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권자미 시인의 첫 시집. 2005년 계간지 시안으로 등단한 이후 활달한 상상력과 해학적인 멋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으며 작품활동을 해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 53편의 시를 묶었다. 소박한 우리 삶의 곳곳에 율동하는 생명성과 또한 겉으론 괜찮아 보이나 결코 괜찮치 않는 우리 삶의 비정을 쓰다듬는 손길이 간절하게 녹아 있다. 찰진 경상도 방언과 우리말 구사로 삶의 질감과 온도를 그려내는 솜씨도 빼어나다.

 

이번 시집을 두고 이경수 평론가는 세상에 괜찮은 건 없괜찮다는 말은/괜찮지 않다는 말”(괜찮아)임을 알아챈 시인은 녹음이 우거진다는 말얼마나 두렵고 지독한 일”(흙 흙)인지 절감한다. 흙으로 돌아간 누군가의 생명이 다른 생명에게 초록을 선사함을, 그러므로 생명은 돌고 도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이라고 해설하고 있고, 오탁번 시인은 그가 구사하는 토속적인 시어의 감칠맛은 독자의 눈을 가린 백석의 방언보다도 훨씬 맵짠 시적 효과를 발휘하여 새콤달콤한 눈물겨움을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살갑게 보여주고 있다.”고 헌사하고 있다.

 

무엇보다 시인은 의젓하다. 오랜 투병생활을 견뎌낸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시적 포즈나 엄살이 없다. 그의 시에서는 불화나 비유와 수사에 대한 강박이 보이지 않는다. 바닥은 절절한 아픔인데도 오히려 생기발랄하면서도 오묘한 서정으로 자기만의 개성을 그려내고 있다. 이 점이 이번 시집의 가장 큰 미덕이다.

 

권자미 시인은 어떤 고통에도 숨길 수 없는 순결한 영혼을 지닌 사람인 듯하다. 이후 그의 시세계에서도 어느 바람에도 녹슬지 않을 자기만의 색을 입혀갈 것이라 기대한다.

 

 

책속에서

 

아무래도

아무래도 눈치가 다르더니

 

시시껍적 농 거는 바람과

애첩처럼 회창거리는 만첩홍매화

그 낌새 남다르더니

응달 춘설도 본처같이 버티는데

 

보셔요

대책 없는 화냥년

발칙한 짓거리

 

노련한 바람사내

그 빠알간 새살에 입김 닿았을 때

알몸에 손 밀어 넣었을 때

 

!

삽시간에 부풀어

탱탱해지는 붉은 유두, 유두, 유두.

 

애지중지 온몸은 성감대

한껏 물 올라

까무룩 자지러지는데

 

― 「수상그르다전문

 

 

 

죽령 옛길을 소풍하던 권형은 얼마나 선하고 명랑한 힘으로 넘치는 사람이었는지요. 하산 길의 농담 끝에 과수원 바깥 가지의 사과 한 알을 개구쟁이처럼 잽싸게 따내던 일이며, 깔깔거리며 함께 맛있게 먹던 일이며, 모두 말할 수 없이 신선하고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소백산록의 그 덕스러운 산세와 함께 오래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권형의 밝음과 열정의 힘은 나중에 읽게 된 권형의 시들에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수상그르다의 발그란 관능이며 오이도의 언어감각과 결합된 묵직한 통찰이며 다 좋았습니다만, 어느 시랄 것 없이 깔려있는 권형의 낙천스러움과 따뜻한 장난기들이 나는 제일 좋았습니다.

_김사인(시인)

 

무언가 활달하면서 나름의 미학적 실험에도 게으르지 않다. 세련된 아름다움이라는 점에서는 다소 부족한 면이 없지 않으나 세계를 보는 인식의 틀이 크고 또 그 내용을 자신의 철학으로 해석해서 담으려는 노력이 진지하다.

_오세영(시인)

 

시인의 상상력이 얄궂고 맹랑하다. 매화는 사군자의 필두(筆頭), 수천 년 이어온 동양적 인문과 교양의 한 기호다. 특히 매운 품격(品格)과 맑은 아치(雅致)는 눈 쌓인 밤 달빛 아래 성근 갈필(渴筆)의 검은 가지가 겨우 두세 낱 꽃과 꽃눈을 간신히 받들고 있을 때를 으뜸으로 친다. 그런데 권자미는 그 춥고 오롯한 묵적(墨跡)의 품격과 아치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유린한다. 하물며 이 시는 표현기교가 헐겁고 거칠며, 시상의 흐름이 속돼 보이는 구석마저 눈에 띤다. 상상의 질도 어디서 많이 본 듯 낯이 익다. (이런 류의 시에서는 매화도 능수홍매, 월영매, 겹옥홍매, 흑룡금매 따위로 구체화시키는 방식이 이미지를 선명히 등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나 싶다) 이 모든 흠집과 의심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 시를 젖혀두지 못하고 눈길을 빼앗기고 만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낱말의 감칠맛 때문인 듯하다. ‘수상그르다는 사전에 좀 수상쩍다(suspisious)’로 나온다. 의미는 수상쩍다와 대동소이해 보이지만, 어감에 있어서는 거의 딴판이다. ‘수상쩍다는 대상이 위험한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의구심과 경계심이 짙게 배어 있다. 이에 비해 수상그르다는 의구심과 경계심도 없달 순 없겠지만, 거기에 차이점이 강조되면서 대상을 향한 개구진 호기심 같은 것이 짙게 투영된다. 발음을 할 때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 같은 흐벅진 감정이 들게 하기 때문이겠다. 이러한 뉘앙스와 시의 내용이 서로 절묘하게 간섭하면서 봄빛 낭자한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린다. 또 빼 놓을 수 없는 게 회창거리고. 말할 나위 없이 휘청거리고의 작은 말이다. 그러나 느낌은 사뭇 다르다. ‘애첩처럼 휘청거리고와 비교해 보면 그 맛깔의 차이를 선명히 느낄 수 있다. “애첩처럼 회창거리고회창거리고는 간드러짐, 낭창스러움 따위 의미를 거느리면서 분위기에 요염하게 편승한다.

시는 언어로 이루어진 형식이다. 시의 발착점도 언어고 시의 종점도 언어다. 그러나 이 당연한 명제를 만족시키는 시를 찾기는 뜻밖에 쉽지 않다. 대부분의 시에서 언어는 의미를 매개하는 수단 정도로 소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시의 언어가 비유와 상징의 본능에만 맡겨져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요령부득이다. 시의 언어는 그 이상이다. 권자미는 언어 자체가 지니는 질감과 온도를 느끼고 그것을 상황과 때에 맞춰 부릴 줄 아는 솜씨를 지녔다. 이는 그가 살려 쓸 만한 미덕이다.

_오태환(시인)

 

추천글

권자미 시인의 시는 읽을수록 눈물겹다. 그러나 이러한 눈물겨움은 기쁨이나 슬픔의 이분법으로 분해되지 않는 보다 오묘한 문학적 독해력을 요구하고 있다.

2005년 등단할 때부터 그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아주 독특한 시적 개성으로 뭇 시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청량산의 그윽한 높이와 부석사의 생뚱맞은 신화 속으로 무녀리 가시나처럼 겁도 없이 돌진하는가 하면, 작품 곳곳에 판소리의 말과 몸짓과 아니리도 배어있다. 누룽지 맛이 나는 민요타령의 배꼽 잡는 어조도 일찌감치 제 것으로 삼아 눈비음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능청을 떨고 있다. 시치미를 떼어놓고 되려 떼쓰는 이러한 발랄한 상상력은 마치 쥔 주먹을 펴면 포르르 날아오르는 마술사의 비둘기처럼 사뭇 황홀하기까지 하다. 그가 구사하는 토속적인 시어의 감칠맛은 독자의 눈을 가린 백석의 방언보다도 훨씬 맵짠 시적 효과를 발휘하여 새콤달콤한 눈물겨움을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살갑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는 그냥 툭 떨어지며 부서지는 고드름의 싱거운 패러다임같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저 멀리 우주의 생성과 변화를 감지하는 초능력의 안테나가 빼어난 이미지로 반짝이고 있다.

자미여, 자미여 그대 머리 위의 면류관은 절절한 아픔이지만, 이것이 바로 한 시인의 생애를 전율케하는 운명적 모티브가 된다는 점을 젤 잘 아는 자미여.

_오탁번(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