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8호...
   2020년 04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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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대통령은 우리의 무엇인가 file
무궁화
1534 2012-08-03
대통령은 우리의 무엇인가 강태규/ <대통령>은 어감 자체가, 제일 막중한 통감으로 해석될 때가 있다. 영어로 표현되는 내각의 최고책임자인 “미니스터”나 “the chief executive of a republic” 으로 표현되는 “프레지던트” 속에는 분명 위임받은 권한의 대행자임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지만 대통령이라는 언어의 감각은 사뭇 권위적이며 무소불위한 느낌을 배제할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언어는 지속적으로 변위와 진화와 변동적인 시대의 감각적인 함의를 가진 동적인 ‘verse' 인 것은 분명한 듯하며, 그러한 연유로 사전의 개정판이 반복되는 것 또한 그 방증일 것이다. 지난, 서울 이전문제나 국어기본법의 한글전용정책의 헌법재판소의 해석에 등장한 관습헌법상 개념을 주목해 볼만하다. 쉬운 구어체로 풀어본다면, 오랫동안 (사실은 오랫동안이라 할 수도 없다. 재판관들의 습득된 법인식의 소요세월이 고작해야 30년 전후일 것이므로)사용해온 제도를 굳이 지금 바꿀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법이란, 과거에 쌓아온 판단의 근거에 준해서 제도적으로 설정된 울타리라고 볼 때는, 울타리 바깥을 넘지 않겠다는 법의 의지라고도 본다. 실로 우리 문학인은 심리적 울타리까지의 극복과 그 변연의 확장이 사명일 수 있다는 생각에 닿을 때, 우리가 허물고 새로 구축해야 할 울타리 또한 만만치 않음도 안다. 그래서 교육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 미래의 헤게모니 구축에 있어 새 의자에 앉힐 인물들은 그 교육에 의해 계급적 재생산에 가담하게 되는 것이므로. 지금 우리 앞에는 정치사관학교 출신이 아닌 새로운 유형의 대선후보자가 등장했다. 강준만 교수의 <안철수의 힘>에서의 표현대로 “증오의 종식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타이밍의 가장 적합한 후보의 등장이다. 즉, 승자독식의 증오와 적대의 시스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도 본다는 데 필자는 동감하며 통합과 타협을 통해, 리더십이 아니라 팔로십을 통해 진보와 보수의 양극단을 순리적으로 다듬어 가는, 이념대결에서 나아가 국민 실리의 대결국면을 즐겁게 누려보는 희망을 선사하리라 본다. 그리하여 국민의 위임을 총괄하여 수행하는 그런 국가대표에게 금메달의 얄팍한 국수적 희비를 넘어 노무현정부 시절처럼 끌어내리는 데 부화뇌동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부의 한계와 문제점 또한 일찌감치 그리고, 충분히 소통되는 말과 제도와 습관들을 개진하면서 새 정권의 성공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문제투성이의 민주당 또한 국민이 나서서 재교육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전혀 다른 상머슴을 만나게 되는 꿈을 미리 준비한다. 차라리 강준만 교수의 말대로 “쇼크” 먹을 준비를 미리 해야 할 것이다. 지난 시절 우리 스스로가 “쥐떼”가 아니었나를 무릎 치게 되는 그런, 마음의 울타리 조차 없이 율려의 세상으로 드는 빗장을 열어 볼 수 있는 시대가 목전이 아니리 코끝 앞에 왔다고 생각하니 신명이 난다. 나는 기도하듯 한 음, 한 소절 노래할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던 정도령이 왔음도 알게될 거라는 그런 여름밤의 꿈을 꾼다. 깨지 말지니, 그 꿈이 개꿈일지언정.  
109 성리학의 두 발, 사변과 실천/양백산인 박희용 file
편집자
2291 2012-07-23
 성리학의 두 발, 사변과 실천 양백산인 박희용 고려 말의 대학자인 익재 이제현(1287년~1367년)의 實學觀은 그의 문집 『익재난고』권9(하), 「史贊」, <成王>에 보이는 ‘거부과 去浮夸 , 무독실 務篤實, 구신민지리 求新民之理, 궁행심득 躬行心得’과 같은 표현에서 잘 나타난다. 이는 당시 원나라에서 성행하던 실천적인 주자학풍에서 영향을 받은 바 큰 듯하다. - 최영성의 『한국유학통사』上卷 330p - 당대의 현인이었던 이제현이 원에서 수입한 것은, 그로부터 약 250년 뒤인 조선 중, 후기부터 극성한 ‘사변적 주자학풍’이 아니라 ‘실천적 주자학풍’이었다. 이 말은 주자학풍에는 ‘사변적’과 ‘실천적’의 양면이 있다는 것으로, 주자가 조선에 알려진 바인 ‘사변적 논리학자’의 모습만이 아니라 현실을 개혁하려는 ‘실천적 지식인’의 모습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신시대를 지나 안향, 이제현, 백이정, 이색, 정몽주 등 현자들에 의해 새로이 싹튼 고려 문화가 최영, 이성계 등의 무장들에 의해 뒷받침 되었다면 고려의 국운이 다시 흥성하였을 것이다. 고려 멸망이라는 역사적 변환이 없었다면 이제현에 의해 수입된 ‘실천적 주자학풍’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물론 개국파인 정도전, 권근 등에 의해 그 맥이 이어져 조선 초기의 문운을 융성케 했지만, 중기 이후 조선을 지배한 주류는 실세하여 산림에 은거한 학자들이 주자학의 사변성에 깊이 천착하여 배양한 ‘사변적 성리학’이었다. 고려 말기 유학의 학맥은 安珦(순흥. 1243~1306. 1289 주자전서 도입)-白頤正(1247~1323. 1314 주자학 연구)-禹倬(안동. 1263~1342. 역학 연구, 사변적 연구 방법 선구, 理學 창시자)-李齊賢(1287~1367. 경학과 성리학의 병진, 유학의 실학화)-李穡(1328~1396)으로 이어진다. 이색에 이르러 큰 호수를 이룬 유학은 고려를 유지하자는 절의파인 정몽주-길재-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사변적 성리학파와, 새 왕조 조선을 세운 혁신파인 정도전-권근-정인지-신숙주로 이어지는 실용적 경세학파로 양분되어 흘렀다. 1289년 안향이 『주자전서』를 원에서 수입한지 약 100년 뒤에 신유학의 번성과 함께 구왕조가 몰락하고 신왕조가 건립되었다. 시대 풍조에 맞는 『주역』을 중심으로 한 역성혁명파의 실용적 경세학이 주류가 되었고, 『춘추』를 중심으로 한 절의파의 사변적 성리학은 비주류가 되었다. 조선 건국 후 약 150년 동안 태평성대를 유지한 바탕은 관학파의 실용적 경세학이다. 그러나 산림으로 들어가 그동안 뿌리를 내린 성리학이 그 세력을 현실화하면서 차츰 관학파와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한 갈등의 산물이 네 번에 걸친 士禍이다. 연속되는 士禍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은 지식인들에게 더욱 심화되어 마침내 1550년 이후부터는 관학파의 실용적 경세학을 밀어내고 주류 학문이 되었다. 안향이 『주자전서』를 수입한 고려 말 이후부터 서양 문명이 수입되기 시작한 조선말까지의 한국사를 관류한 두 흐름은 실용적 경세학과 사변적 성리학이다. 이 두 흐름은 동전의 양면이면서도 역사상에서 끊임없이 갈등하였다. 조선의 개국과 초기엔 실용적 경세학이 우세였고, 퇴계학과 율곡학이 융성한 조선 중기엔 성리학이 우세였다. 국력의 피폐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조선 말기엔 성리학 일변도의 위험성을 간파한 선각들이 실학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속으로는 물질적 풍요를 탐하면서도 겉으로는 정신을 논하는 성리학의 사변적 고답성을 끝내 돌파하지 못하였다. 실용적 경세학과 사변적 성리학은 사상의 양면이다. 한 시대에 그 둘이 조화롭게 나타나면 문명이 발달하고, 서로 상극이 되면 난세가 된다. 한 시대에 그 둘이 함께 등장하여 조화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시대마다 교대로 나타나야 국력을 유지할 수 있는데, 조선은 중기 이후 사변적 성리학의 시대가 계속 되었기 때문에 국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사변적 성리학을 마루고 실용적 경세학의 시대로 변화하였다면 조선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이후 강제된 시련기인 일제 침략, 분단, 전쟁을 거치면서 사변적 성리학은 모든 책임을 지고 퇴장하고, 서양문명의 영향을 깊이 받은 실용적 경세학이 재등장함으로서 한국이 경제, 문화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실용적 경세학은 줄기이고 사변적 성리학은 꽃이다. 사변적 성리학만을 최고로 여기고 실용적 경세학을 천시하는 것은 꽃만 탐하고 줄기를 버리는 것과 같다. 줄기를 떠난 꽃은 잠시 화려하지만 곧 시들고 말듯이 성리학은 경세학이라는 받침이 든든해야만 번성할 수 있다. 성리학이 마음이라면 경세학은 몸이다. 어느 한쪽만 강조하면 건강을 곧 해치고 만다. 이런 면에서 보면, 내가 사는 시대와 후손들이 살아갈 시대를 생각하는 지식인이라면 학문과 사상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것이 얼마나 큰 역사적 범죄인가를 먼저 인식해야 한다. 아무리 선현으로 추앙받는 대학자라 해도 자기 학문만을 고집하고 타 학설을 극력 부정하며, 심지어 반대 학파를 사문난적의 이단으로 몰아 정치적 탄압을 자행한 것은 ‘爲己之學’의 의미를 오독하였기 때문으로, 마땅히 후학들로부터 엄중한 비판을 받아야 한다. 범부는 명분을 우습게 알아 명예욕을 가장 먼저 버리지만 識者는 명분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 명예욕을 가장 끝에 버린다. 명예욕은 정신적 가치이다. 한 생애 동안 학문으로 닦은 명예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자기 정신의 기둥이다. 그래서 늙어갈수록 명예, 자기 학문에 집착한다. 그 기둥이 훌륭하다는 말은 백번 들어도 흐뭇하지만, 옳지 않다거나 삐뚤어졌다는 말을 한 마디라도 들으면 극심한 분노에 빠진다. 선비라면 항상 불치하문하는 겸허한 자세여야 함에도, 명예욕에 집착된 자들은 그러한 분노로부터 탈출하기 위하여 정신의 기둥을 더욱 장식하거나 비판자를 사문난적으로 매도하며 엄중히 문책하였다. 그러므로 명예욕에 들끓는 자들은 입으로는 아무리 유식한 말을 내뱉어도 뼈와 피는 이미 선비가 아니다. 정신의 기둥이 옳지 않는데도 장식에만 급급하는 것은 위선이요, 논리가 아니라 비방이나 형벌로 비판자를 억압하는 것은 폭력이다. 한국사에서 보면 이러한 학문적 폭력이 비일비재하다. 학설의 차이, 표현의 차이를 학문적으로 해결하지 아니하고 당파적, 정치적 폭력으로 해결한 경우가 매우 많다. 이런 면에서 이색에서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조광조-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학맥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퇴계가 사변성이 짙은 안향-우탁-이색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정맥으로 치고, 백이정-이제현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접은 까닭은 그 역시 경세성보다 사변성을 추종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40세까지 경학을 공부하다가 40세 넘어서 비로소 『주자대전』을 접하고 그 깊이에 몰입하기만 하였지, 그것이 통달하고 난 다음에는 신속히 빠져나와야 할 정신의 늪인 것을 미처 몰랐다. 그러기에는 그의 몸과 마음이 이미 노쇠하여 빠져나올 시간이 없었다. 그가 20세 전후부터 주자학을 접하였더라면 생각의 폭이 훨씬 넓어져서 사변성과 경세성의 균형을 회복하였을 것이다. 그에 의해 본격적으로 흥기된 성리학은 경세성이 축소되고 사변성이 강조된 경직된 모습이 시대가 흐를수록 심해졌고, 그에 따라 士氣가 퇴전되어 국운이 피폐해졌다. 문명의 중심이 서양에서 동양에로 이동하기 시작한 21세기 벽두에, 그 중심의 핵인 新儒學이 사변과 실천의 두 발을 어떻게 행보하여야 할까. 줄기가 튼튼해야 꽃이 실하고, 두 발이 튼튼해야 역사의 지평을 굳세게 멀리 갈 수 있는 법.  
108 의도의 오해/권서각 file
편집자
1828 2012-07-16
 의도의 오해 권서각 (한국작가회의 이사) 문학이 죽고 시가 죽은 시대라고 말한다. 그래도 몇몇 시인의 시는 독자들이 깊이 공감하고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도종환의 「담쟁이」와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도 아마 가장 널리 알려진 시에 속할 것이다. 마을과 집이 사라지고 빌과 아파트만 있는 삭막한 시대에도 시가 읽힌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방울 없고 씨앗 한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 「담쟁이」 도종환 시인은 전교조 활동을 하다가 해직되었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전교조는 우리 지역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어버이연합의 노인들은 해체하라고 성화인 단체다. 이 시는 민주화 운동 관련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하고 있다. 하나하나의 담쟁이는 보잘 것 없다. 하지만 여럿이 함께 손잡고 나아가면 아무리 높은 벽도 올라간다. ‘담쟁이’를 깨어 있는 민중에, ‘여럿이 함께’는 민중의 연대에 비유했다. 독재와 억압의 벽이 아무리 높아도 민중이 연대해서 투쟁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도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이며 진보적 생각을 가진 시인이다. 연탄은 자기 몸을 태워 사람들을 따뜻하게 하는 희생적 삶의 비유다. ‘너’는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살아온, 힘 있는 자를 뜻한다. 「너에게 묻는다」는 자기의 것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 남을 위해 희생한, 그러나 지금은 힘없는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어버이연합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이런 시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도종환 시의 ‘벽’ 같은 사람, 안도현 시의 ‘너’ 같은 위치에 있는 분들이 의외로 이들 시를 자신의 애송시라고 한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지금은 이해가 된다. 그분들 나름대로 이 시를 이해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담쟁이’의 경우 어려운 조건을 극복하고 높은 지위에 오른 자신의 삶을 담쟁이에 비유한 것이다.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는 자기를 지지하는 추종자들과 함께 한다는 뜻일 터이다. ‘너에게 묻는다’의 경우도 지금까지 남에게 비난 받으며 살아온 자신의 삶이 연탄재와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비난했던 사람들을 향해 너는 나처럼 힘겹게 살아보았느냐고 묻는 것이다. 문학용어에 ‘의도의 오류’라는 것이 있기는 하다. 문학작품이 작가가 쓸 때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의도의 오해’라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교과부 교육평가원에서는 도종환이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이유로 그의 시를 교과서에서 사실상 삭제하라는 공문을 교과서 발행 출판사에 보냈다가 국민적 저항으로 철회했다. 대한민국 교육과학기술부는 보기에도 민망한 헛발질을 하였다. 도종환이 자기네 편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런 치졸한 권력자들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문학을 하고 있다. 이럴 때마다 저절로 떠오르는 물음이 있다. 누가 이들에게 권력을 주었는가?  
107 도깨비감투/고석근 imagefile
편집자
2579 2012-07-08
 도깨비감투 줄거리 한 나무꾼이 산에 갔다가 도깨비들을 만나 도깨비감투를 얻게 되었다. 그것을 쓰면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감투를 쓰고 남의 물건을 훔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번잡한 시장에서 지나가던 사람의 담뱃불에 감투에 구멍이 나게 된 그는 아내에게 감투를 기워 달라고 하였다. 아내는 빨간 헝겊을 받쳐서 기워 주었다. 또 다시 그는 도둑질을 하러 가게 되었는데, 도둑을 맞은 사람들은 빨간 천 조각이 왔다 갔다 하면 물건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빨간 천 조각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한꺼번에 덮쳐 그를 붙잡고 흠씬 두들겨 팼다. .......................................................................................................................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고 있었어, 그리고 나, 이 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虛空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 파블로 네루다의 시 <시(詩)> 중에서 감투 없이 맨머리로 산다는 건 참으로 힘들다. 사람들은 낯선 사람을 만나면 머리부터 보기 때문이다. 머리에 무엇을 썼는가를 보고 그 사람을 대하기 때문이다. 감투는 곧 한 인간의 정체성이 되었다. 세상의 감투란 각자의 역할일 뿐인데, 우리는 감투(직업, 직책)를 신분으로 본다. 그래서 우리는 머리에 잘 맞지 않는 감투를 쓰려 한다. 그러니 우리 삶은 늘 버겁다. 머리가 무겁고 몸짓이 어색하다. 한평생이 뜬 구름처럼 흘러간다. 인생은 연극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쓰는 모든 감투는 배역일 뿐이다. 배우가 그 배역이 진짜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연극이 어떻게 되겠는가? 연극 전체가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맡는 여러 역할도 그것이 진짜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인생 전체가 망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무꾼이 도깨비감투를 쓰고는 연극한다고 생각했다면 그의 인생은 얼마나 풍요로웠을까? 마을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수도 있었을 테고, 여러 어려움에 처한 마을 사람들을 도와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의 삶은 나날이 즐거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감투를 쓰고는 완전히 그 감투가 되어버렸다. 인간의 마음이 없는 감투가 무슨 짓을 못 하겠는가? 그는 패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우리들 삶이 어찌 이다지도 그 나무꾼을 닮았는가? 멀쩡하던 사람도 감투를 쓰고 나면 갑자기 얼굴 표정이 달라지고 행동거지가 달라진다. ‘그’는 간 곳이 없다. 감투를 쓰고서 그 감투역(役)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자신은 끝까지 자신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평소에 자신을 마음껏 느끼며 살아야 한다. 뺨을 스쳐가는 바람, 흙을 밟는 즐거움, 온 몸을 감싸 안는 따스한 햇살, 지저귀는 새소리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들 목소리...... 아이처럼 즐겁게 살아야 한다. 이 동심을 가슴 가득 품고 있으면 감투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내가 맡고 싶고, 맡을 수 있는 감투를 쓰고 유쾌하게 그 배역을 즐기면 된다. 우리는 이미 많은 감투를 쓰고 있다. 즐거운 연극 놀이를 해 보자!  
106 시인의 결핵 / 강태규 file
무궁화
1821 2012-07-02
시인의 결핵 / 결핵감염의 기원은 BC 7000년 전의 화석에서 발견되었다니 석기 시대 이후 인류와 동물이 같이 겪어온 내력의 세균성 질병 중의 하나다. 물론 이러한 사실도 19세기 세균학자 코흐에 의해 명명된 이후의 일이다. 결핵은 에이즈의 발호 이전 까지만 해도 우리 문학에서 고통의 질병으로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을 잃게하는 소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인의 병’ 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불치의 질병이었지만, 21 세기, 지금은 진단 기술과 치료 프로그램이 상당히 체계화 되어, 약제 내성을 가진 균만 아니라면 치료에 낙관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핵의 위험성은 그 발병 원인체를 알아내는 과정에 감기로 오인되기도 하고, 지금까지도 치료약제를 여러 달 이상 먹어야 하는 까다로운 세균성 질병이기도 하여, 잠복감염 기간 또한 길어 군인 막사나 학교와 같이 1 미터 이내에 접촉하는 환경에서는 쉽게 전파되기도 한다. 물론 개인별 유전력과 면역력에 따라 8할 정도는 감염을 비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약물사용 빈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경우에는 여러 약제에 듣지 않는 '다제 내성' 감염에 매우 취약한 것도 사실이다. 필자는 한 때, 미군병원에 집단질병 역학을 연구하는 방역관 일로 밥벌이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예방의학 군의관이 들려준 이야기 중의 하나로, 핵잠수함 승무원의 결핵감염 연구를 소개해 주었는데, 좁은 복층 침대의 1 미터 이내가 임상적 감염범위라는 연구결과였다. 공기감염, 비말감염으로 전파된다 하여도 체외로 배출 되는 이 균의 감염력의 한계를 가늠하게하는 사례로 곱을 수 있겠다. 집단 사육하는 동물에서는 경제적인 이유로 도태를 해야하는 법정전염병으로 규정하고 있다. 동물은 사람처럼 생후 1 개월 이내 비씨지 예방접종을 하지 않는다. 통상, 젖소를 포함하여 소와 사슴이 주요 감염대상이 되고 있지만, 여러 논문에 의하면 동물원의 코끼리를 포함한 모든 포유류도 적지않은 감염보고가 있고 사람과 교차감염이 됨으로 사육사에게도 쉽게 감염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구제역 유행 이후에 필자는 직업상 여러 농장의 순회 중에 결핵감염 여부를 선별적으로 할 기회가 있었다. 사람에서와 마찬가지로 목장주나 목장 직원이 소들을 보정틀에 목을 고정 시킨 후에 소의 꼬리 앞부분 내측이나 측면 부위에 투베르클린 반응검사용 약제 소량을 피부 밑에 주사하고 2 ~ 3일 후에 그 반응결과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사람과 동일하다. 문제는 사슴이다. 사슴은 요즘처럼 뿔을 자르는 시기가 아니면 정황적으로 어렵다. 물론 까다롭기도 하지만, 이 사슴들은 매우 민감하여, 마취하지 않고 접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깨죽지의 털을 제거한 후에 접종을 권하기도 하지만, 차선으로는 항문 또는 회음부의 잘 보이는 부위를 택하여 접종하기도 한다. 더 큰 문제는 접종하였다 해도 며칠 후 확인하는 과정에는 목장주가 바쁘거나 다시 보정 또는 마취하는 과정은 동물에게 대단한 압박임으로 필자는 작은 쌍안경과 인내만으로 소들과 사슴들을 관찰하는 방법을 자주 사용한다. 물론 교과서에 없는 일이다. 사슴은 외부 동물인 나를 향하는 경계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목부와 같은 칙칙한 옷을 입고 척후병처럼 인내한다. 소의 경우는 꼬리를 들거나 흔들 때를 기다리거나, 사슴은 그의 옆구리를 나에게 노출시키는 대략 이 초 정도의 짧은 시간에 표시한 접종 부위를 렌즈로 포착하는 것이다. 노동자 시인인 고철은 혈혈단신으로 위로삼아 강아지 세 마리를 키운 적이 있다. 지티비 방송을 통해 그의 일상이 소개된 적이 있는데, 나는 화면으로 강아지들의 건강진단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인에게 필자가 관찰한 바를 전했더니 모두 수긍을 했다. 관찰은 그래서 나를 지방에서도 수의사로 밥벌이를 하게하며, 목장주인들과도, 집짐승과도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오형제의 넷째로 자란 나도 둘째형의 결핵감염으로 인해 나 또한 폐장 안에 초기감염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모두가 바쁘고 폼나는 일들과 소통의 부재로 옛시절의 좁게 같이 살던 기억은 이미 아득하다. 진작 나는 내 어머니와 형제들, 더 나아가 내 아들 까지 관찰하고 소통하는 기회가 더욱 멀어진다. 나는 지방생활을 통하여 갇힌 짐승들과는 겨우 소통하면서도 진작 내 핏줄의 변연에 너무 멀리 왔다.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내공을 연마하게 한다. 그리하여 글로써 또 다른 시인과, 또는 드물지만 독자들과 소통한다. 어쩌면, 시 쓰기가 아니었다면, 나를 관찰하고 나를 소통하지 못하였으리라. 내 가슴의 결핵흔적이 싫지 않음은 그 속에 피의 연대를 같이한 기억이 소중해서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예수와 부처의 시대도 그러했겠지만, 여전히 우리의 환경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자생 면역력에 의존하는 시기로 더 가까이 몰리고 있는 것 같다. 기망과 허언 속에서라도, 상처의 흔적은 시를 쓰게 하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딛는 동인이 되기도 할 것이다. 어느 때 즈음에서야 상처들이 연꽃처럼 피울 것인가. 내 삶의 초라한 훈장처럼 스스로 다독이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105 육신과 마음의 관계/양백산인 박희용 file
편집자
1549 2012-06-22
 육신과 마음의 관계 - 금장태 박사의 「인간존재의 근본구조」 논주 양백산인 박희용 철학박사 금장태가 쓴 『儒學思想의 문제들』제2장 「유교의 인간이해」2절 「인간존재의 특성」2항 「인간존재의 근본구조」32p 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인간의 생명은 생물학적으로는 육신의 기능에 연결된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인격적으로는 마음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음은 육신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은 아니나, 육신을 명령하고 주재하는 지위에 있는 존재이다. 마음도 육신의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인간생명의 주체는 마음으로 이해된다. 성품과 욕망은 모두 마음에 깃들어 있으면서 각각 하늘과 땅에서 근원하는 것으로 구분될 수 있다. 유교이념에서는 하늘로부터 부여된 성품은 순수한 선이요, 보편적 이치이며 불멸적인 존재라 인식되고 있다. 욕망과 연결되어 있는 육신은 선의 기준으로부터 이탈하기 쉬운 가능성을 가진 충동적 힘이요, 개체적이면서 가멸적 존재이다. 마음은 선과 악이 실현되는 계기요 현장이며, 개체적이고 가멸적인 충동을 그릇으로 삼아, 보편적이고 불멸적인 이치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 양자를 결합하는 인격의 중심을 가리킨다. 따라서 마음은 인간이 성품을 발견하여 하늘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필수적인 통로라 할 수 있으며, 하늘이 세계를 주재하는 지위에 상응하여 인간 자신의 신체를 주재하는 지위에 있음을 주목한다.」 금 박사의 유학 공부는 이중 구조를 가진 듯하다. 학부 시절에는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에서 공부하고 대학원 시절은 유학의 본산인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력에서 보듯 그의 유학관은 종교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그의 저서 곳곳에서 학문으로서의 유학보다는 종교로서의 유교를 강조하는 논지를 읽을 수 있다. 위의 글 중 ‘마음은 하늘이 세계를 주재하는 지위에 상응하여 인간 자신의 신체를 주재하는 지위에 있음’이라고 하며, 비록 인격신이라고 직접 지칭하지는 않지만 하늘을 큰 신으로, 마음을 신체를 주재하는 지위, 즉 작은 신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육신<마음<하늘’이라는 종교적 위계질서를 기반으로 하여 논리를 전개함으로서, 성리학이 갖고 있는 학문성보다는 원시유학의 제례성을 강조함으로서 수많은 저작활동에도 불구하고 유학의 다양성과 각 학파들에 대한 심도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편이다. 학문으로서의 유학이 심화되어야 미래지향적인 가치를 갖는 것이지 종교로서의 유교가 강조되어서는 개인적 수양이나 전통 유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제 전제된 글을 분석해 보자. 앞 문단에서, 금 박사는 육신을 말할 때는 ‘있겠지만’, ‘것은 아니나’, ‘받을 수 있지만’이란 연결어미를 사용하여 육신의 존재 가치를 일단 인정하는 모호성을 보인 다음에, ‘볼 수 있다’, ‘존재이다’, ‘이해된다’, ‘구분될 수 있다’라는 확정형 종결어미를 사용하여 마음의 존재를 강조하고 있다. 육신은 존재와 가치가 희미하지만 마음은 뚜렷하다는 마음 우선, 즉 종교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연결어미의 모호성을 걷어내고 육신과 마음의 관계를 직시하면, ‘받을 수 있지만’이 아니라 마음은 육신의 영향을 깊이, 절대로 받는다. 육신의 현상적 표현이 마음이다. 인간생명의 주체는 마음이 아니라 몸이다. 마음이 잉태되는 게 아니라 몸이 먼저 잉태된다. 몸이라는 그릇이 마련되어야 마음이 그 속에 담긴다. 그릇이 깨어지면, 즉 몸이 흩어지면 마음도 새거나 흩어져버린다. 그러므로 마음은 몸의 종속물이다. 그러나 시간이 누적하여 마음이 성숙하면 앞나서서 몸을 이끈다. 태어나서부터 유년기까지는 몸의 욕구에 따라 마음이 움직이나 몸이 계속 성장함에 따라 마음도 성장한다. 20세경에 몸은 성장을 완성하나 마음은 계속 성장하여 드디어 몸을 이끄는 위치에 오른다. 마음의 성장이 올곧게 된 사람은 육신의 욕망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으나, 마음의 성장이 짧거나 왜곡된 사람은 육신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한다. 마음의 근본은 육신이기 때문에 마음이 앞나서서 육신을 이끌더라도 근본인 육신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육신의 욕망은 물이나 불과 같기 때문에 물이 순리로 흐르도록 하는 게 중요하듯 육신의 욕망이 순리로 흐르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고 불은 활동의 근원이다. 물과 불이 알맞은 때와 곳에서 상호작용을 원활히 하면 생명이 윤택하다. 마음의 고결성을 강조하는 것은 좋으나 그것이 지나치면 육신을 피폐하게 한다. 육신의 욕망을 무조건 저열한 것, 추잡한 것으로 치부하고서 오로지 마음의 순수성만을 추구하면 편협한 唯心論으로 흐르게 된다. 그리하여 육신을 음지에 가두고 마음을 양지에 내놓아 홀로 설치게 하면, 꺾어온 꽃이 곧 시들 듯이 육신이란 물과 토양에서 분리된 마음은 곧 시들고 만다. 마찬가지로 물질의 조합체인 육신의 욕망을 본질로 보고 마음이란 것은 육신의 허상으로 보는 唯物論 역시 온당하지 않다. 그렇다고 유물론과 유심론의 조화를 말하는 것은 논리를 모호하게 만드는 가식이다. 유물론을 중심한다하여 마음의 가치가 훼손되는 게 아니다. 유물은 마음의 바탕이다. 마음이 꽃나무라면 유물은 화분이다. 화분이 튼실하고 그 속에 든 흙이 비옥해야 꽃나무가 잘 자란다. 육신이 튼실하고 영양상태가 양호해야 마음의 꽃나무가 잘 자라고 마침내 개화하여 꽃과 열매를 맺는다. 유물론에 덮씌워져 있는 19세기적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걷어내고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 물질을 강조한다고 하여 정신이 무시되거나, 정신을 강조한다고 해서 물질이 무시되어서는 온전한 인간 삶의 양면을 보았다고 할 수 없다. 육신이 있어서 마음이 있는 것이지 육신이 소멸하면 마음 역시 따라서 소멸하고 만다. 생시에는 마음이나 죽으면 靈魂이 된다고 하는데, 靈魂은 죽은 자의 모습과 언행이 산자들의 관념상에 떠오른 影像일뿐이다. 육신의 끝이 마음의 끝이다. 마음은 고결하고 육신은 저열하다는 고정관념에 묶인 사람들은 유심론을 적극 주장하면서 유물론을 뱀 보듯이 한다. 육신은 허상이 아니라 본질이고 마음의 근저이기 때문에 유물론 역시 고결하다. 육신의 욕망은 생명체를 존속시키기 위한 생리적 현상일 뿐이지 도덕적 잣대로 재단할 대상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은 배가 고프면 울고 목이 마르면 액체로 보이는 것이면 아무 것이나 마신다. 마음이 성장하지 않는 동물들은 육신의 욕망에 따라 자동적으로 행위한다. 그러나 몸의 성장에 따라 마음이 성장하는 인간은 차츰 육신의 욕망을 조절하거나 통제할 줄 알게 된다. 동물의 세계에서 보더라도 독립생활을 하는 맹수들은 육신의 욕망에 투철하지만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들은 사회생활에 적응하면서 대체로 온순해진다. 마찬가지로 고독한 인간은 육신의 욕망에 탐닉하지만 사회생활에 익숙한 인간들은 마음이 육신의 욕망을 조절한다. 마음이 모습을 온전히 갖추게 되면 유물론이 환골탈태 하여 마음이 쑥쑥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자양분이 된다. 즉 유심론이 유물론을 앞서는 단계가 된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 이런 단계에까지 오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물과 유심의 경계에 머물며 오락가락한다. 마음의 성장이 육신의 성장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은 범죄의 가시밭길을 걷지만, 육신의 성장에 맞게 마음이 성장한 사람이라도 어떤 사안에 닥쳤을 때 마음으로는 통제를 하고 싶지만 과도한 육신의 욕망을 주체할 수 없어서 사회적 해를 끼치기도 한다. 생물인 이상 누구나 사회적 가치보다 개인적 욕망을 우선하는 게 사실이다. 단지 사회적 통제 때문에 마음속에 잠복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내공이 깊은 도덕군자라 하더라도 마음속에서는 욕망이 갈등하고 아찔한 유혹 앞에서는 맥없이 무너진다. 그러므로 유교이념에서처럼 인간의 성품은 하늘로부터 부여된 순수한 선이요 보편적 이치이며 불멸적인 존재라고 확언할 수 없다. 또한 권근이 「입학도설」제1도인 「天人心性合一之圖」에서 말한 대로 육신이 욕망과 연결되어 선의 기준으로부터 이탈하기 쉬운 가능성을 가진 충동적인 힘이요 개체적이며 가멸적인 존재인 것은 분명하지만, 마음이 꼭하게 선과 악이 실현되는 계기요 현장이며, 육신의 욕망을 그릇으로 삼아 보편적이고 불멸적인 이치를 받아들여 마음과 몸을 결합하는 인격의 중심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육신은 시공간적 제약을 받아 한계를 갖지만 마음이 인간의 성품을 발견하여 하늘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필수적인 통로인 것은 분명하다. 물론 그 통로의 외벽은 육신이다.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은 생명이다. 이때 말하는 ‘하늘’이란 어떤 인격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말하며, 생명은 가깝게는 부모로부터 받았지만 근본적으로는 대자연으로부터 받았다. 즉 대자연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이 갖고 있는 섭리는 동일하다. 대자연의 기와 리가 한 점에 응집되어 內循環을 시작한 것이 생명이고 일정한 기간이 지나 外循環을 위해 흩어지는 시점이 사망이다. 물질의 본질인 원자와 그 결합체인 분자들이 육신을 형성하여 생시 동안 내부에서 순환하다가 분자의 산화작용으로 인하여 피로 물질이 누적되어 한계에 이르면 자연적으로 분해, 소멸작용이 일어난다. 한 개체에서 내순환을 종료한 원자들은 다시 대자연 속으로 흩어져 외순환을 하다가 다시 한 개체 속으로 들어가 내순환을 시작하여 생명체를 형성한다. 이렇듯 지구상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은 화학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나비효과’에서 보듯 물리적인 면에서도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지구의 생명체는 서로 존중하여야 한다.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는 내순환과 외순환으로 연계되어 있고, 그 외연은 우주 전체로 확대되므로 인간의 육신과 마음이 갖는 고귀한 가치와 함께 그 한계를 적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성은 소멸을 전제로 하여 시작된다. 생명은 시작이고 사망을 마침이다. 지구가 갖고 있는 물질의 질량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한 개체 내에서만 내순환이 무한정 계속되면 다른 개체들이 새로 형성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 한 개체가 소멸되어야 그가 갖고 있던 질량이 외순환을 통해 다른 개체의 내순환으로 옮겨갈 수 있다. 모든 인간들이 자기만은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데, 내순환과 외순환의 원리로 보면 그것이 얼마나 헛된 욕망인지 알 수 있다. 무조건 무병장수를 탐내기보다 내가 갖고 있는 내순환의 기간을 충실하게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사고, 독수, 독물 등으로 내순환 기능을 망치지 않으면 하늘이 부여한 수명을 다할 수 있다. 생물과 무생물의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문명과 인류의 세계에도 지구질량불변의 법칙은 적용된다. 식자들은 물질문명의 팽창과 인구의 팽창으로 인하여 지구가 갖고 있는 자원 고갈로 인하여 인류의 멸망이 멀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은 인류 중심의 고정관념의 소산이다. 50억년이나 되는 지구의 역사에서 인류가 주인으로 등장한 것은 불과 만년이 안 된다. 그동안 써버린 지구자원은 인류의 문명을 위한 것이었지 지구에 사는 다른 생물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즉 인류는 자기 몫의 자원을 자신만의 내순환을 위해 모두 소모하였기 때문에 지구 전체적 차원의 외순환 원리에 의해 필연적으로 소멸 시점을 맞지 않을 수 없다. 인류가 소멸되고 난 다음에는, 앞으로 지구가 수십억 년의 미래 역사를 갖기 때문에 공룡시대처럼 어떤 다른 생물체가 자기들의 번식에 적합한 자원을 이용해서 번성할 것이다. 인류의 미래가 걸어 갈 향방은 발전, 극성, 쇠퇴의 외길이다. 인간의 번식본능 때문에 인구가 한 세기마다 배로 증가할 것이고, 지능의 발달에 따라 문명은 더욱 발달할 것이고, 인류문명은 물질을 섭취, 소화, 배설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문명이 발달 할수록 가용 물질의 양이 줄어들 것이고, 가용물질이 부족할수록 인간 대 인간, 지역 대 지역, 민족 대 민족, 국가 대 국가, 인종 대 인종 간에 갈등과 전쟁이 빈발할 것이다. 전쟁이 극도에 도달하면 핵이 사용될 것이고, 핵겨울은 지구를 빙하기에 강제로 들게 하여 인류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들의 절멸을 초래할 것이다.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성주괴공, 춘하추동, 극성쇠락 등의 원리가 인류문명사에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하지만 지구는 수십억 년 동안에 걸쳐서 몇 번 되풀이 했듯이 그 혹독한 핵겨울 빙하기를 자연스럽게 극복할 것이다. 그리하여 수백, 수천만 년 후에 다시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이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새 세상은 인류의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군집성의 사회적 동물이고 지능이 우수하기 때문에, 진화의 원리를 간파하는 지혜가 있기 때문에, 서로 살상하다가 공멸하는 핵겨울 빙하기를 피하기 위하여 노력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다. 그러한 노력은 크게 두 가지, 물질과 마음 두 분야에서 이루어진다. 물질 분야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적정한 인구 유지이다. 국가 단위나 지역 단위로 적절한 인구 정책을 시행하여 인구가 과밀화 되는 현상을 방지함과 동시에 인류 DNA를 고급화하여야 한다. 하지만 적정한 인구가 유지되더라도 지구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은 자원이 고갈될 수밖에 없다. 자원 소비의 최소화, 대체 자원의 개발, 타 행성 자원 도입 등의 외형적인 노력과 동시에 물질과 에너지를 재활용, 순환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과학기술을 개발하여야 한다. 또한 인간 육신의 진화 과정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대응이 필요하다. 외모와 신체 기관, 체모와 손가락 등을 보면 인류가 아직 진화 과정에 놓여있는데, 그 진화가 유효한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또한 적정 인구 유지, 물질 순환 등의 조치가 성공하더라도 인간의 DNA가 잘못된 방향으로 진화하거나 퇴화해서는 만사 헛일이다. 물질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한 전제는 마음 분야이다. 인류에게 닥친 위기를 인식하고 바람직한 미래를 통찰하는 지혜의 원점이 마음이다. 지금까지 모든 철학과 종교, 학문과 예술 같은 인문학이 응시하는 목표는 인간과 사회의 마음이 갖는 본질적 가치였다. 마음을 하늘로, 육신을 땅으로 하여 땅이 하늘의 지배를 받듯 마음이 육신을 지배한다는 관념적이고 도덕적인 관점을 중요시 했다. 그러다보니 육신은 현실에서 온갖 문명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무시 또는 억제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고, 마음은 그 본질이 제대로 구명되지도 못한 채 온갖 장식을 입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철학과 종교, 학문과 예술이 현실과 유리되어 현학성만을 띄게 되었다. 생각과 입으로는 문명의 붕괴와 인류의 멸망을 말하면서도 일상생활에서는 더 많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려는 이중의 인식 구조가 고착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제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통섭하여야 한다. 인문학의 뿌리가 자연과학이고 자연과학의 현현이 인문학임을 인식해야 한다. 인문학이 지식인들의 지적 유희 수준에 머물지 않고 인간과 자연의 이치와 현현이라는 본질로 가야하고, 자연과학이 물질적 풍요만 추구하는 수준을 벗어나 인간과 자연의 이치 규명과 물질 순환 구조의 개선이라는 본질로 가야한다. 사회적으로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통섭, 개체적으로는 마음과 육신의 통섭이 필요하다. 마음을 꺾은 꽃가지가 아니라 흙속에 뿌리내린 꽃나무로 가꾸어야 한다. 동물마다 각기 마음을 갖고 있지만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는 까닭은 인간이 갖는 마음의 양과 질이 여타 동물들과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간단한 신체구조와 뇌를 가진 미물들의 마음은 단순하지만 복잡한 신체구조와 뇌 구조를 가진 인간의 마음은 매우 복잡 미묘하다. 인간마다 갖고 있는 마음의 모양과 색깔은 공통점이 많지만 일정한 차이점을 가진다. 또한 인간마다 마음의 크기, 깊이, 굳기, 밀도, 개폐 정도가 다르다.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해야 할 것은 공통점을 수용하고 차이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역사상 수많은 철학자들이 마음을 연구하면서도 종내에는 실패하고 마는 까닭은 자기의 마음을 기준으로 다른 인간들의 마음을 재단하였기 때문이다. 자기는 수준 높은 불변의 마음을 갖고 있어 도덕적으로 완벽하다는 잣대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재단하였기 때문에 판판이 대중들의 마음은 저급하며 불완전하다는 결과가 도출된 것이다. 또한 자기는 육신의 욕망을 충분히 억제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대중들은 욕망의 노예로만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자기만이 예쁜 꽃이고 다른 것들은 보잘 것 없다고 여기는 꽃의 자만과 같다. 하지만 형형색색의 여러 가지 꽃들이 피어있는 산이나 들이 아름답고 생명력이 넘치는 것이지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혼자 또는 무더기로 피어있어서는 보는 이로 하여금 큰 감동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기 위해서 혁명이 필요하다. 그 혁명의 씨앗은 자기 마음의 나르시즘을 벗어나는 것이다. 마음은 수시로 표변하지만 육신의 욕망은 한 곳으로 집중하려는 자연의 이치이다. 물론 타인과 사회에 피해를 주는 욕망은 선별되어 마땅하지만 욕망이라고 하여 모두 무조건 억제, 배척되어서는 안 된다. 크고 작은 욕망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는 것이 마음을 소통하게 하는 방법이 된다. 욕망을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다보면 광산의 선별라인에서 잡석이 가려지고 원광이 나타나듯이 유익한 욕망은 육신과 마음의 생기가 되고 무익, 유해한 욕망은 사라지게 된다. 욕망은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과 선택의 문제이다. 인식과 선택에 따라서 개인적 악이냐 사회적 악이냐가 구별된다. 선과 악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으로, 개인적으로는 선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악이고 개인적으로는 악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선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인식과 선택의 차이에 의해 개인적 문제, 사회적 문제, 국가적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당사자인 개인이 선과 악에 대한 인식과 선택을 유효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과 사회적 환경이 중요하다. 물론 그 중심은 자각이다. 성인에게 있어 선과 악에 대한 인식과 선택의 주체는 마음이다. 그래서 금 박사의 말대로 마음이 ‘하늘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필수적인 통로’인 것이다. 우주 속에 작은 한 점으로 존재하는 행성 지구의 대자연 속에서 식물과 동물은 탄생, 성장, 사멸이라는 같은 과정의 한살이를 한다. 인간의 일생을 식물인 복숭아나무에 비유하자면, 한 그루의 묘목이 성장하여 줄기가 굵어지고 가지와 잎을 가지는 것은 인간이 성장하며 온전한 육신을 바탕으로 감각과 의식이 깊어지는 것이고, 복숭아꽃은 마음의 성숙을 향한 화사한 펼침이라 할 수 있다. 꽃의 화사한 펼침이 열매를 향한 노력이듯 마음공부는 온전한 마음을 향한 노력이다. 복숭아나무의 모든 노력이 견고한 씨앗의 완성으로 향하듯 인간의 마음 역시 완전을 추구한다. 완전히 성숙된 마음이라야 비로소 육신의 가멸적인 충동을 억제하고 유효하게 주재하는 지위가 된다. 이때의 마음이란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대자연에서 생명체가 받아들이는 감각과 의식의 영양이 집중된 종결점이자 현재와 미래에 제시되는 모든 행위의 시발점이다. 꽃의 화사함은 인간 삶의 보람과 즐거움이고, 씨앗의 견고함은 인간 마음의 완성이다. 복숭아나무가 꽃과 씨앗을 위해 노력하듯 인간 역시 삶의 의미와 마음의 완성을 위해 노력함이 마땅하다. 한 그루의 나무도 가뭄과 폭풍우 등의 자연재해와 벌목 등의 인위재해를 당하지 않은 한에는 생생지리의 이치에 따라 지속적인 성장을 도모한다. 그러나 나무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삶과 마음의 가치에 대한 자각이 부실해서 물질문명의 발달에 비례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인간들이 늘어나고 있다. 보태어 다른 인간의 생명까지 죽이는 사건이 증가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생물들이 生生之理에 맞춰 살려고 노력하는데, 지능이 가장 우수하다는 인간동물만은 걸핏하면 ‘죽는다, 죽여버리겠다’라는 소리가 입에 달렸다. 아주 이기적인 이유를 대며 자살과 살인을 선택한다. 어떤 명분과 이유로라도, 자살과 살인은 꽃을 피워 완전한 열매를 맺으라는 생명의 원리에 역행하는 우매한 짓이며, 육신과 마음의 관계를 확실하게 통찰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이다. 19세기 서양 문명에서 잉태되어 이후 두 세기 동안 지구의 사상계를 지배하고 있는 세 흐름은 자본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이다. 그중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득세하여 각자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면서 상충하고 있다. 이미 공산주의는 그 한계성이 노정되어 소멸기로 접어들었고, 자본주의 역시 극성기를 구가할수록 내적으로는 공동화 현상이 생겨나 치명적인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다. 그리하여 많은 지성인들이 제3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로 아나키즘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물론 현대의 과밀한 인구와 복잡한 사회구조를 간과한 아나키즘의 순박성이 문제시 되지만, 아나키즘의 선구자인 클로포트킨이 ‘만물은 서로 돕는다’라고 말한 의미를 인간의 육신과 마음의 관계, 나아가 생물과의 관계에 비추어보면, 지구에 존재하는 생명들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통찰하고 있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2012년 壬辰季夏初澣 說樂然齋에서  
104 사랑한다는 말/권서각 file
편집자
1630 2012-06-15
 사랑한다는 말 전화를 받으면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는 애교스런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의 요지는 자기 회사의 상품을 사 달라는 주문이다. 이때 사랑한다는 말이 입에 발린 소리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백화점에 들어서면 예쁘게 단장한 젊은 여성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굽혀 절을 한다. 물건을 살 때 에누리 한 푼 할 수 없는 비정함에서 그 웃음에 진정성이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선거철이 되면 사랑하고 존경하는 유권자 여러분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후보자는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한다. 그리고 유권자 여러분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하겠다고 말한다. 이렇게 당선되어 유권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일하다가 감옥에 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유권자를 사랑한다던 그 말이 진정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사랑한다고 말하며 사랑의 표현을 함으로써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기교를 배운다. 비싼 교육비를 내고 미소 짓는 법, 인사하는 법, 친절하게 말하는 법을 배우기도 하고, 후보자들은 이미지 관리를 위해 비싼 돈을 들여 이미지 연출 지도를 받기도 한다. 사랑받기 위한 노력이다. 이쯤 되면 사랑이 이미 사랑이 아니라 상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아내들도 남편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어 한다. 남편들은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서는, 꽃을 사서 바치고, 보석을 사서 바치고, 아내와 분위기 있는 곳에서 우아한 식사를 하고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심지어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지상의 모든 아내들은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백마 탄 왕자님의 사랑의 고백을 듣기를 원한다. 시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시에는 머리로 쓰는 시, 가슴으로 쓰는 시, 온몸으로 쓰는 시가 있다고 한다. ‘풀’이라는 시를 쓴 김수영 시인은 흔히 온몸으로 시를 쓴 시인으로 분류된다. 그의 시에는 절실함과 진정성이 있기 때문이다. 온몸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쓰지 않으면 죽을 만큼 절실한 표현 욕구를 통해 쓴 시라는 뜻이다. 쓰나마나한 시가 아니라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쓴 시 말이다. 그런 시가 감동을 준다. 덧붙이면 김수영은 아내를 늘 여편네라 불렀지만 진정으로 사랑했다. 시를 사랑으로 바꾸면, 사랑에도 머리로 하는 사랑, 가슴으로 하는 사랑, 온몸으로 하는 사랑이 있을 것이다. 2000년 전 예수라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함으로써 인류에 대한 사랑을 실천했다. 그런 사랑이 온몸으로 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자기희생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닐 것이다. 교육의 아버지라 불리는 페스탈로치는 교육의 가장 좋은 방법이 사랑이라 했다. 그의 사랑은 말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아이들이 발을 다칠까봐 허리를 굽혀 유리를 줍는 사랑이었다. 말로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아무리 문제가 많은 학생도 진정한 사랑으로 다가가면 마음의 문을 연다. 교육이든 정치든 또 통일이든, 이 세상 사랑으로 풀지 못할 것이 어디 있으랴. 글 권서각(한국작가회의 이사)  
103 혹부리 영감/고석근 imagefile
편집자
1761 2012-06-07
 혹부리 영감 줄거리 혹부리 영감이 어느 날 산으로 나무 하러 갔다가 길을 잃어 빈집에 들어갔다. 무서워서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도깨비들이 나타났다. 도깨비들이 그 노래가 어디서 나오느냐고 묻자 혹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도깨비들은 그 혹을 떼고는 보물을 주었다. 이 소문을 들은 이웃 마을의 또 다른 혹부리 영감이 도깨비를 찾아가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나오는 곳을 묻는 도깨비들에게 혹에서 나온다고 하자, 도깨비들은 거짓말하지 말라며 다른 혹마저 붙여 주었다. ............................................................................................................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는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는 것처럼. - 알프레드 디 수자의 시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중에서 노래 부를 때 우리는 ‘원래의 우리 자신’이 된다. 우주의 본질은 춤인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이 세상은 물질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에너지들이 들끓는 거대한 무도장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분이 좋으면 마음이 마구 설레고 저절로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 마냥 좋아서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부처의 얼굴이 우리의 진면목인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본 모습을 띨 때 모든 것이 잘 된다. 물론 세속적 가치들도 상으로 주어진다. 혹부리 영감이 노래를 불러 혹도 떼고 보물도 얻듯이. 하지만 나쁜 의도를 갖고 노래를 하면 그건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기에 오히려 재앙이 따른다. 따라서 이 세상은 이 모습 이대로가 사실은 낙원인 것이다. 다만 우리의 나쁜 의도가 문제인 것이다. 이 세상의 궁극적 도(道)란 ‘마냥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즐거워하려해서는 즐거워지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을 꾸준히 응시하고 있으면 우리의 마음이 저절로 즐거워하게 된다. 우리의 나쁜 의도만 풀어주면 마음은 저절로 즐거워 춤추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건 우리의 나쁜 의도를 알아채기 위한 것이다. 좋은 문학 작품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잘못된 역사관을 갖고 있거나, 허황한 사상을 갖고 있으면 우리의 마음은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특히 의도적으로 잘하려 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잘하려는 마음’은 이미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이웃 마을의 혹부리 영감이 보물을 얻어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려 했어도 도깨비들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마음을 자연스럽게 놔두는 것이다. 노자는 이를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했다. 혹부리 영감처럼 절망에 빠졌을 때, 우리는 우리 마음을 자연스럽게 풀어줄 기회를 얻는다. 평소에는 아무래도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다잡고 살기 때문이다.  
102 질투는 너의 힘/강태규 file
무궁화
1804 2012-06-01
질투는 너의 힘 미워하는 마음은 제대로 바라보는 시야나 올바른 판단을 방해한다. 그러나 때로는 질투와 욕망이 버무려진 마음은 어떤 일을 추진하게 하는 (사람을 포함한 생물진화의 우점종 속에 계대되어 강화되어온 현재 작동중인 유전자에 의한) 힘이 되기도 할 것이며, 그것의 순방향과 역방향은 스스로 선택과 폐기를 반복하면서 아슬하게 생태계와 문명을 이때껏 지켜온 동인들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불경이나 성경에 견주어 볼 때, 불온한 발상이거나 지극히 유물론적 사고의 경도인지도 모르나, 본시 사람은 부처나, 거룩함의 아들이라고 아무리 전파를 하여도, 지금껏 지구라는 행성의 우점종으로 남은 내력을 곱아보면, 오히려 이기적이고 사악한 고등유전자의 생물로 ‘살아 남아 번성한 지금’ 으로 보이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요즘이다. 총선의 결과분석 중에 드러난 현상인, 가난한 계급이 어찌하여 양의 가면을 하고 있는 야수의 계급에 투표했는 지가 ‘기억하고 의심하는 능력’ 을 퇴화시킨 우리와 주변의 기득권층임을 부인할 수도 없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자. 차라리 터놓고 소담을 하는 술자리라고 해보자. 웃는 얼굴로 고민없이 부처님 같은 소재가 일견 폼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문화단체 운영비를 요구할 때나, 교육계나, 공적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로 폼나는 (좀 의심스럽더라도) 정부정책 동화적 사업계획서가 우선적으로 예산배정되고 있고, 그 앞줄에 서서 추진하는 대표자에게 힘이 쏠린다. 중요한 포탈에 있는 의사결정권자도 더 큰 욕망을 위해서는 어떤 결정들을 하고 있는지 뻔하게 보인다. 다 아는 이야기를 새삼스레 쓰는 것도 멋 적지만, 20세기를 지나 21세기가 되면서 점점 더 사악해지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지난 달, 필자는 구제역 때문에 지연된 과제 하나를 마무리 했다. 가축의 기생충연구 중에 하나를 발표했는데, 뻔한 결론이지만, 기생충을 안전한 식육을 유지하면서 피해를 효율적으로 최소화하자는 취지로 이러저러한 증거를 동원하여 백신을 개발하자는 게 요지였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이따금씩 생각하고 여러나라의 과학적 자료들도 참고하다보니, 기생충에 대한 미움은 사라지고 기생충의 마음속으로 들여다본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지구 껍질의 상판이 이동하기 전부터 버텨온 지극한 생명체에 대한 경외감도 생겼다. 생태계가 열악해질수록 몸집이 큰 생명체는 개체수의 포화점 도달이 빨라, 일찍 소멸한다는 것이다. 보잘것 없이 보이는 미물들은 적은 에너지로 살아남거나 버티면 그 열정 하나로 기어코 남는다는 것. 나는 이 소망이 빨리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50키로그램도 채 안되는 몸집으로 살아남았다. 방송사 진짜노조는 공룡의 편에서 구축된 논리에 기대는 한편의 방송인들과 균열 되거나 구획되고 있다. 대선을 앞둔 즈음에 이 대결국면은 의도적으로 연장되어 진행될 것이다. 시를 공부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필자도 일견한 장면이지만, 자유실천에 뿌리한 현재의 작가회의 소속 지역문단 시인(다른 단체도 겹가입하였는 지도 모르나)인, 나보다는 젊은 시인의 차에 동승한 적이 있었는데, “사대강 개발을 반대하는 빨갱이 문인이 있다” 라는 그의 의견을 듣고, 이런 작가도 작가회의 홈페이지에 이름이 올라있다는 사실에 대한 나의 경악과 경의가 동시에 나를 괴롭혔다. 나는 알것도 같다. 그런 지식인 또는 작가가 왜 지금 번성하는 토양인지를. 나는 아직도 소망한다. 내 아들이 삼성직원일지라도, 큰 공룡은 포화점이 빨리 도달할 것임으로 빨리 사라졌으면 한다. 지금, 힘이 있는 계급 또는 부류는 더 큰 결속력으로 왼손이 모르는 악행을 당연한 정의라고 구역예배를 할 것이고, 백일 불공을 드릴 것이다. 바퀴벌레여, 좀 더 힘써 열망과 분노를 키워 버텨라. 10억년 후 태양계가 팽창하기 훨씬 전까지 너의 세계가 올찌니.  
101 진보는 우듬지, 보수는 줄기/박희용 file
편집자
1863 2012-05-25
 진보는 우듬지, 보수는 줄기 나의 친구 정수, 잘 계신지 그리고 가내 두루 안녕하신지. 전번 중락이네 사위 보는 잔치에 가서 재경 친구들을 만나 잘 대접받고 놀다 왔지만 그날 자네를 못 뵈어 좀 서운했네. 여류세월, 시간은 흐르는 물이라더니 벌써 2012년 초여름이 진하네. 오랜만에 자네 이름으로 온 메일이어서 반가웠네. 며칠 전에 서울 가 머물다가 어제 오전에 안동으로 내려오기 직전에 도착한 반가운 자네의 메일, 무슨 사연일까 궁금해서 잠깐 열어보았네. 내려와서 찬찬히 읽어보니 아래와 같은 점이 눈에 걸리더군. 비록 견문과 식견이 부족한 시골 사람이 횡설수설하는 하찮은 말이지만 불쾌하시더라도 일독하여 주시면 고맙겠네. 먼저, 자네가 보내온 문서의 제목은 <FW: 정당 국기계양대에 조기가 왼말?>였네. 사진 두 장, 하나는 4월6일 금요일 오후3시경 막말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민주통합당 노원구갑 김용민 후보와 민주당사에 걸린 태극기 사진이고, 또 하나는 지난해 5월 한명숙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2주기 분향소에서 ‘태극기를 짖밟고 헤맑게 사진촬영’을 한 사진이더군. 장황하지만 거기에 쓰인 글을 먼저 살펴보겠네. 《민주통합당에 대한민국은 없었다. 대한민국 제 1야당원들에 의해 태극기는 무참히 능욕당했다. 4월6일 금요일 오후3시경 막말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민주통합당 노원구갑 김용민 후보와 사과없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민주통합당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대한민국어버이연합과 애국여성들의모임 레이디블루가 당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순간 행사 참가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위를 쳐다보니 믿기 어려운 장면이 보였다. 민주통합당 당사 옥상에 걸린 게양대에 태극기가 조기로 달려있는 것이었다. 바로 옆 자신들의 당 깃발은 당당하게 달려있는 모습을 보면서 태극기를 자신들의 당 보다 못한 취급을 한 것은 우연이나 실수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주위에 있던 국민들은 분노했다. 우리 대한민국의 얼굴인 태극기가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서 그것도 제1야당 본거지에서, 태극기가 능욕 당하는 것에 대한 정당한 분노였다. 분노한 시민들이 민주통합당을 강력히 규탄하자 한참 후에 관계자들이 나와서 부랴부랴 태극기를 다시 계양했다. 애국 시민들의 정의로운 목소리가 없었다면 민주통합당은 계속해서 대한민국과 태극기를 모독했을 것이다. 민주통합당의 태극기 능욕은 상습적이다. 지난해 5월 한명숙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2주기 분향소에서 태극기를 짖밟고 헤맑게 사진촬영을 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얼굴을 짖밟는 자가 전 총리였고 제1야당의 대표였던 것이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태극기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홍모 제공 "내가 너를 법도대로 징계 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레미아 46:28)》 자네가 보낸 메일의 사진 두 장과 글을 읽고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보았네. (1) 우선 많은 사람들에게 광고하는 선전문인데 오자가 몇 있더군 계양 < 게양 揭揚, 왼말 < 왠말, 헤맑게 < 해맑게, 짖밟고 < 짓밟고 등이 표준 철자법에 맞는 어휘가 아닐까 하네. (2) 제목이 ‘선거에 졌다고 조기가 왼말’인데, 항의 집회가 4월 6일이면 선거가 4월 11일이니 5일 전 아니가? 제목이 좀 이상하지 않는가? 제목 넣을 때 간과한 것 같군. (3) 첫 번째 사진을 보니 의도적으로 조기를 달았다기보다는 태극기 게양할 때 소홀한 것 같아. 조기는 깃폭만큼 내려야 하는데 한 1/3정도 내려오지 않았나? 아마 집회 참가자들의 감정이 매우 과격한 상태이다 보니 그것이 오버 랩 된 것이 아닐까 하네만. (4) 두 번째 사진을 보니 나도 태극기 위에 서있는 게 일단 눈에 거슬리네. 그러나 주변을 살펴보면 故 노무현대통령 2주기 추모식으로 중간에 추모비가 있는데, 한명숙 대표가 헌화하는 모습이 찍힌 것 같네. 추모식과 추모비 개념을 적용하면 가능한 장면이지만 태극기를 신성시 하는 군중들로 보면 하자가 되지. 하지만 요즈음 시대적 풍조는 태극기를 공공장소에선 국가의 상징으로 신성시하지만 옷이나 모자 스포츠용품 등에 디자인으로 활용하도록 하고 있는 줄 아네. 모양도 좀 변형시키기도 하더군. 그게 몇 년 전엔가 법률로도 공표된 줄로 아네. 그러니 태극기를 바탕으로 한 전직 대통령 추모비와 제1양당 대표의 헌화는 자연스러운 장면이 아닐까 하네. (5) ‘민주통합당에 대한민국은 없었다’라는 말과 ‘태극기가 능욕 당했다’라는 말은 어떤 정치적 목적을 지나치게 내세운 선동문구가 아닐까 하네. ‘민주통합당’, ‘대한민국’, ‘태극기’, ‘능욕’이란 말은 서로가 생소할뿐더러 의미 단절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드네. 민주통합당 인사들과 지지자들은 그래도 대한민국의 반은 되는데, 그들이 정말 그렇다면 절단 날 일이 아니가. 몰라 혹여 일부 사람들이 그럴지는 몰라도 다수는 건강한 대한민국의 건강한 국민임은 분명하지 아니한가. 이 땅에 삶의 발을 딛고 사는 사람치고 대한민국과 태극기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 없네. 대한민국과 태극기를 비하, 무시하는 자들은 종북주의자들과 극좌 모험주의자들이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정치적 목적을 가진 측들의 사주를 받아 과격하고 선동적인 말과 행동으로 대한민국 인구의 반으로부터 지지를 받는 민주당을 비방하는 것은 우리들과 우리 자녀들이 평화롭게 살아가야할 대한민국의 미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하네. 민주주의는 건전한 정당정치를 기반으로 여론에 따른 다수결 원칙을 존중하면서 성장하네.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라 해도 미흡하면 질책해야 하고, 내가 반대하는 정당이라 하더라도 잘하는 점이 있으면 칭찬해 주어야만 민주주의가 올바르게 성장하네. 혁명은 폭언과 폭력이 난무하지만 건강한 정치는 말과 글로서 이루어지네. 규탄할 것이 있다고 해서 극우파인 어버이연합과 레이디블루처럼 우르르 몰려가 소란을 피우는 것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하네. 물론 극좌파들의 불법집회와 시위도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안 되는 것도 당연하네. 5월 내내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문제로 나라가 소란하네. 이석기, 김재연, 이상규, 이정희 등 구당권파 사람들 나름대로는 제대로 조사받지도 못했는데 과장되게 마녀 사냥을 당하는 억울한 분기가 있겠지.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회의방해와 폭력사태가 인터넷 중계를 통해 실시간으로 국민들에게 시청됨으로서 대다수 국민들이 그들의 반민주주의 행패에 대하여 분노하고 있네. 민주주의의 생명은 절차 중시 아닌가. 어떠한 명분으로도 폭력을 행사해선 안 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폭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종북과 반국가, 비사회적인 극좌 모험주의가 폭로되고 말았네. 이번에 우리 국민들은 진보에도 참과 거짓이 있음을 알았네. 물론 보수에도 참과 거짓이 있을 걸세. 이념 문제는 20세기 내내 우리 겨레의 정신과 생활을 혼란하게 하여 상쟁하도록 하는 요인일세. 이번 사태를 통해서 크게 진보와 보수라는 두 진영에도 양쪽 가에 각각 5% 정도의 극우와 극좌가 있고 다음으로 각각 10% 정도의 강우와 강좌가 있고, 중간을 기준으로 70% 정도의 중도층이 있음이 확연해 졌네. 이 70% 정도의 중도층이 극좌와 극우를 견제하면서 확실한 무게 중심을 잡는 게 가장 중요하네. 과격한 극좌와 극우 사람들은 서로가 빙탄물상용이라서 “ 몽땅 쓸어버려라, 척결하라, 숙청하라” 등등 말을 함부로 내뱉는데, 이념과 생각이 다르면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이해와 용인을 도모해야지 폭언과 폭력을 사용해서야 되겠는가. 평화야말로 인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닌가. (6) 홍모의 제공이더군. 에레미아 46:28을 언급한 걸 보니 목사 또는 장로가 아닌가 싶네. 예수는 그 당시로서는 굉장한 진보주의자였네.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유대 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적 고통을 가장 가슴 아파하며 자기 민족에게 생명의 길을 개척해주기 위해 헌신한 선각자였네. 나도 1976년 9월 초에 여산 제2하사관학교를 마치고 용산역에서 선교하는 아주머니로부터 휴대용 성경을 한권 증정 받아 육군종합학교 시절에 찬찬히 읽어보았네.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깊은 감명을 받았네. 33년 동안 세상에서 산 예수의 말씀과 행적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더군. 결국 자기들만의 기득권을 위협받는다고 여긴 유대교단으로부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선각적 진보주의자로서의 진리 추구와 참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네. 오늘날 대중 종교들이 물신주의, 배금주의, 대형주의 등에 탐닉하고 있는 것은 예수나 석가모니, 공자 등의 성현들이 제시한 진리의 길하고는 생판 다르지 않을까?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보편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예수의 삶을 오늘과 미래에 부활하는 길이 아닐까 하네. 정수, 번잡한 변명만 늘어놓았네. 고등학교 동창이지만 한 세대가 훌쩍 흘러갔다보니 서로가 살아온 방식이 달라서 이젠 모습이 다르고 이젠 생각이 다르고 이젠 이념이 다르네. 특히나 우리의 향토인 영남, 그 중에서도 경북, 그 중에서도 경북북부 지방은 아주 단단한 보수 풍토이지. 이 지역에 살면서 진보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여서 섬처럼 참 고독하다네. 자주는 못 만나지만 가끔 만나서 나누는 대화와 카페에 오른 글들을 살펴보면 재경 동창들은 90% 이상이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있더군. 진보든 보수든 그것들은 생각의 차이일 뿐이 아닌가. 그것이 가족이나 이웃, 친지나 친구들의 사이에서 장애로 작용해선 안 되네. 서로의 생각과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가치를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진보는 나무의 우듬지로서 하늘을 향하여 자라는 부분이고 보수는 그 우듬지가 단단해져서 무게를 갖춘 줄기가 아닌가. 우듬지를 부정하거나 줄기를 부정해서는 나무가 존재할 수 없지 아니한가. 우리가 이 나이 되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삶을 잘 마무리하고, 우리 자식들이 살아갈 세상을 잘 준비해 주는 것 아니겠는가. 위에서 언급한 어버이연합과 레이디블루 회원들의 마음도 이와 같음은 분명하네. 그분들이 무슨 돈과 명예를 위해서 행동 대열에 참가하였겠는가. 단지 이 나이 되어서 우리들이 경계하여할 할 점이라면, 나만이 옳다 우리만이 옳다라는 아집이 아닐까 하네. 장강이 지류를 받아들이고 대하가 세상의 모든 강을 받아들이듯 노년기엔 청년기보다 더 머리와 가슴과 마음을 열어놓아야 하지 않을까 하네. 그래야 지혜로운 노인으로 아름답고 편안하게 나의 생애를 마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자네나 나나 지향하는 목표는 동일한 것은 분명하네. 가는 길이 다를 뿐이지. 건안하시게. 2012년 5월 24일 안동에서 양백산인 박희용 드림  
100 불가사리/고석근 imagefile
편집자
1645 2012-05-07
 불가사리 줄거리 깊은 산 속에 사는 외로운 할머니가 어느 날 때를 뭉쳐서 새까만 때 뭉치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 새까만 때 뭉치가 벌레가 되어 돌아다니며 쇠붙이를 먹다가 산처럼 커져 괴물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벌레를 도저히 죽일 수가 없어서 불가사리라고 이름을 붙였다. 할머니가 나타나 불가사리한테 왜 이리 장난이 심하냐며 등을 탁탁 쳤다. 그러자 불가사리는 본래의 자기 모습인 때 뭉치로 돌아갔다. 할머니는 때 뭉치를 가지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 1 301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요리사다. 아침마다 그녀의 주방은 슈퍼마켓에서 배달된 과일과 채소 또는 육류와 생선으로 가득 찬다. 그녀는 그것들을 굽거나 삶는다. 그녀는 외롭고, 포만한 위장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잠시 잠시 잊게 해준다. 2 302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방금 301호가 건네준 음식을 비닐봉지에 싸서 버리거나 냉장고 속에서 딱딱하게 굳도록 버려둔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먹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는 외롭고, 숨이 끊어질 듯한 허기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약간 상쇄시켜주는 것 같다. - 장정일의 시 <요리사와 단식가> 중에서 외로운 할머니의 때 뭉치가 세상의 쇠붙이들을 다 먹어버리며 거대한 괴물이 되었다. 인간의 외로움과 쇠붙이가 만나면 괴물이 된다. 청동기 시대까지만 해도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다 철기 시대가 되면서 부족과 부족 간에 전쟁이 일어나고 국가가 생겨나면서 신권을 가진 왕이 탄생하였다. 그래서 신동엽 시인은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고 노래했다. 인간 세상에 사랑과 연대가 아니라 재물과 권력이 중심에 자리 잡으면서 인간은 점점 더 외로워졌다. 외로움은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모래알처럼 땅바닥에 떨어진 인간은 쇠붙이가 이룩한 것들을 다 먹어치우려 한다. 이런 게 잘 안 되면 그것들 대신에 밥을 꾸역꾸역 먹는다. 밥은 사랑이다. 우리는 어릴 적 엄마가 주던 밥을 잊지 못한다. 외로울 때면 밥을 찾는다. 하지만 밥은 밥일 뿐이지 사랑이 아니다. 그의 외로움은 채워지지 않는다. 아예 밥을 끊어 사랑 없이 살 수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괴물(욕망의 노예)이긴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끝없이 부풀어 올라 결국은 펑 터지고 말 욕망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것은 겉보기엔 거대해 보여도 사실은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욕망은 망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배가 고프면 아귀처럼 먹는다. 배가 다 채워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수저를 놓는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이 아이의 천진난만함, 망각이다. 불가사리는 ‘장난 그만 쳐라’며 할머니가 등을 탁탁 치자 삽시간에 자그마한 때 뭉치로 바뀐다. 우리가 몹시 화가 났을 때 화난 자신을 무심히(아이 마음으로) 들여다보고 있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화가 가라앉는다. 우리가 길러야 할 것은 이 아이의 힘이다. 아무리 억누르려고 해도, 온갖 지혜를 다 짜내어도 욕망은 오히려 그것들을 먹으며 더 커진다. 우리 안의 아이- 그것은 신이다.  
99 광우병을 말한다 / 강태규 file [1]
무궁화
1826 2012-05-01
광우병을 말한다 필자는 수의학 분야를 상당한 정도로 수학하기도 하고 연구하기도한 학자였으므로 소견을 제시해야한다고 판단하였으며, 또한, 나름 인문학적 통섭적 훈련에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가,를 고민 할 줄도 알게된 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독자제위께 글형식으로 게재한다. 황우석 박사 줄기세포 특허관련사건의 전개과정과 과학적 논란의 치열논쟁과 결말을 통해 종국의 의문점은 “누가 이익을 보았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때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답변은 이러하다. 첫째, 다국적 제약회사가 있고 두 번 째는 한국의 의학계로 볼 수 있다. 과정의 흠결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결론을 내리자면, 미래를 먹여살릴 만한 황금 알을 낳는 오리였음은 자명하고, 그 미래이익을 한국을 위해 구획을 설정할 때, 이미 적들은 생산되고 있었다. 과학분야의 비전에 대한 국민적 공론이 이후로 다시 없을 정도로 커다란 이른바, 에픽(Epic) 적인 소재요 사건이었다. 가장 치열한 화공을 날린 영역은 주지하다시피 카이스트가 주축이 된 과학토론 사이트(BRIC)에서 논문에 대한 예공이 집중포화로 가격되었으며, 이는 생물학 중에서도 발생학, 유전학, 생화학 분야의 석박사 과정학생들도 그들의 뇌를 뜨겁게 달구며 과학평론을 양산해 내었다. 필자는 지난해 최고의 상복을 누린 이영광 시인과의 식사자리에서 이 사건을 영문판 소설로 발표하면 괜찮겠다, 라는 데 동의까지 한 바 있었다. 그 뜨거움이 식은 지금도 줄기세포 연구는 미래 과학의 주제로 자리잡고 있음이 증명되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동물(동물 세포유래 포함)실험에서 사람세포의 실험을 하기위해서는 우스꽝스럽게도 사람의사, 여야한다고 못 박았고, 이제, 상당한 수입의존 줄기세포들로 병원들은 살림을 꾸려나갈 것이 틀림이 없어 보인다. 각설하고, 광우병을 논해보자. 필자는 가능한 이 글을 피하고 싶었다. 이 글을 쓰기위해 등장시켜야하는 과학자들과 지난 연분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필자는 과학의 최전선에서 본인의 부족한 치열함으로 뒤켠으로 스스로 물러난 사람이며, 다행히도, 글을 좀 쓰는 열정이 있어 이나마 객기를 부려 이 글을 쓴다. 시인으로서 글을 써야할까 과학자로 쓸까, 걱정이 앞선다. 또, 각설하자, 어제 오늘, 여러 논쟁이 광우병 소재로 달궈지고 있다. 그런데 묘하게 심판의 휘슬도 없고, 중재자도 없다. 이 혼전을 지켜보는 일반 사람에게 어떤 방법으로 광우병의 위험을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과욕이라고 느끼기도 하지만, 짧은 문학경력으로 배우고 있는 열정으로서 설명하고자 한다. 언론에 드러내 놓고 논쟁을 할 만한 인물은 사실 없다. 있다면 Y교수, 또는 H대학의 Y 교수 정도 되겠다. Y교수는 필자와 같은 학번으로, 신입생 시절부터, 그의 일본 D대학 유학시절 까지 자주 접촉하였지만, 그 후 미국 H 대학 의학연구소에서의 연구업적을 볼 때, 뛰어난 과학자가 틀림없다. 그리고 지난 논쟁 중에 H 신문의 칼럼을 통하여 의사들과 맞짱을 놓을 정도로 배포도 있다. 한 때, 학회에서 사소한 오해로 면박을 준 것을 이 지면으로 사과하고 싶다. 왜, Y교수의 논지가 중요하냐며는, 그는 면역학자요, 생화학자이다. 즉, 작은 분자 수준의 변이와 전개, 그리고 숙주의 반응을 수준있게 연구한 내공이 충분한 학자다. 그렇기 때문에 변형 프리온이 아주 미량이라도 숙주의 전체세포에 영향을 끼치고, 그러므로 ‘후추’ 알갱이 정도 미량으로 섭취하여도 광우병의 발현이 가능하다는 나무랄데 없는 과학적 추론과 최근 미국의학계 연구결과를 제대로 인용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지식인이다. 척수나 뇌신경만 피한다고 다른 근육을 먹는다 하더라도 광우병 감염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순진한 생각이다. 자, 문제는 이것이다. 당장 발병 증거를 내 놓으라고 윽박한다. 과학이라는 것이 뭣인가?. 몇 광년 떨어진 혹성이 지구를 때릴 수 있는 것을 예측하여 방비를 하자는 것이 과학이 아닌가. 진행 과정이 수년에서 20 ~ 30년 이상 걸리는 질병을 두고서, 당장 증거를 내 놓으라니. 미안하지만, 다분히 진행중인 질병일 가능성이 많다, 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유일한 대안은 쇠고기와 그 부산물들을 피하는 것이 좋으나, 백마리 중에 하나, 광우병 유발인자에 오염된 골분을 포함한 (수입)사료를 섭식시킨 소라며는 상황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소규모 유기농 축산, 또는, 집에서 닭 몇 마리 기르며 사는 모델들이 제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P교수 경우, 또한 내 후배이며 지방대학 교수로 있다. 그는 보건대학원에서 석사를 했고, 전공은 역학분야이다. 병의 원인과 전개를 통계학적 방법으로 연구하고 예측하는 분야다. 그런데 근일, 묘하게 언론에서는 그 확률을 최소화 시켰다. 이 사고의 큰 흠은 알려진 데이터만을 입력하여 추론한다는 학문의 결함이라고 본다. 왜냐면, P교수는 ‘상당량’ 광우병 인자를 섭취해야 발병한다는 견해이고 Y교수는 그 반대다. 역학적 분석이 어느정도 되기 위해서는 20 ~ 30년 소요되는 것을 지금 예단한다는 것은, 지금 멀리 날아오는 혜성이 지구와 부딪힐 가능성이 없다는 이야기와 뭐가 다른가. 게다가, C대와 일본 D대 농대 출신에다, S대 단과대학장, 식약청장 까지한 또다른 Y 박사는 근일 방송 대담에서 톡톡히 챙피를 당했다. 그 분의 특유의 과장화법에 단정적인 안심 발언의 근거가 엉터리였기 때문이다. 마당발도 유분수지, 그 분은 전공이 너무 많아 탈이다. 술자리 학자요 비즈니스 학자임은 반경에 있어 본 학자들은 아는 이야기다. 그래도, 이 분야를 아는 필자가, 명색이 시를 공부하고 문학하는 지인들이 많아 최소한 예를 갖추어 이 글을 쓰고 있다. 소규모 자영 겸업 축산이 대안이다. 육류를 피하되, 닭고기로 대체하거나, 집에서 소규모 텃밭과 농사를 통해, 그 부산물로 닭과 계란을 소비하는 구조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며, 둘째로, 축산농가에는 매우 죄송스럽지만, 유기농 축산업으로 가지 않으면 먼 거리에서 볼 경우, 매우 힘들 것이다. FTA 로 축산업은 붕괴될 가능성이 많다. 사료가 자급자족 되지 않으며, 카킬과 같은 대규모 사료생산, 대기업농에 유리한 신대륙 국가의 농산물을 피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우리밀, 우리 콩, 우리 쌀, 우리 사료, 우리 고기로 가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생계유지로는 험난할 것이다. 다행히도, 재료의 원산지 표사나, 이력제 등으로 원료 추적이 가능한 체계는 미국 보다 낫다는 것은 사실이다. 결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광우병 사태를 무마시키면 누가 이익을 보는가? 첫째, 미국 대선에서 부시 가문을 비롯한 축산 농업분야의 유권자들로부터 오바마 대통령은 표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미국과, 중국과, 종국에는 별종국가인 북한 까지도 선린관계를 유지해야하는 극동의 나라입장에서,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아야 하지만, 미국친화적 제스처로 종국은 정치적 이익을 향유할 기득권자가 유형무형의 이익을 볼 것이다. 쇠심줄로 연결된 듯한 힘쎈 압력과 회유에 익숙한 우리의 지도자는 명확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논리싸움에서 즉, 이미지 전쟁에서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있는 적절한 소재이기도 하다. 즉, 우리의 대선까지 굵게 연결되는 논란종식을 위하여 일찍 김을 빼야하는 숙명이기 때문이다. 극단적 예를 하나 들고자 한다. 담배는 암을 유발시키기 때문에 피지말 것을 권고한다. 그럼에도 국가는 담배를 생산하고 판매하며, 광우병을 별 거 아닐 수 있다고 까지 대비시킬 수 있다. 현재의 내려진 증거로는 맞는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국민들은 담배의 유해함을 충분히 잘 알고 선택적으로 소비하고 있다. 광우병 우려 고기의 수입 문제는 솔직하게 이러이러한 위험이 있다고, 하기에는 고민이 되는 식품이다. 다행히도 담배인삼공사는 아주 기호성이 많은 담배를 국민들에게 제공하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쇠고기의 생산단가는 국내 담배생산 단가에 견주어 볼 때 휠신 더 경쟁력이 없다. 즉, FTA 의 대표적 상품이 수입고기인 것이다. 광우병 위험관리는 한우에서는 뛰어 날 정도로 잘 관리되고 있지만, 의외로 미국의 육류생산체계는 허술하다. 여기에 그 위험도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이다. 향후 10년 동안 우리의 경제는 어려울 것이고, 안전한 먹거리에 지출해야 되는 비용을 상쇄할 수 있는 방법은 육류 소비의 억제일 수 밖에 없다. 자동차를 수출하기 위해서는 고기를 수입해 줘야 하는 논리와 충돌 중이다. 우리는 어째야 하는가. 힘쎈 나라와 힘쎈 지도자에게 직언을 하며, 고언을 하며, 최고의 지략으로 외교전을 펼쳐야 함에도 어쩔 수 없이 안방 내주고, 말로 주고 되로 받는 형국으로 본다. 세칭 전문가들이라는 학자들은 은행원과 다름 없어서, 개인 이익(국가 주도 연구예산 따기), 이익 집단(약사협회, 의사 협회, 곡류 협회, 육류수출입 협회, 유통협회의...) 뒤치다꺼리도 솔직히 힘에 부칠 것이다. 먹거리 사슬에 사욕에 가득차거나, 진실을 말하는 자를 싫어한다. 결국은 힘겨루기와 이익의 교환에 다름 아니다. 내 병은 내가 고치고, 내 먹거리는 내가 챙겨야 하는 고단한 자연주의가 대안이라니. 좀 더 정련되지 못한 글을 올려 필자로서 부끄럽다. 우리 문인들이라도 너그럽게 일독해 주심에 감사한다 (끝). .  
98 인간은 감각적 현상을 이성으로 고착하기 위해 신을 만들었다/박희용 file
편집자
1972 2012-04-23
 인간은 감각적 현상을 이성으로 고착하기 위해 신을 만들었다 唯物과 唯心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인간에 가장 가까이 있다. 인간의 생활과 마음은 유물과 유심의 경계를 괘종시계의 추처럼 하루 종일 오고간다. 이렇듯이 인간의 삶이 유물과 유심의 합체인데도, 지식인들의 관념에서 유물과 유심이 상충하는 까닭은 신을 인격신으로 보느냐 물신으로 보느냐 하는 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현상의 본질을 보기보다는 현상의 외형을 보기 때문이고, 물과 심의 개념을 신의 종속변수, 이분법적 사고로 보고 예단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불교, 이슬람교 등 모든 고등종교의 근본주의자들은 신의 의지가 우주와 삼라만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신은 절대적으로 추앙 받아야 한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유대인이었고 일상생활에서 귀족스러움을 자랑하고 싶어 한 인간이었지만, 무질서하고 빈곤한 세계를 방치하는 신의 무관심과 직무유기에 대한 분노가 그로 하여금 기독교적 신을 부정하고 마침내 감각적 현상의 물적 토대와 그 작용이 바로 정의로운 신임을 선언하게 하였다. 일상의 고급 사유활동에서, '靈的 인간' 라는 말은 순박한 인간 마음의 변화를 지칭하기보다는 신의 의지가 투사된 종교적 몰입 상태의 인간 정신을 말하는 데 사용된다. 일단 종교적 상태에 몰입하면 개체적 인간은 풀어지고 집단적 인간, 신의 의지에 충실한 도제들의 껍질만 남게 된다. 인간이 사라지고 신의 의지만이 태풍처럼 휘몰아친다. 그러한 태풍 속에서는 삼라만상과 인간이 안온한 삶을 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안온한 삶을 위해선 이제 '靈的 인간' 이란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제자리에 돌려놓을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외면하고 있었던 '인간 마음의 효과적인 변화' 라는 본래의 의미를 되찾아야 한다. 되찾는 방법은 '아주 미묘한 幾微의 시작과 진행'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우주와 그 속 한 점 지구, 천변만화의 변증법으로 만들어지는 삼라만상, 그 변화의 총체인 ‘인간’이 갖는 의미를 잘 생각해 보는 것이다. 즉 감각적 현상을 어떻게 이성으로 고착하느냐 하는 것이다. 인간은 한시적 생명과 통제하기 곤란한 생리욕구가 내재하고 있는 나약한 존재이다. 개체 인간은 근본적으로 깊은 외로움과 두려움을 갖고 있고, 그것을 서로 달래고자 짝을 찾아 성교를 하고 가족을 이룬다. 봄철 낚시에 걸린 암붕어의 찬란한 산란에서 보듯이 인간의 성교와 산아 행위는 생물적 본능이다. 개체 인간은 횡적 연결과 종적 연결 -배우자와 가족, 사회와 국가-을 통해 원초적 외로움과 두려움으로부터 탈출하려고 노력한다.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자기만의 가족을 조직함으로써 위안을 받는다. 사회적 집단 속에서 공동체가 되어 함께 노동하고 놀이를 함으로써 두려움을 망각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불안을 위로 받을 수 없는 인간은 기어코 신을 만든다. 정신의 마지막 우상인 신을 만들어 유일한 도피처로 삼고자 한다. 개체 인간으로서의 생물적 존재가 사후에도 보장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신을 더 크게 만든다. 신을 더 크게 만드는 것이 현세 행복과 내세 행복을 담보 받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자기 암시의 늪에 더 깊숙이 들어간다. 그러나 '아주 미묘한 幾微의 시작과 진행'을 통찰하는 인간은 개체이면서도 고독하지 않으며 오히려 집단속에서 고독하다. 그는 개체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개체일 때나 집단일 때나 물적, 심적으로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개체일 때는 더욱 그 빛이 반짝이고, 군중 속에 들어서도 恒心할 수 있다. 신의 부축 없이도 그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늘 열린 마음으로 幾微의 시작과 진행, 그 변화의 행방을 관찰하고 있다. 절대고독을 통찰한 자는 감각적 현상을 이성으로 고착시키기 위해 인격신이나 물신을 이용하지 않는다.  
97 투표하기/권석창 file
편집자
1653 2012-04-17
 투표하기 권석창 후보자님들은 늘 ‘사랑하고 존경하는 유권자 여러분’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번 선거 결과를 보고 개인적으로 매우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하는데 천심이 이러하다면 천심이 과연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아는 투표는 나의 생각을 대신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뽑는 제도적 장치입니다. 내가 직접 정치를 할 수 없으니까 나의 말을 대신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뽑는 것이 투표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도덕적인 사회를 원하면 도덕성이 있는 사람, 내가 잘 살고 싶으면 나를 잘 살게 해 줄 수 있는 사람, 내가 통일을 원하면 통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뽑기 위해서 투표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친애하는 유권자 여러분은, 나는 잘나지 못했을지라도 나보다 잘난 사람, 나보다 학벌이 좋은 사람, 나보다 부유한 사람, 나보다 똑똑한 사람에게 표를 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투표하면 그들은 나를 대변하지 않습니다. 잘난 사람을 위해 일합니다. 가재는 게 편이기 때문입니다. 더러 잘난 사람이 못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령 김구 선생 같은 분을 말함이지요. 그러나 그런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번 총선에서 막말을 했다고 텔레비전 방송과 조중동의 집중포화를 맞은 서울 노원구에 김용민 후보는 낙선을 하고, 박사학위 논문을 표절했다고 박사가 아닌 복사라는 이름을 얻은 부산의 문대성 후보는 당선 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막말을 한 것은 도덕적으로 부적절한 것이므로 사과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논문을 표절한 것은 처벌의 대상입니다. 우리의 친애하는 유권권자들은 막말을 한 김용민을 낙선시키고 논문을 표절한 문대성을 선택했습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더러 막말을 하기도 합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면 친애하는 유권자 여러분도 막말을 했던 기억이 더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논문표절은 막말과 다릅니다. 남의 지식을 훔치는 지식의 절도 행위입니다. 친애하는 유권자 여러분이 지식을 절도한 사람을 선택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투표가 나의 생각을 대신해 주는 사람을 뽑는 행위라는 것을 모르거나, 아니면 지식의 절도 행위를 가벼이 여기는 사람이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유권자는 바보이거나 부도덕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랑하고 존경하는 유권자 여러분이라는 말을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또한 이번 선거에서 우리 경북지역은 특정정당을 열렬하게 지지하여 선거지도를 완전히 빨간색으로 물들였습니다. 저는 우리 지역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 지역 유권자 여러분의 투표하기는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강남 사람들이 지기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농어촌에 사는 사람들이 지기의 이익에 반하는 정당에 투표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96 반쪽이/고석근 imagefile
편집자
1852 2012-04-08
 반쪽이 줄거리 옛날 옛적 노부부가 살았는데, 자식이 없어 산신령에게 빌어 세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막내는 반쪽이었다. 과거를 보러 가던 형은 반쪽이가 따라나서자 사람들이 놀릴까 봐 반쪽이를 바위에 꽁꽁 묵어 놓는다. 그러나 힘이 장사인 반쪽이는 바위를 아예 들어올렸다. 그래서 형들은 칡덩굴로 칭칭 묶어서 호랑이가 많이 사는 산속에 던져놓고 가버렸다. 반족이는 호랑이들을 잡아 가죽을 벗겨 짊어지고 길을 떠났다. 도중에 부잣집 영감과 마주친 반쪽이는 딸과 호피를 걸고 내기 장기를 하였다. 영감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늦은 밤, 영감의 집에 찾아간 반쪽이는 꾀를 내어 하인들, 노부부, 며느리들을 제압하고 마침내 딸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 ............................................................................................................................. 도마뱀의 짧은 다리가 날개 돋친 도마뱀을 태어나게 한다. - 최승호의 시 <인식의 힘> 중에서 인간은 완전한 존재일까? 불완전한 존재일까? 타고날 때는 완전한 존재인데, 이 세상에 살면서 불완전하게 되어 버린다. 이 세상 자체가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타고난 대로 완전하게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스스로를 불완전한 존재라고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어떤 길을 가도 불완전하게 살 수밖에 없다. 항상 전교 수석을 하고 명문대를 나와 사자 직업을 가져도 불완전하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완전하게 태어난 인간으로서 완전하게 사는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항상 자신을 결핍된 존재로 느끼는 것이다. 오직 모를 뿐! 이렇게 마음으로 다짐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궁극적 진리를 깨치게 될 것이다. ‘반쪽이’는 타고나기를 반쪽으로 태어났다. 즉 자신을 철저하게 결핍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엔 완전한 인간(다른 반쪽을 만나)이 되는 것이다. 온갖 난관을 물리치는 힘은 이런 자기 인식에서 나온다. 완전하게 태어난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요소들은 참으로 많다. 가족이라는 작은 집에 우리를 가두고, 형제라는 틀에 우리를 꿰맞추고, 온갖 규범이 우리를 옥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우리를 가두는 것들의 상징들이다. ‘반쪽이’는 이 모든 시험을 이겨낸다. 자신이 ‘반쪽이’임을 알기에 무난히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작아지는가? 평생 부모 그늘을 못 벗어나 부모 원망만하다가 일생을 허비하고, 형제간의 갈등의 늪에 빠져 한평생 허우적거린다. 이 세상의 온갖 사상, 규범은 어쩌면 그리도 부조리한가? 그것들은 우리를 끝내 꼭두각시로 만들고 만다. 꼭두각시가 되어 한 세상을 살다가 허망하게 사라져간다. 모든 성현들의 가르침은 자신의 오만을 깨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간단한 진리를 깨닫는 것은 얼마나 힘든가? 세상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는다. 오만을 부추겨 우리를 완전히 이용하고는 내팽개쳐버린다. 아예 타고나길 ‘반쪽이’라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자신의 결핍을 철저히 인식할수록 우리들 삶은 그만큼 풍부해진다.  
95 때벗기기/강태규 file
무궁화
1905 2012-04-02
때벗기기 강태규(시인) 아무리 목욕재계를 해도, 속에 있는 허물까지 벗기는 어렵다. 하물며, 술에 취한 후, 숙취해소를 돕는 간해독제도 도움이 되지만, 속을 비워주며 상당한 물을 마시고 자연적인 배설을 증가시킴으로 가능하다. 수신서에서 조차 ‘생각 비우기’를 권하고 있다. 스스로 엄격할수록 타인의 허물들이 잘 보이는 것은 물론이지만, 정치현장에서는 정치의 표현형이 온갖 기질의 사람들을 대하고 다루고 판단하면서 권력을 확보해야하는 현실을 대할 때는 의외로 독립투사나 선비를 택하기 보다는 지역에 도움이 될만한 이익을 줄 인물이라던지, 큰 기업 경영을 했거나 고위공무원, 특히 권력의 학문인 정치학, 법학을 전공한 후보들에 쉽게 기우는 경향이 있으며, 검증되지 않은 후보자간의 여론몰이 또한 쉽게 유권자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국가주의 환경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장년 또는 노인층은 새로운 흐름에 대해 완고한 편이며, 상대적으로 유복한 층은 유복한 후보를 선호하며, 빈곤한 층은 혁신적 후보에 기대는 경향도 그렇다. 선거가 아무리 중요해도 정당구조에서 국민이 원하는 기대에 부응할 후보를 내지 못하는 한, 깃발을 보고 투표하는 갈등구조에 익숙한 유권자로서는 여전히 헛발질일 수도 있다. 경제권력에 의해 포괄적으로 포위되어버린 현실은 더욱 암담한 여정을 암시한다. 방울을 달 사람을 선거를 통해 선발하여 행복한 국민을 꿈꿔야 하는 유권자의 권리가 정당에 의해 애당초 포기되어야 하는 현실은 더욱 암담하다. 경제권력은 이미 국가권력을 조정할 수 있는 경지에 닿았고 국민들은 행복할 수가 없어, 담배와 소주의 판매량만 늘리고있다. 아버지는 못된 흠이라도 제 닮은 자식을 감싸 안는다. 우리는 너무 많은 흠들에 익숙해져 어떤 때가 내 몸에 붙어있는지 모를수록 미래는 암담하다. 오죽했으면, 젊은 후보들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지형도 이를 어느 정도 반증한다. 시인의 시쓰기는 자기 구원*이라고도 한다. 이는 부단히 내 안의 때 빼기인 것이다. 어떤 때는 너무 깊어 응시만 할 수 밖에 없는 처지를 고백하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식자들은 보이는 것도 많지만 할 말도 많다. 때묻은 족속들의 놀라운 결속력에 비하여 그나마 붙일 때 조차도 없는 족속은 모래가루처럼 응집력이 약하다. 여기에 우리의 한계가 숨어있어, 오히려 자기희생적이며 이타적인 인물의 발굴과 전선배치가 절실하지만, 현실은 무심히도 비정하다. 긴 시야로 볼 때, 선거 이후도 그리 희망적이지 못할 현실 읽기는 책읽기를 뒷장부터 시작하는 나의 악습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목욕재계와 기도가 필요한 즈음이다. 술먹든 아니던 물이라도 많이 마셔야 겠다. 물 먹히기 전에라도. * 최종천 시인의 2009년 "미의식 논고"에 따르면 인간의 구원은 불가능하다고 한다(옮긴이 註) 참고 글이 담긴 웹주소: http://blog.daum.net/livemocha/1404  
94 말/박희용 file
편집자
1786 2012-03-22
 말 사월이 눈부시다. 해마다 오는 사월이지만, 올해는 앞으로 4년 동안 우리나라 정치를 주도할 인재들을 뽑는 달이어서 의미와 기대가 더 빛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군집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집단에 속한 개체마다 성격과 취향,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의사소통과 조절이 필요하다. 그러한 소통과 조절 작용을 정치라 하고 그것을 주도하는 주체를 일러서 정치인이라 한다. 정치인에 의해 정치의 질이 정해지고, 정치에 의해 한 집단의 평화와 발전이 결정되는 바, 그 관건으로 원활한 소통이 필수적이다. 현대엔 온갖 메스미디어를 활용한 소통과 조절이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하지만 옛날엔 씨족사회처럼 좁다면 마을 중간에 나서서 우렁찬 목소리로 일장 연설을 하면 되었지만 부족국가, 봉건국가로 발전하면서는 원거리 소통과 조절 수단으로 말을 이용하였다. 만약에 말이 길들여지지 않았다면 동서의 인류문명이 예까지 발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물론 말이 아니라도 낙타나 소 등 등 덩치 큰 동물을 영악한 인간이 길들여서 이용하였을 것이지만, 말만큼 빠르고 강력한 동물이 없기에 수천 년 동안 인류는 말을 더 익숙하게 길들이려고 노력한 것 아니겠는가. 말馬과 말言, 한자 표기는 다르지만 우리 말 발음은 같다. 군집동물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이고, 그 소통은 말로 이루어진다. 옛날에는 멀리까지 소식이나 정보를 말이나 글로 전달하기 위하여 말을 타고 달려갔다. 그런데, 말이 부실하다면 어떻게 될까? 말이 부실하다면 목적지에조차 가지도 못할 것이고, 말이 부실하다면 소루하거나 왜곡된 정보가 전달되어 엉뚱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번 달에 뽑는 300명의 국회의원들은 2012년 6월부터 2016년 6월까지 4년 동안 우리나라의 정치를 선도해나갈 인재들로서 우리 국민들을 등에 태우고 달릴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주류 정당 공천의 아주 어려운 예선을 통과한 말들이 대부분이지만 예선 탈락이나 분김에 출전한 말들도 있다. 각 지역의 유권자들은 자기가 탈 말을 4월 11일이면 선택할 것인데,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할까? 먼저, 말 아닌 것이 말 행세를 하는 가짜 말假馬을 즉각 추려내야 할 것이다. 뽐내는 겉치레에 깜빡 현혹 되어 그것을 선택한다면 타는 즉시로 가야할 4년 뒤의 목적지가 아니라 말아닌 것인 지가 탐내는 곳으로 총알같이 달려갈 것이 뻔하다. 또는 탄 사람을 내동댕이치거나 달리지도 못할 것이 뻔하다. 심지어 주인 행세를 하려고 드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위에 탄 지역민들은 별 수 없이 시달리거나 중간에 말을 교체할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선택 당한 목적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강인한 말을 선택해야 한다. 체력은 강하지만 정신이 흐릿하여 가다가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말이 아니라, 체력은 보통이지만 유혹에 강인한 말을 선택하여야만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체력도 강하고 정신도 강한 말이라면 금상첨화이지만 그런 말은 드물다. 그러나 하늘은 그런 말을 종종 시대마다 몇 마리 내보내는 법, 그런 말이라면, 역사의식이 분명한 인재라면 이번 출발뿐만 아니라 이어달리기 다음 출발에서도 선택을 받아 계속해서 역사의 목적지를 향하여 달릴 영광을 누릴 것은 명약관화하지 않으랴. 조선성리학자들이 리기와 사단칠정을 논할 때 말과 주인의 관계로 흔히 비유한다. 선현들은 리를 정신으로 기를 몸으로 보며, 가깝게는 자기수양에서 넓게는 사회교화까지를 통찰하였다. 리와 기의 조절이 작게는 개인수양과 크게는 사회정치의 요체임을 간파하고 말이 주인의 말을 잘 듣는 것을 중요시했다. 그것을 올해 사월 국가적 행사에 비추어보면, 리는 주인인 국민으로 기는 말인 국회의원이라고 할 수 있다. 리인 국민들의 정신도 분명하여야겠지만 운반 도구인 기, 즉 말의 품질과 능력도 중요하다. 정신이 분명한 주인이라면 말부터 바르게 선택할 것이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지만, 민주주의 수준은 딱 국민들 수준이라고, 여러 주인들의 정신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말의 성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술에 취해 정신이 몽롱한 주인을 태워 목적지인 천관의 집 앞까지 저절로 가는 김유신의 말이나, 전장에서 전사한 주인의 시체를 싣고 고향으로 돌아온 말처럼 충성스럽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말이나 그런 말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우선 주인의 정신이 먼저 분명해야만 한다. 출발선에 선 말들이 “나를 선택해 주세요”하고 히잉히잉 운다. 말 많이 한다고 세금 많이 내지 않으니, 있는 말 없는 말, 굽은 말 바른 말, 굵은 말 가는 말, 본래 말 만든 말, 무색 말 유색 말 등 등 교언영색을 마구 쏟아낸다. 출발선에서 초조한 심정으로 대기하는 말들의 생각은 히잉히잉 우는 말 속에 담겨있는 것, 그 말들이 토하는 많은 말이 주인과 이웃을 헤치는 흉기인지, 권력과 재물을 향한 자기 욕심을 채우는 무기인지, 명작을 만드는 작품 도구인지, 의식주를 위한 생산 도구인지를 제대로 분별하는 안목과 지혜는 주인의 책임이다. 자, 우리가 타고가야 할 말이 어떤 말을 하는지 똑바로 듣고, 똑바로 선택해야 할 순간이다. 말의 진실과 말의 건강을 갈피 잡아야 할 순간이다. 어떤 말을 골라서 어떤 정신으로 타고서 앞으로 4년 동안이란 역사의 시간을 통과하느냐는 순전히 주인인 우리의 몫이다. 수천 년 민족사 동안 숱한 말들이 역사의 짐을 지고 예까지 달려왔다. 준마駿馬도 있었고 범마凡馬도 있었고 비마鄙馬도 있었다. 밉든 곱든 그것들이 역사를 실어 나른 덕분에 근대 한 세기 동안의 피폐를 극복하고 이만큼이나마 사는 모양, 외산 쇠고기를 먹네 안 먹네 미국과 에프티에이FTA를 하네 안 하네 하는 문제가 최대의 이슈가 될 정도로 국력이 향상하였다. 앞으로 4년 동안 우리 한국정치사의 주역이 될 정치인들을 선택하는 일, 더 길게는 1987년 체제를 한 세대 만에 손질하여 수십 수백 년 미래의 초석을 다지는 일인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는 곧 이어달리기 배턴을 넘겨받을 말을 선택하는 순간이다. 말들이 저마다 보수와 진보의 띠를 두르고 있지만, 보수와 진보는 주인의 승마 기술, 즉 말을 모는 방법과 기술에 대한 관점의 차이일 뿐, 목적지는 평화, 통일, 번영의 땅 한반도 건설 단 하나다. 승마 기술 문제는 주인들이 더욱 심화되어야 할 문제이고 우선은 말의 건강성이 중요하다. 준마든 범마든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선택의 순간을 통과한 까닭은 잘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준마는 준마답게 이해관계에 연연하질 말고 대성할 앞날을 내다보며 호연지기 달려야 할 것이요, 범마는 범마답게 자기 분수를 알고 탐욕을 적당히 부려 중간에서 낙오하거나 주인을 엉뚱한 곳으로 실어 나르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준마는 더욱 각고면려하여 관운장의 적토마가 아니라 민족의 적토마가 되어야 하겠고, 범마는 스스로를 반성하는 수양을 통해 대아가 튼튼할 때 소아도 보장받을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부패는 한 때는 달콤하더라도 마침내 나와 가족을 망치고 사회와 나라를 망치는 법, 아무리 범마라 하더라도 일단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나와 주인이 함께 망하는 길을 정신없이 달릴 만큼 우매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물론 비마가 주제넘게 섞여있다면 금방 도태 될 것이고. 자, 4월 12일 자정부터 한국사의 한 구간을 달리는 말들이여, 적어도 김유신의 말 정도는 되어야 할 것 아니랴. 비록 목이 잘리더라도 주인을 천관의 집까지 실어 나르는 우직한 순정을 갖고 있다면 후세의 역사는 반드시 그대를 기억 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 한국사의 맥락을 보전토록 한 준마들의 공로, 일상 유지에 밑받침이 된 범마들의 평온, 민중을 피폐의 구덩이에 고꾸라뜨리게 한 비마들의 과오를 냉철하게 판별하는 정신이 필요한 2012년의 봄꽃 화사하게 피는 사월이다. 이제부터 축복 활짝하라 간고한 한국사여! 2012년 3월 22일 양백산인 박희용  
93 소망적 사고의 풍경들/권서각 file
편집자
2008 2012-03-14
 소망적 사고의 풍경들 권서각(시인, 한국작가회의 이사) 풍경 하나 아무개 씨는 희망근로로 생계를 잇고 있다.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5만원을 부의 봉투에 넣어 지역의 유력 인사의 상가에 조문을 했다. 친한 친구 상가에는 3만원 부조 했다. 형편대로 하시길 권한다. 풍경 둘 아무개 씨는 대한민국00회 회장이라고 적힌 명함을 주면서 인사를 했다. 그는 사실 일정한 직업이 없는 이른바 백수였다. 명함이 화려할수록 내실이 없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풍경 셋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킨 학생의 학부모가 학교에 왔다. 선생님과 면담하는 과정에서 학부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이는 절대 그런 아이가 아닌데 친구를 잘못 사권 것 같습니다. 그 나쁜 친구의 부모도 댁의 자녀를 나쁜 친구라고 합니다. 풍경 넷 성적이 하위권인 학생의 학부모가 교사와 상담을 했다. 우리 아이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해서 걱정입니다. 조금만 하면 서울대에도 갈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예, 누구에게나 가능성이 있습니다. 풍경 다섯 재래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할머니가 세금 폭탄 때문에 못 살겠다고 했다. 아마 종합부동산세를 말하는 것 같았다. 세금을 얼마나 내시느냐고 물으면 하여튼 노무혀이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하신다. 할머니, 종합부동산세 내지 않으셔도 되고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풍경 여섯 선거 때 대부분의 서민들은, 서민을 잘 살게 하겠다는 후보자보다 자기보다 나은 학벌,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후보자를 선호한다. 선거 때마다 그랬다. 그래서 당신도 잘 살게 되었습니까? 이런 풍경들은 대체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사람은 자신을 꾀나 똑똑하다고 여긴다. 그렇지만 때로 멍청하기 짝이 없는 것이 사람이다. 또한 모든 사람들은 이득을 추구하고 손해 보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실제 하는 행동은 손해 보는 일만 골라서 한다. 왜일까? 심리학 용어로 ‘소망적 사고’라는 것이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보는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현재의 자기는 서민이지만 미래의 자기 모습인 부자로 살아간다.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자기로 살지 않고 미래의 자기로 살아간다. 그래서 아주 오래 전에 어떤 그리스 노인이 ‘너 자신을 알라’고 한 말이 오늘에까지 남아 있는 걸까? 아무튼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소망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소망이 현실인 양 착각하고 사는 사람의 모습은 우리를 매우 우울하게 한다. 우울하게 할뿐만 아니라 자기에게도 사회에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92 견우와 직녀/고석근 imagefile
편집자
1883 2012-03-07
 견우와 직녀 줄거리 옛날 옥황상제에게는 직녀라는 어여쁜 딸이 하나 있었다. 그 딸의 이름은 직녀였는데 베를 잘 짰기 때문이었다. 서쪽에는 견우라는 남자가 있었는데 소를 잘 몰아서 견우라는 이름이 붙었다. 어느 날 견우와 직녀가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다. 옥황상제는 그 얘기를 듣고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해 주었다. 하지만 직녀와 견우는 일을 하지 않고 놀기만 했다. 화가 난 옥황상제는 직녀는 서쪽 끝으로, 견우는 동쪽 끝으로 보내고는 1년에 한번 칠석날에만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칠석날이 되자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로 갔는데, 은하수가 너무 넓어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견우와 직녀가 울었는데 그 눈물이 비가 되어 땅으로 흘러내렸다. 다행히 까마귀와 까치가 은하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어 그들은 만날 수 있게 되었다. ............................................................................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원숭이에게 자위행위를 가르쳐 줬더니 먹지도 않고 자위행위만 하다 굶어 죽었다는 글을 어디서 읽은 적이 있다. 사랑의 힘은 이렇게 무서운 것 같다. 열심히 소를 기르고 배를 짜던 견우와 직녀가 사랑에 눈을 뜨게 되면서 일을 하지 않고 오로지 놀기만 해 옥황상제가 분노해 서로를 떼놓았다는 것은 인간에게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다른 동물들은 종족 보존을 위해 성행위를 한다. 인간만이 ‘즐거움’을 위해 성행위를 한다. 자연 경제 활동을 했던 원시인들에겐 ‘사랑’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은 충분히 풍요로웠기에 구석기인들은 하루 4시간 정도만 일하며 즐겁게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에덴동산의 생활은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끝나고 말았다고 한다. 즐겁게 놀며 살다가 갑자기 많은 일을 해야 했던 농경 사회 사람들은 삶이 참으로 고단했을 것이다. ‘견우와 직녀’ 이야기는 이러한 농경 사회의 고민을 드러내 준다. 하지만 일을 하기 위해 1년에 하루만 사랑을 하는 삶을 우리가 받아 들여야 하는가? 사랑과 일은 양립할 수 없는가? 농경 사회 초기엔 사랑과 일의 갈등이 심각했겠지만 인류는 놀이 문화를 만들어 내며 사랑과 일을 양립시켜 갔을 것이다. 인간의 사랑은 언뜻 보면 ‘즐거움’ 뿐인 것 같지만 ‘사랑’은 ‘반쪽’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 되는 거룩한 행위이다. 인간은 사랑을 통해 ‘나를 넘어서는 사랑’을 배우며 자신의 영혼을 깨닫는다. 한 인간을 깊이 사랑해 본 사람만이 남과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을 제대로 못 해 본 사람은 돈, 권력, 명예를 좇는다. 스스로 충만한 힘을 가진 사람은 그런 외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지만 내면이 텅 빈 사람은 그런 외적인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려면 모든 사람이 ‘사랑’을 해야 한다. 그래야 원초적인 ‘사랑의 에너지’가 영적인 에너지로 승화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에너지는 한없이 돈을 추구하고 남을 짓누르고 자신을 드높이려는 에너지로 타락하게 된다. 우리가 사는 천민자본주의는 이런 인간을 ‘정상적인 인간’ ‘성공한 인간’으로 호도하기에 우리는 그런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보라! 그렇게 사는 사람이 행복한가? 그런 사람의 내면은 얼마나 황량한가? 그의 얼굴은 사막 같다. 인간은 일을 하면서도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성 에너지를 승화할 수 있는 ‘문화’에 있다. 지금도 여러 곳에서 목도하는 여러 흥겨운 축제들, 멋있게 살았던 수많은 예술가들. 우리는 ‘포르노 같은 성’을 ‘사랑’으로 오해한다. 인간은 ‘육욕적 성행위’만 하며 살 수는 없다. ‘성’은 ‘사랑’이 되고 문화적으로 승화해야 한다. 성이 사랑으로 승화하지 않으면 우리는 ‘포르노 사회’에 살거나 ‘물욕의 늪에 빠져 일만하는 사회’에 살 수 밖에 없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담겨 있다.  
91 페북을 경계하라 / 강태규 file
무궁화
2030 2012-02-28
SNS를 통한 소통으로 횡적 연대 속에 있는 현실에서, 이 망 속에서 소통과 연대를 이루는 개별적 성향과 소통정보는, 사적 정보를 취하지 않는다는 허울 좋은 강령 속에 모든 참여자가 안전하게 관리된다는 당부에 속고있는 것은 분명하다. 개인 신상은 물론이며, 선호하는 카테고리가 정교하게 선별되어, 상업적 발송메일은 물론이고, 기업체에 상당한 댓가를 받고 집단 정보를 제공한다. 원하던, 원치 않던, 알만한 친구 찾기나 사진을 포함, 이름 검색으로 쉽게 노출되고 있다. 소통의 공유화가 횡적연대에 지대한 필수조건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상당한 소통참여자들이 또한 원하던, 원하지 않던 익명의 다수에게 무차별 전개되고 있는 현실이며, 사적인 정보는 더 이상 사적이 아님을 쉽사리 간과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우리는 익히 알고있다. 사소한 경품권(쿠폰)이나 즉석 먹거리를 '무료'로 준다하고 실컷 신상정보를 입력하고나면, 종국에는 보험회사나, 금융회사에 자신의 정보를 빼앗기고는 당첨되기를 기다린 순진한 경험이 있다. 이미 주소, 성명, 주민번호, 전화번호는 휴대전화나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는 한 이미 빼앗겼다고 보면 정확하다. 자신의 정보 뿐만 아니라 페북에 연결된 모든 지인들의 전화번호까지 동반 유출함으로 지인들에게 까지 무차별(좀 더 정확한 표현으로 이미 파악된 고객분류에 따라 선별된) 광고메일을 받거나 전화를 받아야한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쉽게 '동의'를 해 온 결과이며, 동의과정을 거치지 않고서야 페북에 가입될리도 만무하다.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댓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우리는 작던 크던 정보를 제공한 댓가로 웹 운영비가 없는 온라인 소통을 위해 회원가입을 해 오고 있다. 새로운 독립된 작은 규모의 대안 소통망 구축이 가까운 미래에 제시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모든 온라인 소통에는 고유의 꼬리표가 달려 전세계 온라인 망이나 집단 서버에 선별적 피드백이 되고 있음도 안다. 문제는 이 거대한 피라미드 상혼의 연대망이 외려 개인정보망의 늪 속에 벗어날 수 있는 욕구가 더 나아가 욕구의 연대가 차별적으로 필요한 시기가 온다고 본다. 대자본은 정보의 고속도로를 선점하여 더 쉽고 간편한 진입과 주행을 부단하게 조장한다. 역설적으로 다소 불편을 감수해서라도 느린 국도의 소통도 더 나을 수 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정당하고 합리적이며 주체적이며 사려깊은 소통을 하고 있는가? 옛 선비들이나 아낙들은 소중한 소통을 위해 서간문을 여러 달 교환하며 그리고서 여러 날을 소요하여 친구를 만나는 그런 과정에 익숙하였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상대를 읽고 생각하였을까. 지금 사람에게는 지극한 연인사이에서도 흉내내기 어려운 원조 아날로그 소통으로 인생을 누렸다. 우리 아들, 딸 세대의 소통을 들여다 본적이 있는가? 들여다 보시라. 온라인으로, 준회원으로. 만난지 백일이나 이백일이면 서로의 몸소통을 하고 있고, 임신과 낙태와, 피임약 걱정을 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학생들만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조급하고 다급하다. 고속도로에서 내려, 천천히 걸으며 소통해야 할 필요충분한 이유를 되살려 본다. 우리는 이른 아침 부터 밤 늦게 까지 일하며, 소통한다고 열심인 데, 왜 행복하지 않은가, 라는 이유를 알게 될 지도 모른다. 우리는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지도자가 게을러야 사람이 덜 불행할 거 같다는. (말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 김사인 풍으로) 참고자료: Secret or Fact of Facebook - IT Channel, B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