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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녀 시집 / 푸른 징조 / 애지 / 2013

 

바다와 사랑의 이미지를 통하여 모든 생명이 함께 살아가는 또 다른 생명의 공간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김길녀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푸른 징조』(도서출판 애지)는 병마의 시간을 이겨내면서 바다를 읽어가는 시인의 그늘이 푸르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사월의 눈/ 파천금/ 물결에 관한 보고서/ 푸른 징조/ 청사포의 봄/ 미술관에서 만난 바다/ 옛집/ 기억의 꽃밭/ 바다를 굽다/ 칠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지 않았다/ 첫사랑/ 곧, 봄/ 바다로 가는 문/ 하루

제2부
저녁 바다/ 화레스톤/ 시간의 죽음/ 붉은 시간/ 적과의 동거/ 어떤 이별/ 오래된 서랍/ 그림자/ 꽃 피는 저녁/ 기억상실증/ 기억의 집/ 그렇게,/ 물의 사막에 봄이 핀다/ 안간힘의 연대기/ 이별에 대한 예의

제3부
봄비/ 섬에서 하룻밤/ 백색소음/ 물고기 사랑법/ 블루의 나날/ 물위를 걷는 바람의 엽서/ 폭설 전야/ 여자, 여자, 여자/ 덩굴의 사생활/ 비 내리는 물고기 전망대/ 고래의 귀향/ 외돌개/ 오래된 편지/ 무거운 하루/ 크리스마스 섬

제4부
비밀의 정원/ 시간의 허리를 자르다/ 백야의 바다/ 무섬/ 그 여자/ 그곳에 고래가 있다/ 다시,/ 지극한 사이/ 무겁다/ 때,/ 늦지 않은 염려/ 모지포 가는 길/ 만선/ 태평양에서 온 편지

책속으로

이제 옛집 빈터에는 산수유꽃만 사태지고 있다
버즘처럼 썩어가는 모과와
꽃바람에도 꿈쩍 않는 늙은 감나무 옆
부르튼 살결의 산수유 가지 끝에
차마 떨구지 못했던
지난해 붉은 산수유 열매
할머니 쪼그라든 젖꼭지 같다
서둘러 골짜기로 찾아드는
저녁 햇살 붉다
덩그마니 댓돌 위에 앉은
흰고무신 바람그늘 속
그네 타는 노란 꽃귀신들
풍장으로 뼈만 남은 허물어진 담벼락
감싸 안은 초록 넝쿨은
금이 간 장독 안에서
새벽 이슬을 낳는다
― 「옛집」 전문

출판사 서평

바다와 사랑의 이미지를 통하여 모든 생명이 함께 살아가는 또 다른 생명의 공간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김길녀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푸른 징조』(도서출판 애지)는 병마의 시간을 이겨내면서 바다를 읽어가는 시인의 그늘이 푸르다.

“오랫동안 내 몸속에 세 들어 살았던 늙은/ 세포의 잎사귀들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저물녘 바다의 등에 업혀 흘러 흘러만 갑니다”(「저녁 바다」)라든가 “나의 삶이 죽음 근처에 가까웠을 때/ 비로소, 시간에게도 죽음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시간의 죽음」)는 언술처럼 “한 달에 한번 꽃피는 절정을 잃어버린”(「화레스톤」) 여자가 여성호르몬 억제제 화레스톤을 껴안고 제 몸속의 수많은 여자를 직면하는 시선이 서늘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바다가 있었다. 시인이 살고 있는 물리적 공간인 부산과 바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생관계이다. “바다에 와 바다를 그리워하는 일이 나의 일이다”(「백야의 바다」) 는 진술에서부터 “나보다 먼저 죽어간 이들의 저녁을 위하여/ 슬며시 문고리를 열어”둔 옛집에서도, 모텔 바다정원 침실에서 남자의 발을 씻기면서도, 폐석탄 잔해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는 태백능선에서도, “제 몸 서랍 속 비늘/ 모두 털어내어/ 바다로 가는 길을 열고 있다”
(「물결에 관한 보고서」).

환생, 희생, 치유의 바다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를 두고 구모룡 평론가는 “김길녀는 바다를 통하여 시원과 원초적인 생명의 약동을 그린다”고 평하고 있고, 이원규 시인은 “그녀는 가장 오래된 물고기인 실러캔스 목걸이를 걸고 이 세상을 떠도는 한 마리 고래다, 지상의 섬이다. 대양의 낯선 시어들인 서커틀, 마스트, 열수 분출공 등과도 교접하며 백 만 년 동안 불어오던 고래의 울음소리를 낸다.”고 헌사하고 있다.

■ 추천글

“바다에 와 바다를 그리워하는 일이 나의 일이다―.” 바다의 시인이자 물의 시인인 김길녀가 온 생애를 걸고 내뱉는 숨비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가장 오래된 물고기인 실러캔스 목걸이를 걸고 이 세상을 떠도는 한 마리 고래다, 지상의 섬이다. 대양의 낯선 시어들인 서커틀ㆍ마스트ㆍ열수 분출공 등과도 교접하며 ‘백 만 년 동안 불어오던’ 고래의 울음소리를 낸다. 김길녀의 시를 읽는 지리산의 봄밤에도 하염없이 마린스노우(marine snow)가 내린다.
_이원규(시인)

오죽하면 시(詩)를 쓸까.
삶을 끙끙 앓으며 이렇게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존재가 있는 한,
우리 인생이 해명과 변명의 비밀문서를 필요로 하는 한,
인류의 특산품이 눈물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
이 말의 생명력은 영원할 것이다.
길녀시인의 「푸른 징조」가 옛날 애인처럼 찾아왔다. 앓음의 노력행위가 그녀에게 무심한 깊이를 만들어 놓았다. 우리가 유영(遊泳)할 곳은 그 깊고 푸른 수심(水深)이다.
_한창훈(소설가)

■ 시인의 말


적과의 동거를 시작하며 화레스톤을 만났다
나를 지독하게 사랑하는 적과의 생활은 울퉁불퉁했다
깊은 우울 속으로 나를 감금시켰다

그래도, 끊임없이 나로부터의 혁명을 꿈꾸며
시간의 죽음을 넘어 안간힘의 연대기를 지나며
물결에 관한 보고서를 받았다

날짜변경선을 지나 흑해에서 날아온 발칸장미 향기가 바다로 가는 문을 열어 주었다 봄비 내리는 날 파천금을 만나며 그 여자가 남기고 간 화레스톤을 보았다

이제, 페루의 바닷가에서 로맹가리와 뫼르소를 데리고 자카르타로 간다
그곳에서 청사포의 봄과 사월의 눈을 그리워 할 것이다
다시, 옛집으로 돌아오는 날은 더 이상의 구토는 없으리라

세상, 저 너머로 떠나간 나의 혜린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2013년 봄이 오는 모지포 작업실에서
김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