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한 ‘유망한’ 시나리오작가의 죽음이 나에겐 지독히도 낯설었다. 국회의원과 정부까지 나선 사회적 관심은 더 낯설었다. 학비 때문에 피자 배달을 하다 차에 받혀 죽은 아이들의 죽음 속에서 그의 죽음은 아주 특별했다. 그는 이웃집 문에 쪽지를 붙일 게 아니라 문을 두드려야 하고, 친구들에게 전화라도 걸어야 했고 피자 배달이라도 해야 했다. 게다가 그의 죽음이 다른 이들의 사회적 죽음을 가려버리는 건 참기 힘들었다.

위 글은 2011년 3월 2일자 한겨레신문 칼럼 <아주 낯선, 죽음의 풍경들- 곽병찬 편집인 씀>의 일부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참으로 아팠다. <아주 낯선, 죽음의 풍경들>은 우리 사회의 사회적 죽음들,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들의 죽음에 대해 분노하고 아파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한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건가? 그의 죽음이 사회적 이슈가 되어 기층 민중들의 사회적 죽음을 묻어버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이 시대 지배세력들의 지배전략이지 그의 죽음이 사회적 죽음이 아닌 것은 아니다.
‘피자 배달이라도 하라’는 말은 내 가슴을 너무나 아프게 한다.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 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먹고 살 권리를 타고 난다. ‘좋은 학교’ 나오고 시나리오도 잘 쓰는데도 먹고 살 수 없다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나리오를 잘 쓰는 사람은 시나리오만 써도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 그가 피자 배달해서 먹고 살면 우리는 좋은 드라마를 볼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많은 시간을 TV를 보며 사는데 말이다)
‘진보 신문’에서 이런 글을 읽는다는 건 참으로 슬프다. 진보는 우리 모두 함께 힘을 모아 그 힘이 보수, 수구를 능가할 때 가능하다. 단지 기층 민중들의 죽음에 대해 분노하고 아파하는 것으로 진보의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 같아 이 칼럼은 내게 슬프기 그지없다. 글에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이 녹아나고 그 사랑의 힘으로 이룩하는 진보가 진정한 진보일 텐데 말이다.      

어디선가 읽은 얘기다. 한 노시인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니까 후배 시인이 충언을 했단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시지 마십시오. 건강을 생각하셔야죠.” 그러자 그 노시인은 이렇게 대답했단다.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술 마시는 것도 중요하네.” 몇 년 후에 그 노시인은 돌아가셨다. 아마 그 동안 계속 술을 마셨을 것 같다.

위 칼럼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죄! 다만 희생자를 타자화한 것은 잘못이다. 이웃은 우리이지, 타인이 아니다.’라고 끝을 맺는다.  
‘피자 배달이라도 하라’는 말은 희생자를 타자화한 사람의 목소리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