

후-두둑 떨어져 어둠의 두터운 안부를

빗길 위에 떠내려 보낸다

검은 물기둥 궁전이 있는 사북, 뭉텅뭉텅

킬링필드의 목 잘린 해골처럼 쌓여서

산맥을 이루는 폐석탄 잔해들,

굳은 능선의 부르튼 틈새마다엔

붉디붉은 물결의 시간이 깊은 주름으로

흐르다, 꽉 다문 막장 문 입구에서

녹슨 눈물의 뿌리로 환생하기도 한다

막장으로 가는 마지막 길

숨이 긴 여름햇살, 제 몸 서랍 속 비늘

모두 털어내어

바다로 가는 길을 열고 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지 않았다

 

 

죽지 않는 날들을 위하여

죽은 새들의 장례식에 갔다

 

바다는 더 이상 구토를 하지 않았고

갈매기 떼의 군무도 볼 수 없었다

누구도 육지에서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삶에서의 간절함이 녹아버린

사탕처럼 끈적거리는

기억들만 남겨 놓았다

소매가 닳아빠진

외투와 실밥이 터져버린 초록빛깔

실크 스카프와 잉크가 말라가는

파카펜 한 자루, 스스로 향기를

접어가는 커피잔을 앞에 두고 책장의

마지막 페이지에 빗금을 그었다

죽음을 기다리던 한 남자의 그림자 안으로

이른 아침,

짙은 안개를 걷어내며

한 여자가 다가왔다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나이

마흔일곱 살 그 남자는

새들의 죽음이 즐비한 페루의 조용한

바다를 떠나갔다

 

죽지 않은 그들이 바다로 갔다

죽은 새들의 장례식이었다

 

 

 

 

 

 

 

적과의 동거

 

내 보물상자에는 알약이 가득 차 있어

 

나는 그렇게 죽음을 한 알씩 상자 속에 쌓아 두었어

 

눈빛이 참 고운 주치의는 날 아주 착한 환자로 알아

 

꼬박 꼬박 병원에 오고

꼬박 꼬박 약사를 만나고

꼬박 꼬박 환하게 웃고

 

꼬박 꼬박 꼬냑을 마시고

꼬박 꼬박 불량음식을 먹고

꼬박 꼬박 불면증을 즐기고

 

꼬박 꼬박 바다를 보고

꼬박 꼬박 타라수를 마시고

꼬박 꼬박 잦은 통증과 함께 밤을 새우고

꼬박 꼬박 아무도 없는 집에서 귀신놀이를 하기

도 하는

내 안에 여자들이 알약의 주인들이지

 

내 보물상자 열쇠는 막대사탕처럼 달콤하게 생겼어

 

지난 봄에는 천 년 전 바다였던 카파토키아 괴뢰메 골

짜기에

내 알약들을 한 상자 묻어 두고 왔어

바다의 유전자를 지닌 고래 형상의 모래 조각 아래 조

용히 묻었어

다시 천 년이 흐르면 알약들이 모래 조각으로 되살아나

내 아이들을 반기겠지

원자 기호 같은 알약 조각 앞에서

아이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참 궁금해지기도 해

아이들 몸속에는 내가 심어

놓은 피토캐피탈이 매일 매일

초록 키를 키우고 있을 거야

 

내 안에는 알약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아주 많이 살아

그 여자들이 내 보물상자를 가지고 싶어해

아주 가끔씩은 그 여자들에게

막대사탕 열쇠를 건네주기도 하지

그런 날은 여자들이 날밤을 새며 파티를 열기도 해

내 안에 가득한 그 여자들이 난 정말 좋.단.다

 

 

 

 

 

 

 

 

 

 

 

 

 

 

 

 

 

 

 

 

 

 

 

 

 

 

 

 

 

이별에 대한 예의

 

이대로 떠나야만 하는가

너는 무슨 말을 했던가

어떤 의미도 어떤 미소도

세월이 흩어가는 것

-이문세 “그녀의 웃음소리뿐” 중에서

 

 

지난가을 서둘러 먼 먼 세상으로 떠난 널 위해

내 편하고자 떠나온 섬마을 외딴집

오래된 돌담에 기대 핀 창백한 매화

 

그믐밤 속에 꽃향기는 없고 너의 하얀 얼굴만

꽃잎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하늘이 너무 푸르러 서러운 날” 남겨 둔 채

들꽃 한아름 안고 물길 따라 흘러가고 있는 너

 

지금쯤,

네가 흘러가 닿은 그곳은 먼 먼 바다

그레이트 동굴 안 사자의 관 근처겠지

 

넌,

그곳에서 잠시 머물다

곧 더 많이 흘러가 마침내는

마린스노우 흩날리는 심해에 닿겠지

 

살아서는 다다를 수 없는 세상

그 세상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심해어들 틈에서 들꽃 화관 쓴 어여쁜

너는 영원하거라……

내 생애 가장 절박한 기도가

바다로 바다로 흘러가고 있다

 

너와 함께 보냈던 따뜻한 날들의

온기를 오랫동안 기억하리라

 

섬마을의 적요 속에서

내게 처음 찾아 온 취기를 빌려

맨발의 바람소리와 느린 곡조의 노래로

화장葬을 치르는 중이다

 

 

 

 

 

 

 

 

 

 

 

 

 

 

 

 

 

 

 

 

 

 

 

 

 

 

 

 

 

 

 

 

 

바다를 굽다

 

내 친구 김 선장이

북태평양에서

바다를 택배로 부쳐왔다

해동되는 꽁치 아가미에서

뚝뚝 떨어지는 붉은 피

발칸장미 입술처럼 붉다

먼 바다의 일기장이 두루마리를

펼치듯 시퍼렇게 물이 뚝뚝

저녁 내내 철판 가득

난바다 항해를 굽고 있다

 

 

 

 

 

 

 

 

 

 

 

 

 

 

 

 

 

 

 

 

 

 

 

 

 

미술관에서 만난 바다

 

침묵하던 블루 속에서 점점이

부풀어 오르는 숨겨진 바다

 

지난여름 남극을 떠돌다

깨어진 부빙 꽃잎들

수평선 넘어 불어오는

파도 비늘 모아 천천히 흘러 나온다

 

일억 년 전 빙하에 실려 온

일각돌고래 뿔 긴 생애

장막에 가려진 해무 벗기며

긴 잠에 빠져있던 물고기 궁전의

화려한 시절,

한 페이지씩 펼쳐낸다

 

깊은 바다, 열수 분출공 굴뚝 아래

그 캄캄한 곳

 

오래된 수장고 비밀의 문 열리자

먼지 쌓인 방마다 묻혀있던

죽은 자들의 푸른 시간, 한번도

천사였던 적이 없었던 나의

전생도 그곳에서 부활하여

마린스노우, 하얀 눈송이로 날아오른다

 

 

 

 

 

 

 

 

 

 

 

 

안간힘의 연대기

 

깜깜했다

 

천지간에 고립된 어둠뿐,

웃자라나는 곡식들의 고른 성장을 위하여

최소한의 빛도 허락하지 않는다

강에서 올라오는 낮은 숨결조차도

어둠에 떠밀려 고개를 수그린다

밤이면 더욱 찬란해지는 빛의 제국에서

깜깜한 어둠은 매우 낯설게

전신에 스며든다

혹 꿈속은 아닐까, 아홉 시간 삼십 분 온몸에 문신처럼

박음질된 죽음의 편린, 절벽 같은 침묵을 이끌고

한줄기 빛으로 목덜미를 파고든다

순간, 살아내야만 할 그 어떤 의무감에

피돌기의 숨찬 질주가 시작된다

온종일 뙤약볕이 머물고 간 강 저쪽,

물뱀들이 몸을 식히던 구부러진 둑길에는

달맞이꽃 한 무더기

달빛을 찾아 바람 속을 뒤적인다

완강한 어둠에 몸을 숙인 여름 강,

왼쪽 어깨를 적신 버드나무 늘어진

속살에는 치열하게 살아낸 붉은 노을의

생애가 흥건하게 번지고 있다

 

참으로, 지독한 어둠의 끝이었다

 

 

 

 

 

 

 

 

 

 

사월의 눈

 

아주 오랜만에

꽃길을 뚫고

옛날 애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