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시인 최기종의 이번 시집은 “전교조 교사로 살아왔던 교단의 기록이다.” 사실 관계를 말하자면 이제 최기종 시인은 현직 교사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신분상의 변화는 이 시집을 설명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최기종 시인을 ‘교사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의 시가 오로지 일선 교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교육에 대한 고뇌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시인 자신도 〈시인의 말〉에서 밝혔듯이 아직도 변하지 않은 학교현장을 강하게 인식하면서 쓴 시를 모아 펴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 시집이 이루지 못한 자의 풀씨였으면 한다. 힘써 이루려는 자의 노래였으면 한다”라고 밝혔다. 그 변하지 않은 현실은 끝내 ‘세월호’라는 비극을 우리에게 안겼다. 그래서 시인은 “부디 진실이라도 돌아오라고” 절규한다. 왜냐면 그래야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시인에게는 아이들이 “고래”가 되는 길이다. 교단 생활의 고백과 성찰,
참회와 희망의 기록이자
아득한 절망을 넘어 사라진 신화처럼 들려오는
작은 희망의 노래!


이 시집은 최기종 시인이 첫 발령을 받은 완도군 고금도의 바닷가 학교생활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벌어진 전교조 탄압, 그리고 지난 해 4월에 16일에 벌어진 세월호 참사에 대한 간절한 마음까지가 큰 서사의 물결을 이룬다. 다시 말해 그 기본 뼈대를 중심으로 교사 생활에 대한 갈등과 고뇌, 그리고 학생들과 동료 교사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그 속살을 이루고 있다. 물론 이 시집이 서사시적 스케일을 갖는다는 뜻은 아니다.

조창익 전교조 전남지부장의 말마따나 “교육의 거대담론이 시인과 아이들의 눈을 통해 촘촘하게 재해석되고 있다.” 시인의 눈에 포착된 학교의 현실은 “세상사가 관심 밖이다./꽃이 피고 지는 것도/사람이 죽고 다치는 것도/지구촌이 아파하고 갈등하는 것도/홍수가 일어나고 빙하가 녹는 것도/다 남의 일처럼 여겨진다.”(「하루해」)

어쩌면 교육이 어떤 울타리 안에 갇힘으로써 근원적인 위기를 맞았는지도 모른다. 교육이 사회의 울타리 안에 갇힐 때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교사에게도 진부함이 찾아온다. 그래서 “가르치기 싫을 때가 있다./어깨를 넘어오는 아이들이 미워지고/거듭되는 일상이 지겨울 때가 있”으며(「기침 소리」) “아이들의 꿈에는/도무지 땀 흘리는 게 없다.”(「장래 희망」)

이렇게 울타리 안에 갇힌 교육은 교사나 학생들에게 전도된 가치를 심어준다. 이 전도된 가치의 전파야말로 현재 우리의 교육이 처한 가장 심각한 딜레마이다. 돌이켜 보면 이 전도된 가치를 재생산하는 사회가 세월호 참사를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그것에 대한 최기종 시인의 인식은 명징하다. 그래서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지 못한 지난날을 아프게 되짚는데 그것은 깊은 회한으로 드러난다. “아이들에게/가만히 있지 말라고/바닥에서 어서 탈출하라고/그렇게 가르쳐야 하는데/그렇게 알려줘야 하는데/아무래도/학교를 깰 수는 없었다./세상을 깰 수는 없었다.”(「차마 가르치지 못한 것-세월호 참사 30일」)

최기종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보여주는 것은 그러나 비극적 현실인식만은 아니다. 학교에서 일상적으로 맞는 학생들에 대한 긍정적이고 또 유머러스한 시들도 적지 않다. 특히 그는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서 긍정적 세계를 간취하려는 자세를 포기하지 않으며 그것이 또 의지적인 것만은 아니다. 특히 표제작인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학교에서 고래는 사라졌을까?
고래를 찾는 아이들의 눈들이
외눈박이 집어등이 되어서
장생포구를 환하게 밝혔지만
어디에고 고래는 보이지 않는다.
고래는 다 어디로 갔을까?
어른들이 마구 포획해서 씨를 말렸다고도 하고
크릴새우를 따라서 남극으로 갔다고도 했으나
아이들은 고래를 기다렸다.

학교에서 고래는 사라졌을까?
고래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눈들이
청어 떼가 되어서
저 멀리 수평선까지 넘나들었지만
고래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 아이들은 고래를 탈 수 없을까?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는데
아이들의 난바다에는
물을 품는 고래가 있다는데
어디에고 고래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고 그리운 남방은 보이지 않는다.

책상에 엎드린 아이들이
고래 소리를 타전한다.

“고래”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 속뜻은 “수평선”에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울타리가 되어버린 학교 교육을 역설적으로 환유한다. “수평선”은 “아이들”의 삶을 수평선 안쪽으로 가둬두려는 교육 혹은 길들여진 길을 가길 바라는 우리의 교육 현실이 정한 일종의 마지노선이다. 그래서 “청어 떼가 되어서/저 멀리 수평선까지”만 허락하는 것이다. 거기에 반해 “고래”는 “수평선” 너머를 상징한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고 고래는 보이지 않”지만 “아이들은 고래를 기다”리며 “책상에 엎드린 아이들이/고래 소리를 타전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암흑 같은 교육 현장에 희망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시인의 눈에게만 보이는 ‘진실’이다. 여기에 이 시집의 의미가 있다.


시인의 말

1982년 고금중학교(전남 완도)로 첫 발령을 받았다. 지도를 보니 남쪽 끝 섬이었다. 이불 보따리 하나 들고 먼 길 나섰다.

광주행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에서 강진까지 직행버스를 타고, 강진에서 마량까지 비포장도로를 달려서 마량 선착장에서 고금도까지 철부도선을 타고 가교리 선착장에서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소재지에 도착하니 벌써 땅거미 지고 있었다.

교단생활 33년, 되돌아보니 첫 발령지로 가던 하루처럼 짧기만 하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지나온 학교들이 징검다리처럼 놓여있다. 함께 했던 선생님, 아이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이 시집은 전교조 교사로 살아왔던 교단의 기록이다. 입시위주의 교육을 타파하고 교육민주화를 염원했던 시대의 에너지였고 학교를 학교답게 하고자 했던 검붉은 지층이기도 하다.

사실 처음 교육운동 할 때만해도 힘써 싸우면 옥죄는 교육모순이 곧 사라질 줄 알았다. 우리 아이들이 즐겁고 행복한 학교에서 꿈꾸는 세상을 열어갈 줄 알았다. 하지만 아직도 학교 현장은 변하지 않았다. 아직도 학교는 불야성이고 아이들은 대학 가는 동아줄에만 매달려 있다.

이 시집이 이루지 못한 자의 풀씨였으면 한다. 힘써 이루려는 자의 노래였으면 한다. 꿈꾸는 선생님들에게, 깨어있는 학부모들에게, 별 같은 우리 아이들에게 그리고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아이들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나무나루에서
최기종


시인의 말

제1부

은어 떼
바닷가 학교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
안반데기
하늘말라리아
대한의 선생들은 춥다
만만한 선생
교실에서 1
교실에서 2
아이들을 하느님이라고 하네
교사라면 첫째로
농부와 교사
분필
철갑상어 1
철갑상어 2

제2부

기침 소리
사과도 노동한다
감성노동자
물에 빠진 아이들
예전의 선생들은 그래도
하루해
선생도 사람이다
교육노동자
19세기 교육 관료
종이비행기
이 땅의 헤엄 못 치는 선생이 되어
밥과 양심
명동 단식
다시 전교조
반공이라는 것

제3부

첫 발령지
장래 희망
공부해서 남 주자
빵꾸
공부가 참외라면
이런 농담
결점
일제고사
편애
성적표
칭찬 아닌 칭송
뽐뿌질
유리창
졸업식장에서
고구려를 배우는 시간

제4부

바람 부는 날
김진아
작은 소영이
양주라
한은경
강수자
정반화
채미선
김신순
정유연
시원이
최주현
최숙종 교사
국어샘 김명희
곰팽이 선생님

제5부

45분
깨기 싫은 꿈
차마 가르치지 못한 것
이불 한 채 보내노라
물망초
풍등 하나
아직 눈물을 거둘 때가 아니다
진실이라도 돌아오라

발문
이루지 못한 꿈, 아직 길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