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몸 꽃( 이종암. 애지출판사. 2010년)

 

 

 

 

봄날, 하동


매화 피고 나니

산수유 피고

또 벚꽃이 피려고

꽃맹아리 저리 빨갛다


화개花開 지나는 중


꽃 피고 지는 사이

내 일생의

웃음도 눈물도


,


다 저기에 있다


 

 

홍매도 부처 연두도 부처

 

황사 심하던 어저께 통도사에 갔다


마음과 몸뚱어리

모래 먼지 뒤덮인 허공만 같아

대웅전 바닥에 한참 엎디어 울었다

속울음 실컷 울고 나니

내 허물 조금 보이는 것만 같다


금강계단 되돌아 나오는데

천지간 황사 밀어내며 막 눈뜨는

홍매 한 그루, 나를 꾸짖는다

암아, 암아, 세상 살면서

제대로 핀 니 몸꽃 하나 가져라


산문을 나오며 바라본 먼 산

잿빛 겨울을 지우며 올라오는

연두가 또 회초리를 든다




百中




  늦은 밤 방문을 열고 나오다가

  하늘에 떠 있는 살빛 꽃 한 송이를 보았다

  엷은 구름 속 보름달이어서

  그 모양 갖가지로 보이는데


  고향집 툇마루에서 허허 웃고 있는 아버지가 거기에 있고, 나 때문에 삐쳐 토라진 동생이 있고, 6․25때 운문산 어디에서 전사하였다는 삼촌도 있고, 왜정 때 일본에서 객사하였다는 우리 할아버지도 있는데


  저 커다란 달꽃 한 송이 내 속으로 자꾸 건너오고

  살빛 속으로 내가 마구 스며드는 것은


  그렇다, 피의 일은 멈춤 없이

  속수무책 흘러 흘러 내려오는 것이어서







답장




누룩으로 빚은 술 이웃과 나눠 마시며

절로 솟구치는 만흥漫興

에헤이 디-야 끄덕끄덕 어깨춤

잘도 추셨던 우리 아버지 무학자가 아니었어


암아배고프제정지솟안에살믄고구마

퍼떡꺼내무꼬큰사나꼴로나락비로오니래이


연필에 침 묻혀 삐뚤빼뚤 눌러 쓴

싯누런 돌가리 포대기 쪼가리

툇마루에 작은 돌멩이로 꽉 눌러 둔

난생 처음 받은 아버지 편지


십오 년 전 먼 길 가신 아버지

나는 한 번도 편지 드리지 못했다

아, 보내지 못한 그 답장


그래, 나는 지금 두어 줄의

더디고 어눌한 편지를 쓴다


아부지요! 

거기서 할배와 동생 식이는 봤십니꺼

어매와 지수씨는 걱정하지 마시소






木蓮을 빌리다




신관 건물 3층 11반 창가에

힘겹게 이사 온 목련 가지 하나

허공에 낚싯대 내걸고 오래 골몰한다


한 주가 지나고

다시 수업하다 보니

화르르 고기떼가 왔다

하얀 목련 꽃망울 터져 낚싯대 주변이

다 환하다 허공이 꽉 찬다


며칠 더 지나 그 나무 아래로 갔다

잠시 정박 중에 불 밝히던

꽃, 화르르 지고 있다

저 꽃의 뒷모습은 누가 감당하나


자연自然, 본래 그러하지만

그걸 지켜보는 사람의 몸은

상처투성이다

내 몸에 네가 아직 남아 있다







무논의 책




아버지는 멋진 책을 잘 만들었다

봄과 여름 사이 오월의 논에 아버지

산골짝 물 들여와 소와 쟁기로 해마다

무논의 책 만든다


모내기 전의 무논은 밀서密書

하늘과 땅이 마주보는 밀서 속으로

바람이 오고 구름이 일어나고

꽃향기 새소리도 피어나는 무논의 책


아버지 어머니 책 속으로 걸어가면

연둣빛 어린 모가 따라 들어간다

초록 치마를 펼쳐놓은 책 위로

하늘이 구름 불러 햇볕과 비를 앉히고

한철 또록또록 그 책 다 읽고나면

밥이 나왔다

무논의 책이 나를 키웠다










  경산絅山 선생은 내 고향 청도 감을 두고 ‘결사結社’와 ‘신격神格’ 그리고 ‘벼락 감춘 금강金剛’이라 노래했다* 씨 없는 청도 감의 속내는 청도의 바람과 물과 흙이 접으로 빚어내는 그 생명의 마당이어야 한다 고욤나무에 청도 감나무 생가지를 꺾어다가 볕 좋은 봄날에 접붙이면서 감나무는 생명의 첫눈을 뜬다 접이 중요하다 서로 다른 너와 내가 만나 접 되어 한 몸으로 새끼를 놓는 일, 생명이 나오는 본디 모습이다 이 땅에 내 생명 하나 내려놓는 일 이것이 분명 결사요, 신격이요, 금강일 터이다 세상에 번지는 죽임의 물결 걷어내고 생의 명지켜내는 것 신격보다 더 소중한 인격의 본 모습이다







*정진규 시집 『껍질』(세계사,2007)에 수록된 시「청도가 수상하다」






사월, 주산지




  일부러 딴청을 부리고 있는 건가? 문 열지 않으면 그 옆구리라도 호비작거리는 수밖에. 저수지 옆구리 깊숙이 들어가 속을 훔쳐본다. 호수가 산 속의 봉우리를 물고 있는지, 봉우리가 호수를 끌어안고 참선에 드는지 나는 모른다.


  가랑이를 물 속 깊숙이 담그고 있는 수십 그루의 왕버들 가시내들. 사월 초순 저 가시내들 몸이 달아오른다. 누가 저 머리에 초록 족두리를 올렸는가? 뾰족뾰족, 하늘 오르는 초록에게 짓궂은 바람은 자꾸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긴다. 휘청대는 왕버들, 봄날의 허공 빗자루로 쓸어내리듯 초록 글자 휙- 휙 써 갈긴다.


  길 위에서 다시 노래를 부른다. 초록 글자들 주워 모아 주춧돌 놓고 대들보 올려 사월의 마당에 방 한 칸 장만한다. 여기가 오늘 하루 나의 거처, 색색의 봄꽃들 초록 들판에 흩뿌려두고.







동피랑과 나타샤




칠월 어느 날 구형 산타페 끌고 느릿느릿

통영 동피랑 간다 산으로 휘어지고 비탈진

좁은 골목 휘휘 돌다가 넋 놓고 내려다 본

골목 끝 그 바다의 얼굴 너는 기억하는가


스러지고 쓰러져가던, 가파른 집과 담벼락

기타 치며 노래 부르니 꽃이 핀다

슬레이트 지붕 낡은 벽돌담에 향기가 돈다


사랑은 극한의 벼랑에서 피는 꽃이다


내려오는 동네 어귀 네가 따 건네 준

치자꽃, 처음 본 끝물의 그 살빛 고혹

동피랑 나타샤로 내 몸 깊게 봉인된다


이제 언제 어디서라도 찰방찰방 통영

파도소리 따라 허공에서 꽃이 핀다

저 허공 속으로 손을 집어넣을까?






-석장승*과의 대화1




  그대 보고 싶어 다시 이렇게 왔다 어찌 손도 내밀지 않는가 방금 이렇게 쑤욱 내민 손 보지도 못했는가 품속에서 꺼내지도 않았는데 뭐 그대는 보이는 것만 보는가 그래 보인다 퉁방울눈 주먹코 한일 자 입에다 삐죽이 튀어나온 두 개의 송곳니 참 못생긴 돌장승 그대 손이 이렇게 따뜻하네 그런데 너는 상주 남장사 오르는 길섶 모퉁이서 수백 년 지나가는 사람들 보고 또 그 말씀들 다 들었으니 모르는 게 없지


  그럼 말이야 사람의 길, 도는 어디에 있는 거야 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귀가 없구나 내 말 하나도 못 들었지 방금 우리가 손 이야기 한 것 잊었나 없다는 것은 사방으로 열려 있다는 것 아닌가


  그러면 길을 알려줘 뒤돌아봐 지금껏 너를 따라온 길 있는가 하나도 없지 그대가 밟아온 길은 그대로 네 가슴속에 다 들어가 있어 가야할 길도 네 가슴속에 있지 고개 숙여 참회의 눈으로 너를 들여다 봐 그리고 세상 속으로 가렴 길은 거기 그렇게 있어



*석장승 : 경북 상주시 남장동 산63-6에 소재한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