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과 같이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기를

넓은 잎새 위를 또르륵 굴러

수직으로 승천함이 얼마나 고귀한 것이냐

한 생 가득 담은 눈빛을 선뜻 버리고

저토록 투명하게

참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한바탕 몸을 날려 떠날 수 있음이

또 얼마나 가슴 시린 뜨거움이냐

하지만,


저 작은 물방울도 끝에 와서는

어찌 잠시의 망설임 없었겠느냐

어쩌면 손을 놓지 않기 위해

끝내 발버둥쳤을지도 모르고

움츠려 몸을 말아들인 채

부들부들 떨었을지도 모르는 것

그러니 또 다른 물방울로 한세상 흘러내리는

내 어찌 안쓰러운 눈빛 하나

가득 담아주지 못하겠느냐




















상처의 집


바싹 마른 그 집

다 쓰러져가는 블록담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다

들어가서

세월에 덧나고 금간

상처와 상처가 서로 붙들고

쓰러질 듯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그 오래된 끈기를 보고 싶다

가장 큰 슬픔으로 한순간

쓸쓸히 무너져내려도 아쉬움 없을

깊고 오래된 눈빛들의

상처의 집 하나 짓고 싶다






























탑리 오층석탑


땅과 하늘을 받들어 서 있는

탑리 오층석탑에 가서

낮잠 한번 자고 싶다

명자나무 붉은 꽃이

따순 햇살에 환하고

탑리여중 순진한 소녀들이

단발머리를 자꾸 매만지며

철없이 깔깔거리고 있을 때면 좋겠다

우보 어디쯤 지나고 있을

발걸음 느린 화물열차가

곤한 숨소리를 연방

내 핏줄기 속으로 들이밀어도 좋겠다

모든 것 내려놓고

한숨 늘어지게 자다가

그 옛날 석공의 우직한 망치가

정수리를 내리쳐 그만

푸른 멍 하나 받고 깨어났으면 좋겠다

살아 있는 동안

끝내 지우지 않을 그 멍으로

세상 깊숙이 들어가서

오래오래 서 있고 싶다



















더 낮은 모습으로

                         - 늙은 역무원 -     


기차는 빨라졌고

나는 늙었네

하루에 네 번 있는 완행도

서둘러 떠나는 시골 정거장

파란 깃발을 흔들어 기차를 보내고 나면

어느새 힘없이 늘어지는 오후

한때 팔딱거리던 근육이 쓸모없는 무게로

기차가 떠나간 곳 바라보는 눈길을 막아

힘겨운 걸음을 돌려 오는데

가을 햇살 아래 홍시 떠받친

불그름한 이파리들 서로 몸을 비비며

낮은 모습으로

더 낮은 모습으로

가슴을 여미라 하네

두고두고 허물어지지 않을 것은

이 땅의 낮은 것뿐

그 자리를 꼭꼭 지키라 하네
















숙모 돌아오시다


  그만그만한 어깨 서로 기대고 사는 서해안 작은 마을에서 서해안 노을처럼 은은하게 느릿느릿하게 낡은 세월 보듬던 숙모 돌아오셨네 서방님 먼저 보내고 우툴두툴 엮어온 새끼줄 같은 날들 툭 끊고 돌아오셨네 나 이제 가겠다 온 얼굴에 잔잔한 웃음꽃 피워 불혹의 목사 아들 앞에 슬픈 향기로 남기시고 광명시와 개봉동과 태안을 거치는 동안 한 번도 놓지 않았을 삼십육 년 전 서방님 고운 손길을 따라 돌아오셨네 어허둥둥 꽃상여가 아니어도 좋구나 검은 관 속에 가만 누워 밭고랑 타고 올라가시네 숙부의 작은 집을 반쯤 허물고 아들아 네 아비가 너무 오래 기다리셨다 숙모 사뿐히 들어가시네 이제 평화 있으리 나란히 누운 평안함으로 소나무 가지들 길게 늘어지리 온종일 바라보아도 저 황톳빛 금강 하구 잔잔하리 이제 너희들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그만 문 닫아라 사람들 어깨 위에 올라선 한줄기 소낙비 들썩들썩 내 눈 속으로 파고드네






















늙은 과부의 술집


평생 햇빛 든 날 없는

쥐구멍만도 못한 인생이라고,

일찍이 혼자되어 모질게 키운 아들놈이

연애로 결혼하자마자

나온 구멍은 제쳐놓고

들어갈 구멍만 찾는다고,

수없이 지나간 사람들 중에

때로 풋정도 있었지만

스쳐 지나가면 그뿐 말짱 헛것이라고

술청 가득 푸념이나 지긋지긋 풀어놓고

때로 진절머리나는 쓸쓸함으로

때로 머리 불끈 일어서는 오기로

늘 술 그림자 출렁거리지만

어차피 혼자서 버틴 삶인데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며

눈물도 한숨도 비틀거림도

풀풀 풀어놓는 주름진 얼굴이

가슴 아파도 좋다, 나는

아픈 가슴 나누어서 좋다, 나는















철도 궤도공의 편지 2


온종일 대전역 3번 선의 레일을 바꾸었어요 형님

점심때가 거의 다 되었을 때인데요

서울행 열차를 기다리던 사람들 중에서

예쁜 옷차림의 어린아이 하나가 신기한 듯

레일을 철거하는 우리 쪽으로 다가왔지요

착해 보였어요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조카 생각도 나고요

그래 씩 한번 웃어주었지요

그랬더니 엄마인 듯한 젊은 여자가

너도 공부 못하면 저렇게 돼

하면서 얼른 아이를 돌려세우더군요

이런 니기미, 아 참 죄송해요 형님

속에서 뜨거운 욕설 한 주먹이 치밀어오르더군요

내 참 더러워서, 그렇다고 내가 공부를 잘 했다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그렇지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는지

참았어요 참 용케도 꾸욱 참았어요

거친 손이어도 시꺼먼 얼굴이어도

하늘 부끄럽지 않은 떳떳함으로 살아가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형님

곤두서는 밥알을 겨우 쟁여넣고

오후 내내 이를 악물고 스파이크를 박았어요

그래 고귀한 너희들이 끝내 나를 외면해도

내 끝끝내 서럽지 않은 단단함으로 서리라

침목 깊숙이 스파이크를 때려박았어요

그깟 속 빈 년 말 한마디 열차 바퀴에 짓이기고

흔들리지 말자 절대로 흔들리지 말자 다짐하며

내 가슴 속 굵은 못을 힘껏 때려박았어요

내 뜨거운 땀방울의 당당함으로 푸르게

푸르게 서는 날 있으리라 믿어요 형님, 그럼










다시 겨울에


쌍용양회 공장 굴뚝 부쩍 낮아지고

처마 끝마다 썰렁하게 찬바람 매달리는 날

녹스는 철길 따라 주평역 앞

이름도 없는 술청에 찾아들면

곱게 갈아 차진 메밀묵보다

한껏 쪼그라든 바람벽이 먼저 반긴다

제 몸 하나 데우기도 힘겨운 난로는

피시식 부끄러운 눈웃음이나 던지고

풍으로 드러누운 바깥양반의 마른기침 두어 번으로

우리들의 안부는 그저 그렇다고 넘어간다

소주병 속에서 얼어붙은 참기름 대신

신 김치나 듬뿍 넣어 내놓은 묵을 두고

휘휘 휘두르는 호계 막걸리 속으로

살갗에 머물던 냉기가 떨어져내리고

무슨 다짐도 없이 굳은 입술도 풀어져내리면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매한가지지만

이 외진 골짜기에도 있을 것은 아쉬운 대로 있고

없어야 할 것은 끝끝내 없어

이제는 잊고 싶다거나 사라져야 할

모든 슬픔이며 숨막히는 치욕 따위와

오랜 좌절과 헐렁한 분노까지도

한 사발 막걸리에 스르르 녹아내리고

끝내 푸르디푸른 눈물마저 쓸어내리면

처마 끝에 매달린 찬바람도 뚝뚝 떨어져

우리 철 지난 비틀거림이 이제야

어깨를 걸고 나오는 것을 나는 본다

힘겨워도 사그라지지 않는 불빛처럼

오래 갈아 차진 메밀묵처럼







환한 집


담배 참 되어

삽자루 그대로 놓고

철둑에서 땅 파던 보통인부들

호두나무 아래로 들어가니

오종종 개미들처럼 기어드니

지루해, 축 늘어져 있던 호두나무

설익은 호두알 딱딱거리며 일어나네

그늘이 둥둥 넓어지네

아무렇게나 몸을 내린 인부들

지상에서 가장 편안한 집 하나 얻었네

이파리들 환하게 웃네






















사량도


사량도 지리망산

시작은 있는데 철계단

아무리 목을 빼고 보아도

내리막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뻔한 길을 걸어온 자에게는

절대로 내어줄 수 없다는 듯

안으로 말아 튼 몸길 단호하다

단호한 것들 앞에서 늘 그랬듯이

망연히 돌아보는 먼 눈 속으로

천년을 헉헉거린 늙은 파도 

이를 악물고 따라오고 있다


한 번도 오르지 못하고

습기만 가득한 몸부림

그렇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여기까지 너무 쉽게 온 것이다

 

 

상처의 집 (2005, 실천문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