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감각적 현상을 이성으로 고착하기 위해 신을 만들었다

 

 

唯物과 唯心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인간에 가장 가까이 있다. 인간의 생활과 마음은 유물과 유심의 경계를 괘종시계의 추처럼 하루 종일 오고간다. 이렇듯이 인간의 삶이 유물과 유심의 합체인데도, 지식인들의 관념에서 유물과 유심이 상충하는 까닭은 신을 인격신으로 보느냐 물신으로 보느냐 하는 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현상의 본질을 보기보다는 현상의 외형을 보기 때문이고, 물과 심의 개념을 신의 종속변수, 이분법적 사고로 보고 예단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불교, 이슬람교 등 모든 고등종교의 근본주의자들은 신의 의지가 우주와 삼라만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신은 절대적으로 추앙 받아야 한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유대인이었고 일상생활에서 귀족스러움을 자랑하고 싶어 한 인간이었지만, 무질서하고 빈곤한 세계를 방치하는 신의 무관심과 직무유기에 대한 분노가 그로 하여금 기독교적 신을 부정하고 마침내 감각적 현상의 물적 토대와 그 작용이 바로 정의로운 신임을 선언하게 하였다.

일상의 고급 사유활동에서, '靈的 인간' 라는 말은 순박한 인간 마음의 변화를 지칭하기보다는 신의 의지가 투사된 종교적 몰입 상태의 인간 정신을 말하는 데 사용된다. 일단 종교적 상태에 몰입하면 개체적 인간은 풀어지고 집단적 인간, 신의 의지에 충실한 도제들의 껍질만 남게 된다. 인간이 사라지고 신의 의지만이 태풍처럼 휘몰아친다.

그러한 태풍 속에서는 삼라만상과 인간이 안온한 삶을 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안온한 삶을 위해선 이제 '靈的 인간' 이란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제자리에 돌려놓을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외면하고 있었던 '인간 마음의 효과적인 변화' 라는 본래의 의미를 되찾아야 한다.

되찾는 방법은 '아주 미묘한 幾微의 시작과 진행'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우주와 그 속 한 점 지구, 천변만화의 변증법으로 만들어지는 삼라만상, 그 변화의 총체인 ‘인간’이 갖는 의미를 잘 생각해 보는 것이다. 즉 감각적 현상을 어떻게 이성으로 고착하느냐 하는 것이다.

인간은 한시적 생명과 통제하기 곤란한 생리욕구가 내재하고 있는 나약한 존재이다. 개체 인간은 근본적으로 깊은 외로움과 두려움을 갖고 있고, 그것을 서로 달래고자 짝을 찾아 성교를 하고 가족을 이룬다. 봄철 낚시에 걸린 암붕어의 찬란한 산란에서 보듯이 인간의 성교와 산아 행위는 생물적 본능이다. 개체 인간은 횡적 연결과 종적 연결 -배우자와 가족, 사회와 국가-을 통해 원초적 외로움과 두려움으로부터 탈출하려고 노력한다.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자기만의 가족을 조직함으로써 위안을 받는다. 사회적 집단 속에서 공동체가 되어 함께 노동하고 놀이를 함으로써 두려움을 망각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불안을 위로 받을 수 없는 인간은 기어코 신을 만든다. 정신의 마지막 우상인 신을 만들어 유일한 도피처로 삼고자 한다. 개체 인간으로서의 생물적 존재가 사후에도 보장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신을 더 크게 만든다. 신을 더 크게 만드는 것이 현세 행복과 내세 행복을 담보 받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자기 암시의 늪에 더 깊숙이 들어간다.

그러나 '아주 미묘한 幾微의 시작과 진행'을 통찰하는 인간은 개체이면서도 고독하지 않으며 오히려 집단속에서 고독하다. 그는 개체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개체일 때나 집단일 때나 물적, 심적으로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개체일 때는 더욱 그 빛이 반짝이고, 군중 속에 들어서도 恒心할 수 있다. 신의 부축 없이도 그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늘 열린 마음으로 幾微의 시작과 진행, 그 변화의 행방을 관찰하고 있다. 절대고독을 통찰한 자는 감각적 현상을 이성으로 고착시키기 위해 인격신이나 물신을 이용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