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4호...
   2019년 12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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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5 짚 1. 외 1편/박찬선 file
편집자
54 2019-11-30
짚 1 다 주고 떠나는 마지막 가는 길은 부드럽다. 빈들로 사라지는 종소리의 여운이듯 해질녘 집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이듯 땡볕과 장마 속에서 초병처럼 서서 버틴 무서리 내린 찬 논바닥에 누워 덕장의 명태처럼 바람과 햇살에 몸 말리는 초분草墳 가벼운 육신 무더기로 꽁꽁 묶여서 수의 같은 흰 비닐에 싸여서 누룩 뜨듯 익혀 진한 맛을 들여 온 몸을 소처럼 고스란히 공양 올리는 우걱우걱 되새김질하는 저물녘의 우리 움직이는 붉은 꽃으로 불어나는 은밀한 시간 함께 머물렀던 빈자리 벼 그루터기 추워 보인다. 마른 눈물 자국 보인다. 짚 2. 아버지 짚이 되셨네. 햇살 밝은 가을날 벼 거둔 천수답에서 퇴비 깔고 보리씨앗 넣으시며 '참 좋다 참 좋다' 이르시고 짚이 되셨네. 마당 가득 처마보다 높게 차곡차곡 쌓인 낟가리 볏짚으로 쌓은 황금의 성 그때는 정말 넉넉한 부자였네. 은은한 달빛 넣어 꼬아낸 새끼줄보다 질긴 삼신 줄을 엮어 오신 우리 아버지 포성이 오갔던 그해 여름 문경 새재 보국대 다녀오신 뒤 목마를 해서 건넜던 낙동강 아버지의 높은 어께에서 솟아났던 쇠죽솥의 구수한 짚 냄새 한가한 날 약주를 즐기셨던 아버지의 불그레한 얼굴이 근심을 태우셨던 아궁이의 불기운으로 상기된 그 모습으로 나도 홍시가 되면 멍석에 누워 별 헤며 들었던 가마니 치는 소리 솟아나고 이엉 엮어 새로 덮은 집의 따뜻한 겨울밤에 닿는데 짚 거둬간 빈 들 썰렁하다 못해 차가움으로 오는 대설 지난 지금에야 조금 알 듯도 하네. 짚이 되신, 흙이 되신 아버지의 길지 않은 생애를 약력 경북 상주 출생. 1976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돌담 쌓기』『상주』『우리도 사람입니다』외  
4 불턱 방담放談 외1편/김요아킴 file
편집자
30 2019-11-30
불턱 방담放談 서로의 심장에 총탄을 재던 그해 六月, 고향 갯가로 끌려나온 무수한 유령들이 광목천에 묶이어 역사 저 편으로 수장되었다는 어른들의 음계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문득 남도의 외로운 섬 하나가 떠올랐다 그 총알이 왼쪽 눈에 깊은 슬픔으로 커져, 三月의 차가운 물 밖으로 떠올라 증인으로 서자 고향의 수많은 발자국들이 거리거리에 찍어놓은 분노를 활자로 읽으며 그 섬마을의 하도리가 생각났다 한 치의 틈도 내주지 않은 고향의 날선 목소리 속에, 태어나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사진 속의 인물을 용의자로 지목하자 낯선 국방색 표지들이 두더지처럼 十月의 마음을 도굴하는 장면을 눈으로 지켜보며 그 하도리의 불턱이 자꾸 스쳐갔다 골다공증을 앓는 아낙들의 숨비소리가 쌓아올린 부도, 매일같이 저승의 문턱을 닳아 없앤 물질을 제쳐두고 한지보다 더한 젖가슴을 아이에게 물리며 한라에서 불어오는 四月의 냉기어린 들숨마저 화톳불로 이겨내는 영원한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부암역 빛 발한 네온사인을 위하여 흥청대는 값싼 말투와 본능이 자본으로 덧씌워지는 원심을 향하여 지독히도 땅 밑을 환승하며, 아래로 아래로 파묻혀가는 것을 감내해야 한다 한 끼의 밥과 교환할 노동은 여전히 살아 끊임없는 무표정과 침묵으로 재생되고 덜컹거리는 레일 위의 불규칙한 일상으로 낯설게 불거져오는 서로의 얼굴을 비춰보며 고대의 커다란 무덤을 생각해 본다 개찰구 쪽으로 맞닿은 저 벽 너머로 엷은 향내와 둔탁한 곡소리가 수런거리고 눈높이로 가로지르는 주검이 누워 매번 스칠 때마다 이곳은, 순장될 듯한 전생의 기억으로 떠오른다 여전히 햇빛은 광합성을 하는 무리들에 유효하고 낙하하는 빗줄기에 몸을 정화할 기회는 기득의 울타리에 한정되지만 오늘도 살아남아야 할 당위當爲 앞에 생과 사의 거리는 너무도 짧기만 하다 김요아킴 1969년 경남 마산 출생. 2003년 계간 <시의나라>와 2010년 계간 <문학청춘> 신인상으로 등단.『왼손잡이 투수』『행복한 목욕탕』『그녀의 시모노세끼항』외 다수. 산문집『야구, 21개의 생을 말하다』서평집『푸른 책 푸른 꿈』. 한국작가회의와 부산작가회의 회원. 현재 부산 경원고 교사.  
3 훈연 외1편/유준화 file
편집자
32 2019-11-30
훈연(燻煙) 외증조할머니는 연산 대추골에서 동학군에 가담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죽었다 사구라꽃이 극성으로 피던 대추골에서 징용으로 끌려간 아들을 기다리던 외종조할머니도 죽었다 ✽상강 지나서 얼음이 멍가나무 대궁에 빨갛게 얼던 날 의용군에 끌려간 아들을 기다리던 외할머니는 컹컹컹 마른기침을 하며 윗방에서 곰방대에 성낭 불을 켰다 그런 밤이면 하얀 사기대접의 자리끼에는 살얼음이 얼었다 오장육부가 타고 있는 외할머니의 입에서는 연기가 났다 기다리다 지친 눈두덩이를 훈연하던 그 연기가 매웠던지 어머니는 끌려가지 말라고 나를 삼대독자로 만들었다 제사복이 확 터진 아내가 구시렁거린다 간 사람도, 기다리던 사람도 신생대의 먼지가 된 지금 외할머니의 손자도 할아버지가 되어 훈연되고 있는 중이다 ✽ 서리가 오기 시작한다는 날 순대 순대 국밥을 먹는다 누군가의 어머니 아버지 누군가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점심때 시장에서 순대국밥을 먹는다 마음에 점 하나 툭 찍어놓는 점 심 때 순하지만 대차게 한 번 살아보라는 순대국밥을 먹는다 순대를 채우기 위해 평생 땅이나 후빈 돼지는 이승을 떠나고 나서 남의 살과 피로 순대를 채웠다 땅이나 바라보고 살은 늙은 아내를 데리고 오물오물 순대를 채우기 위해 순대 국밥을 먹는다 목숨 부지 한다는 것은 늘 허기가 심해서 남의 피와 살로 내 순대를 채우는 것이다 이승을 떠난 돼지가 보시한 순대로 늙은 아내와 나는 행복하지만, 잠시 윤회하는 시간 속에서 마주 보는 것이다 유준화 충남공주출생 2003년 불교문예 시집. 초저녁 빗소리 울안에 서성대는 밤 네가 웃으면 나도 웃는다. 외 수상 : 충남시인협회. 충남문인협회 작품상  
2 화관 외1편/박경조 file
편집자
33 2019-11-30
화관 전생을 온전히 지워내야만 비로소 꽃이 된다는 상사화 봄에서 겨울로, 머리끝에서 발끝으로 눈물로 꽉 찬 당신의 비밀과 빗물로 꽉 찬 나의 생각까지 다 닦아내지 못하고도 한 통속이라 기운차게, 이 습한 화단을 뚫고 내 필생 속에 핀 당신 참 명랑한 화관입니다 미완(未完)은 여기서 이렇게도 지극하나 봅니다 새벽 비 내리는 구간 모란 촉에 스며드는 수국 꽃방을 넓히는 놀이터에서 저 혼자 미끄럼틀 타는 발정 난 길고양이 울음, 마음 쓰이는 인력시장 박 씨 발목 잡는 새벽에 홀로 깨어 나를 단련시키는, 나를 움직이게 하는, 약력/경북 군위출생 2001년 계간 『사람의 문학』으로 등단. 현재 『사람의 문학』편집위원 시집 『밥 한 봉지』, 『별자리』 출간  
1 늙은 호박 외1편/채형복 file
편집자
34 2019-11-30
늙은 호박 친구 농장에서 얻어온 호박을 가득 싣고는 집으로 돌아와 차 트렁크를 여는데 늙은 호박 하나 떨어져 내리막길을 굴러 데굴데굴 마을 아래로 신나게 치달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잡을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지켜만 보는데 달달하고 맛있는 전을 부쳐 냠냠 짭짭 먹을까 몸에 좋은 진액을 우려내어 주욱 쭉 빨아 먹을까 행복한 상상이 저 멀리 도망가고 있다 자신을 죽인 뒤 시신을 토막 쳐서 세상의 구경거리로 삼지나 않을까 여러 대의 수레에 팔다리를 나누어 묶고는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게 겁이 났을까 사지를 탈출한 둥근 호박, 경사진 길을 가로질러 잘도 굴러간다 하늘이 사람에게 준 권리 중에 자유보다 귀한 것이 없다던 근엄한 인권법학자는 어디 갔나 풀숲에서 꼼짝 않고 숨어있는 늙은 호박을 기어이 찾아내 포박하고는 다시는 도망하지 못하도록 음습한 창고에 가두어 두었다 호박손 팔다리가 없는 호박은 순 백수건달 심보로 와, 우짤낀데 죽일라카마 한 번 죽이봐라 일단 머리를 들이밀며 앞으로 쑥쑥 나아가고 넝쿨을 똥배 삼아 땅을 힘차게 딛고 일어선다 벽을 만나면 허리를 꺾어 수직으로 덤불을 만나면 가시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는 슬그머니 기어올라 넓고 거친 잎으로 덮어버리고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꽃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호박이 호기를 부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가늘고 긴 덩굴손이 있어 누구든 잡히는 대로 꼼짝 못하게 꽁꽁 얽어매고 마는 까닭이다 호박은 세상에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하늘 향해 뻗는 호박손의 희망은 헛되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호박손아, 너의 갈라진 손가락을 활짝 펴 비겁한 세상의 목울대를 콱 조아버려 숨통을 끊어버려 한여름 무더위에 지친 텃밭 작물은 모두 날개를 꺾고 고개 푹 숙인 채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는데 덩굴손을 죽창으로 앞세운 호박만 삼삼오오 대열 지어 기세등등 힘차게 진군하고 있다 채형복/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경작가회의 회원. 펴낸 시집으로 <바람이 시의 목을 베고>(2017년 상반기 세종도서 문학나눔 시부문 선정) 및 <칼을 갈아도 날이 서질 않고>(2018)를 비롯 여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