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1호...
   2019년 09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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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정당한 분노/권서각 file
편집자
105 2019-08-25
정당한 분노 일본이 우리에게 경제 규제를 시작하면서 한일관계가 극도로 악화되고 있다. 일본이 우리에게 총성 없는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정치권이나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가 시시각각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다. 야권에서는 이 사태의 책임이 우리정부의 외교 무능에서 빚어진 결과라고 한다.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고 국민의 반일감정만 부추긴다고 한다. 심지어는 대통령을 행해 대통령이 싼 분뇨는 대통령이 치우라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에게는 해결책이 있는가? 외교적 노력이라는 추상적 언어뿐이다. 사실 한국과 일본은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조약으로 한국과 일본은 공히 미군이 주둔하는 나라가 되었다. 미국에 의해 한·미·일 군사동맹이라는 불편한 동거를 하는 상태다. 1965년 한일협정도 미국의 요구에 따라 일본의 사과 없이 대한민국 국민들의 반대 속에 맺어졌다. 한일관계는 언젠가는 정상화 되어야겠지만 보다 오랜 시간을 두고 풀어야 할 과제다. 양자가 화해를 하기 위해서는 가해자가 먼저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 가해자가 반성하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는데 피해자가 먼저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서독 수상 브란트는 바르샤바에서 무릎을 꿇고 나치 피해자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일본에게는 사과할 많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겨우 ‘과거의 일에 대해 통석의 염을 느낀다.’ 정도의 말로 퉁치고 넘어가려 한다. 여기에 어떤 외교가 필요한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아베정권은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남의 나라에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 국가가 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100년 전에 제국주의 침략을 했듯이 제국주의 침략의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낸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에게 경제 규제라는 카드를 꺼내들고 사실상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사실 일본이 이렇게 나올 거라고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무역 규제는 국제질서에 대한 엄청난 도발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어떤 외교가 필요한가? 독도를 주어야 하는가? 강제 징용과 위안부 피해에 대해 없었던 일로 해 주어야 하는가? 피해자는 우리이고 사과를 해야 할 나라는 일본이다. 그런데 그들이 먼저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분노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의 존엄을 포기하는 것에 다르지 않다. T. 플러는 ‘분노는 영혼의 원동력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분노가 없는 사람의 마음은 불구다.’라고 했다. 수주 변영로는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다.’고 했다. 우리의 분노는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값싸지 않다. 우리 민족이 3.1혁명 그날처럼 뜨겁게 분노하고 있다. 상인들은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일본 제품은 팔지 않겠다고 한다. 일본으로 떠나려든 관광객들은 서둘러 예약을 취소하고 있다.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는 시민들의 분노는 정당하다. 누가 이런 분노를 값싼 반일감정이라 하는가. 우리는 분노한다. 고로 살아 있다. 우리고장에서도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일본산 불매운동이 일고 있다.  
275 사람은 누구나 개성화에 대한 삶의 과제가 있다 (융)/고석근 file
편집자
116 2019-08-14
사람은 누구나 개성화에 대한 삶의 과제가 있다 (융) 개망초 오선홍 깎아지른 벼랑 돌 틈을 비집고 저도 위험한 하나의 풍경이 된다. 홀로 피었다 당당하게 사라지는 개망초. 아주 오래 전에 한 시민단체 활동가가 말했다. ‘사회 운동하는 사람은 도덕성이 가장 중요하다.’ 그때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다르게 생각한다. ‘도덕성’ ‘옳기에 가는 길’은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봐도 대의명분이 뚜렷한 이런 것들은 마음 깊은 곳에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겉으로 도덕성을 내세울수록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두운 자신의 모습이 쌓이게 된다. 지킬박사가 되면 동시에 하이드도 되는 것이다. 지킬박사의 마음 깊은 곳에서 하이드가 틔어 나올 때 지킬박사는 한순간에 하이드가 되고 마는 것이다. 배신한 운동가들이 이런 사람들이 아닐까? 운동가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 같은 ‘당당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선홍 시인은 ‘개망초’에게서 당당함을 본다. ‘깎아지른 벼랑/돌 틈을 비집고/저도 위험한/하나의 풍경이 된다.//홀로 피었다/ 당당하게 사라지는/개망초.’ 개망초는 그 무엇도 아닌 바로 개망초다. 그는 다른 어떤 식물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 오롯이 자신으로만 살아간다. 그에게서는 여기서 나오는 당당함이 있다. 사람도 그렇다. 오롯이 자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당당함이 있다. 하지만 인간 세계에서 자신으로 살아가는 게 쉽지 않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는 14살 소년의 당당한 삶이 있다. 허클베리 핀은 야생의 소년이다. 부모도 없이 혼자 살아간다. 학교도 가지 않고 교회도 가지 않는다. 누더기를 걸치고 짐승처럼 살아간다. 어른들의 눈으로 보면 영락없는 불량소년이다. 하지만 그는 모험을 하면서 ‘인간성(人間性)’이 깨어난다. 인간에게는 인간에게만 있는 본성이 있다. 사랑이다. 다른 존재에 대한 공감, 연민이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면서 이런 특성을 획득하게 되었다고 한다. 허클베리 핀은 노예 소년 짐과 모험을 하면서 흑인에 대한 공감, 연민을 배우게 된다. ‘사랑’은 본성이기에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다보면 자연스레 깨어난다. 하지만 학교에 가고 교회에 가는 다른 아이들도 이런 능력이 쉽게 깨어날까? ‘도덕성’을 배우는 순간 오히려 이 능력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허클베리 핀은 모험을 끝내고 나서도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향해 달려가려 한다. 우리 안에는 ‘허클베리 핀’이 있다. 우리 안의 아이가 깨어나야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 안에서 우리나오는 대로 사는 게 왜 이리도 힘들었던가?’ 개망초는 자신 안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한평생을 살아갔을 것이다. 그래서 당당하게 꽃을 피웠다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가는 길에는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인간 세계에 맞춰 살아가는 것. 또 하나는 자신 안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살아가는 것. 자신 안의 ‘아이’를 깨우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갈 때 우리는 남을 사랑할 수 있고 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274 품격과 야만/권서각 file
편집자
204 2019-07-27
품격과 야만 품격이 있다는 말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품격이 있는 사회일까? 그렇다고 대답하기엔 망설임이 있을 것이다.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은 출발부터가 품격을 가지지 못했다. 정치, 경제, 사회, 예술 등 각 분야를 책임진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에 친일행위를 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해산하고 친일파에게 나라 일을 맡겼다. 일제강점기에 친일파였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개인의 이득과 권력을 위해 민족이 아닌 왜구의 편에 섰던 사람들이다. 우리나라 혹은 우리겨레라는 가치보다 자기의 이득과 권력 더 소중하게 여기고 친일을 선택한 것이다. 좋게 말하면 개인주의자고 나쁘게 말하면 기회주의자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품격을 갖추기는 어렵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쟁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사회는 극단적 경쟁사회로 분류될 수 있다. 학교는 성적순으로 줄을 세우고, 직장을 구하는 데도 시험성적순이다. 학교도 등급이 있어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에 따라 사람의 평가가 달라진다. 평생 자기가 졸업한 학교의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한다.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대통령은 그것 때문에 자격이 안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런 사회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고급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 서민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다니지 못하게 하려고 시위를 하는 학부모들의 모습이 티브이 화면에 종종 나온다. 자기의 자녀가 서민아파트에 사는 아이의 친구가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베라르디는 한국사회를 ‘끝없는 경쟁과 극단적 개인주의’라 규정했다. 야만이란 말을 이렇게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는 ‘경쟁교육은 야만이다’라고 했다. 유럽의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은 경쟁교육을 하지 않는다. 성적으로 줄 세우기도 하지 않고 출신학교로 인간의 등급을 매기지도 않는다. 다만 자기 자신과의 경쟁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높일 뿐이다. 독일은 2010년 홈스쿨링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홈스쿨링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없으므로 사회적 공감능력이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라 했다. 사회적 공감 능력이라는 말, 타인을 배려하는 능력이다. 아도르노의 관점에서 보면 타인에 대한 예의와 배려가 없는 사회는 야만인 것이다. 우리도 예전에는 천박한 경쟁사회가 아니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서울의 이회영 선생, 안동의 이상용 선생 같은 이는 가산을 정리해서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하고 일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셨다. 여운형 선생도 노비를 해방하고 그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고 독립운동의 길로 나섰다. 그분들의 품격 있는 삶이 있었기에 우리가 오늘 온전히 야만으로 떨어지지 않은 건 아닐까.  
273 하려는 자는 패할 것이오 가지려는 자는 잃을 것이다 爲者敗之 執者失之 (노자)/ 고석근 file
편집자
180 2019-07-16
하려는 자는 패할 것이오 가지려는 자는 잃을 것이다 爲者敗之 執者失之 (노자) 밤비 백거이 철 이른 귀뚜라미 우는가 했더니 뚝 그치고 기름 적은 등잔불도 꺼질듯 다시 밝아져 창밖엔 밤비가 내리고 있구나 그러니까 파초닢이 소리를 내지 공원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엄마가 아이에게 질책하는 소리가 들린다.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질투하지 마! 알았지? 질투하면 안 돼!’ 엄마가 동생과 함께 운동을 하니 언니가 왜 나와는 하지 않느냐고 투정을 부렸나 보다! 세 모녀의 침묵이 흐르고, 바람이 나뭇잎 흔드는 소리가 들리고, 운동 기구 돌아가는 소리만 쓸쓸하게 들린다. 앞으로 언니는 어떻게 될까? ‘질투’가 마음 깊이 응어리지지 않을까? 그 응어리진 검은 마음은 언젠가 동생을 향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불쑥 불쑥 틔어 나올 것이다. 저럴 때는 그냥 두면 되는데! 엄마의 마음 깊은 곳엔 ‘질투’라는 응어리진 검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 질투의 씨앗이 심어지고 그 씨앗은 몰래 몰래 자라고 이제는 스스로 어쩔 수 없을 만큼 커서 제 마음대로 불쑥 불쑥 틔어 나오나 보다. 엄마는 그 업(業)을 끊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랫동안 쌓인 업은 또 그만큼의 시간 동안 힘겹게 허물어야 사라질 것이다. 이제 엄마는 힘 센 그 업을 어쩌지 못해 질투의 화신이 되어 버렸다. 딸에게만큼은 자신의 업을 전해주기 싫어 질투하지 말라는 조기 교육을 하는데, 오히려 딸들은 그 업을 고스란히 상속받게 되어버렸다. 가끔 학부모 교육을 가게 되면 나는 항상 같은 주제의 강의를 한다. ‘그냥 두면 돼요!’ 누구나 말로는 다 아는 ‘아이를 지켜봐 주고 격려하고 지지하면 된다’는 논지로 강의를 한다. 그러면 학부모님들은 그게 ‘어려워요!’하고 합창을 한다. 나는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를 믿지 못해서라고 말한다. 스스로를 오랫동안 그냥 내 버려 둬봐야 한다고 조언해 준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항상 자신을 그냥 두지 말라고 다그친다. ‘시간은 금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금과옥조다. 우리는 헉헉대며 앞으로 앞으로 달려 왔다. 나는 언젠가부터 ‘그냥 내버려 둬!’가 삶의 신조가 되었다. 이 신조가 가장 빛을 발한 건, 자녀 교육 같다. 내게는 두 아들이 있다. 이제는 장성하여 둘 다 자신들의 삶을 가꾸어 가고 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 시골에 내려가서 완전히 자유롭게 자라게 한 게 가장 큰 힘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내 삶 전체가 ‘그냥 내버려 둬!’가 되었으면 좋겠다. 백거이 시인처럼 담담히 ‘밤비’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철 이른 귀뚜라미 우는가 했더니 뚝 그치고/기름 적은 등잔불도 꺼질듯 다시 밝아져/창밖엔 밤비가 내리고 있구나/그러니까 파초닢이 소리를 내지’ 거대한 우주의 운행 앞에 함께 담담하게 동참하는 백거이 시인. ‘자신’을 다 버려야 도달할 수 있는 지고한 경지일 것이다. 백거이 시인의 이름 거이(居易)는 ‘편안함에 거하다’는 뜻이다. 시인의 자(字)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이다. 그는 술의 힘으로 이 세상의 온갖 풍파를 온 몸으로 맞이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거이(居易)’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272 사이비(似而非)/권서각 file
편집자
171 2019-06-24
사이비(似而非) 우리는 일상에서 중용(中庸)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중용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중용 본래의 뜻이 아닌 중간의 의미로 쓰인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사서를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까닭이다. 평소에 막연하게 ‘중용은 중간이 아니다’란 말을 가끔 입에 올린 적이 있다. 중용은 변증법적 선택이 아닐까, 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우리고장 출신의 석학 황헌식 선생의 ‘신지조론’을 읽으면서 중용에 대한 개념이 보다 가깝게 다가왔다. ‘장미꽃은 붉다’는 주장과 ‘장미꽃은 푸르다’는 주장 사이에서, 중도(中道)를 택한다는 미명 아래 ‘장미꽃은 보라색’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기만이다. 여기엔 중도가 아니라 진실이 있을 뿐이다. 이때 지조인(志操人)이 택할 바 중용은 ‘장미꽃은 붉다’는 그 한마디다.(신지조론) 중용에 대한 매우 명쾌한 비유적 설명이다. 논어와 맹자에는 향원(鄕原)이란 말이 나온다. 쉽게 말하면 처세를 원만하게 하여 고을 사람들의 신임을 받는 이른바 유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광자(狂者)라는 말이 있다. 뜻은 높고 크지만 능력이 그에 따르지 못하여 미치광이처럼 보이는 자를 이르는 말이다. 돈키호테와 같은 사람이다. 견자(狷子)라는 말이 있다. 식견이나 생각은 부족하나 한번 옳다고 여기면 그 뜻을 굽히지 아니하는 고집불통을 이르는 말이다. 향원은 시류에 영합하고 성격이 모나지 않아서 비난하는 자가 거의 없다. 그러나 공자는 향원은 덕을 헤치는 자이기에 광자나 견자보다 못하다고 했다. 향원은 중용을 가장한 사이비(似而非)이기 때문에 중용에 이르기가 불가능하다. 짝퉁이 명품이 될 수 없는 이치다. 노무현은 대통령 후보 지명 연설에서 사이비 중용, 즉 향원이 지배했던 우리 역사를 통렬히 비판했다. “조선 건국 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꾸어 보지 못했고, 비록 그 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 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습니다. 패가망신했습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야 했어요.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어머니가 제게 남겨 주었던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며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 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그만 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노무현의 이말은 아직도 유효하다.  
271 감옥은 실제 사회가 감옥과 같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존재한다 (보드리야르)/고석근 file
편집자
165 2019-06-14
감옥은 실제 사회가 감옥과 같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존재한다 (보드리야르) 호수2 정지용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꼬 간지러워. SBS ‘궁금한 이야기Y’에서는 ‘신(神)’이 되어 있는 ‘허경영’에 대해 다루고 있다. 산골짜기에 대궐 같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중심에는 ‘하늘궁’이 있다고 한다. 그의 손이 몸을 쓰다듬기만 해도 불치병도 낫는단다. 사람들이 한 줄로 쭉 늘어서서 그를 찬양하며 각자의 지병을 치료 받고 있다. 그에게 속았다며 항의하는 목소리는 그의 지지자들의 환호 소리에 묻혀 버리는 듯하다. 그는 대통령이 되면 ‘지금의 헌법을 없애버리고 다시 제정할 것’이라고 말한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를 없애고, 헌법 제1조 ‘모든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매월 150만 원의 국민 배당금을 지급한다’로 바꿀 거란다. 그는 누굴까? 그가 무척 낯설게 보인다. 그리고 이 세상이. ‘대국민 사기극’을 눈앞에서 보는 게 어찌 자연스러울까? 하지만 그는 이 시대의 ‘거울’이 아닐까? 이 세상의 어떤 사건도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은 없다. 그가 아무리 낯설어도 그는 바로 우리다. 낯설다는 건 우리가 어떤 생각의 그물에 갇혀 ‘어떤 진실’을 보지 못한다는 얘기다. 아도르노는 ‘낯섦을 표현하는 게 예술의 기원’이라고 말한다. 그의 낯섦을 드러내 그를 우리 사고의 그물 안으로 끌어들여보자. 그를 ‘재벌의 아이콘’ ‘소망의 아이콘’으로 보면 어떨까? 결국 그는 ‘이 시대의 아이콘’이 아닐까? 강의 시간에 수강생들에게 가끔 질문해 본다. ‘재벌 회장과 대통령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게 좋아요?’ 당연하다는 듯 사람들은 일제히 합창을 한다. ‘재벌 회장이요!’ 우리 사회의 ‘적폐 청산’이 이리도 힘든 건 대통령보다 힘이 더 센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비호를 받는 세력들을 대통령이 어떻게 청산할 수 있나? 온갖 사기가 판을 치는 춘추전국시대. 한 왕이 맹자에게 나라를 잘 다스리는 비결을 물었다. 맹자의 대답은 간단했다. ‘왕께서 잘하시면 됩니다.’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은 당연히 맑은 법이다. 아무리 아랫물을 맑게 하려해도 윗물이 흐린 한 모든 노력들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우리 사회 개혁의 중심엔 결국 재벌이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에는 없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재벌’을 누가 개혁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말한다. 외국에 갔을 때 재벌의 로고를 보았을 때 가슴이 뭉클했다고. 그러면서 덧붙혀 말한다. ‘재벌이 우리나라의 국위를 선양하고 우리를 잘 살게 한 게 사실 아니냐?’고. 국민소득이 아무리 높아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질이 높아지지 않으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국가는 도대체 무엇일까? 힘든 국민을 빼 놓은 국가란 도대체 무엇인가? 재벌에 취직하기 위해 우리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아이를 낳고 전 사회가 정성을 들여 기른다.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가 될까? 재벌에 취직하여 그 돈을 다 받아 낼 수 있을까? 또 높은 연봉으로 받은 돈은 결국 재벌이 만든 집, 물건을 사는 데 쓴다. 재벌은 선진국이면 범죄 행위가 되는 것들을 얼마나 당연한 듯 저지르는가? 그런데도 누구에게도 제재를 할 힘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사람들은 재벌에 대해 별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소리가 너무 크면 들리지 않는 이치인 듯하다.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매월 150만 원의 국민 배당금을 지급한다’는 허경영의 헌법 제1조는 지금 이 시대 우리의 소망의 한 표현이 아닐까? 곧 정치의 계절이 다가온다. 우리가 힘을 합쳐 ‘기본소득제’를 받아들이는 정치인만 지지한다면 ‘허경영’을 통해 드러난 우리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을까? 사람들은 그 많은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그건 재벌을 위시한 모든 국민이 ‘선진국’에 걸맞은 세금을 낼 각오를 한다면 어렵지 않게 재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정지용 시인은 아름다운 한 폭의 풍경을 본다. ‘오리 모가지는/호수를 감는다.//오리 모가지는/자꼬 간지러워.’ 오리와 호수와 바라보는 시인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삼라만상은 사실은 하나로 어우러진다. 단지 우리의 눈이 갈가리 찢어놓을 뿐이다. 허경영을 비난하는 건 우리 자신을 비난하는 것일 것이다. 그는 우리의 모습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줘 우리는 불편하다. 하지만 그는 그 안에 우리의 모든 것이 다 들어있는 한 폭의 풍경일 것이다.  
270 국민과 인민/권서각 file
편집자
183 2019-05-26
국민과 인민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국민학교는 일제강점기인 1941년부터 사용되었다. 일제가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학교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국민은 황국신민의 줄임말이다. 물론 국민학교의 교육목표는 충량한 황국신민, 즉 친일파를 양성하는데 있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의미에서 1996년 초등학교로 바꾸었다. 해방된 지 50년 만이다. 학교 이름은 국민이라는 말이 쓰지 않지만 ‘국민’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인민이라는 말이 보이고 대한제국에서도 백성과 같은 뜻으로 인민이라는 말이 쓰였다. 인민은 영어의 People을 번역할 때도 쓰였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에서도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라는 말이 나온다. 인민이라는 말이 쓰이지 않게 된 것은 분단 이후다. 북에서 인민이라는 말을 쓰게 되면서부터 우리는 인민 대신에 국민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동무라는 말도 북에서 쓰는 말이기에 남에서는 쓸 수 없는 말이었다. 원래 동무는 ‘동모’, 동메‘ 등으로 쓰이다가 조선 후기 광산에서 덕대 밑에서 일하던 광부들이 서로를 ’동무‘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후로 친근한 사이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도 원래는 ‘동무 따라 강남 간다.’였다. 1964년 춘천의 한 교회 전도사가 ‘모여라, 동무야 여름성경학교로’라는 펼침막을 교회 앞에 걸었다가 경찰에 끌려가 온종일 맞았다. 제주의 한 고등학교 교사는 술자리에서 동무라는 말을 했다가 전기고문을 당하여 폐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로 동무라는 말은 차츰 남쪽에서 사라졌다. 노동이라는 말도 근로로 바뀌었다. 만약 분단이 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인민, 동무, 노동이라는 말을 자유롭게 쓰고 있었을 것이다. 원래 쓰던 우리말을 자유롭게 쓸 수 없는 것도 분단으로 인한 국어의 수난이라 할 수 있다. 국어가 시대를 잘못만나 고생이 많다. 지금 북에서 쓰는 말을 쓴다고 처벌 받는 일은 없다. 그만큼 민주화 되었다. 게다가 우리는 북의 40배나 넘는 경제력을 갖고 있으며 군사력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 북에 쫄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무나 인민이나 노동이라는 말이 낯선 말로 느껴지는 것은 분단이 너무 길어 ‘국민’이나 ‘친구’, ‘근로’라는 말이 굳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분단으로 인해 남과 북의 국어도 상당부분 이질화 되었다. 남에서 동무는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는 사이에 쓰는 말이다. 북에서 동무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함께 싸우는 사람’ 정도의 뜻으로 쓰인다. 북에서는 정을 나누는 가까운 사이에는 친구라는 말을 쓴다. 동무와 비슷한 말로 동지가 있는데 동지는 자기보다 윗사람에게 쓰는 말이다. 김일성 동무라고 하지 않고 김일성 동지라고 한다. 남에서 ‘아바이’는 ‘어마이’와 작을 이루는 말로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북에서 ‘아바이’는 남의 ‘어르신’과 같은 높임말이다. 남북의 통일은 아직은 어렵지만 화해와 협력의 시대가 가까워지고 있다. 비무장지대 초소도 철거하고 서로 비방도 하지 않는다. 필자가 소속된 한국작가회의에서는 남북한 공동 국어사전을 준비하고 있다.  
269 생활세계는 체계의 식민지가 된다 (하버마스)/고석근 file
편집자
145 2019-05-15
생활세계는 체계의 식민지가 된다 (하버마스) 오늘밤은 106호에서 시작되었다 김행숙 못된 아이들은 이렇게 항상 머리 위에서 논다. 106호 고독한 남자는 갑자기 참을 수 없었다. 천장이 아니라 천둥 같잖아. 오늘밤은 조용해야 해. 오늘밤은 쉬어야 해. 106호 고독한 남자는 206호 고독한 여자가 된다. 우리 집엔 애들이 없어요. 그리고 난 쭉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어요. 306호는 살인사건 이후 칼 한 자루까지 사라졌잖아요.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집이 됐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좀 더 올라가봐야 해요. 못된 아이들은 빠르게 기어올라요. 어디쯤에서 배꼽은 쑥 빠질까요? 옥상까지 올라온 우리들은 43명이다. 우리들은 일제히 하늘을 노려본다. 1206호 별빛같이 고독한 남자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기초수급자인 청년이 술에 취해 마을 회관에서 행패를 부리다 기물을 파손하게 되었단다. 급기야 경찰이 출동하고 그는 연행되어 벌금형을 받고 풀려났단다. 그를 돌보는 요양보호사는 그 청년에게 마을회관에 손해배상을 하게해야지 왜 국가가 벌금을 물리느냐고 했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이론을 공부하고 있는 시간에 아주 적절한 질문이었다. 하버마스는 ‘우리의 생활세계가 체계에 의해 식민지가 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살고 생활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물가에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고 있는 아주머니들. 다정한 친구들 몇몇이 만난 술자리들. 완전히 자유롭게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입을 막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이 함께 어우러진다. 그들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간다. 그 청년은 무슨 사연이 있어 마을회관의 기물을 파손하게 되었을 것이다. 술이 깨고 나면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를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때 마을 사람들이 손해배상을 하라고 하면 그도 순순히 따를 것이다. 마을 사람들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 가게 되면 마을은 점점 신나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국가가 이런 소소한 일에 개입할까? 현대 사회는 국가 권력과 자본 권력이 깊이 결탁되어있다.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영리 추구, 효율성 등을 위해 국가 기구가 관료화되어있다. 자본은 개인이 공동체를 이루기를 원치 않는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각자도생(各自圖生)하기를 바란다. 서로 비교하고 질투하며 소비를 최고의 가치로 두기를 바란다. 그래야 자본이 원하는 세상이 이루어지니까. 국가 기구들은 이런 세상을 만들어간다. 기초수급자인 한 청년의 벌금형은 ‘체계가 생활세계를 식민지화하는 거대한 사건’인 것이다. 생활세계와 체계가 하나인 공동체가 있었다. 대표적인 공동체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Political animal)’이라고 정의했다. 즉 인간은 ‘폴리스적(Political)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공동체, 도시국가(Police)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민주주의(民主主義)는 이러한 공동체에서만 제대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인간은 자신의 이익에만 연연해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이익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이익을 하나로 만들어갈 것이다. 그야말로 한 사람은 전체를 위하고 전체는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눈부신 공동체를 아주 잠깐 만난 적이 있다. 1991년 봄 강경대 학생이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희생되었다. 내가 속한 단체도 다른 여러 단체들과 함께 강경대 학생의 모교인 명지대에 모여 독재 타도를 외치며 도심으로 행진해갔다. 길 가던 시민들이 우리를 향해 박수를 쳤다. 그날 밤 우리는 을지로에서 경찰을 몰아내고 ‘해방구’를 만들었다. 체계가 없는 생활세계. 가슴이 벅차올라 서로 어깨를 끼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둘러 앉아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사람이 이렇게 고귀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늘, 바람, 건물들, 지나가는 차들이 다 고귀해졌다. 나는 이렇게 기적적으로 마르크스가 꿈 꾼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를 만났다. 그래서 나는 인간을 믿는다. 아무리 체계가 우리의 아름다운 생활세계를 마구 짓이겨버려도 생활세계는 언제고 되살아나리라는 것을 믿는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황량한 생활세계 속에 산다. 김행숙 시인은 폐허가 된 생활세계를 처절하게 노래한다. ‘오늘밤은 106호에서 시작되었다’ ‘못된 아이들은 이렇게 항상 머리 위에서 논다. 106호 고독한 남자는 갑자기 참을 수 없었다. 천장이 아니라 천둥 같잖아. 오늘밤은 조용해야 해.//오늘밤은 쉬어야 해. 106호 고독한 남자는 206호 고독한 여자가 된다. 우리 집엔 애들이 없어요. 그리고 난 쭉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어요. 306호는 살인사건 이후 칼 한 자루까지 사라졌잖아요.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집이 됐잖아요.//그러니 우리는 좀 더 올라가봐야 해요. 못된 아이들은 빠르게 기어올라요.//어디쯤에서 배꼽은 쑥 빠질까요? 옥상까지 올라온 우리들은 43명이다. 우리들은 일제히 하늘을 노려본다. 1206호 별빛같이 고독한 남자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빌라로 이사 온지 두 달이 다 되어 가건만 옆집 노부부밖에 모른다. 가끔 소음으로 이웃들의 존재를 느낄 뿐이다. 적막하다. 우리는 어찌하다 서로 애타게 찾으면서도 이다지도 모질게 서로를 외면하며 살아가게 되었을까? 강의 후 뒤풀이하며 잠시 동안 더불어 사는 인간을 느낀다. 사람의 진한 향기를 맡다 술집 문을 나서면 이 세상은 황량하다. 무표정한 건물과 사람들 사이로 자전거를 달리다보면 내 표정도 차츰 굳어진다. 핵전쟁 후의 세상처럼 괴기스럽다.  
268 꽃에게 묻다 /권서각 file
편집자
219 2019-04-22
꽃에게 묻다 봄이다. 겨우내 무채색의 쓸쓸한 대지가 화사한 표정이다. 부드러워진 땅 속에서 움츠렸던 생명들이 파란 모습을 드러낸다. 냉이 달래가 고개를 내밀고 밥상 위엔 봄나물이 향기롭다. 나무의 거친 등걸에도 작은 가지에 봄꽃이 얼굴을 내민다. 산수유 매화의 조그만 얼굴이 반갑다. 사람들은 그 봄의 생명들을 만나기 위해 들길을 걷고, 날을 잡아 봄 소풍을 가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자연을 찾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사를 보낸다. 자연에서 배운다고도 한다. 우리는 자연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자연의 질서를 배우는가? 옛 사람들은 아마 그렇게 했을 것이다. 도덕경의 상선약수(上善若水)와 같은 것 말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에서 변하지 않는 성정을 배우고, 담는 그릇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것에서 변화의 태도를 배웠을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자연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사회 생태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생명체를 그냥 생명체라고 하지 않고 ‘생태적 개체’라 한다. 숲속에 피어 있는 한 송이의 꽃은 저 혼자 겨울을 이겨낸 인고의 시간 끝에 마침내 스스로 꽃을 피운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한 송이 꽃이 피기 위해서는 뿌리를 적시는 물과 가지를 스치는 따스한 바람과 발목을 덮어주는 낙엽과 그 낙엽을 거름으로 만들어주는 온갖 미생물들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꽃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눈맛을 상큼하게 하며 벌들에게는 양식을 제공한다. 벌은 양식도 가져가지만 꽃가루를 수정하여 나무의 종족을 보존하게 하게 해 준다. 생태적 개체라는 말 속에는 모든 생명체는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생명체와 관계를 맺으며 그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을 보존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사람도 대자연에 존재하는 하나의 생태적 개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도 여러 다른 생태적 개체의 도움에 의지해서 살아간다. 땅과 물과 공기가 있는 곳에 터를 잡고 여러 동물과 식물에서 먹을거리를 얻는다.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도 다른 개체의 도움이 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 우리가 자연에서 배운다는 것은 인간도 제 혼자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닐까. 우리사회는 극단적 경쟁사회다. 경쟁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과 노력이 뛰어나서 그리 되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경쟁에서 실패한 사람은 능력이 없거나 성실하지 못해 그리 된 것이므로 그의 실패는 그만의 탓이라 여긴다. 그렇지 않다. 사람 사는 세상도 생태계와 다르지 않다. 성공한 자는 저 혼자 잘나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리 된 것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 꽃이 저 혼자 핀 것이 아닌 것처럼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도 저 혼자 잘나서 그리 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입으로만 말하지 말고 자연에 가서 꽃이 어떻게 해서 피었는가, 왜 그토록 아름다운가 물어보아야 할 것이라.  
267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프랑스와즈 사강)/고석근 file
편집자
226 2019-04-15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프랑스와즈 사강) 안개 기형도 1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욱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聖)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똑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銃身)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뒷산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면 사방이 뿌옇게 보인다. 흐릿한 고층 아파트들이 서양 중세 도시의 성곽 같다. 자전거를 타고 헉헉 매캐한 공기 속을 헤쳐 나간다. 집에 들어와도 공기가 탁하다. 숨이 턱턱 막힌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공기 청정기를 샀다. 몇 시간을 돌렸더니 거실의 공기가 향긋하다. 이제 숨을 좀 쉴 것 같다. 뿌연 세상 속에서 나만의 청정한 세상.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평화롭다. 작년엔 난생 처음 에어컨을 썼다. 거실 천장에 달려 있는 에어컨을 비닐로 싸두고 있었는데,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비닐을 뜯어내고 에어컨을 켜니 오! 찬바람이 쏴 거실 전체를 한순간에 가득 채웠다. 모처럼 큰 대자로 편히 누웠다. 재작년엔 스마트 폰을 샀다. 핸드폰 없는 나는 편한데 남들이 불편하단다. 결국 세상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제 핸드폰은 내 몸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내가 어딜 가건 항상 내 몸에 착 달라 붙어있다. 나는 자꾸만 자본주의에게 굴복해 간다. 이상(理想)보다는 생존이 먼저니 결국 생존을 담보로 나를 길들인 자본주의 앞에 속수무책이다. 세상이 뿌옇다. 한 치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교(資本主義敎)의 신도는 세상을 똑바로 볼 필요가 없다. 교주님께서 세상만사 다 역사하시니 우리는 주님의 충직한 종으로만 살면 된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聖域)이기 때문이다./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방죽 위에서 취객(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19세기 미국의 추리소설가 에드가 앨런 포는 그의 단편소설 ‘검은 고양이’에서 ‘안개에 갇힌 세상’에서 한 치 앞도 잘 보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악마가 되어 가는지를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나’는 동물을 좋아하는 상냥하고 소심한 남자다. 이런 사람은 겉으로는 선하게 보인다. 사람들은 그를 법 없이 살 사람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왜 그럴까? 자신들이 대다수 ‘선량한 소시민’이어서 자신들 내면의 깊은 광기가 두려워서 그런 것일까? ‘선량한 인간’은 안개 속에서 안개 너머의 세상을 보려하지 않는다. ‘나’는 어느 날인가부터 술독에 빠지기 시작한다. 술은 ‘나’안의 억압된 힘을 일깨운다. 사람들은 술이 문제라고 하지만 실은 ‘나’안의 억압된 것들이 문제다. 술은 그것들을 해방시킨다. 취중진정발(醉中眞情發 술에 취하게 되면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놓게 된다)이다. ‘나’는 자신 안의 온갖 괴기스러운 것들은 그대로 풀어놓는다.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가 자신의 손등을 할퀴었다는 이유로 나무에 목매달아 죽이게 되고, 그 고양이를 닮은 고양이를 데려와 기르다 그 고양이마저 죽이려 든다. 막아서는 아내에게 흉기를 휘둘러 아내를 살해하게 된다. 그 다음 수순은 아내 시체를 처리하는 것. 벽에 아내를 세워 넣고 태연히 회칠을 한다. 경찰들이 찾아오고 ‘나’는 안전하다고 생각하여 한 말들이 굴레가 되어 그는 결국 아내 살인범으로 체포된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황망했을까? ‘나’는 선량한 사람이었는데, 어디서부터 어긋나게 되었을까? 그는 도무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냥 자신의 처지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 그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을 것이다.  
266 블랙 코미디/권서각 file
편집자
254 2019-03-24
블랙 코미디 블랙 코미디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나 사건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의 한 갈래다. 1940년 프랑스 초현실주의 작가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이 ‘블랙 유머 선집’이라는 책을 발간하면서 블랙 유머, 블랙 코미디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 목적이지만 인간과 세계의 모순성, 부조리함을 느끼게 하는 역설적인 유머를 사용한다. 희극이지만 마냥 웃기만 할 수 없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가 그러하다. 우리 근·현대사에도 블랙 코미디 같은 장면이 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은 탐관오리의 대명사다.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여 자신의 부를 축적했다. 조병갑의 학정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녹두장군 전봉준의 휘하에 들어가 고부 관아를 공격하면서 동학농민전쟁이 시작되었다. 조병갑은 몸을 피해 살아남았으나 제주에 유배된다.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동학군이 패했다. 전봉준도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도 채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졌다. 해월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재판장이 전 고부 군수 조병갑이다. 김구 선생과 함께 상해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심산 김창숙 선생은 고문 후유증으로 앉은뱅이가 되었다. 스스로 앉은뱅이 늙은이라는 뜻의 벽옹(躄翁)이라는 아호를 쓰셨다. 두 아들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해방 후에는 유림들의 재산을 헌납 받아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총장이 되셨다. 유학의 중흥을 통해 선비정신을 바로 세울 인재를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그도 잠시 이승만이 보낸 정치 깡패들에 의해 총장직에서 물러나서 여관을 전전하는 처지가 되었다. 생계는 택시 운전을 하는 셋째 아들이 이어갔다. 의성 김 씨라는 인연으로 말년에는 봉화 바래미에 기거하시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심산의 뒤를 이어 성균관 대학 총장이 된 사람이 이명세다. 이명세는 일제 때 조선유림연합회 대표로서 침략전쟁의 나팔수 노릇을 하던 친일파였다. 해방이 되어도 해방이 된 것이 아니었다. 영화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사람이었다. 식민지 침략의 본거지와 침략 원흉을 폭탄으로 응징했다. 일제는 김원봉에게 김구 선생보다 많은 현상금을 걸고 잡으려 했다. 그는 끝까지 잡히지 않고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1947년 3월, 일제 때 고등계 형사로 악명 높은 노덕술에 의해 좌익 혐의로 체포되었다. 억울해서 사흘을 울었다 한다. 1948년 김구 선생과 함께 남북연석회의에 갔다가 북에 남았다. 북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다가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가장 열렬한 독립투사가 해방 후에는 남에서도 북에서도 찬밥 신세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만주에는 두 부류의 조선인이 있었다.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독립군을 토벌하는 일본의 앞잡이가 그들이다. ‘간도토벌대’는 독립군 잡는 대표적인 일본의 앞잡이다. 혈서를 쓰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서 일본군 장교가 되어 간도토벌대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던 사람은 해방 후에 통치자가 되고 애국자가 되어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그들에게 쫓기던 독립투사는 타국의 감옥에서 쓸쓸히 죽고 후손들은 가난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블랙 코미디와 다르지 않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265 시를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건 벽을 마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자)/고석근 file
편집자
281 2019-03-16
시를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건 벽을 마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자) 시 옥따비오 빠스 뒤집어 엎어라. 꼬투리를 잡고 늘어져라(비명을 질러봐, 더러운 년들아), 두들겨 패라, 입에 단물을 마구 들이 부어라. 풍선처럼 부풀려서 터뜨려버려라, 피와 골수를 마셔버려라, 말라 비틀어지게 해, 거세해버려라, 짓밟아버려, 멋진 수탉처럼, 목을 비틀어버려, 요리사처럼 털을 꺼내버려, 투우처럼, 수소처럼, 질질 끌고 가라, 가르쳐준 대로 해, 시인아, 말들을 서로 삼켜버리게 해라. 오랜만에 대학 후배 ㄱ과 술을 마셨다. 한 때 문학청년이었던 그는 근면성실한 공기업 간부가 되어 있었다. 대학 시절엔 참 할 말이 많았는데, 이제는 자꾸만 말이 끊어졌다. 술기운으로 버틴 자리였다. 횡설수설 그 시간을 메우고 지쳐서 집으로 돌아왔다. 시(詩)를 잊은 그는 내 앞에 놓여 있는 벽이었다. 왜 시를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은 벽을 마주하는 것과 같을까? 시(詩)라는 글자는 말(言)과 절(寺)이 합쳐져 있다. 즉 시는 절에서 쓰는 말이라는 것이다. 절에서는 쓰는 말은 고도의 비유와 상징으로 이루어져있다. 조주 선사가 막 도착한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는 일찍이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가?’ 그 스님이 대답했다. ‘예, 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조주선사가 말했다. ‘그래? 그러면 차 한 잔 들게나.’ 다시 조주선사는 다른 스님에게 같은 질문을 하였다. 그러자 그 스님이 말했다. ‘아니오, 와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조주선사가 말했다. ‘그래? 그러면 그대도 차 한 잔 들게나.’ 이성적(理性的)으로는 도저히 그 뜻을 알 수 없는 대화다. 선사들은 단어를 사전에 나와 있는 뜻으로 쓰지 않는다. 깨달음의 경지를 보여주는 수단으로 언어를 쓰는 것이다. 왜 선사들은 말을 이렇게 할까? 우리 모두 공유하고 있는 뜻으로 언어를 쓰면 일상생활에서는 충분히 소통을 할 수 있겠지만 삶의 신비, 일상 이면에 있는 세계를 드러낼 때는 한계가 있다. 언어는 이성적이어서 과학적 논리적 세계만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모 고등학교에 인문학 강의를 갔다가 끝난 후 집으로 오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정류장 벽에 시가 붙어 있었다. 그 시를 보고 있는데, 인문학을 수강하는 여학생이 나를 보며 말했다. ‘선생님, 저 시 좋죠? 읽고는 두 번이나 눈물이 났어요.’ ‘아니야, 저건 시가 아니야!’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나는 장래 희망이 문학인 그 여학생이 평소에 생각하던 시로부터 벗어나기 바랐다. 김수영 시인은 ‘시여, 침을 뱉으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思辨)을 모조리 파산(破算)을 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시를 감정의 분출로 생각한다. 김소월 시의 아류들을 시로 생각한다. 비유와 상징, 긴장미가 별로 없는 일상어의 감상적인 나열들. 이런 시들이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 역 벽, 공원 게시판에 많이 붙어 있다. 시는 최소한 우리의 상투적인 생각에 실금이라도 내야 한다. 누구나 뻔히 느끼는 감정을 글자들을 행과 연으로 나열하여 표현한다고 해서 시가 되지는 않는다. 문학이 꿈인 그 여학생이 벌써부터 시를 감상의 분출로 알게 되면 그녀의 문학 끼는 일찍이 고갈되고 말 것이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시인 도연명은 말했다. ‘바깥에 있는 것은 물색(物色)이고 내게 있는 것은 생각이니, 이 둘이 서로 부딪치고 어우러져서 시가 지어지게 된다. 만약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서로 관련되는 대상이 없다면 물색은 그저 한가한 소재거리에 불과하다.’ 언어는 세상이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이기에 ‘나만의 생각’으로 바깥의 사물을 만나지 않으면 우리의 사고는 언어에 갇히게 된다. 나의 언어가 없으면 우리는 나의 삶을 살 수가 없다. 시 읽기와 시 쓰기는 나의 삶을 살기 위한 치열한 몸짓이다. 그래서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빠스는 ‘시’에 대해 노래한다. ‘뒤집어 엎어라./꼬투리를 잡고 늘어져라(비명을 질러봐, 더러운 년들아),/두들겨 패라,/입에 단물을 마구 들이 부어라./풍선처럼 부풀려서 터뜨려버려라,/피와 골수를 마셔버려라,/말라 비틀어지게 해,/거세해버려라,/짓밟아버려, 멋진 수탉처럼,/목을 비틀어버려, 요리사처럼/털을 꺼내버려, 투우처럼,/수소처럼, 질질 끌고 가라,/가르쳐준 대로 해, 시인아,/말들을 서로 삼켜버리게 해라.’ 말들을 서로 삼켜버리게 해야 한다. 말이 없는 세상, 침묵... 속에서 솟아나오는 언어. 시다. 진정한 언어다. 나의 생각을 말하려면 시를 알아야 한다. 시를 모르는 사람은 나의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무슨 말을 하든지 그의 말이 아니다. 소음일 뿐이다. 소음뿐인 인간 앞에서 우리는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다.  
264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권서각 file
편집자
271 2019-02-25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시인의 ‘그날’이라는 시의 마지막 행이다. 요즘 다시금 이 문장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 주위에는 조금만 생각해도 옳고 그름을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에 대해서도 옳은 것을 자꾸만 그르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이 문장이 떠오르는 것은 이런 말들이 횡행하는 언어의 풍경 때문일 것이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었다. 일반 시민의 성금으로 이루어진 이 사업은 친일파 후손들의 고소고발 등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15여년 만에 간행되었다. 나라가 해야 할 당연한 사업을 시민들이 해낸 것이다. 처벌을 해도 모자랄 친일 행위에 대해 그 이름을 공개하는 일조차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친일파를 밝히는 일을 반대하는 이들은 말한다. “일제 때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한 일을 친일이라고 한다면 친일파 아닌 사람이 누가 있는가?” 틀린 곳이 없는 말처럼 들린다. 고백하건데 이 말에 공감한 적이 있다. 우리 역사를 알지 못할 때는 그랬다. 독일이나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들은 모두 처벌받았으나 우리는 그 반대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세운 학교에서 정상적 교육을 받았는데 왜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몰랐을까?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노래는 ‘고향의 봄’, ‘희망의 나라로‘ 등의 아직도 애창되고 있는 곡들이다. 이 노래를 만든 사람이 홍난파, 현재명인데 이들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음악활동을 한 사람들이다. 해방 후 홍난파는 방송국 지휘자로, 현재명은 서울음대 학장으로 우리나라 음악교육을 담당했다. 해방 이후 수립된 이승만 정권은 친일 인사로 구성되었다. 청치, 사회, 경제, 교육. 예술 등 모든 분야를 친일파들이 장악했다. 우리는 해방 후 학교를 다니면서 친일파들이 구성한 교육과정으로 친일파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그래서 홍난파, 현재명의 노래만 있는 줄 알았다. 그들이 만든 음악교과서엔 친일파의 음악과 서양음악만 있고 우리음악인 국악은 없었다. 우리가 모든 행사에서 부르는 ‘애국가’도 친일파 안익태의 곡이다. 우리 국가는 국악풍의 노래여야 함에도 루마니아풍의 곡이라는 논란도 있다. 안익태는 에키타이 안이라는 이름으로 동경, 베를린 등에서 활동한 재능 있는 음악가였다.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국 수립을 찬양하는 교향곡 ‘만주 판타지’를 작곡하여 연주했다. 해방 후 이를 약간 수정하여 ‘코리아 판타지’로 바꾸었다. 이 교향곡에 삽입된 합창곡이 ‘애국가’다. 에키타이 안은 인본과 연합한 나치정권에 협력했다는 논란도 있다. 이보다 더 친일파일 수는 없다. 이승만은 국회에서 구성한 반민족행위자처벌법에 따라 구성된 반민특위를 해체했다. 이후 친일파는 대한민국의 주류가 되었다. 친일파의 후손이 승승장구한 것과는 달리 독립투사의 후손은 주변인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런 사회가 병든 사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친일파가 만든 노래를 아무 생각 없이 부르는 우리의 모습이, 병들었으나 아프지 않은 것과 무엇이 다른가. 대한민국 100주년을 맞아 떠오른 생각이다.  
263 죄수의 질을 보면 그 나라 문명의 수준을 알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고석근 file
편집자
283 2019-02-16
죄수의 질을 보면 그 나라 문명의 수준을 알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삶 릴케 그대는 삶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때면 삶은 축제처럼 될 것이다. 어린이가 길을 가며 바람결 하나하나에서 많은 꽃들을 선사받듯 나날을 지나가게 버려두라. 그 꽃을 모아 아껴둔다는 것은 그 어린이의 생각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 어린이는 즐겨 머무르려는 꽃을 머리카락에서 가만히 뽑아 사랑스러운 젊은 해들을 향해 또 다시 손을 벌리고 있다. 한 모임에 갔다가 학원에서 논술을 강의하는 분과 얘기를 하게 되었다. 그는 교도소에서 인문학을 강의하고 싶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죄수들에게 인문학을 강의하여 성공한 사례가 있다고 하면서. 그와 얘기하면서 그가 바라보는 ‘범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범인은 가르치고 이끌어서 다시 이 사회에 복귀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아니면 가혹하게 처벌하든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데 익숙하다. 그 논술강사는 자신은 정상의 자리에서 비정상을 정상으로 이끌어보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그런 ‘이성(理性)적 인식’으로 가능하냐는 것이다. 머리로 따져서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 랭보는 말한다. ‘오직 신성한 사랑만이 세계에 대한 인식의 열쇠를 수여한다.’ 이 세계, 인간은 신성한 사랑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시무시한 폭력이 된다.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사고체계는 이 사회가 우리에게 주입한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우리 사회를 고스란히 긍정하는 사고체계이다. 우리 사회의 죄수들을 생각해 보자. 우리 사회의 구조가 촘촘히 그들을 옭아매어 끝내 그들을 감옥에 갇히게 했을 것이다. 단적으로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의 사회 구조’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면 인문학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그들을 교화하여 사회에 복귀시키는 것이 정말 인문학적 일까? 다행히 죄수가 되지 않고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보내는 우리는 그들보다 잘 살고 있는 걸까? 머리로는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겠지만 몸은 안다. 그들이 죄를 저지를 때 우리도 동참했다는 것을. 우리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런데 우리는 죄의 그물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우리는 죄수가 아닌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내가 오늘을 정직하게 살았다면 그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도스토예프스키)’ 우리 사회에서 오늘 하루를 정직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 모두 정직하지 않게 살았는데 그들은 죄수가 된 것이다. 우리는 죄수들을 구원하려 하기 이전에 먼저 인간, 세상에 대해 깊은 통찰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죄수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저절로 나올 것이다. 랭보는 ‘천재는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유년기로의 회복’이라고 했다. ‘그대는 삶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그때면 삶은 축제처럼 될 것이다./어린이가 길을 가며/바람결 하나하나에서/많은 꽃들을 선사받듯/나날을 지나가게 버려두라.’ ‘그 꽃을 모아 아껴둔다는 것은/그 어린이의 생각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아껴두고 절약한다는 소유의식에 젖은 우리는 남을 구원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 ‘그 어린이는 즐겨 머무르려는/꽃을 머리카락에서 가만히 뽑아/사랑스러운 젊은 해들을 향해/또 다시 손을 벌리고 있다.’ 이런 경지를 프랑스의 철학자 라캉은 ‘주이상스’라고 했다. ‘아이’만이 갖고 있는 ‘법열(法悅)’. 자신 안의 아이에 이끌려 살아가는 어른도 이 기쁨 속에 있다고 한다. 이때 랭보가 말하는 ‘신성한 사랑’은 우리 안에서 물결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 세계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재단하고 어떤 틀에 꿰맞추는 폭력을 인문학의 이름으로 논술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이 자행하고 있는가?  
262 피라미드/권서각 file
편집자
315 2019-01-24
피라미드 티브이 드라마를 즐겨 보는 편은 아니지만 요즘 ‘스카이 캐슬’이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강남 부자동네 사람들의 사는 모습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다. 드라마를 보기 전에는 그들은 그들 밖의 사람들을 개, 돼지로 여긴다는 정도로만 짐작할 뿐이었다. 코디라는 말도 연예인의 옷차림을 관리해 주는 사람 정도로 알았는데 그들의 코디는 자녀를 명문학교에 입학시켜주는 기획자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소도구 가운데 피라미드 모형이 있다. 등장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차 교수는 피라미드 모형을 늘 책상에 두고 보면서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르기를 소망한다. 자녀들에게도 피라미드 꼭대기에 오를 것을 요구한다. 꼭대기에서는 누리고 아래에서는 짓밟힌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그들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모두 이런 부류의 사람만 산다면 우리사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사회가 아직 온전히 망하지 않은 것은 자기의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며 이웃을 배려하며 사는 선량한 다수, 곧 피라미드의 아랫부분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일 것이다. 사회 모든 구성원이 모두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르려고 온갖 부정과 불법과 편법을 저지르며 산다면 우리사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이다. 그들이 개, 돼지라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그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다. 피라미드의 아래에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지배계층에 짓밟히면서도 오히려 그들을 지지하는 모습이 그러하다. 우리는 OECD 국가 가운데 자영업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에 산다. 최저임금을 올리자 자영업자들이 살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최저임금을 올린 정부를 탓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건 우리 경제의 오래된 구조의 문제이지 누구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서로가 지혜를 모아 풀어야 할 어려운 과제다. 경제개발 시대에 우리는 대기업에 자본을 몰아주기 위해 강제로 저금을 하고, 우리의 어머니들은 머리카락을 잘라서 팔았다. 독일에 광부로 가고 간호사로 갔다. 베트남에 용병으로 가고 젊은이들은 공돌이와 공순이로 불리며 저임금 노동을 하며 기업을 키웠다. 그 희생이 모여서 대기업이 성장하고 통계상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런데 그 공은 어느 한 사람의 것이 되고 노동자들은 아직도 최저임금도 받기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 사는 사람들은 밖에서 보면 우아하고 품위가 있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꼭대기를 향한 천박한 경쟁이 있을 뿐이다. 속은 병들었으나 겉만 멀쩡한 꼴이다. 어두운 과거를 숨기고 우아한 척 사는 드라마 속 인물인 한서진은 화가 치밀면 태도를 돌변하여 “아갈머리를 확 찢어 놓을라.”라는 비속어를 수시로 사용한다. 비속어는 대책 없는 상대를 만났을 때 가끔 필요하기도 하다. 주위에서 최저임금도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비하하고 피라미드 꼭대기를 두둔하는 말을 들을 때는 한서진의 대사를 되돌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피라미드를 내동댕이치며 한 차 교수 아들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지구는 둥근데 왜 피라미드여야 해?”  
261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끈다 (괴테) /고석근 file
편집자
401 2019-01-17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끈다 (괴테) 그 희고 둥근 세계 고재종 나 힐긋 보았네 냇가에서 목욕하는 여자들을 구름 낀 달밤이었지 구름 터진 사이로 언뜻, 달의 얼굴 내민 순간 물푸레나무 잎새가 얼른, 달의 얼굴 가리는 순간 나 힐끗 보았네 그 희고 둥근 여자들의 그 희고 풍성한 모든 목숨과 신출神出의 고향을 내 마음의 천둥 번개 쳐서는 세상 일체를 감전시키는 순간 때마침 어디 딴 세상에서인 듯한 풍덩거리는 여자들의 참을 수 없는 키득거림이여 때마침 어디 마을에선 훅, 끼치는 밤꽃 향기가 밀려왔던가 말았던가 모 대안 고등학교에서 남학생들이 여학생 기숙사를 침범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여학생들이 샤워하는 장면을 남학생들이 몰래 훔쳐보았다고 한다. 여학생 부모님들이 어찌 대안학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분노했단다. 그 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어머니는 어찌하면 좋으냐고 내게 물었다. 우리 어른들은 이 사건을 ‘음란’으로 생각할 것이다. 과연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고재종 시인도 청소년 시절에 ‘그 희고 둥근 세계’를 본 것 같다. ‘나 힐긋 보았네/냇가에서 목욕하는 여자들을//구름 낀 달밤이었지/구름 터진 사이로/언뜻, 달의 얼굴 내민 순간/물푸레나무 잎새가/얼른, 달의 얼굴 가리는 순간’ ‘나 힐끗 보았네/그 희고 둥근 여자들의/그 희고 풍성한/모든 목숨과 신출神出의 고향을’ 그 언뜻 본 숨 막히는 순간을 시인은 ‘모든 목숨과 신출神出의 고향을’ 보았다고 했다. 시인만 이런 눈을 가졌을까? 시대 때도 없이 음란을 조장하는 문화에 접하는 요즘 아이들은 이런 마음이 전혀 없을까? 도덕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谷神不死 이를 현묘한 암컷이라고 하고, 현묘한 암컷의 문을 일러 천지의 뿌리라고 한다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之根’ 나는 강의 시간에 이 구절의 이해를 위해 프랑스 화가 쿠르베의 ‘세계의 기원’을 핸드폰에서 검색하게 했다. 가끔 아저씨들은 ‘세계의 기원’을 검색해 놓고서도 지나치곤 했다. 설마 인문학 강의 시간에 이런 음란한 그림을 찾게 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쿠르베의 ‘세계의 기원’은 여성이 누워 성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그림이다. 나는 처음 그 그림을 보았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여성 성기가 세계의 기원이라니! 신도 아니고 하늘도 아니고...... 오! 맞네! 머리가 띵 했다. 나의 음란을 한순간에 날려 버리는 그림이었다. 헝가리의 철학자 루카치는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사물, 사람들을 물화(物化)한다고 했다. 우리의 원래 마음은 여성의 몸을 신성(神聖)하게 보는데, 자본주의는 자꾸만 우리에게 여성의 몸을 음란하게 보게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음란’을 통해 얼마나 많은 자본을 증식시키는가! 우리는 음란물을 즐기며 자신이 정말 즐거워한다는 착각을 한다. 하지만 그건 루카치가 말하는 ‘허위의식’이다. 사람은 자신의 의식이 세상과 정직하게 만날 때 행복하다. ‘모든 목숨과 신출神出의 고향을’ 음란하게 보는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분열되어 있는가! 그래서 우리 사회엔 정신질환자가 이리도 많다. 모 대향병원에서 마음이 아픈 사람이 자신을 치유하던 의사를 살해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 화가 신윤복의 그림 중에 ‘목욕을 하는 여인들을 몰래 훔쳐보는 까까머리 동자승’이 있다. 이 그림은 음란한가! 나는 그 어머니에게 학교에서 먼저 ‘성과 사랑’ ‘인권’에 대한 심도 있는 교육을 하고 교사, 학생, 학부모가 함께 솔직한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사건을 음란으로 몰아가지 말고 ‘인권’의 차원에서 다뤘으면 좋겠다. 그리하면 잘못한 아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정직하게 알고 반성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허위의식에 젖을 때 우리는 얼마나 무서운 괴물이 되는가! 이 사건이 우리 모두 함께 성숙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260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시라 /권서각 file
편집자
322 2018-12-25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시라 한반도 북쪽에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다.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된 것은 우리의 뜻이 아니었다. 분단 당시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가 냉전체제를 확립하던 시기였다. 그런 열강들에 의해 우리는 남과 북으로 분단이 되었다. 이후 세계는 공산국가가 몰락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이념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분단 이후 남과 북은 같은 한 겨레이면서도 서로를 비방하며 군비를 증강하며 전쟁의 위험 속에 살아왔다. 남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미국의 도움으로 경제적 성취를 이루었다. 반면에 북은 사회주의의 붕괴와 계속되는 기근으로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수많은 인민들이 굶어죽었다. 게다가 국제사회에서 불량국가 혹은 악의 축으로 분류되어 유엔의 경제제재를 받으며 힘겨운 나날을 보네고 있다. 북은 살아남기 위해 핵무기 개발을 시작했다. 작년에는 핵을 장착하고 미국까지 갈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에 성공했다. 핵을 가진 나라끼리는 전쟁을 할 수 없다는 말이 정설이다. 핵무기는 전쟁에 쓰기 위한 전술무기가 아니다. 핵을 쓰면 모두가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핵은 국제관계에서 유리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무기다. 미국이 북미협상에 나오게 된 것도 북이 핵 개발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국가정보원 자료에 의하면 지금 북의 식량 사정은 농업생산과 수입곡물을 합해도 88%를 넘지 못한다. 북의 식량사정을 말해주는 자료다. 김정은은 군사체제에서 경제체제로 북을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북과 미국은 싱가포르 회담에서, 북은 핵을 폐기하고 미국은 북의 체제를 보장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그 이후의 진전은 순조롭지 못하다. 북미회담 이후 북은 풍계리 핵 실험장을 폭파했다. 그리고 다음 핵 폐기 계획을 제시했다. 남과 북은 휴전선의 방송시설을 철거했다. 비무장지대의 전방초소도 제거하고 상호비방을 중단했다. 남과 북은 평화를 향해 가고 있다. 남과 북은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반면에 미국이 북에 준 것은 한미군사훈련 잠정중단 하나다. 문제는 북미 관계에 있다. 북은 단계적으로 핵을 폐기하고 대북제재도 단계적으로 풀어달라는 것이다. 미국은 북이 핵을 완전히 폐기하기 전에는 계속 제재를 하겠다는 입장이다. 북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먼저 항복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미국이 어떻게 생각하든 북도 하나의 나라다. 북의 입장에서 보면 받아들이기 쉬운 일이 아니다. 오바마 보좌관이었던 벤 로즈는 한반도 평화를 원하지 않는 세력으로 워싱턴 블로브(Blob), 즉 워싱턴의 패거리를 지목했다. 분단이 우리민족의 뜻대로 된 것이 아니듯이 분단의 해소도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통일이 아니다. 남과 북의 평화체제 구축이다. 평화협정이 이루어지고 전쟁의 위험이 사라지면 자유로운 교류와 협력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이게 통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의 나라가 되는 통일은 그 다음 문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진행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말하면서 문 대통령에게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시라. 두려워하지 마시라.”고 하셨다.  
259 (서평) 어우동을 변호하다-고창근 서사시집 『사랑하다 죽은 여인 어우동』 /김재순 file
편집자
482 2018-12-17
어우동을 변호하다 ―고창근 서사시집 『사랑하다 죽은 여인 어우동』(문학마실, 2018) 김재순 『사랑하다 죽은 여인 어우동』은 고창근 작가가 아홉 번째로 펴낸 책이다. 그는 엄청난 문학적 에너지로 지금까지 소설집 세 권과 장편소설 네 권을 출간했고 서사시집도 두 권이나 냈는데 최근에 출간한 서사시집이 『사랑하다 죽은 여인 어우동』이다. 작가가 여러 작품에서 주창한 페미니즘 사상을 이번에는 서사시로 보여준다. 비디오 테이프 대여점이나 비디오방이 거리를 풍미하던 가까운 지난 시절 유리문에 붙어있던 어우동 영상물 광고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눈길이 멈췄을까. 아름다운 여배우의 선정적인 차림과 요염한 자태, 남자배우와 엉겨있는 배경, 상업자본과 맞물린 그토록 매혹적인 도화를 똑바로 당당하게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힐끔거리면서 볼 것 다 보게 했을 것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우동을 어떻게 기억할까. 젊은 아가씨에게 어우동을 아느냐고 물어봤더니 기생이라고 했다. 황진이처럼 예인인 기녀도 아니고, 홍랑처럼 절개가 있는 기녀도 아니요, 논개처럼 의로운 기녀도 아닌, 그냥 퇴폐적인 기생으로 기억하는 것 같다. 어우동을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은 그녀를 그렇게 기억할 것 같다. 어우동은 충북 음성 음죽현(현 경기도 이천)의 정3품 박윤창의 딸로 태어났다. 외숙부가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이며 세종대왕의 형 효령대군의 손부가 된 조선 최고의 신분이다. 신분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온갖 잡설, 음녀의 불명예를 아직까지도 벗지 못한 어우동에 대해 고창근 작가는 반론을 제기한다. 그녀는 가부장제를 거부하고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살았으며 그녀에 대한 많은 기록이 권력의 검열을 거친 누명이라고 말한다. 그의 변론을 들어본다. 그렇다고 은장이한테 흑심을 품은 건 아니었다 다음 날 은기를 만드는 것이 신기해 차마 사대부가의 아녀자로서는 못 가고 장미의 옷을 입고 변장하여 부엌으로 가 물 한 그릇을 들고 은장이한테 다가가 주곤 다시 앉는데 등에 꽂히는 독화살 하나 오호라 이제야 알았구나 소문으로만 들었다가 막상 두 눈으로 보니, 이 음탕한 년! ―「제2부 쫒겨나다, 제7장」 중에서 위의 장면들은 어우동이 쫓겨나게 된 경위를 보여준다. 어우동은 왕족과 혼인하여 해인이라는 작호를 받았고 장미는 그녀의 하녀 이름이다. 그러나 남편 이동은 첫날밤만 어우동을 찾았을 뿐 기생을 별채에 들여서 주색잡기에 빠져 어우동을 잊었다. 남편의 무관심으로 쓸쓸하게 지내던 어우동은 하녀복장을 하고 집안에서 은그릇을 만드는 은장이를 찾아가, 그냥 신기해서 물도 떠다주고 말도 나누며 옆에서 잠시 앉아 있는다. 은장이와 마음을 나누거나 간통을 한 것이 아닌데 다른 여자에게 빠져 어우동을 내쫓을 구실을 찾던 남편 이동에게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어우동은 가부장사회에서 사통한 천하의 음탕한 여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친정으로 쫓겨난다. 아비와 오라비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활달하고 열린 생각을 지닌 어미의 도움으로 조금의 재산을 분배받아 분가한 어우동은 길갓집에 살게 된다. 그녀는 젊고 건강하다. 소박맞아 홀로지내는 심정이 어땠을까. 신열을 앓으며 누워 지내는 어우동에게 하녀의 권유로 신분을 속이고 중인이지만 사헌부 도리라는 직책에다 용모가 준수한 오종년이라는 사내를 만나 서로 몇 번의 탐색을 끝내고 사랑을 나눈다. 그들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서 정을 나눈다. 이후 어우동은 풍기문란 죄로 구속되기 전까지 많은 남성을 만난다. 시와 거문고 등의 재주가 뛰어나서 당대의 유명인사와 유생들이 찾아왔고 어우동은 가리지 않고 만났다. 신분의 귀천도 나이도 가리지 않았다. 한마디로 프리섹스였다. 그녀가 얼마나 많은 남성들과 만나 어떤 애정행각을 했는지는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거의 다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자세하게 열거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 시집에서는 잘 보여준다. 이 팔뚝에 그대의 이름을 새겨주시오 박강창이 머뭇거리다 현비의 팔뚝에 먹물을 먹인 바늘을 가져갔다 (중략) 현비는 낮과 밤을 구분 못하고 음식도 먹는 등 마는 둥 절벽에 서 있는 듯 지냈다 매일 죽은 사람처럼 말라가는 꼴을 보지 못한 장미가 이틀에 걸쳐 사연을 알아왔다 ―「제5부 열락의 세계에 빠져들다, 제21장」 중에서 어우동이 이런저런 남자들과 관계한다고 본능만 따르는 음탕녀가 아니라 그녀의 가슴은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할 줄 아는 순정한 여인이라고 고창근 작가는 대변하고 있다. 현비는 어우동이 길갓집에 살면서 사내들을 만날 때부터 바꾼 이름이다. 아무리 길갓집에서 여러 남자들을 상대하며 살고 있는 그녀라지만 그중에는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가슴속에 맺혀서 그리움에 눈물짓게 하는 한 사람의 이름이 있는데 박강창이라는 젊은이다. 스스로 팔뚝을 내밀어 박강창의 이름을 새겨달라고 했고 박강창이 집에 갇혀 못 오게 되자 절망하며 눈물로 밤을 새우고 말라갔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아녀자들만 있는 집이요 왜 이러셔, 다른 사내들에겐 넙죽법죽 잘 주면서 나도 그 구멍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 좀 합시다 치욕, 마비된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며칠 전 일, 이 떠올랐다 장미가 없는 틈을 타 사내는 불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항할 틈도 없이 옷이 발가벗겨지고 이렇게 사내들의 쾌락의 종이 되느니 죽는 게 낫다 ―「제6부 사랑은 외로움이더라, 제27장」 중에서 이근지라는 자는 어우동과 가까이 지내는 사내의 이름을 팔고 어우동에게 접근해서 그녀를 희롱하고 능욕했다. 대문으로는 드나들지 못하고 얍삽하고 교활하게 몰래 들어와서 강제로 폭행하는 파렴치한 인간 말종도 있었다. 노류장화라고 소문난 어우동에게 달라붙는 잡것들이 많았다. 벌, 나비, 산들바람만 있었겠는가. 온갖 잡것들이 달라붙었지만 “사내들의 쾌락의/종이 되느니/죽는 게 낫다”는 말로 그녀는 맘에 드는 사내와 스스로 향유할 뿐, 자유롭고 주체적인 생활을 했을 뿐이라고 작가는 그녀의 편에 서서 강력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어우동의 행동이 한성부에 퍼지고 진상을 요구하는 공론이 형성되어 왕 성종은 어우동을 풍기문란 죄명으로 잡아들였고 상대 남자들도 잡혀왔다. 그녀를 탐하던 남자들은 하나같이 어우동을 모른다고 했다. 자백을 않고 있던 어우동의 입에서 당대 유명 인사들 방산수 이난, 수신수 이기, 박강창, 오종년, 이승언, 홍창, 이근지, 구전, 어유소, 김휘, 김청……이라는 이름이 줄줄이 꿰어져 나왔다. 허위와 가식을 성리학으로 포장했던 사내들의 헛된 이름을 마구 불러내었다. 내 정신도 어쩌지 못하는 몸이다 정신과 몸이 쓰라린 갈등을 겪을 때 내 몸 어디에서 또 하나의 몸이 불쑥 나타났다 나는 그 또 다른 몸을 인정했을 뿐이다 그 몸 또한 내 몸이기 때문이다 내 몸을 툭, 내려놓을 때 나는 해방을 느꼈다 ―「제7부 사랑이 꺾이다, 제32장」 중에서 어우동은 감옥에 갇힌 죄인이 되었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단지 위선 떨지 않고 자신의 몸과 마음이 시키는 대로 마음에 드는 사내와 즐기며 살았을 뿐인데 그것이 죄가 되는가. 도대체 제도와 관념이 무엇이기에 개인의 삶마저 통제한다는 말인가. 여성은 아무런 권리도 주장도 할 수 없었던 사회, 힘의 논리 즉 남성의 논리 권력의 논리로 지배되던 사회, 그들의 틀 속에 여자들을 가두고 숨도 못 쉬게 하던 사회에서 어우동은 너무도 절실하게 몸의 해방과 정신의 해방을 추구했다. 허울뿐인 비단 옷을 벗듯이 마음도 벗고 몸도 벗어 주체적으로 살아간 여인, 드디어 그것을 성취하고 인간의 본질을 찾았지만 그녀는 성리학의 사회를 뒤흔든 죄인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죄인은 그 사회라고 작가는 어우동을 변호한다. 어우동은 옥사에 갇히고 상관했던 남자들은 신분이 낮은 자들을 제외한 사대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석방되고 직책도 돌려받았다. 어우동을 처벌할 수 있는 법률은 장 백대에 이천 리의 유배가 합법적이지만 다른 비슷한 조문,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바로 개가한 법에 적용하여, 즉 억지법을 적용하여 성종의 명에 따라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그녀는 왕가의 족보에서도 사라지고 그녀의 시, 서, 화 등 작품도 폐기되었고 현재 몇 작품만이 남아있다. 성종은 고려의 멸망을 교훈삼아 국가의 긴급한 사명은 인간의 본성을 순화하고 풍속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여성에 대한 규범을 강화하였는데 우주론적으로 하늘에 해당하는 것이 남자고 여자는 땅이라 남자는 여자에게 군림하며 낮은 존재인 여성은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고 여겼다 특히 욕망 가운데 성은 경계의 대상이었다 여자들은 성리학에서 제시하는 부덕(婦德)을 요구했고 예에서 벗어나 욕망을 발산하거나 일탈된 행동을 하여 가정과 사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를 제약했다 그 제약은 개인뿐만 아니라 가족 가문에까지 공동 책임을 지웠다 개인의 생명보다 국가의 풍속이 더 중요했고 왕권강화가 더 시급했다 ―「제8부 사랑에, 죽다, 제 38장」 중에서 성종은 왕이 될 수 있는 서열이 먼 사람이었지만 당시 최고의 권모술수를 가진 한명회를 장인으로 두었고 뛰어난 지략을 지닌 어머니(훗날 인수대비)의 합작으로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두고 기반을 잡아가던 시기, 인수대비는 조선이 성리학의 나라로 자리를 잡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우동이 처형되기 몇 년 전에 내훈을 발표하고 아직은 고려의 분방한 습성이 남아있던 조선 여인들의 삶을 더욱 더 통제했다. 그것이 지도적 역할을 하는 사람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종은 그런 어머니 의지를 꺾지 못해 어우동을 교수형에 처하고 비슷한 시기에 자신의 부인도 사사했다. 이 여인들을 비롯해서 조선의 모든 여인들은 남성우월주의, 남성중심주의, 유교사회의 질서에 희생되었고 그녀에 대한 기록도 그 권력의 기록일 뿐이라고 작가는 서사시로 말하고 있다. 이 서사시집 『사랑하다 죽은 여인 어우동』에는 어우동의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만 노래한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부정부패, 혼인의례, 품위로 포장된 이면에 썩어빠진 양반과 왕족들의 부도덕, 불법으로 법을 행사하는 성종의 모습 등 당시 사회를 알 수 있는 많은 자료를 볼 수 있다. 그리움이 밀려오는 계절이다. 대상에 대한 실체가 없는 그리움이다. 이런 계절에 보기 좋은 서사시집이 『사랑하다 죽은 여인 어우동』이다. (이 글은 2018년 <작가정신>에 실렸습니다) 김재순/경북 상주 출생. 2002년 『작가정신』으로 등단. 시집 『복숭아 꽃밭은 어디에 있을까』. nok9105@hanmail.net  
258 함석헌의 씨ㅇ·ㄹ사상/권서각 file
편집자
396 2018-11-26
함석헌의 씨ᄋᆞᆯ사상 어린 시절 아버지가 보시던 동아일보로 흙벽에 도배를 했다. 허연 수염을 기르고 한복을 입은 노인의 사진이 우리 식구가 밥 먹는 방의 벽에 붙어 있었다. 굵은 제목으로 쓰인 ‘정부에 들이대는 말’이라는 글자가 늘 내 눈에 들어왔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기억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제목만은 아직 기억에 남아있다. 짐작하건대 이승만의 독재를 비판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한 노인이 이승만 정권에 들이댄 것이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분이 우리가 겨레의 스승으로 섬기는 한석헌 선생이시다. 함석헌 선생은 ‘씨ᄋᆞᆯ의 소리’라는 잡지를 발행하셨다. 그분의 사상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분이 늘 말씀하시는 ‘씨ᄋᆞᆯ’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며칠 전 영주의 시민단체인 ‘민본실천 시민연합(회장 김영모)’이 주관하는 ‘정도전의 민본사상과 함석헌의 씨ᄋᆞᆯ사상’ 학술 세미나가 열렸다. 이 세미나를 통해 함석헌 선생의 씨ᄋᆞᆯ에 대해 조금은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선생은 국민이나 민중이라는 말 대신에 ‘씨ᄋᆞᆯ’이라는 말을 쓰셨다. 씨ᄋᆞᆯ은 민중이나 국민과는 조금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씨는 종자를 말한다. 그러니까 생명의 근원이다. ‘ᄋᆞᆯ’의 ‘o’은 하늘을 ‘ㆍ’는 사람을 ‘ㄹ’은 운동과 생성을 뜻한다. 온전한 씨ᄋᆞᆯ은 생명을 품고 있어야 하며 봄이 오면 싹을 틔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힘이 센 통치자가 이리 가라면 가고 저리 가라면 가는 사람은 씨ᄋᆞᆯ의 본분을 알지 못하는 자라 할 수 있다. 선생이 ‘씨ᄋᆞᆯ의 소리’를 줄기차게 발행한 것도 씨ᄋᆞᆯ을 씨ᄋᆞᆯ답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가령 조선왕조가 망하고 일본제국주의가 침략했을 때 우리는 일본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일본에 저항해 보아야 이길 수 없음이 불을 보는 듯했다. 많은 사람들이 체념하거나 친일파로 돌아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의병활동이나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 계신다. 우당 이회영이나 석주 이상용 같은 이는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에 거서 무관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나라가 완전히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독립군이 되거나 독립운동을 했다. 이육사의 시 ‘절정’이 있다. 일제 식민지 침탈로 나라를 빼앗겨 어디에도 발붙일 땅이 없는 상황을 절정이라 했다. 시의 마지막 연은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고 노래했다. 아무리 일제식민통치가 겨울의 추위처럼 견딜 수 없어도 시인의 마음은 광복을 뜻하는 무지개를 본다. 강철로 된 무지개는 사라지자 않는다. 강약은 부동이지만 광복의 의지는 꺾을 수 없다는 씨ᄋᆞᆯ 정신이 나타난 일제강점기 최고의 저항시다. 이러한 씨ᄋᆞᆯ사상이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이어오게 한 힘이었다. 지금 우리민족은 분단 극복이라는 역사의 고비에 서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어떤 나라도 한반도의 평화를 원하는 나라는 없다. 강대국들은 우리를 좋은 먹잇감으로 여기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무기는 씨ᄋᆞᆯ의 힘이다. 아무리 강한 자 앞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것이 함석헌 선생의 씨ᄋᆞᆯ사상이다.  
257 사랑은 사랑을 일으키는 힘이고 무능력은 사랑을 일으키는 능력이 없다 (에리히 프롬) /고석근 file
편집자
424 2018-11-15
사랑은 사랑을 일으키는 힘이고 무능력은 사랑을 일으키는 능력이 없다 (에리히 프롬) 세월의 강물 장 루슬로 다친 달팽이를 보게 되거든 도우려 들지 말아라 그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 당신의 도움은 그를 화나게 만들거나 상심하게 만들 것이다. 하늘의 여러 시렁 가운데서 제 자리를 떠난 별을 보게 되거든 별에게 충고하고 싶더라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라.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아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모 고등학교에 강연을 가서 학생들에게 이 시를 읽게 했더니 한 학생이 묻는다. ‘그럼 다친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친 달팽이는 도와주지 말고 다친 사람은 도와 줘야 할까? 나는 그 학생에게 말했다. ‘네가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려면 네가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해. 그래야 남들이 네게서 도움을 받게 돼. 네가 악취가 나는 사람이 되면 네가 아무리 남을 도와주고 싶어도 사람들은 네게서 악취를 맡게 돼. 도움을 줄 수가 없어. 남을 도와주고 싶을 때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봐야 해.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런 건 아닌지?’ 태양은 스스로 뜨겁게 타오르며 신나게 살아간다. 삼라만상은 그 빛을 받으며 살아간다. 가을이 되면 밤나무는 잘 익은 밤을 툭툭 땅에 떨어뜨린다. 다람쥐는 그 밤을 먹으며 살아간다. 우주 차원에서 보면 누가 누구를 도와주지 않는다. 삼라만상 각자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그 ‘자신의 길을 갈 뿐’으로 삼라만상은 서로 도움을 주며 살아가게 된다. 나는 그 아이에게 말했다. ‘사람도 각자 자신의 길을 가야 해.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갈 수 있어야 해. 그러면 예수가 얘기하듯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남을 도와주게 돼. 이때 우리는 진정으로 남을 도와줄 수 있게 돼.’ ‘다친 사람은 도와 줘야 해!’라는 도덕을 갖고 살아가게 되면 마음 안에 그림자가 생기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이 다친 사람을 외면하며 살아가는가? 그때마다 깊은 마음속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생긴다. 그 그림자는 켜켜이 쌓이며 스스로 힘을 갖게 된다. ‘악마’가 된다. 자신은 하지 못하면서 다친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게 된다. 위선자, 이중인격자가 되어 버린다. 오래 전 TV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열강을 하는 마이클 샌델을 보며 나는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는 주로 특별한 상황 속에서 어떤 게 정의인가 하는 논의를 했다. 황당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그런 특별한 상황을 몇 번이나 맞닥뜨리게 될까? 그가 정말 정의를 얘기하고 싶으면 미국이라는 제국(帝國)이 저지른 과거의 무수히 많은 불의들이 논의되어야 하고 지금 이 순간에 미국이 다른 나라에 대해 저지르는 불의들과 미국 내에서 무수히 일어나는 불의들이 논의되어야 하지 않나? 눈에 뻔히 보이는 불의들은 외면하고 어떤 특별한 상황을 상정하고서 정의를 얘기하는 것은 공염불에 불과하게 된다. 그런 논의를 자꾸 얘기하다보면 현존하는 불의들이 묻혀버리게 된다. 그래서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많이 팔렸으면서도 정작 우리 사회의 정의에 대해서는 전혀 논의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도덕, 정의’라는 너무나 좋은 말들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실제를 가려버리는 것이다. 정의, 의로움은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 아닌가? 맹자가 말하듯 우리 마음 깊은 속에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아는 본성이 있으니까. 그래서 철학자 니체는 ‘도덕은 비도덕적이다. 도덕 자체가 부도덕의 한 형식’이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공정- 책임의 공포, 정의- 복수의 본능’인 것이다. 센델은 자신이 왜 그렇게 정의를 부르짖는지, 사람들은 왜 그렇게도 정의에 열광하는지를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진짜 자신들의 욕망을. 우리는 장 루슬로 시인처럼 ‘세월의 강물’을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다친 달팽이를 보게 되거든/도우려 들지 말아라/그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당신의 도움은 그를 화나게 만들거나/상심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삼라만상을 보며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나’도 세월의 강물이 되어 흘러가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