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를 가든지 그곳에서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그곳이 진리가 되리라 (임제)


이불을 꿰매면서
박노해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거지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 달라 물 달라 옷 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 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세상이 가르쳐준 대로
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나는 성실한 모범근로자였었다
노조를 만들면서
저들의 칭찬과 모범표창이
고양이 꼬리에 매단 방울소리임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보살핌이
허울 좋은 솜사탕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편리한 이론과 절대적 권위와 상식으로 포장된
몸서리치는 이윤추구처럼
나 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가정의 독재자가 되었었다

투쟁이 깊어질수록 실천 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낸다
노동자가 이윤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전교조를 하면서, 학생들이 비로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결석한 아이의 빈자리가 눈에 크게 띄고 그 아이의 마음이 가슴 아리게 느껴졌다. 아이들 하나하나가 소중해졌다.

그 전에는 아이들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교장, 교감 선생님, 장학사, 부장 선생님들이 항상 크게 보였다.

  박노해 시인은 ‘동료들과 노조 일을 하고부터’ 비로소 아내가 보이기 시작했나 보다.  

‘이불홑청을 꿰매면서/속옷 빨래를 하면서/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설거지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마무리하는 아내에게/나는 그저 밥 달라 물 달라 옷 달라 시켰었다’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세상이 가르쳐준 대로/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나는 성실한 모범근로자였었다’

‘투쟁이 깊어질수록 실천 속에서/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낸다/노동자가 이윤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진리가 나와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내’가 ‘삶의 주인’이 되어야 비로소 진리가 드러난다.  

내가 전교조를 하며 교장, 교감 선생님, 장학사, 부장 선생님들에게 당당하게 맞설 수 있을 때 나는 학생들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었다. 학교 교육의 진리가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박노해 시인이 노조 일을 하며 당당한 노동자가 되자 회사는 물론 가정의 진리까지 선명하게 그 실상을 드러냈다. 가부장 문화에 젖어 있었던 자신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더불어 민주당 청년 대변인이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남성도 차별 받는다’ ‘남자도 힘들다’고 논평했다고 한다.

왜 그의 눈에 ‘남성의 특권’이 보이지 않을까? 여당인 더불어 민주당을 대변하는 그가 이 나라의 주인으로 살고 있지 못하고 있는 건가?

민주주의(民主主義)의 가치인 ‘자유와 평등’은 우리(民)가 이 땅의 주인(主)이 되어야 비로소 그 모습을 찬란하게 드러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정한 사회’ ‘복지 사회’ ‘정의란 무엇인가?’ 하는 담론들이 공리공담으로 흐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한 논쟁들이 외려 우리나라의 실상을 덮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땅의 주인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촛불을 밝혀 나갈 때 ‘공정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 ‘복지 사회’는 진리의 환한 빛을 드러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