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영화 ‘밀양’의 여주인공 신애는 어린 아들을 유괴로 잃는다. 슬픔을 못 이겨 그녀가 찾아간 곳은 교회였다. 차츰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그녀는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녀는 살인범이 수감된 교도소로 찾아간다. 면회소에서 그녀는 살인범에게 말한다. “당신을 용서해 주겠다.” 아,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하나님이 제 죄를 이미 용서해 주셨다. 하나님이 제 기도를 들어주셔서 지금 너무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 신애는 면회소를 뛰쳐나와 울부짖는다. “어떻게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먼저 용서할 수 있느냐?”  

이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은 선한 여주인공과 악한 범인을 대비해 보며 큰 분노와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분법의 망상’ 속에 빠져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정말 여주인공은 선한가? 범인은 악한가? 이렇게 선명하게 이 두 사람을 나눌 수 있는가?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가르친 예수는 치열한 수행 끝에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하지만 신애는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기에 그럴 능력이 없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동안엔 잠시 그럴 것 같은 생각이 들 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아 팽창’이다. 그 범인도 마찬가지다. 교도소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두 사람 다 ‘진정한 자신 이상으로 자신을 부풀려 보게 된 것’이다.  

인류의 근원적 비극은 ‘이분법적 사고’라 한다. 삼라만상을 선악으로 나눠 보는 것. 신애가 진정 자유로워지려면 이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가능할 것이다. 잠시 부풀려진 자신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이 커질 때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진정한 자신의 수준을 높이는 일일 것이다. 용서란 ‘진정한 자신’의 수준만큼 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