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50살인 셋째 아우는 같은 연배의 친구들과 모임을 만들었단다. 모임 이름을 뭐로 할까 고민하다가 ‘아뿔싸’로 정했단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생각난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앞만 보며 줄달음치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보니 ‘아뿔싸’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년을 눈앞에 둔 50대.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그 이름을 지었을 사내들의 쓸쓸함이 선히 보인다.

 이게 인생일까? 한바탕 꿈인 인생. 이게 우리 삶의 실상일까?

 동화 ‘어린 왕자’에 보면 ‘길들이기’에 대해 나온다. 사람과 사람은 서로 길들여간다. 부부들을 보면 ‘어쩌면 저렇게 닮아갈까?’ 신기할 때가 많다. 그런데 부부들은 대체로 나쁜 쪽으로 많이 닮아가는 것 같아 닮은 부부들을 보면 마음이 슬퍼진다. 착하지만 약한 남자와 현실에 약삭빠르고 강한 여자가 만나면 대체로 남자는 약삭빠른 쪽으로 닮아간다. 그게 살아가기 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 뒤에는 든든한 이 세상이 받치고 있어 부부는 그렇게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소위 ‘신자유주의’다. 모든 게 돈이고 돈을 향한 무한 경쟁이 이 시대의 유일한 율법이다. 이 율법을 잘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이 시대의 적자(適者)다. 심성이 착하더라도 약한 사람은 이 율법을 좇는 사람에게 길들여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들 신자유주의에 맞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 끝까지 저항하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소수가 된다. 먹고 살만한 사람들은 신자유주의에 잘 적응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세속적인 것들은 어느 정도 가졌지만 혼을  잃어버렸기에 결국엔 ‘아뿔싸’ 비명을 지르게 된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헉헉대는 사람들은 이런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생명의 문은 좁다. 신자유주의가 열어주는 넓은 문을 거부하고 생명의 좁은 문을 간다는 건 너무나 어렵다. 하지만 재물과 하느님은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재물을 섬기면 재물에 길들여진다. 하느님을 섬겨야 하느님에게 길들여져 혼을 지킬 수가 있다. 하느님은 우리 안의 존재의 힘을 끌어올려준다. 이 힘이 커져야 행복해진다. 신자유주의는 이 힘을 고갈시키고 밖에서 끌어주는 대로 살게 한다. 끌려가는 삶. 이 삶의 끝은 ‘아뿔싸’ 낭떠러지가 우리를 기다린다.       

 한 개인이 좁은 길로 갈 수 있을까? 그것은 너무나 큰 결단이다. ‘다 버리고 가는’ 길이라 아무나 갈 수가 없다. 하지만 서로 어깨 걸고 아픈 다리 서로 일으켜 주며 가면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다. 힘겹지만 이 좁은 길을 가야 ‘아뿔싸’의 낭떠러지를 만나지 않게 된다.

 지난 일요일 비보이 공연을 보러갔다. 강한 음악과 야성적인 몸의 움직임이 좋았다. 우리는 몸 하나로 즐거울 수가 있다. 누구나 갖고 있는 몸. 나는 비보이의 유행을 이 시대의 새로운 화두로 읽는다. 많이 갖게 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거부! 맨몸으로 증언하는 행복의 비결!

 이 비보이를 자본은 ‘좋은 상품’으로 계속 변형시켜 낼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좋은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신자유주의에 길들여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끈질긴 소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또 새로운 ‘맨몸의 행복’을 만들어 낼 것이다.

 ‘아뿔싸’ 비명지르는 우리의 몸은 아직 희망이 있다. 우리 몸 깊은 곳의 혼이 비명을 지르기 때문이다. 아직 혼이 죽지 않았다는 증거. 혼은 그 자체로 무한히 행복하다. 재물의 독버섯들 속에서 말갛게 돋아나는 혼들이 세상을 가득 덮기를 두 손 모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