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호박

 

친구 농장에서 얻어온 호박을 가득 싣고는

집으로 돌아와 차 트렁크를 여는데

늙은 호박 하나 떨어져 내리막길을 굴러

데굴데굴 마을 아래로 신나게 치달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잡을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지켜만 보는데

달달하고 맛있는 전을 부쳐 냠냠 짭짭 먹을까

몸에 좋은 진액을 우려내어 주욱 쭉 빨아 먹을까

행복한 상상이 저 멀리 도망가고 있다

자신을 죽인 뒤 시신을 토막 쳐서

세상의 구경거리로 삼지나 않을까  

여러 대의 수레에 팔다리를 나누어 묶고는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게 겁이 났을까

사지를 탈출한 둥근 호박,

경사진 길을 가로질러 잘도 굴러간다

하늘이 사람에게 준 권리 중에

자유보다 귀한 것이 없다던

근엄한 인권법학자는 어디 갔나

풀숲에서 꼼짝 않고 숨어있는 늙은 호박을

기어이 찾아내 포박하고는

다시는 도망하지 못하도록

음습한 창고에 가두어 두었다

 


호박손

 

팔다리가 없는 호박은

순 백수건달 심보로

, 우짤낀데

죽일라카마 한 번 죽이봐라

일단 머리를 들이밀며

앞으로 쑥쑥 나아가고  

넝쿨을 똥배 삼아

땅을 힘차게 딛고 일어선다

벽을 만나면 허리를 꺾어 수직으로  

덤불을 만나면 가시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는

슬그머니 기어올라

넓고 거친 잎으로 덮어버리고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꽃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호박이 호기를 부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가늘고 긴 덩굴손이 있어

누구든 잡히는 대로 꼼짝 못하게

꽁꽁 얽어매고 마는 까닭이다  

호박은 세상에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하늘 향해 뻗는 호박손의 희망은 헛되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호박손아,

너의 갈라진 손가락을 활짝 펴

비겁한 세상의 목울대를 콱 조아버려

숨통을 끊어버려

한여름 무더위에 지친 텃밭 작물은

모두 날개를 꺾고 고개 푹 숙인 채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는데  

덩굴손을 죽창으로 앞세운 호박만  

삼삼오오 대열 지어

기세등등 힘차게 진군하고 있다

 

 

 

채형복/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대경작가회의 회원.

펴낸 시집으로 <바람이 시의 목을 베고>(2017년 상반기 세종도서 문학나눔 시부문 선정) 및 <칼을 갈아도 날이 서질 않고>(2018)를 비롯 여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