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우와 직녀


줄거리

옛날 옥황상제에게는 직녀라는 어여쁜 딸이 하나 있었다. 그 딸의 이름은 직녀였는데 베를 잘 짰기 때문이었다. 서쪽에는 견우라는 남자가 있었는데 소를 잘 몰아서 견우라는 이름이 붙었다. 어느 날 견우와 직녀가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다. 옥황상제는 그 얘기를 듣고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해 주었다. 하지만 직녀와 견우는 일을 하지 않고 놀기만 했다. 화가 난 옥황상제는 직녀는 서쪽 끝으로, 견우는 동쪽 끝으로 보내고는 1년에 한번 칠석날에만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칠석날이 되자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로 갔는데, 은하수가 너무 넓어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견우와 직녀가 울었는데 그 눈물이 비가 되어 땅으로 흘러내렸다. 다행히 까마귀와 까치가 은하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어 그들은 만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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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원숭이에게 자위행위를 가르쳐 줬더니 먹지도 않고 자위행위만 하다 굶어 죽었다는 글을 어디서 읽은 적이 있다. 사랑의 힘은 이렇게 무서운 것 같다.

열심히 소를 기르고 배를 짜던 견우와 직녀가 사랑에 눈을 뜨게 되면서 일을 하지 않고 오로지 놀기만 해 옥황상제가 분노해 서로를 떼놓았다는 것은 인간에게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다른 동물들은 종족 보존을 위해 성행위를 한다. 인간만이 ‘즐거움’을 위해 성행위를 한다.

자연 경제 활동을 했던 원시인들에겐 ‘사랑’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은 충분히 풍요로웠기에 구석기인들은 하루 4시간 정도만 일하며 즐겁게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에덴동산의 생활은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끝나고 말았다고 한다. 즐겁게 놀며 살다가 갑자기 많은 일을 해야 했던 농경 사회 사람들은 삶이 참으로 고단했을 것이다.

‘견우와 직녀’ 이야기는 이러한 농경 사회의 고민을 드러내 준다.

하지만 일을 하기 위해 1년에 하루만 사랑을 하는 삶을 우리가 받아 들여야 하는가?

사랑과 일은 양립할 수 없는가?

농경 사회 초기엔 사랑과 일의 갈등이 심각했겠지만 인류는 놀이 문화를 만들어 내며 사랑과 일을 양립시켜 갔을 것이다.

인간의 사랑은 언뜻 보면 ‘즐거움’ 뿐인 것 같지만 ‘사랑’은 ‘반쪽’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 되는 거룩한 행위이다. 인간은 사랑을 통해 ‘나를 넘어서는 사랑’을 배우며 자신의 영혼을 깨닫는다. 한 인간을 깊이 사랑해 본 사람만이 남과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을 제대로 못 해 본 사람은 돈, 권력, 명예를 좇는다. 스스로 충만한 힘을 가진 사람은 그런 외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지만 내면이 텅 빈 사람은 그런 외적인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려면 모든 사람이 ‘사랑’을 해야 한다. 그래야 원초적인 ‘사랑의 에너지’가 영적인 에너지로 승화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에너지는 한없이 돈을 추구하고 남을 짓누르고 자신을 드높이려는 에너지로 타락하게 된다.      

우리가 사는 천민자본주의는 이런 인간을 ‘정상적인 인간’ ‘성공한 인간’으로 호도하기에 우리는 그런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보라! 그렇게 사는 사람이 행복한가? 그런 사람의 내면은 얼마나 황량한가? 그의 얼굴은 사막 같다.

인간은 일을 하면서도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성 에너지를 승화할 수 있는 ‘문화’에 있다. 지금도 여러 곳에서 목도하는 여러 흥겨운 축제들, 멋있게 살았던 수많은 예술가들.

우리는 ‘포르노 같은 성’을 ‘사랑’으로 오해한다. 인간은 ‘육욕적 성행위’만 하며 살 수는 없다. ‘성’은 ‘사랑’이 되고 문화적으로 승화해야 한다.        

성이 사랑으로 승화하지 않으면 우리는 ‘포르노 사회’에 살거나 ‘물욕의 늪에 빠져 일만하는 사회’에 살 수 밖에 없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