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들이 좋아하는 많은 대중가요들이 가사에 ‘술’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19세 미만 청취불가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술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곡이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게 그 이유라고 한다.
이 시대는 왜 술을 싫어할까? 술은 사람들 마음속의 광기를 끄집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평소엔 얌전하던 사람이 술만 마시면 ‘인간 이하’가 되니 사람들이 술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미치지 않고’는 이 세상을 살 수 없으니 술을 끊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술을 ‘필요악’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인간의 광기란 정말 위험한 것일까? 푸코는 ‘광기로 하여금 이성을 감시하게 하라!’고 했다. 이성으로만 세상을 보려하면 이성은 인간의 광기를 억누르게 되어 광기는 갇힌 물처럼 위험하게 된다. 광기란 인간의 근원적인 마음이기에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르게 하면 맑게 흐르며 노래를 하지만 억지로 가둬놓으면 썩게 되고 엉뚱한 곳으로 분출하게 된다.
그래서 평소에 마음을 가둬놓고 사는 사람은 술을 마시면 ‘인간 이하’가 되고 평소에 자유롭게 마음을 열고 사는 사람은 술을 마시면 ‘인간 이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의 본질은 술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폐쇄성’인 것이다. 19금(禁) 판정을 내린 심사위원들은 아마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항상 마음을 꼭꼭 닫고 살았기에 술이 주는 ‘대자유(大自由)’를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아마 거의 모든 우리 사회의 소위 ‘지도급 인사들’의 치명적인 약점일 것이다. 술에 의해 대자유를 획득한 시선 이백을 생각해 보자. 그런 경지가 이백만이 가능할까?    
심포지엄(향연)이란 단어는 원래 ‘함께 술을 마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함께 술을 마시며 인간과 세상에 대해 함께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술기운에 의해 약화된 이성은 ‘인간의 광기’를 아름답게 피어오르게 했을 것이다. ‘이성’이 약화되었다는 건 ‘인간의 오만’이 그만큼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을 죽여야 진정한 자신이 드러나는 존재이다.    
술은 인간이 발명한 최고의 음식이라고 한다. 마실 때는 물이었다가 마신 이후엔 불이 되는 기적! 물과 불의 하나 됨! 그래서 술은 고상한 토론을 할 때나 의례를 행할 때 마셨을 것이다.
나는 강의 시간에 술을 마실 때가 많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들도 모르던 ‘어떤 위대한 말들’을 하곤 한다. 강의 시간은 그야말로 향연이 된다. 술의 힘이다. 술이 우리 안의 고상한 힘을 피어 올리는 것이다.
나는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중고등학생들에게 술을 금하게 하는 게 아니라 ‘향연’을 체험하게 하면 어떨까? 한 분야에서 일정 정도의 성취를 이룬 사람들(출세가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을 잘 키운 사람들은 술도 잘 마시리라)과 학생들이 함께 술판을 여는 거다. 함께 술을 마시며 난장을 벌이는 속에서 ‘위대한 광기’가 피어 올라오는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 광기들이 어우러지며 장엄한 사람꽃을 피어 올리는 위대한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오랫동안 사람꽃의 향기를 잊지 못하리라.
나도 교직에 있을 때는 술이란 필요악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다 교직을 그만두고 문학을 공부하고 운동단체에서 일하며 많은 멋있는 작가들, 활동가들과 술자리를 자주 가졌었다. 그 때 술에 대한 내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렇게 멋진 향연이 있었구나!
술은 이성을 잠재우며 광기를 일깨운다. 평소에 광기를 잘 가꾼 사람은 술을 마시면 아름답고, 광기를 옥죈 사람은 술을 마시면 광기가 마구 활개 치게 되어 괴물이 되어버린다.
우리사회는 얼마나 숨 막히는 사회인가! 이 속에서 우리는 질식할 듯한 모든 고통을 인간의 위대한 발명품, 술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속죄양으로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