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시인의 작품은 저 멀리 푸른 포도밭에서 물씬 풍겨오는 향기처럼 은은하고 아련한 매력을 지녔다. 그가 유기농 포도를 재배하는 틈틈이 쓴 글로 펴낸 '포도향기 가득한'(도서출판 한솜)은 인공적이지 않고 순수한 자연의 내음과 아날로그로의 그리움을 가득 담고 있다.

금낭화 담홍색 물든 날/벌레 물고 올/어미 기다리는/주둥아리 넷/귀엽고 귀여워/땡볕에 지칠라/배달부 근처 오지 말라/차양 치고/금줄 치니/산모도 고마운 양/지지대며 요란 떨더니 -'전생의 애인' 중에서

↑ 은은한 시어의 향연, 정의선 씨의 '포도향기 가득한' 출간

시집은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포도향 가득한 나의 포도밭에서'는 세상의 모든 물욕을 버리고 자연으로 귀의(歸依)한 농부의 순수함이 그대로 묻어나온다. 포도순을 정리하여 올려다본 하늘에서는 새들이 자유로이 날아가는 풍경. 바쁘게 살아가는 도시에서는 꿈도 꿀 수 없던 여유의 향기가 그리워지는 장이다. 자연의 품과 아날로그 감성에 대한 예찬은 '연비여천지세'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비우고/태우고/어제도 했건만/오늘도/유기농 포도밭//...그래도/먼 훗날 잠시 소풍 나와/밤하늘 수놓는 촛불 구경하며/오고는 가지 않는/그런 사랑 보고 싶다.'

그렇게 잔잔하게 흘러가던 귀농의 감성은 어느덧 현실의 노을에 물들어 간다. 농민에게 너무나 가혹하고 척박한 현실에 분노하는 목소리('2003년, 한 농민의 자살에 붙여')도 이따금 내지르는 한편, '1999, 홍氏 日記'에서는 그 분노가 한결 가라앉아 차분하고 담담하게 서사된다.

2부 '생명의 바다'에서는 그래도 이 현실을 딛고 살아나가야 한다는 굳은 의지가 일어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음에 남아 있는 욕심과 분노의 응어리를 비우고 '나 이제 숲으로 간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있으며 '그래도 산다는 것은'에서는 고목나무에서 살며시 고개를 내민 새싹을 보며 희망을 찾고 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면 밝고 따뜻한 내일이 올 것임을 굳게 믿으며, 싱그러운 포도가 열릴 날을 떠올리며 그렇게 '사는 것'은 계속된다.

3부 '모동의 안개'와 4부 '그리움'에서는 주위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도 한층 드러난다. 부제목에서도 나와 있듯, 이 장들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그리움'이다.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든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든, 어떤 대상에 대해 느끼는 그 깊은 감정은 시의 세계를 더욱 여물고 성숙하게 만든다.

'포도향기 가득한'에 수록된 작품들은 화려한 문법적 기교나 맛깔나는 시어 대신 꾸밈없이 읽는 이의 가슴에 스며드는 감동을 선사한다. 가만히 눈을 감고 순수의 언어를 음미하며, 마음속에 감도는 달콤한 여운을 느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