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살 조각 한 점  


어릴 적 소 꼴을 베다 손가락을 많이 베었다. 아차하는 순간, 베인 자국이 하얗게 드러나고 잠시 후 새빨간 피가 송송송 배어 나왔다. 다른 손의 손가락으로 상처부위를 감싸 쥐고는 지혈을 시킨 뒤 주변의 고운 흙을 상처 부위에 뿌렸다. 그리고는 옷을 한 조각 떼어 감싸 맸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베어져 간신히 붙어 있는 살 조각을 다시 제자리에 잘 붙여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상처가 깨끗하게 아물었다. 내 손을 보면 그때의 상처의 흔적들이 보인다. 하지만 손은 아무런 이상이 없다.

며칠 전에 일어난 ‘해병대 총기 사고’를 생각해 본다. 기수열외(왕따)를 당한 한 병사가 생활관에서 동료들을 향해 마구 총을 난사해 3명이 사망하고 3명이 다쳤다고 한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해병대에서 이런 가혹한 이지메가 있었다니! 선임, 후임들에게 온갖 폭력과 모욕을 견디다 못해 그는 그들에게 총을 겨눈 것이다.    
    
예수는 왜 99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더 소중히 했을까. 만일 예수가 99마리의 양에 만족하며 “자, 우리 집에 가자! 한 마리 정도는 없어도 돼. 한 마리보다 99배나 많은 너희들이 있잖아.”하면서 집으로 가자고 하면 99마리 양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예수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는 것은 ‘당연한 세상의 이치’다. 그래야 남은 양들이 안심하고 목자를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도 언제 길을 잃어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떨어져 너덜거리는 살 조각을 곱게 다시 제자리에 붙여야 상처가 제대로 아문다는 것을 어린 우리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그런데 왜 ‘귀신 잡는 해병대’는 그런 이치를 모를까. ‘대한민국의 자랑 해병’은 공허한 말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