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7호...
   2020년 03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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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290 낭만 보존의 법칙/권서각 file
편집자
30 2020-03-29
낭만 보존의 법칙 오랜만에 티브이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다. 메르스19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낭만닥터 김사부2’라는 드라마다. 주인공 김사부는 거대재단에서 설립한 병원의 시골 분원인 ‘돌담병원’의 외과과장이다. 그는 뛰어난 실력을 갖춘 의사지만 유난히 외상 환자가 많은 시골병원에서 사람을 살리는 일에 보람을 느끼며 의사로서의 본분에 충실하다. 그의 돌담병원 생활은 순탄하지 않다. 재단이사장은 수입이 되지 않는 돌담병원을 폐원하고 VIP 손님을 받아 힐링 중심으로 운영하는 영리병원을 세울 계획이다. 이사장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돌담병원을 없앨 궁리만 한다. 김사부와 대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사장은 본원의 의사들 가운데 문제가 있는 의사들만 돌담병원으로 파견한다. 일단 파견된 의사들은 김사부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돌담병원의 보람 있는 일들을 겪으며 김사부에 동화되어간다. 영리병원 쪽으로 가려는 의사집단과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충실하려는 의사들 간의 갈등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주제이고 이면에 깔린 주제는 낭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 전에 읽은 선우휘의 단편소설에도 의사 이야기가 있다. 가방 하나 들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도는 의사 이야기다. 그는 허름한 차림의 나그네로 유랑하다가 위급한 환자를 만나면 치료해 준다. 진료비는 받지 않고 그냥 떠난다. 치료를 받고 나은 사람이 치료비를 주어도 받지 않고 나중에 은혜를 갚겠다며 이름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그냥 떠난다. 그의 친구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을 때 의사는 치료비를 받으면 고마워하는 마음이 사라진다고 대답한다. 만약 김사부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미소 띤 얼굴로 ‘개멋 부린다’고 하고 그게 ‘낭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드라마는 김사부의 바람대로 돌담병원이 재단의 지원을 받는 권역외상센터로 지정되어 보다 좋은 진료여건이 마련되는 것으로 끝난다. 의료인 본연의 일에 충실했을 때 얻어지는 보람으로 짜여 진 여러 개의 에피소드가 드라마의 재미를 더하고 있다. 마지막 회에 내레이션을 통해 전해지는 낭만의 정의는 진정한 낭만이 무엇인가를 암시해 준다. “낭만보존의 법칙, 대부분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걸 알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 그러나 누군가는 그 아름다운 가치를 지켜주었으면 하는 것. 매순간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정답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그러한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낭만은 끝난다고 김시부는 말했다.” 사람들은 ‘정의’라든가 ‘진리’라든가 ‘목숨보다 귀한 가치’라든가 그런 것이 존재하는 걸 안다. 그것이 아름다운 가치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그런 가치를 애써 부정하려 한다. 권력이 있어야 하고 돈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의를 위해 세속적 가치를 버리는 이를 바보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끔 그 아름다운 가치를 지키기 위해 세속적 가치를 버리는 이들을 역사 속에서 만난다. 일본에 국권을 빼앗겼을 때 모든 걸 버리고 의병이 된 사람,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고 북방의 겨울을 견디는 독립군이 된 사람, 엄혹한 독재권력 앞에 맨몸으로 저항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아름다운 가치를 지키려고 자기를 희생하고도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이가 있었다. 이들에 의해 낭만은 보존된다. 세상이 말세라고 탄식해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은 온전히 망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289 인간은 각자 하나의 세계다/고석근 file
편집자
83 2020-03-15
인간은 각자 하나의 세계다 파랑새 한하운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군대에 가는 게 싫어 정신질환 진단을 받기를 바란다는 한 청년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그는 내성적인 성격의 미술학도라고 한다. 정신질환자가 되었다가 나중에 취직하기 힘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말에 그는 평생 혼자서 미술작업을 할 것이라고 대답했단다. 그는 평소에 ‘남자’라는 게 얼마나 버거웠을까. 감수성이 예민한 그는 ‘씩씩한 남자’는 입을 수 없는 무거운 갑옷 같은 게 아니었을까. 나도 그랬다. 나는 어릴 적에는 마을 동무들과 골목으로 산으로 들로 마구 신나게 뛰어 다녔지만, 사춘기가 되며 사나이가 되어가는 친구들과 점점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직장생활을 할 때도 가장 힘들었던 게 무리지어 다니며 ‘온갖 가부장 문화’를 누리는 남자 동료들이었다. 직장도 그만두고 모든 소속에서 벗어나 ‘외로운 늑대’처럼 살아가는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편안한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인문학을 공부하며 나 같은 부류의 남자들이 사실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만 이 시대의 소위 ‘주류 문화’가 모든 남자를 ‘남자다운 남자’로 강제할 뿐이다. 트렌스젠더 ㄱ씨가 숙명여대에 합격했지만 비난의 여론을 감당할 수 없어 입학을 포기했다는 뉴스를 접하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대에 가서 여성 몸을 보고 싶었던 거야?’하는 댓글을 읽으며 우리 사회가 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저급한지를 느꼈다. ㄱ씨는 ‘여성’을 알고 싶어 여대에 가려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성정체성은 여성이지만 오랫동안 남성으로 살아왔기에 어떻게 여성으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상투적으로 생각하는 여성이 아닌 진정한 여성은 무엇일까?’ 심층심리학자 융은 인간에겐 남성성과 여성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그는 남성 속의 여성성을 아니마라고 하고, 여성 속의 남성성을 아니무스라고 한다. 그러니까 인간은 남성과 여성으로 분류되는 게 아니라 남성성과 여성성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온전한 인간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사람이다. 인간을 남성과 여성 둘로 나눠 어느 하나에 속하게 하는 사회는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동물은 본능적으로 살아가지만 인간은 생각이라는 게 있어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인간은 스스로를 계속 재구성해가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세계 속에서 부품이 되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각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가는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차이와 개성을 존중해 줘야한다. 군대에 가기 싫어 정신질환자가 되려하는 청년에게 우리는 다른 길을 보여줄 수는 없을까? 그가 타고난 예술적 감수성으로 살아가면서도 우리 시회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은 무궁무진하게 많을 것이다. 트렌스젠더 ㄱ씨가 여대에 가서 자신의 정체성을 섬세하게 만들어갈 때 우리 사회는 한층 더 성숙해질 것이다. 한하운 시인은 ‘천형(天刑)’인 한센병(문둥병)에 걸려 한평생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그는 ‘시는 눈물로 쓴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모진 운명을 견뎌냈다. ‘나는/나는/죽어서/파랑새 되어//-//푸른 노래/푸른 울음/울어 예으리.//나는/나는/죽어서/파랑새 되리.’ 트렌스젠더는 문둥병 같은 천형(天刑)도 아닌데, 우리는 왜 그들을 이다지도 모질게 대하는 걸까?  
288 상식적이지 못한 사람들/권서각 file
편집자
95 2020-02-27
상식적이지 못한 사람들 사람 사는 일에는 근심 걱정 없는 날이 거의 없다. 그런 날은 장마철에 잠시 보이는 푸른 하늘만큼이나 드물다. 이런 저런 일로 근심이 많으면 잠을 설치기도 한다. 열일곱 살 스웨덴 소녀 그레타 툰베리는 지구환경이 걱정이다. 무분별한 경제성장에만 관심이 있는 어른들 때문에 지구가 죽어가고 있는데 어른들은 지구환경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집에 불이 났는데 어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한다. 다니던 학교도 그만 두고 의회에서 일인시위를 했다. 지구환경을 파괴하는 육식과 화석 에너지를 쓰지 않고 채식을 하며, 태양광 요트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해서 유엔에서 연설했다. 당신들이 나의 어린 시절을 훔쳐갔다고 어른들을 나무랐다. 그녀는 환경이 걱정되어 오늘도 잠 못 이룰 것이다. 실제 지구 온난화로 바닷물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머지않아 인구 1억이 넘는 방글라데시는 물에 잠겨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된다. 우리도 나라 잃은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할지 처지에 놓일 것이다. 이보다 더 먼저 닥칠 위기가 기후 변화로 인한 농업생산의 감소다. 지금도 세계의 식량자급률은 위험 수준이다. 최근에 만난 석학 한분은 정치권의 미래에 대한 안목 없음을 걱정하신다. 디지털 기기와 인공지능의 발달로 머지않아 사람의 일자리는 로봇이 대신하게 된다. 지금 지구상에 있는 대부분의 일자리는 로봇이 차지하게 된다. 심지어 신문기사도 AI가 대신 쓰게 될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고도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몇 가지로 한정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 된다는 얘기다. 그렇게 되면 소수의 엘리트가 벌어들인 돈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구조로 사회가 개편된다는 것이다. 머지않아 닥칠 미래에 대한 대비 없이 눈앞의 권력다툼에만 여념이 없는 정치인들이 한심하다는 말씀이다. 인터넷상에는 그레타 툰베리를 비난하는 글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채식을 주장하며 화석에너지를 쓰지 않는다고 하면서 자기가 먹는 음식 용기는 플라스틱이라고 하고 항공요급보다 비싼 태양광 요트를 대여하여 대서양을 건넌 것은 철저히 이중인격을 드러낸 것이라 한다. 자기를 과시하려는 정신적 문제가 있는 소녀라고도 한다. 그녀를 위한 변명을 한다면 세계의 역사를 바꾼 대부분의 인물들은 상식적이지 않다.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에디슨도, 아인슈타인도 평범하고 상식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어린 학생 신분으로 목숨을 걸고 일제에 맞섰던 유관순도, 상해에서 일본군 대장에 폭탄을 던지고 젊은 나이에 처형된 윤봉길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도,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빈민으로 전락한 독립지사들도 상식적이지 못했다. 그런 분들이 있어서 역사는 발전되었고 우리는 그분들을 위인이라 부른다. 누구나 걱정근심이 없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 걱정이 눈앞의 이득과 권력에 있는가, 우리 모두의 미래에 있는가에 따라 그 걱정의 의미는 다르다. 4월에 우리의 대표인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있다. 예비후보로 등록한 분이나 입후보를 결심한 분이나 모두 근심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을 것이다. 본격적인 선거기간이 시작되면 모두 지역을 위해,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고 말할 것이다. 그분들의 다짐이 자신의 권력을 얻기 위한 말인지, 정말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진심인지 밝은 눈으로 살펴야 할 것이다.  
287 아픈 만큼이 나다 /고석근 file
편집자
146 2020-02-16
아픈 만큼이 나다 그날 이성복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변통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 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대유행하며 한 확진자가 맹비난을 받고 있다. 우환을 다녀와 감염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기저기 다녀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시켰느냐는 것이다. 그가 다녀 간 곳은 폐쇄되기도 하고 그가 함께 식사한 사람도 감염되어 확진 판정을 받고 이 감염자의 가족들도 감염 위험이 높다고 한다. 이 가족들의 직장도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그는 ‘평상시’대로 행동했을 것이다. 우리는 아파도 참고 견디며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가지 않는가? 미국에서는 아프면 집에서 쉰다고 한다. 사람은 몸에 익은 습관(習貫)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공부는 ‘학습(學習)’이다.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공부는 ‘학(學)’ 뿐이다. 단편적인 지식을 배우는 데만 주력한다. 새로운 지식을 배워서 몸에 익히게 하지 않는다. 그 확진자는 우리 사회의 ‘한 증상’일 뿐이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나만 챙기는 사회 문화. 우리 사회 체제의 희생자일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피해자는 넘치는데 가해자는 없게 된다. 가해자는 억울할 뿐이다. ‘왜, 나만 갖고 그래!’ ‘다들 그렇게 살고 있지 않아?’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까뮈의 소설 ‘페스트’에는 우리가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이 설정되어 있다. 어느 날 페스트(흑사병)가 창궐하여 한 도시가 폐쇄된다. 도시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차츰 이성을 회복하며 서로의 마음을 모아 상황에 대처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기적이었던 사람들이 차츰 이타적인 사람으로 변모한다. 결국 도시는 안정을 찾아간다. 나는 인터넷 댓글을 읽으며 까뮈가 상상했던 인간의 위대함을 본다. 처음에는 무모한 행동을 한 확진자를 비난하기만 했지만 차츰 서로 힘을 합쳐 이 상황을 잘 헤쳐 나가자는 댓글들이 등장한다. 원시인들은 잘못한 사람을 처벌하기 보다는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피해를 보상해주도록 했다. 문명인처럼 돈을 주고 마는 게 아니라, 피해를 받기 전 상태로 복구하는 노력을 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다시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지혜를 배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되지 않아?’ 이 말은 논리상으로는 맞는데, 현실에서는 맞지 않는다. 만일 우리 모두가 조금만 생각해 보았더라면, 이런 상황이 왔을까? ‘왜? 전염병이 이리도 쉽게 퍼지게 세계화를 한 거야?’ ‘우환이라는 도시에서는 도대체 이렇게 퍼지도록 뭐한 거야?’ 이런 질문들은 함께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공허할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가 ‘생각 없이’ 마구 탐욕에 젖어 살게 하는 체제가 아닌가? 우리는 지혜를 모아 우리 사회를 바꿔가야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체제가 굴러가는 대로 따라 굴러가며 산다. 한 개인은 하나의 부품이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번 같은 ‘대 재앙’을 만나게 되면 사람들은 서로의 마음을 모으게 된다. 사람이 바뀌고 세상이 바뀐다. 우리는 이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평상시의 ‘그날’은 어떤가?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모두 병 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그러다 사건이 터지면 비로소 ‘그날’의 비명이 들리고 아픔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평상시에는 마비되어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의 아픔에 얼마나 무심한가! 인간은 ‘사회적 존재’인데. 하물며 아파도 학교에 가고 출근하다 보면 자신의 몸이 아픈 것조차 모르게 되지 않는가? 몸의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우리는 몸이 없는 인간, 바로 유령이 된다. 이번 재앙을 통해 우리는 마비의 저주에서 풀려나야 한다. 자신과 다른 사람, 다른 생명체들의 아픔을 느끼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 체제에서는 ‘나’는 행복하기는커녕 제 한 몸조차 제대로 지킬 수 없다는 것을 통렬하게 깨달아야 한다.  
286 표현의 자유/권서각 file
편집자
135 2020-01-28
표현의 자유 1979년 파리2대학의 로베르 포리송 교수는 홀로코스트는 조작되었으며 히틀러는 종족이나 종교가 다르다고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는 내용의 글을 썼다. 나름대로 수집한 근거 자료에 의한 글이었다. 범죄자들은 그들에게 불리한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 그는 그걸 몰랐다. 그의 글이 발표되자 그에 대한 공격이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의 글은 금서가 되었고 엄청난 비난을 받고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많은 지식인들이 로베르를 옹호하는 탄원서에 서명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미국의 석학 노엄 촘스키다. 촘스키도 그 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신나치주의자란 말도 들었다. 이에 대해 촘스키는 ‘로베르의 글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표현의 자유는 보장받아야 한다’고 했다. 민주주의에서 표현의 자유는 모든 자유에 앞선다는 뜻이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다양한 목소리를 인정한다. 그 가운데서 민중들의 합의에 의해 최선의 결론을 얻어가는 과정이다. 다른 목소리를 억압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반한다는 뜻이리라. 막말과 표현의 자유는 다르다. 표현의 자유는 근거 있는 주장이지만 막말은 근거가 없다. 요즘 야당 지도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독재’와 ‘폭정’이다. 지금의 문재인 정권이 독재정권이며 폭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늘 야당이었다가 처음 여당이 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는 민주화 투쟁의 결과로 세워진 정부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허물어지지 않게 하려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음이 눈에 보인다. 정권을 비난하거나 막말을 해도 권력으로 억압하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런 문재인 정부에 대해 독재이며 폭정이라고 말하는 것은 막말에 가깝다. 독재 혹은 폭정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무엇이 독재인가? 지난 날 독재정권시절을 회고해 본다. 많은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주장한다는 이유로 모처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가고 조작된 간첩사건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그런 것을 독재라 할 수 있다. 지금이 독재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많은 민주인사들이 독재에 의해 고문당하고 죽어갈 때 당신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가? 그때 독재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행사한 적이 있는가? 표현의 자유를 넘어서 막말을 해도 억압받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런 표현의 자유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많은 민주인사들이 고문당하고 죽어가면서 얻은 민주주의요 표현의 자유다. 대통령에게 막말을 해도 아무 근거 없이 독재라고 하고 폭정이라고 해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것이 민주투사들의 희생 덕분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우리사회에 독재가 있다면 재벌의 독재가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모든 언론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있다. 그런데 우리의 언론이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가?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 시대의 독재자는 재벌이다. 언론사의 주된 수입원은 광고에 의존한다. 재벌에 쓴 소리를 하는 언론은 광고를 얻지 못한다. 이게 언론의 현주소다. 실제 재벌에 비판적 신문을 펼쳐보라. 대개 중소기업의 광고들로 가득하다. 기자들의 급료도 다른 언론사에 비하면 반 토막도 되지 않는다.  
285 우리는 모두 한데 모여 북적대며 살고 있지만 너무나 고독해서 죽어 가고 있다 (슈바이처) /고석근 file
편집자
159 2020-01-15
우리는 모두 한데 모여 북적대며 살고 있지만 너무나 고독해서 죽어 가고 있다 (슈바이처) 외로움의 폭력 최승자 내 뒤에서 누군가 슬픔의 다이나마이트를 장치하고 있다. 요즈음의 꿈은 예감으로 젖어 있다. 무서운 원색의 화면, 그 배경에 내리는 비 그 배후에 내리는 피. 죽음으로도 끌 수 없는 고독의 핏물은 흘러내려 언제나 내 골수 사이에서 출렁인다. 물러서라! 나의 외로움은 장전되어 있다. 하하, 그러나 필경은 아무도 오지 않을 길목에서 녹슨 내 외로움의 총구는 끝끝내 나의 뇌리를 겨누고 있다. 요즘 학교에서는 ‘교무분장’이 한창이다. 평상시 친하게 지내던 교사들도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된다. 공정한 교무분장은 무엇일까? 공부모임에 오는 한 교사가 말한다. ‘다들 1/n을 공정, 정의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희 학교에서는 서로의 입장과 상황을 존중하며 교무분장을 했어요.’ 우리는 ‘1/n의 윤리’에 익숙해져 있다. 버스를 탈 때도 차례대로 타는 것에 아무도 의의를 달지 않는다. 우연히 먼저 와, 자리에 앉게 되는 게 공정,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러 사정으로 늦게 와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 그들 각자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중에는 몸이 아픈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어젯밤 어떤 일이 있어 몹시 피곤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들 마음에는 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1/n의 윤리는 겉으로는 정의롭고 공정해 보이지만 각자의 처지와 입장이 전혀 고려되지 않기에 사람들을 점점 ‘각자도생’으로 몰아간다. 세상은 만인이 만인의 적이 되는 생지옥이 된다. 우리는 모두 ‘외로움의 폭력’에 시달리게 된다. ‘내 뒤에서 누군가 슬픔의/다이나마이트를 장치하고 있다.’ ‘요즈음의 꿈은 예감으로 젖어 있다./무서운 원색의 화면,/그 배경에 내리는 비/그 배후에 내리는 피./죽음으로도 끌 수 없는/고독의 핏물은 흘러내려/언제나 내 골수 사이에서 출렁인다.’ ‘물러서라!/나의 외로움은 장전되어 있다./하하, 그러나 필경은 아무도/오지 않을 길목에서/녹슨 내 외로움의 총구는/끝끝내 나의 뇌리를 겨누고 있다.’ 사람의 마음에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있다. 도심은 타고난 본성에서 나오는 마음이다. 인심은 태어난 후에 만들어지는 ‘자아(自我)의 마음’이다. 자아는 자기중심적이다. 도심은 맹자가 말하는 본성의 네 가지 덕인 인의예지(仁義禮智)에서 나오는 마음이다. 사람은 이런 마음을 지녔기에 남을 사랑하고 의롭게 살고 예를 다하며 지혜롭게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혼자 아무리 진미성찬을 먹고 대궐 같은 집에 살아도 결코 행복하지 않다. 외로움에 몸서리친다. 견딜 수 없어 온갖 쾌락을 추구하지만 결국엔 지치고 우울과 권태에 시달리며 서서히 죽어가게 된다. 우리는 어떻게 1/n의 윤리를 넘어설 수 있을까? 마르크스는 사회 전체가 하나의 가족이 되는 공동체의 꿈을 꿨다. 가족은 서로의 처지와 입장을 완전히 고려하며 살아간다. 능력껏 일하고 각자 필요한 만큼 분배한다.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다. 그래서 ‘행복한 가정은 미리 누리는 천국(R. 브라우닝)’이다. 우리의 가슴속에는 누구나 이러한 지상 천국이 깊이 간직되어 있을 것이다.  
284 외유내강/권서각 file
편집자
197 2019-12-26
외유내강 우리선비들은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가까이 했다. 매화는 설중매(雪中梅)를 가리키는데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운다. 아무리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난초는 척박한 벼랑 끝에서 비와 이슬을 먹고 자라니 그 기품이 고고하다. 겉으로 보기엔 연약하나 그 뜻이 굳어(外柔內剛) 군자의 기품을 지녔다. 국화는 가을 서리 속에서 꽃을 피우니(傲霜孤節) 또한 선비의 기상을 지녔다. 대나무는 곧고 굳세니 그 지조와 절개가 군자라 할 만하다. 우리 선비들은 이 네 가지의 사물을 사군자(四君子)라 하여 가까이 두고 그 굴하지 않는 태도를 사모하고 본받으려 했다. 사군자는 겉모습이 장미나 벚꽃만큼 화려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비들이 어느 꽃보다 가까이 하려한 까닭은 무엇인가. 선비들이 사랑했던 것은 사군자의 겉모습이 아니라 사군자가 지닌 내면이었을 것이다. 사군자가 지닌 공통점 가운데 하나만 고르라면 그것은 의(義)일 것이다. 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니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다. 충성스런 신하가 임금의 옳지 못함에 대해 목숨을 걸고 비판했던 것은 의 때문이었다. 의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던 것이 우리 선비들의 지조(志操)요 절개(節槪)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어떤 사람의 인품을 이야기할 때 외유내강이라는 말을 한다. 겉으로 드러난 외면은 난초처럼 부드럽고 따뜻하지만 내면에 불의에 굴하지 않은 성품을 지녔기 때문이다. 타인을 대할 때는 따뜻하고 부드러우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추호의 잘못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을 외유내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외유내강이 현대에 오면서 왜곡되어 쓰이는 경향이 있다. 우리 아버지들은 언제부터인가 밖에서 남을 대할 때는 친절하고 너그러우면서도 집안에 들어오면 부인이나 자녀들에게 엄격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외유내강인 것으로 여기셨던 같다. 왜 우리의 아버지들은 이렇게 변했을까? 이는 우리의 근현대사와 무관하지 않은 듯 보인다. 사람이 막다른 지점에 처하게 되면 적에게 굴하거나 목숨을 걸고 대항하거나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조선왕조가 저물고 망국의 지경에 다다랐을 때 우리민족의 처지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어떤 신하는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역적이 되어 나라를 일본에 바쳤다. 어떤 선비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조를 지키기도 하고 의병이 되어 싸우다 죽어갔다. 그렇게 꽃다이 죽어간 선비들은 역사에 묻히고 강자에 굴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은 부와 권력을 누렸다. 그래서 사람들의 살아남기 위한 태도가 자기도 모르게 외유내강을 왜곡시켰을 것이리라. 나서지 마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싫어도 좋은 척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살아라. 우리 어버이들이 입에 달고 살아오신 말들이다. 강자에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했다. 우리 한반도의 처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외국에는 유하고 우리민족끼리는 모질게 싸운다. 미국은 북에 대해 입만 열면 제재라 하고, 남에 대해서도 미군 주둔비용을 더 내라, 일본과 맺은 지소미아를 중단하지 말라고 압박한다. 일본도 우리에게 무역제재를 가하고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라 한다. 이 모든 외세의 제재와 압박에 대해서는 부드럽고 우리민족끼리만 죽기 살기로 싸운다. 이런 모습이 오늘의 외유내강은 아닐까.  
283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서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그곳이 진리가 되리라 (임제)/고석근 file
편집자
212 2019-12-15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서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그곳이 진리가 되리라 (임제) 이불을 꿰매면서 박노해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거지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 달라 물 달라 옷 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 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세상이 가르쳐준 대로 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나는 성실한 모범근로자였었다 노조를 만들면서 저들의 칭찬과 모범표창이 고양이 꼬리에 매단 방울소리임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보살핌이 허울 좋은 솜사탕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편리한 이론과 절대적 권위와 상식으로 포장된 몸서리치는 이윤추구처럼 나 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가정의 독재자가 되었었다 투쟁이 깊어질수록 실천 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낸다 노동자가 이윤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전교조를 하면서, 학생들이 비로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결석한 아이의 빈자리가 눈에 크게 띄고 그 아이의 마음이 가슴 아리게 느껴졌다. 아이들 하나하나가 소중해졌다. 그 전에는 아이들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교장, 교감 선생님, 장학사, 부장 선생님들이 항상 크게 보였다. 박노해 시인은 ‘동료들과 노조 일을 하고부터’ 비로소 아내가 보이기 시작했나 보다. ‘이불홑청을 꿰매면서/속옷 빨래를 하면서/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설거지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마무리하는 아내에게/나는 그저 밥 달라 물 달라 옷 달라 시켰었다’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세상이 가르쳐준 대로/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나는 성실한 모범근로자였었다’ ‘투쟁이 깊어질수록 실천 속에서/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낸다/노동자가 이윤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진리가 나와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내’가 ‘삶의 주인’이 되어야 비로소 진리가 드러난다. 내가 전교조를 하며 교장, 교감 선생님, 장학사, 부장 선생님들에게 당당하게 맞설 수 있을 때 나는 학생들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었다. 학교 교육의 진리가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박노해 시인이 노조 일을 하며 당당한 노동자가 되자 회사는 물론 가정의 진리까지 선명하게 그 실상을 드러냈다. 가부장 문화에 젖어 있었던 자신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더불어 민주당 청년 대변인이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남성도 차별 받는다’ ‘남자도 힘들다’고 논평했다고 한다. 왜 그의 눈에 ‘남성의 특권’이 보이지 않을까? 여당인 더불어 민주당을 대변하는 그가 이 나라의 주인으로 살고 있지 못하고 있는 건가? 민주주의(民主主義)의 가치인 ‘자유와 평등’은 우리(民)가 이 땅의 주인(主)이 되어야 비로소 그 모습을 찬란하게 드러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정한 사회’ ‘복지 사회’ ‘정의란 무엇인가?’ 하는 담론들이 공리공담으로 흐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한 논쟁들이 외려 우리나라의 실상을 덮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땅의 주인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촛불을 밝혀 나갈 때 ‘공정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 ‘복지 사회’는 진리의 환한 빛을 드러낼 것이다.  
282 여성에 대한 오해/권서각 file
편집자
252 2019-11-27
여성에 대한 오해 사람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는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하느님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맨 마지막에 진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빚어 아담을 만드셨다. 히브리어 아담(Adam)은 영어의 남자(Man)와 같은 뜻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만든 뒤에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드셨다. 창세기의 관점에서 보면 여성은 남성에 속한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양에서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서양과 다르다. 한자의 기원을 풀이한 ‘설문해자’에 계집 여(女)자에 대한 설명이 있다. 계집 여(女)는 사내 남(男)보다 먼저 만들어진 글자다. 한자는 사물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상형문자에서 비롯되었다. 그 다음 둘 이상의 글자를 합해서 만든 회의문자, 형성문자가 만들어졌다. 남(男)은 밭이라는 글자와 힘이라는 글자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것(田+力)이니 여(女)가 남(男)보다 먼저 만들어졌다. 女의 처음 글자는 지금과 조금 다르다. 여자가 앉아서 아기를 분만하는 모습이다. 인디언 영화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원시시대에는 여자가 앉아서 아기를 분만했다. 계집 여(女)는 여성의 생산성을 숭배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고대의 女는 母와 같은 의미(女=母)로 사용되었다. 男은 농장에서 농사일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여자는 생산하고 남자는 먹을거리를 구해오는 일을 했다. 우리말의 ‘계집’도 ‘집+계시다’에서 온 말이다. 계집은 집에 계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원시사회는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였다. 한 여자가 여러 명의 남자를 거느리고 살았다. 실제 중국의 소수민족 가운데는 아직도 여자가 남자를 선택하며, 여러 남자를 거느리기도 한다. 동물의 세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사자의 수컷들은 암컷을 차자하기 위해 싸움을 한다. 암컷은 이긴 수컷을 선택한다. 우수한 인자를 물려받아 종족을 보전하려는 자연의 법칙이다. 이로 미루어 동물이나 사람이나 성결정권은 암컷에게 있다. 그럼에도 남자 가운데는 힘으로 여성의 결정권을 무력화 하려는 사람이 있다. 이 점이 사람이 짐승보다 못한 점이다. 남자들이 흔히 이런 말을 한다. 남편을 뜻하는 지아비 부(夫)는 하늘 천(天) 위에 점 하나가 있으니 하늘보다 높다. 남편은 하늘보다 높다. 또 남자는 하늘이요 여자는 땅이니 남편은 하늘과 같은 존재라 한다.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다. 하늘은 양이요 땅은 음이다. 음과 양은 높고 낮음의 구별이 없다. 우주만물은 음과 양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남자들이 여자보다 높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정치적 인간(Homo politicus)이 되면서부터다.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부족과 나라가 생기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을 하게 되었다. 전쟁을 하는 일이 남자에게 주어졌다. 이로 인해 정치적 권력이 남성에게 주어지면서 남성의 지위가 여성보다 높아졌다. 남성이 여성보다 강한 것은 힘뿐이다. 여성이 남성에 속한다는 관념은 힘의 논리요 야만의 논리다. 동물의 세계는 아직도 성결정권이 온전히 암컷에게 있다. 그러나 사람의 세계에서는 아직도 힘과 권력으로 여성을 지배할 수 있다고 오해하는 남자들이 있다. 성결정권은 예나 지금이나 여성이 가진 고유한 권리다. 이제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여성의 고유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힘의 논리로 여성을 대하면 100% #미투(Me too)에 걸리는 시대가 되었다. 여성은 남성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남성과 대등한 존재다.  
281 죽은 물고기만이 물결을 따라 흘러간다 (브레히트)/고석근 file
편집자
266 2019-11-16
죽은 물고기만이 물결을 따라 흘러간다 (브레히트) 제대로 된 혁명 D.H.로렌스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에는 혁명에 가담하지 마라 그저 원수들의 눈에 침이라도 한번 뱉기 위해서 하라 돈을 쫓는 혁명은 하지 말고 돈을 깡그리 비웃는 혁명을 하라 획일을 추구하는 혁명은 하지 마라 혁명은 우리의 산술적 평균을 깨는 결단이어야 한다 사과 실린 수레를 뒤집고 사과가 어느 방향으로 굴러가는가를 보는 짓이란 얼마나 가소로운가?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도 하지 마라 우리 모두가 자력으로 괜찮은 귀족이 되는 그런 혁명을 하라 즐겁게 도망치는 당나귀들처럼 뒷발질이나 한번 하라 어쨌든 세계 노동자를 위한 혁명은 하지 마라 노동은 이제껏 우리가 너무 많이 해온 것이 아닌가? 우리 노동을 폐지하자, 우리 일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자! 일은 재미일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일을 즐길 수 있다 그러면 일은 노동이 아니다 우리 노동을 그렇게 하자!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영화 ‘도그빌’을 보았다. 로키 산맥의 한 작은 산골 마을에 어느 날 총소리와 함께 미모의 여인, 그레이스가 갱들을 피해 도망쳐 온다. 마을의 청년 톰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다. 그는 그녀를 마을에 숨겨주고 마을 사람들도 서서히 그녀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경찰이 오고 마을 주민들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급기야는 현상 포스트가 나붙고 그레이스는 마을 주민들의 먹잇감이 되기 시작한다.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게 그녀의 목에 개 목사리까지 채운다. 여자들은 그녀를 가혹하게 부려먹고 남자들은 그녀를 성적 노리개로 삼는다. 왜 평화스러워 보이던 마을이 이리도 잔혹하게 바뀌었을까? 경찰과 갱으로 상징되는 외부의 큰 힘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동물 세계는 먹고 먹히는 세계다. 초식동물들은 자기들끼리 평화스럽게 살고 있다가 육식동물이 나타나면 초식동물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가장 약한 동물을 바치고서 나머지 동물들이 살아남는다. 인간 동물도 약자들끼리 평화스럽게 살고 있다가도 강자가 나타나면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가장 약한 자를 바친다.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이다. 톰이 갱들이 준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건다. 갱들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들이닥친다. 갱 두목이 그레이스의 아버지였다. 그레이스는 갱의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에게서 도망쳤던 것이다. 그레이스는 아버지에게서 권력을 양도받아 주민들을 모두 총으로 학살하고 마을을 불살라버린다. 잔혹한 복수극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우리 사회는 도그빌과 얼마나 다를까? 아마 대부분의 마을은 같은 상황이 오면 같은 과정을 겪고 같은 결과로 끝나지 않을까? 우리 사회 곳곳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런 상황은 무수히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겉으로 평화로워 보이는 가정, 직장, 단체, 지역 사회...... 한 꺼풀만 벗겨보면 우리는 그 안에서 금방 생지옥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가득한 인간 세상을 만들려면 우리 모두 '자유와 평등의 인간'이 되어야 하는데, 모든 특권을 대를 이어가며 누리던 기득권자들이 가만히 있을까? 조국 법무부 장관의 하차를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개혁은 혁명보다 힘들다더니. 하지만 우리 안의 ‘생(生)의 의지’가 강자들이 마음대로 횡포를 부리는 세상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세파를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의 생의 의지를 모아야 한다. ‘제대로 된 혁명’을 해야 한다.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소름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마라/그저 재미로 하라’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에는 혁명에 가담하지 마라/그저 원수들의 눈에 침이라도 한번 뱉기 위해서 하라’ ‘돈을 쫓는 혁명은 하지 말고/돈을 깡그리 비웃는 혁명을 하라’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도 하지 마라/우리 모두가 자력으로 괜찮은 귀족이 되는 그런 혁명을 하라/즐겁게 도망치는 당나귀들처럼 뒷발질이나 한번 하라’ ‘우리 노동을 폐지하자, 우리 일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자!/일은 재미일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일을 즐길 수 있다/그러면 일은 노동이 아니다/우리 노동을 그렇게 하자!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촛불 집회에서 피어났던 ‘벅찬 가슴의 재미’로 하나하나 개혁해 가야 한다. 이제 우리는 긴 싸움을 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이 되기 위한 싸움이니까 지치지 말아야 한다.  
280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권서각 file
편집자
317 2019-10-27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 옛 선비들은 청빈(淸貧)을 소중한 가치로 설정했다. 99를 가진 자가 하나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100을 채우려는 것이 사람의 욕망인데 왜 우리의 선비들은 스스로 가난을 선택했을까? ‘그들은 물질을 탐하다 뜻을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의 삶에서 물질이 차지하는 비중을 최소화 하고, 그 외적 모습이 청빈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황헌식, 신지조론) 물질을 따르면 지조를 지키기 어렵다는 뜻이다. 율곡 이이(1531~1584)는 한양에 집 한 채도 갖지 않음으로써 청빈을 실천했다. 오늘의 재벌들과 대조되는 삶의 태도다. 우리의 청소년들은 일류대학에 가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경쟁한다. 일류대학에 입학했으면서도 금수저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으로 촛불을 들기도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스웨덴의 16살 소녀 그레타 툰베리(2003~ )는 진학을 포기하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우리 집(지구)에 불이 났는데, 어른들은 왜 딴 짓만 하고, 불 끌 생각은 않나요?’라는 질문을 되풀이했다. 급기야 바람으로만 항해하는 요트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했다. 환경 파괴의 주법인 항공여행을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환경론자들은 인간이 편리하게 살기 위해 화석연료를 사용하고 육류를 소비함으로써 지구가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툰베리는 지구를 살리자는 말만 하지 않고 몸으로 실천한 것이다. 우루과이의 제40대 대통령인 호세 무히카(1945~ )도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사람이다. 우루과이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남미의 스위스로 불릴 정도로 잘 사는 나라였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인들의 쿠데타로 군사독재가 시작되었다. 그는 젊은 시절 군사독재에 항거하던 도시 게릴라 출신이다. 15년 감옥살이 이후 장관과 상원의원을 거쳐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궁은 노숙자의 쉼터로 개방하고 20평짜리 허름한 집에서 출퇴근하며 봉급의 90%는 사회기금으로 기부했다. 퇴임 후에도 허름한 옷을 입고 텃밭을 가꾸며 농부로 살고 있다. 고물 폭스바겐 한 대가 그의 전 재산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 된 것이다. 동화작가 권정생(1937~2007)은 동화책 판매로 들어온 인세 수십 억 원을 재단에 기부하고 자신은 마을사람들이 지어준 오두막에서 허름한 옷과 거친 음식으로 가난하게 살다 갔다. 사후에 들어오는 인세도 그의 뜻에 따라 어린이재단을 설립하여 사회를 위해 쓰이고 있다.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지만 자발적으로 가난한 삶을 선택한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은 지구상에 굶는 사람이 많은 것은 지구상에 재화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의(仁義)가 부족해서라고 했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을 줄이고 서로 나누면 지금 지구상의 물질만으로도 굶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했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물질이 넘치지만 어디에선가 굶어죽는 사람들이 있다. 위에 열거한 사람들 외에도 스스로 가난이나 고난을 선택한 사람들은 무수히 많다. 왜 그들은 스스로 가난이나 고난을 선택했을까? 우리 옛 선비들이 지조를 지키기 위해서 가난을 선택했던 것처럼 그들이 선택한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함이다. 스웨덴의 소녀 그레타 툰베리도,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카도 현대의 선비라 할 수 있다.  
279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앙드레 말로)/고석근 file
편집자
434 2019-10-18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앙드레 말로) 꿈 랭스턴 휴즈 꿈을 꽉 붙들어, 꿈이 사라지면 산다는 게 날개 부러진 새와 같아 날 수가 없거든. 꿈을 꽉 붙들어, 꿈이 사라지면 산다는 게 눈으로 꽁꽁 얼어붙은 메마른 들판 같거든. 우리 사회의 귀족은 누구일까? ‘강남 좌파’ ‘강남 귀족’이라는 말들을 하지만 그들이 정말 우리 사회의 귀족일까? 귀족들이 자기 자식들을 위해 그리도 애쓴단 말인가? 귀족이란 원래 자신들이 가진 모든 부와 특권을 자연스레 자녀들에게 세습하는 계급, 계층들이 아닌가? 특목고, 자사고 등 소위 명문고를 나와 대학의 하늘이라는 ‘스카이’와 의대를 다니는 학생들은 귀족 자녀들일까? 그들은 대개 전문직, 대기업 임원 자녀들이라고 한다. 그들이 우리 사회의 귀족들일까? 큰 건물을 몇 채 가진 어느 건물주가 그러더란다. ‘왜 자식을 의대 보내? 병원을 차려주면 되지.’ 고등학생들에게 ‘너희 부모가 저런 건물주였으면 좋을까? 의사, 교수, 변호사 등 전문직이었으면 좋을까?’하고 물으면 아이들은 어떻게 대답할까? 저런 건물주보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자녀들을 어느 고등학교, 대학에 보낼까? 그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 어떻게 살아갈까? 우리 사회 전체를 요동치게 하는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사건’을 보며 우리 사회의 모든 특권을 가진 진짜 귀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법무부 장관’은 우리 사회에서 어느 정도 힘이 셀까? 건물주의 넘사벽인 우리 사회의 진짜 귀족에게도 그는 공권력을 정의롭게 행사할 수 있을까? 검사들은 그와 진짜 귀족 중에서 누구를 더 두려워할까? 장래를 위해서 누구에게 줄을 설까?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자유와 평등의 민주 사회, 이런 사회에서는 사는 게 얼마나 신이 날까? 프랑스의 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남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연구하여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라는 저서를 남겼다. 인디언들은 오랫동안 ‘국가 없는 사회’를 이뤄왔단다. 그들 사회에는 ‘권력’이 없단다. 부족장들은 완전히 ‘봉사직’에 불과하단다. 만일 그가 권력을 행사하게 되면 가차 없이 그를 추방하거나 사형에 처한단다. 그렇게 그들은 폭력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지배 기구를 갖지 않은 사회를 유지해왔단다. 그들은 먹고 남는 생산물을 생산하지 않았단다. 먹고 남는 생산물, 잉여 생산물이 있으면 그것이 사람들의 욕심을 불러일으켜 누군가가 그것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게 되기 때문이란다. 그들은 어떤 사람도 특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했단다. 부족을 위해 공을 많이 세운 사람에게도 공을 인정해 주지 않았단다. 공을 인정해 주면 그는 결국 특권층이 되기 때문이란다. 인간에게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아름다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위대한 힘이 있다. 잘난 아이만 거기에 끼지 않으면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얼마나 신나게 잘 노는가! 동학혁명 때 자치 기구인 집강소를 통해 백성들끼리 얼마나 평화롭게 잘살았던가! 광주민중항쟁 때도 공권력이 잠시 공백을 이뤘을 때 광주 시민 스스로 얼마나 평화롭게 잘 살았던가! 그때 절도사건 하나 없었다고 한다. 유럽 여행을 다녀 온 사람들은 다들 그 사람들의 삶을 부러워한다. 그들의 삶이 우리보다 더 풍요로운 건 우리 사회만큼의 특권층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인디언 사회만은 못해도 소위 ‘선진국 수준’의 사회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조국 사건’이 우리 사회 전반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조국 사건’을 ‘아름다운 조국’을 만들어가는 방향으로 우리가 함께 풀어갔으면 좋겠다. ‘조국 사건’을 통해 보는 우리 사회의 실상은 얼마나 참담한가! 우리 사회에서 대대로 특권을 누려온 광범위한 기득권 세력들, 그 충복들의 민낯은 얼마나 참혹한가! 하지만 나는 언젠가는 ‘사람이 하늘인 세상 人卽天’이 이 땅에 눈부시게 펼쳐지리라는 가냘픈 희망을 가슴에 안고 이 시대를 버틴다. ‘꿈을 꽉 붙들어,/꿈이 사라지면/산다는 게/날개 부러진 새와 같아/날 수가 없거든.//꿈을 꽉 붙들어,/꿈이 사라지면/산다는 게/눈으로 꽁꽁 얼어붙은/메마른 들판 같거든.’ 내가 꿈을 꾸고 있으면 언젠가는 이루어지니까.  
278 우리 안의 일제/권서각 file
편집자
424 2019-09-25
우리 안의 일제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는 머리를 스님처럼 깎고 그 위에 동그란 모자를 썼다. 그리고 겨울이면 천주교 사제복과 비슷한 까만 교복을 입었다. 그것이 일제의 잔재라는 걸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우리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이라는 세월을 일본제국주의, 군국주의의 식민지로 살았다. 해방이 되고 일본은 물러갔지만 아직 이 땅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본의 흔적이 남아 있다. 35년의 세월 동안 일본 천황의 신민이 되어 살았으니 그 잔재가 없을 수 없다. 외래문물이 들어오면 언어도 함께 들어온다. 한반도에 왜구가 들어오면서부터 일본어도 함께 들어왔다. 더구나 그들은 한국어 말살 정책으로 학교에서 한국어 쓰는 것을 금했으니 일본어가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태어나지도 않았음에도 무심코 쓰는 말 가운데도 일본어가 많다. ‘이빠이’, ‘야마’ 등 우리 주변에는 무심코 쓰이는 일본어 흔적의 말이 많다. 생활 속에 스며있는 일본어를 모두 없앨 수는 없다. 일본어 어휘를 쓰는 사람을 나무라자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일본어라는 것을 알고 쓰면 아무런 문제 될 게 없다. 일본은 우리의 이웃나라이기에 다른 나라보다 많은 문화 교류가 있고 말도 따라 들어오기 마련이다. 대학에 일본어 학과가 있기도 하다. 당연한 일이다. 이웃나라에 대해 깊이 아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 스며있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본제국주의, 군국주의의 잔재다. 우리의 생활 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제 잔재가 너무나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학교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학생들의 머리를 스님처럼 깎게 하고 군복 같은 교복을 입힌 것도 모든 국민을 군대로 규정한 일본군국주의 문화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마음대로 체벌을 한 것도 훈도가 칼을 차고 교실에 들어왔던 일제의 잔재다. 학교마다 교표가 있는데 대개의 교표는 비슷하다. 일본 경시청 상징을 본뜬 것이다. 아침마다 전교생을 운동장에 집합시키고 ‘애국조회’를 하고 교장선생님이 ‘훈화’라는 것을 하는 것도 일제의 잔재다. 지금도 하고 있는 국기에 대한 맹세는 ‘황국신민의 서사’에서 온 것이요, 국민교육헌장‘은 일본 천황이 내린 ’교육칙어‘에서 온 것이다. 우리나라의 학교는 학교마다 전교생이 모일 수 있는 운동장이 있다. 그게 당연한 걸로 알았는데 유럽의 학교는 우리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 학교의 운동장은 전교생을 모아놓고 훈화하도록 설계된 일본제국주의의 흔적이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지만 얼마 전까지 교사가 수업에 들어가면 반장이 일어나서 차렷! 경례!를 했는데 그 역시 일본군국주의 문화다. 현충일마다 찾아가 행사를 하는 충혼탑이 전국 각지에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기리는 탑이다. 이 충혼탑의 모양이 일본 충혼탑의 양식과 거의 같다. 이 밖에도 일제의 잔재는 우리 문화의 각 분야에 두루 남아 있다. 그것이 일제의 잔재라는 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흔적을 우리의 전통인 양 잘못 알고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75년이 되었음에도 우리가 모르는 일제의 잔재는 차고 넘친다. 이렇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답은 간단하다. 해방 후 지금까지 우리사회를 움직인 주류가 친일파였기 때문이다.  
277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마르크스)/고석근 file
편집자
382 2019-09-16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마르크스) 그러나 나는 김남주 그러나 나는 면서기가 되어 집안의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했다 황금을 갈퀴질한다는 금(金)판사가 되어 문중의 자랑도 되어 주지 못했다 나는 항상 이런 곳에 있고자 했다 내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인간적인 의무가 있는 곳에 용기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곳 착취와 억압이 있는 곳 바로 그곳에 말하자면 나는 이런 사람과 함께 있고자 했다 해가 뜨나 해가 지나 근심 걱정 잠 안 오고 춘하추동 사시장철 뼈 빠지게 일을 해도 허리 펴 느긋하게 한 번 쉬어보지 못하고 맘 놓고 허리 풀어 한 번 먹어보지 못하고 평생을 한숨으로 지새는 사람들과 함께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고 나라로부터 받아본 것이라고는 납세고지서 징집영장 밖에 받아 본 적이 없는 그런 사람과 함께 있고자 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운영위원회가 처음으로 생겼다. 나는 가슴이 뛰었다. 출마하자! 학교 측에서 후보자들에게 5분이라는 유세시간을 주었다. 나는 흥분한 상태로 ‘열변’을 토했다. 1등으로 당선되었다. 세상에 내가 1등을 하다니! 하지만 운영위원장은 나 같은 귀촌한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퇴직 공무원출신의 지역 유지가 했다. 하지만 운영위원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많은 방과 후 프로그램을 제안하여 개설했다. 학생과 학부모 대상의 글쓰기 강의도 하고 학교 신문도 발행했다. 도시에서 배운 모든 경험을 총 동원했다. 큰 아이 졸업식 날 귀빈석에 점잖게 앉아 있었다. 시상식을 했다. ‘헉!’ 운영위원을 함께 했던 분의 딸이 상을 받는 게 아닌가! 졸업생 좌석을 둘러보니 큰 아이는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 그렇구나! 나는 내 아들에게 아무것도 안 해 줬구나! 그 뒤로도 아이들 스스로 자라게 길렀다. 나는 그게 멀리 내다보면 아이들에게 더 좋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다 자라 성인이 되어 야성의 힘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며 내가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 지역의 시장 선거를 도와 준 적도 있다. 도시에서 국회의원 선거를 어깨 너머로 본 경험이 있어서 시장 후보자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그 후보자가 당선이 되고 시장 비서실장 제의를 받았다. 나는 받아들이고 싶었다. 지역운동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하지만 나의 기대는 산산이 깨졌다. 받아들이기도 전에 여러 통로로 청탁이 들어왔다. 나 같이 심약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대신 시 산하 문화단체의 사무국장으로 갔다. 가자마자 협박성 청탁의 전화를 몇 번 받았다. 그런 작은 단체에서도 검은 돈들이 오고 가나 보다. 나는 2주일 만에 그만뒀다.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유추해 본다. 우리의 정치권, 고위관료와 재벌을 위시한 재계, 사법기관과 언론, 학계는 어떻게 거대한 유착관계를 형성하고 있을까? 그 고리는 너무나 단단해 아무도 깰 수 없는 거대한 성(城)일 것이다. 나는 그래서 그 고리의 어느 매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깨끗한 이미지의 명망가들이 참 많다. 나는 그들을 믿지 않는다. 만일 그들이 학처럼 고결하다면 그들은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실제로 명망가들을 가까이서 볼 때마다 대체로 실망을 했다. 우리는 그들을 이 시대의 구원자, 메시아라는 허상으로 본다. 우리의 망상이다. 민주주의는 민(民)이 주(主)가 되어야 하는데, 민(民)이 아닌 주인을 섬기려는 우리의 노예의식의 발로다. 박근혜 독재 권력을 무너뜨린 우리의 ‘촛불’은 얼마나 위대했던가! 그때 우리는 오로지 민(民)의 힘으로 해냈다. 명망가들이 집회에 와도 마이크도 주지 않았다. 지도부 없이도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모아 천지개벽을 이뤘다. 그때 우리는 인즉천(人卽天 사람이 곧 하늘)의 세상을 봤다. 드라마 녹두꽃에서 한 동학농민군은 말한다. ‘나는 인즉천의 세상을 봤다. 이제 다시는 종살이하는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 사건’을 보며 생각한다. 왜 우리는 그에게서 ‘메시아’를 보는가? 그는 우리 사회의 최고 권력의 고리에 있는 사람이다. 그가 ‘청백리’이길 바라는가? 현대 정치에서 그런 봉건제의 이상적 정치인이 가능할까? 그보다 깨끗한 정치인이 얼마나 될까? ‘인즉천의 세상’이 오기 전까지는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여우의 교활함과 사자의 폭력’이 현실 정치를 지배할 것이다. 조국 후보가 법무부 장관이 되면 국정 개혁, 검찰 개혁을 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는 해낼 것이다. 그가 몸담고 있는 민주당은 우리 사회의 보수, 수구에 기반을 갖고 있는 자유 한국당과는 지지기반이 다르니까. 그동안의 주류 기득권 세력을 어느 정도 청산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한 발짝 진보할 것이다. 하지만 그 후에는 그의 당은 신흥 주류 세력을 형성해갈 것이다. 김남주 시인도 그런 기득권 고리의 맨 밑자락에라도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그의 출신 학교들을 보면). 하지만 그는 ‘면서기가 되어/집안의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했다/황금을 갈퀴질한다는 금(金)판사가 되어/문중의 자랑도 되어 주지 못했다’ ‘나는 항상 이런 곳에 있고자 했다/내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인간적인 의무가 있는 곳에/용기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곳/착취와 억압이 있는 곳 바로 그곳에’ ‘말하자면 나는 이런 사람과 함께 있고자 했다/해가 뜨나 해가 지나 근심 걱정 잠 안 오고/춘하추동 사시장철 뼈 빠지게 일을 해도/허리 펴 느긋하게 한 번 쉬어보지 못하고/맘 놓고 허리 풀어 한 번 먹어보지 못하고/평생을 한숨으로 지새는 사람들과 함께/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고/나라로부터 받아본 것이라고는/납세고지서 징집영장 밖에 받아 본 적이 없는/그런 사람과 함께 있고자 했다.’ 우리는 다시 ‘촛불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좋은 세상은 오로지 우리의 힘으로 이뤄야 한다. ‘나라로부터 받아본 것이라고는/납세고지서 징집영장 밖에 받아 본 적이 없는/그런 사람’외에는 어느 누구도 진정한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없다.  
276 정당한 분노/권서각 file
편집자
416 2019-08-25
정당한 분노 일본이 우리에게 경제 규제를 시작하면서 한일관계가 극도로 악화되고 있다. 일본이 우리에게 총성 없는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정치권이나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가 시시각각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다. 야권에서는 이 사태의 책임이 우리정부의 외교 무능에서 빚어진 결과라고 한다.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고 국민의 반일감정만 부추긴다고 한다. 심지어는 대통령을 행해 대통령이 싼 분뇨는 대통령이 치우라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에게는 해결책이 있는가? 외교적 노력이라는 추상적 언어뿐이다. 사실 한국과 일본은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조약으로 한국과 일본은 공히 미군이 주둔하는 나라가 되었다. 미국에 의해 한·미·일 군사동맹이라는 불편한 동거를 하는 상태다. 1965년 한일협정도 미국의 요구에 따라 일본의 사과 없이 대한민국 국민들의 반대 속에 맺어졌다. 한일관계는 언젠가는 정상화 되어야겠지만 보다 오랜 시간을 두고 풀어야 할 과제다. 양자가 화해를 하기 위해서는 가해자가 먼저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 가해자가 반성하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는데 피해자가 먼저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서독 수상 브란트는 바르샤바에서 무릎을 꿇고 나치 피해자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일본에게는 사과할 많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겨우 ‘과거의 일에 대해 통석의 염을 느낀다.’ 정도의 말로 퉁치고 넘어가려 한다. 여기에 어떤 외교가 필요한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아베정권은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남의 나라에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 국가가 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100년 전에 제국주의 침략을 했듯이 제국주의 침략의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낸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에게 경제 규제라는 카드를 꺼내들고 사실상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사실 일본이 이렇게 나올 거라고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무역 규제는 국제질서에 대한 엄청난 도발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어떤 외교가 필요한가? 독도를 주어야 하는가? 강제 징용과 위안부 피해에 대해 없었던 일로 해 주어야 하는가? 피해자는 우리이고 사과를 해야 할 나라는 일본이다. 그런데 그들이 먼저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분노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의 존엄을 포기하는 것에 다르지 않다. T. 플러는 ‘분노는 영혼의 원동력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분노가 없는 사람의 마음은 불구다.’라고 했다. 수주 변영로는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다.’고 했다. 우리의 분노는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값싸지 않다. 우리 민족이 3.1혁명 그날처럼 뜨겁게 분노하고 있다. 상인들은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일본 제품은 팔지 않겠다고 한다. 일본으로 떠나려든 관광객들은 서둘러 예약을 취소하고 있다.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는 시민들의 분노는 정당하다. 누가 이런 분노를 값싼 반일감정이라 하는가. 우리는 분노한다. 고로 살아 있다. 우리고장에서도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일본산 불매운동이 일고 있다.  
275 사람은 누구나 개성화에 대한 삶의 과제가 있다 (융)/고석근 file
편집자
353 2019-08-14
사람은 누구나 개성화에 대한 삶의 과제가 있다 (융) 개망초 오선홍 깎아지른 벼랑 돌 틈을 비집고 저도 위험한 하나의 풍경이 된다. 홀로 피었다 당당하게 사라지는 개망초. 아주 오래 전에 한 시민단체 활동가가 말했다. ‘사회 운동하는 사람은 도덕성이 가장 중요하다.’ 그때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다르게 생각한다. ‘도덕성’ ‘옳기에 가는 길’은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봐도 대의명분이 뚜렷한 이런 것들은 마음 깊은 곳에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겉으로 도덕성을 내세울수록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두운 자신의 모습이 쌓이게 된다. 지킬박사가 되면 동시에 하이드도 되는 것이다. 지킬박사의 마음 깊은 곳에서 하이드가 틔어 나올 때 지킬박사는 한순간에 하이드가 되고 마는 것이다. 배신한 운동가들이 이런 사람들이 아닐까? 운동가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 같은 ‘당당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선홍 시인은 ‘개망초’에게서 당당함을 본다. ‘깎아지른 벼랑/돌 틈을 비집고/저도 위험한/하나의 풍경이 된다.//홀로 피었다/ 당당하게 사라지는/개망초.’ 개망초는 그 무엇도 아닌 바로 개망초다. 그는 다른 어떤 식물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 오롯이 자신으로만 살아간다. 그에게서는 여기서 나오는 당당함이 있다. 사람도 그렇다. 오롯이 자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당당함이 있다. 하지만 인간 세계에서 자신으로 살아가는 게 쉽지 않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는 14살 소년의 당당한 삶이 있다. 허클베리 핀은 야생의 소년이다. 부모도 없이 혼자 살아간다. 학교도 가지 않고 교회도 가지 않는다. 누더기를 걸치고 짐승처럼 살아간다. 어른들의 눈으로 보면 영락없는 불량소년이다. 하지만 그는 모험을 하면서 ‘인간성(人間性)’이 깨어난다. 인간에게는 인간에게만 있는 본성이 있다. 사랑이다. 다른 존재에 대한 공감, 연민이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면서 이런 특성을 획득하게 되었다고 한다. 허클베리 핀은 노예 소년 짐과 모험을 하면서 흑인에 대한 공감, 연민을 배우게 된다. ‘사랑’은 본성이기에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다보면 자연스레 깨어난다. 하지만 학교에 가고 교회에 가는 다른 아이들도 이런 능력이 쉽게 깨어날까? ‘도덕성’을 배우는 순간 오히려 이 능력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허클베리 핀은 모험을 끝내고 나서도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향해 달려가려 한다. 우리 안에는 ‘허클베리 핀’이 있다. 우리 안의 아이가 깨어나야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 안에서 우리나오는 대로 사는 게 왜 이리도 힘들었던가?’ 개망초는 자신 안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한평생을 살아갔을 것이다. 그래서 당당하게 꽃을 피웠다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가는 길에는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인간 세계에 맞춰 살아가는 것. 또 하나는 자신 안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살아가는 것. 자신 안의 ‘아이’를 깨우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갈 때 우리는 남을 사랑할 수 있고 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274 품격과 야만/권서각 file
편집자
466 2019-07-27
품격과 야만 품격이 있다는 말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품격이 있는 사회일까? 그렇다고 대답하기엔 망설임이 있을 것이다.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은 출발부터가 품격을 가지지 못했다. 정치, 경제, 사회, 예술 등 각 분야를 책임진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에 친일행위를 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해산하고 친일파에게 나라 일을 맡겼다. 일제강점기에 친일파였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개인의 이득과 권력을 위해 민족이 아닌 왜구의 편에 섰던 사람들이다. 우리나라 혹은 우리겨레라는 가치보다 자기의 이득과 권력 더 소중하게 여기고 친일을 선택한 것이다. 좋게 말하면 개인주의자고 나쁘게 말하면 기회주의자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품격을 갖추기는 어렵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쟁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사회는 극단적 경쟁사회로 분류될 수 있다. 학교는 성적순으로 줄을 세우고, 직장을 구하는 데도 시험성적순이다. 학교도 등급이 있어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에 따라 사람의 평가가 달라진다. 평생 자기가 졸업한 학교의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한다.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대통령은 그것 때문에 자격이 안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런 사회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고급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 서민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다니지 못하게 하려고 시위를 하는 학부모들의 모습이 티브이 화면에 종종 나온다. 자기의 자녀가 서민아파트에 사는 아이의 친구가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베라르디는 한국사회를 ‘끝없는 경쟁과 극단적 개인주의’라 규정했다. 야만이란 말을 이렇게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는 ‘경쟁교육은 야만이다’라고 했다. 유럽의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은 경쟁교육을 하지 않는다. 성적으로 줄 세우기도 하지 않고 출신학교로 인간의 등급을 매기지도 않는다. 다만 자기 자신과의 경쟁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높일 뿐이다. 독일은 2010년 홈스쿨링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홈스쿨링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없으므로 사회적 공감능력이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라 했다. 사회적 공감 능력이라는 말, 타인을 배려하는 능력이다. 아도르노의 관점에서 보면 타인에 대한 예의와 배려가 없는 사회는 야만인 것이다. 우리도 예전에는 천박한 경쟁사회가 아니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서울의 이회영 선생, 안동의 이상용 선생 같은 이는 가산을 정리해서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하고 일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셨다. 여운형 선생도 노비를 해방하고 그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고 독립운동의 길로 나섰다. 그분들의 품격 있는 삶이 있었기에 우리가 오늘 온전히 야만으로 떨어지지 않은 건 아닐까.  
273 하려는 자는 패할 것이오 가지려는 자는 잃을 것이다 爲者敗之 執者失之 (노자)/ 고석근 file
편집자
419 2019-07-16
하려는 자는 패할 것이오 가지려는 자는 잃을 것이다 爲者敗之 執者失之 (노자) 밤비 백거이 철 이른 귀뚜라미 우는가 했더니 뚝 그치고 기름 적은 등잔불도 꺼질듯 다시 밝아져 창밖엔 밤비가 내리고 있구나 그러니까 파초닢이 소리를 내지 공원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엄마가 아이에게 질책하는 소리가 들린다.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질투하지 마! 알았지? 질투하면 안 돼!’ 엄마가 동생과 함께 운동을 하니 언니가 왜 나와는 하지 않느냐고 투정을 부렸나 보다! 세 모녀의 침묵이 흐르고, 바람이 나뭇잎 흔드는 소리가 들리고, 운동 기구 돌아가는 소리만 쓸쓸하게 들린다. 앞으로 언니는 어떻게 될까? ‘질투’가 마음 깊이 응어리지지 않을까? 그 응어리진 검은 마음은 언젠가 동생을 향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불쑥 불쑥 틔어 나올 것이다. 저럴 때는 그냥 두면 되는데! 엄마의 마음 깊은 곳엔 ‘질투’라는 응어리진 검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 질투의 씨앗이 심어지고 그 씨앗은 몰래 몰래 자라고 이제는 스스로 어쩔 수 없을 만큼 커서 제 마음대로 불쑥 불쑥 틔어 나오나 보다. 엄마는 그 업(業)을 끊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랫동안 쌓인 업은 또 그만큼의 시간 동안 힘겹게 허물어야 사라질 것이다. 이제 엄마는 힘 센 그 업을 어쩌지 못해 질투의 화신이 되어 버렸다. 딸에게만큼은 자신의 업을 전해주기 싫어 질투하지 말라는 조기 교육을 하는데, 오히려 딸들은 그 업을 고스란히 상속받게 되어버렸다. 가끔 학부모 교육을 가게 되면 나는 항상 같은 주제의 강의를 한다. ‘그냥 두면 돼요!’ 누구나 말로는 다 아는 ‘아이를 지켜봐 주고 격려하고 지지하면 된다’는 논지로 강의를 한다. 그러면 학부모님들은 그게 ‘어려워요!’하고 합창을 한다. 나는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를 믿지 못해서라고 말한다. 스스로를 오랫동안 그냥 내 버려 둬봐야 한다고 조언해 준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항상 자신을 그냥 두지 말라고 다그친다. ‘시간은 금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금과옥조다. 우리는 헉헉대며 앞으로 앞으로 달려 왔다. 나는 언젠가부터 ‘그냥 내버려 둬!’가 삶의 신조가 되었다. 이 신조가 가장 빛을 발한 건, 자녀 교육 같다. 내게는 두 아들이 있다. 이제는 장성하여 둘 다 자신들의 삶을 가꾸어 가고 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 시골에 내려가서 완전히 자유롭게 자라게 한 게 가장 큰 힘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내 삶 전체가 ‘그냥 내버려 둬!’가 되었으면 좋겠다. 백거이 시인처럼 담담히 ‘밤비’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철 이른 귀뚜라미 우는가 했더니 뚝 그치고/기름 적은 등잔불도 꺼질듯 다시 밝아져/창밖엔 밤비가 내리고 있구나/그러니까 파초닢이 소리를 내지’ 거대한 우주의 운행 앞에 함께 담담하게 동참하는 백거이 시인. ‘자신’을 다 버려야 도달할 수 있는 지고한 경지일 것이다. 백거이 시인의 이름 거이(居易)는 ‘편안함에 거하다’는 뜻이다. 시인의 자(字)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이다. 그는 술의 힘으로 이 세상의 온갖 풍파를 온 몸으로 맞이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거이(居易)’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272 사이비(似而非)/권서각 file
편집자
446 2019-06-24
사이비(似而非) 우리는 일상에서 중용(中庸)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중용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중용 본래의 뜻이 아닌 중간의 의미로 쓰인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사서를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까닭이다. 평소에 막연하게 ‘중용은 중간이 아니다’란 말을 가끔 입에 올린 적이 있다. 중용은 변증법적 선택이 아닐까, 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우리고장 출신의 석학 황헌식 선생의 ‘신지조론’을 읽으면서 중용에 대한 개념이 보다 가깝게 다가왔다. ‘장미꽃은 붉다’는 주장과 ‘장미꽃은 푸르다’는 주장 사이에서, 중도(中道)를 택한다는 미명 아래 ‘장미꽃은 보라색’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기만이다. 여기엔 중도가 아니라 진실이 있을 뿐이다. 이때 지조인(志操人)이 택할 바 중용은 ‘장미꽃은 붉다’는 그 한마디다.(신지조론) 중용에 대한 매우 명쾌한 비유적 설명이다. 논어와 맹자에는 향원(鄕原)이란 말이 나온다. 쉽게 말하면 처세를 원만하게 하여 고을 사람들의 신임을 받는 이른바 유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광자(狂者)라는 말이 있다. 뜻은 높고 크지만 능력이 그에 따르지 못하여 미치광이처럼 보이는 자를 이르는 말이다. 돈키호테와 같은 사람이다. 견자(狷子)라는 말이 있다. 식견이나 생각은 부족하나 한번 옳다고 여기면 그 뜻을 굽히지 아니하는 고집불통을 이르는 말이다. 향원은 시류에 영합하고 성격이 모나지 않아서 비난하는 자가 거의 없다. 그러나 공자는 향원은 덕을 헤치는 자이기에 광자나 견자보다 못하다고 했다. 향원은 중용을 가장한 사이비(似而非)이기 때문에 중용에 이르기가 불가능하다. 짝퉁이 명품이 될 수 없는 이치다. 노무현은 대통령 후보 지명 연설에서 사이비 중용, 즉 향원이 지배했던 우리 역사를 통렬히 비판했다. “조선 건국 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꾸어 보지 못했고, 비록 그 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 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습니다. 패가망신했습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야 했어요.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어머니가 제게 남겨 주었던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며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 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그만 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노무현의 이말은 아직도 유효하다.  
271 감옥은 실제 사회가 감옥과 같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존재한다 (보드리야르)/고석근 file
편집자
446 2019-06-14
감옥은 실제 사회가 감옥과 같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존재한다 (보드리야르) 호수2 정지용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꼬 간지러워. SBS ‘궁금한 이야기Y’에서는 ‘신(神)’이 되어 있는 ‘허경영’에 대해 다루고 있다. 산골짜기에 대궐 같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중심에는 ‘하늘궁’이 있다고 한다. 그의 손이 몸을 쓰다듬기만 해도 불치병도 낫는단다. 사람들이 한 줄로 쭉 늘어서서 그를 찬양하며 각자의 지병을 치료 받고 있다. 그에게 속았다며 항의하는 목소리는 그의 지지자들의 환호 소리에 묻혀 버리는 듯하다. 그는 대통령이 되면 ‘지금의 헌법을 없애버리고 다시 제정할 것’이라고 말한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를 없애고, 헌법 제1조 ‘모든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매월 150만 원의 국민 배당금을 지급한다’로 바꿀 거란다. 그는 누굴까? 그가 무척 낯설게 보인다. 그리고 이 세상이. ‘대국민 사기극’을 눈앞에서 보는 게 어찌 자연스러울까? 하지만 그는 이 시대의 ‘거울’이 아닐까? 이 세상의 어떤 사건도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은 없다. 그가 아무리 낯설어도 그는 바로 우리다. 낯설다는 건 우리가 어떤 생각의 그물에 갇혀 ‘어떤 진실’을 보지 못한다는 얘기다. 아도르노는 ‘낯섦을 표현하는 게 예술의 기원’이라고 말한다. 그의 낯섦을 드러내 그를 우리 사고의 그물 안으로 끌어들여보자. 그를 ‘재벌의 아이콘’ ‘소망의 아이콘’으로 보면 어떨까? 결국 그는 ‘이 시대의 아이콘’이 아닐까? 강의 시간에 수강생들에게 가끔 질문해 본다. ‘재벌 회장과 대통령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게 좋아요?’ 당연하다는 듯 사람들은 일제히 합창을 한다. ‘재벌 회장이요!’ 우리 사회의 ‘적폐 청산’이 이리도 힘든 건 대통령보다 힘이 더 센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비호를 받는 세력들을 대통령이 어떻게 청산할 수 있나? 온갖 사기가 판을 치는 춘추전국시대. 한 왕이 맹자에게 나라를 잘 다스리는 비결을 물었다. 맹자의 대답은 간단했다. ‘왕께서 잘하시면 됩니다.’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은 당연히 맑은 법이다. 아무리 아랫물을 맑게 하려해도 윗물이 흐린 한 모든 노력들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우리 사회 개혁의 중심엔 결국 재벌이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에는 없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재벌’을 누가 개혁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말한다. 외국에 갔을 때 재벌의 로고를 보았을 때 가슴이 뭉클했다고. 그러면서 덧붙혀 말한다. ‘재벌이 우리나라의 국위를 선양하고 우리를 잘 살게 한 게 사실 아니냐?’고. 국민소득이 아무리 높아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질이 높아지지 않으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국가는 도대체 무엇일까? 힘든 국민을 빼 놓은 국가란 도대체 무엇인가? 재벌에 취직하기 위해 우리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아이를 낳고 전 사회가 정성을 들여 기른다.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가 될까? 재벌에 취직하여 그 돈을 다 받아 낼 수 있을까? 또 높은 연봉으로 받은 돈은 결국 재벌이 만든 집, 물건을 사는 데 쓴다. 재벌은 선진국이면 범죄 행위가 되는 것들을 얼마나 당연한 듯 저지르는가? 그런데도 누구에게도 제재를 할 힘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사람들은 재벌에 대해 별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소리가 너무 크면 들리지 않는 이치인 듯하다.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매월 150만 원의 국민 배당금을 지급한다’는 허경영의 헌법 제1조는 지금 이 시대 우리의 소망의 한 표현이 아닐까? 곧 정치의 계절이 다가온다. 우리가 힘을 합쳐 ‘기본소득제’를 받아들이는 정치인만 지지한다면 ‘허경영’을 통해 드러난 우리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을까? 사람들은 그 많은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그건 재벌을 위시한 모든 국민이 ‘선진국’에 걸맞은 세금을 낼 각오를 한다면 어렵지 않게 재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정지용 시인은 아름다운 한 폭의 풍경을 본다. ‘오리 모가지는/호수를 감는다.//오리 모가지는/자꼬 간지러워.’ 오리와 호수와 바라보는 시인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삼라만상은 사실은 하나로 어우러진다. 단지 우리의 눈이 갈가리 찢어놓을 뿐이다. 허경영을 비난하는 건 우리 자신을 비난하는 것일 것이다. 그는 우리의 모습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줘 우리는 불편하다. 하지만 그는 그 안에 우리의 모든 것이 다 들어있는 한 폭의 풍경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