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1호...
   2019년 09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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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자연과 어머니/고석근 file
편집자
1823 2011-03-28
자연과 어머니 天地不仁 천지는 어질지 않다 - 노자 우리는 자연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다. 흡사 철부지 아이가 어머니를 대하듯이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릴 적에는 어머니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시는 사랑 가득한 어머니로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착한 어머니와 악한 어머니 사이의 갈등을 해소해주기 위해 옛이야기에서는 계모가 등장한다. 계모는 어머니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렇게 어머니를 둘로 갈라 아이는 자신의 어머니 상을 훼손시키지 않고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 품 안의 자식은 언젠가는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그래서 원시인들은 성인식을 혹독하게 치른다고 한다. 아이는 죽음을 체험하며 그때까지의 ‘아이’는 죽고 ‘어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고 한다. 이 ‘어른’의 눈에는 비로소 어머니가 한 ‘여인’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자연은 삼라만상의 어머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연-어머니’를 아이의 눈으로 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자연을 사랑의 화신으로 보는 환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어머니에게 마구 발길질하며 떼를 써도 통하리라는 생각을 은연중 하고 있는 것 같다. 산과 강을 마구 파헤치고, 도시를 아무 데나 만들고, 방사능 같은 물질을 함부로 만들어도 ‘어머니-자연’은 오로지 사랑을 주실 거라는 환상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일본 대지진’을 겪으며 사람들은 절대 자연은 어질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이 언제 어질고 어질지 않았나? 그것은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아이’의 눈을 볼 때 어머니는 어질기도 하고 어질지 않기도 한 것이다. ‘어른’의 눈으로 보면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사시는 것 뿐이다.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 노자 자연은 ‘스스로 그러할’ 뿐이다. 아이처럼 응석받이로 살면 언제고 자연은 인간에게 가혹할 것이다. 스스로의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어른의 마음으로 자연을 대할 때 자연은 ‘스스로 그러할’ 것이다. 우리도 함께 스스로 그러하게 살아갈 때 까지 우리 인간은 ‘어머니-자연’에게 수시로 버림받는 아이가 될 것이다.  
56 일본 대지진’을 보며 /고석근 file
편집자
1875 2011-03-15
‘일본 대지진’을 보며 고향에 다녀오느라 뉴스를 못 봤는데, 일본에 대지진이 일어났다고 한다. 시장에서도, 기차역에서도, 기차 안에서도, 전동차 안에서도, 평시와 똑 같았는데 지구 한 켠에 대재앙이 있었다. 사망자만 수천 명, 수만 명이 될 거라고 한다. 온 몸에 공포감이 음습해 온다. 누군가는 그런다. “이제 아등바등 살고 싶지 않다”고. TV에서도 “자연의 대재앙 앞에 숙수무책인 인간, 어쩌고저쩌고...... .” 한다. 작은 인간이 큰 자연 앞에 경외감을 느끼는 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도 자연 아닌가? 작은 자연이 큰 자연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이상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긴 어린 시절을 부모에게 의탁해서 산다. 그래서 커서도 자신보다 더 강한 것 앞에 의존하려는 ‘유아 콤플렉스’가 있다. 어른이 되면 스스로의 삶을 이끌어가는 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힘든 상황에 부닥치면 떼쓰거나 부모 앞에 용서를 구하듯 위기 상황 앞에 무조건 무릎 꿇고 빌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조금 마음에 위안은 되겠지만 결국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마음만 점점 약해진다. 이번 대재앙에서도 우리는 지혜를 얻어야지 아이처럼 응석을 부려서는 안 된다. 대지진도 자연이고 우리도 자연이다. 우리는 무한히 자연에 대해 경외감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자신이 자연인 건 잊어버리고 재앙을 일으키는 자연만 자연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번 대재앙을 맞이하면서 자연에 대해 우리가 잃어버렸던 경외감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자연을 함부로 대하는가? 거기엔 인간의 몸을 함부로 대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런데 언론을 위시하여 많은 사람들은 ‘자연의 힘 앞에 속수무책인 인간’만 언급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이번 대재앙에서 아무런 지혜도 얻지 못하고 큰 상처만 안고 살게 될 것이다. 자연에 맞지 않는 도시 구조, 주택 구조, 삶의 형태, 이 모든 것이 이번 기회에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인류의 많은 지혜들을 서로 죽고 죽이는데 써오지 않았는가?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사람이 사람을 제외한 모든 자연을 약탈하는 구조로는 이런 대재앙은 이제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인류가 언제 대재앙 앞에서 지혜를 얻었던가? 마지막까지 가지 않았던가? 우리가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은, ‘자연 앞에 숙수무책인 인간’을 벗어나는 것이다. 조금만 인류사 자료를 찾아보면 자연과 더불어 잘 살아온 인간의 경험은 무수히 많다. 인간은 ‘자연 앞에 숙수무책인 인간’이 절대 아니다. 이런 말을 유포하는 사람들은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지금의 ‘자연스럽지 못한 세상’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이거나 그들에게 세뇌된 사람들이다. 인간도 자연이다. 큰 자연의 재앙 앞에 ‘자연스럽게’ 삶의 지혜를 찾아내야 한다. 이번 기회에 아주 조금이라도 ‘자연스러운’ 지혜를 찾아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55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고석근 file
편집자
1964 2011-03-03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한 ‘유망한’ 시나리오작가의 죽음이 나에겐 지독히도 낯설었다. 국회의원과 정부까지 나선 사회적 관심은 더 낯설었다. 학비 때문에 피자 배달을 하다 차에 받혀 죽은 아이들의 죽음 속에서 그의 죽음은 아주 특별했다. 그는 이웃집 문에 쪽지를 붙일 게 아니라 문을 두드려야 하고, 친구들에게 전화라도 걸어야 했고 피자 배달이라도 해야 했다. 게다가 그의 죽음이 다른 이들의 사회적 죽음을 가려버리는 건 참기 힘들었다. 위 글은 2011년 3월 2일자 한겨레신문 칼럼 <아주 낯선, 죽음의 풍경들- 곽병찬 편집인 씀>의 일부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참으로 아팠다. <아주 낯선, 죽음의 풍경들>은 우리 사회의 사회적 죽음들,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들의 죽음에 대해 분노하고 아파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한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건가? 그의 죽음이 사회적 이슈가 되어 기층 민중들의 사회적 죽음을 묻어버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이 시대 지배세력들의 지배전략이지 그의 죽음이 사회적 죽음이 아닌 것은 아니다. ‘피자 배달이라도 하라’는 말은 내 가슴을 너무나 아프게 한다.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 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먹고 살 권리를 타고 난다. ‘좋은 학교’ 나오고 시나리오도 잘 쓰는데도 먹고 살 수 없다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나리오를 잘 쓰는 사람은 시나리오만 써도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 그가 피자 배달해서 먹고 살면 우리는 좋은 드라마를 볼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많은 시간을 TV를 보며 사는데 말이다) ‘진보 신문’에서 이런 글을 읽는다는 건 참으로 슬프다. 진보는 우리 모두 함께 힘을 모아 그 힘이 보수, 수구를 능가할 때 가능하다. 단지 기층 민중들의 죽음에 대해 분노하고 아파하는 것으로 진보의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 같아 이 칼럼은 내게 슬프기 그지없다. 글에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이 녹아나고 그 사랑의 힘으로 이룩하는 진보가 진정한 진보일 텐데 말이다. 어디선가 읽은 얘기다. 한 노시인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니까 후배 시인이 충언을 했단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시지 마십시오. 건강을 생각하셔야죠.” 그러자 그 노시인은 이렇게 대답했단다.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술 마시는 것도 중요하네.” 몇 년 후에 그 노시인은 돌아가셨다. 아마 그 동안 계속 술을 마셨을 것 같다. 위 칼럼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죄! 다만 희생자를 타자화한 것은 잘못이다. 이웃은 우리이지, 타인이 아니다.’라고 끝을 맺는다. ‘피자 배달이라도 하라’는 말은 희생자를 타자화한 사람의 목소리 같다.  
54 ‘대물’을 기다리며 /고석근 file
편집자
1824 2011-02-22
‘대물’을 기다리며 시골에 살 때였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학교운영위원을 뽑는다는 가정통신문을 가져왔다. ‘한번 출마해볼까?’ 나는 그 당시 아이들을 시골에서 기르고 싶어 큰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에 가까운 시골로 이사를 갔다. 아이들을 분교에 보내어 신나게 뛰어놀게 했다. 학교가 파하면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거나 산과 들로 뛰어 다니며 놀았다. 집 앞에는 개울물이 졸졸졸 흐르는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그때만 해도 시골에 빈집이 없었다. 옛 마을의 정취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빈 땅들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이런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분교가 폐쇄되었다. 마을 분들이 폐교에 앞장섰다. 우리 가족은 본교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갔다. 어설프게 농사를 짓던 나도 지역 신문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지역 신문사에서 일을 하며 자연스레 지역 운동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정치가 민주화될 때라 사회 분위기도 많이 부드러웠다. 나는 교육은 교사와 더불어 학생, 학부모가 함께 교육의 주체가 되어야한다는 주제의 글을 신문에 많이 썼다. 운영위원 선거하는 날 아이들 학교에 갔다. 선거 유세는 1분으로 제한한다고 했다. ‘세상에, 1분이라니!’ ‘학교에서는 교육의 민주화가 두려울 거야.’ 나는 출마 의사를 밝혔다. 세 명을 뽑는데 네 사람이 출마를 했다. 한 명은 떨어져야 했다. 나는 1분이라는 짧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방인이고 다른 분들은 다들 본토박이라 내가 가장 불리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떨어지겠구나!’ 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하리라는 결심을 했다. 나는 1분 동안 이런 말을 했다. ‘저는 학교 교사로 9년 동안 근무했습니다. 그래서 학교교육의 문제점을 잘 압니다. 학부모 입장에서 이런 문제점을 고쳐 우리 아이들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개표가 진행되는 동안 내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쳤다. ‘분명히 떨어질 텐데 괜히 출마했나 보다. 이 무슨 망신인가?’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내가 1등으로 당선되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출마한 사람들은 다들 그 지역의 유지들이었다. 오랫동안 그 지역에서 공무원을 하며 신망을 쌓은 분, 어머니 회장을 하며 탄탄한 지지 기반을 가진 분, 이 분들을 제치고 내가 어떻게 1등으로 당선되었단 말인가? 지금 생각해도 기적이다. 학부모님들이 내게 압도적으로 보내준 성원의 의미는 무엇일까? 불과 몇 년 동안 그 지역에 산 내게 그 분들은 무슨 기대를 걸었을까? 나는 그 분들의 기대를 생각해보면 지금도 눈시울이 붉혀진다. 나는 그 기대에 별로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운영위원장이 선거에서 1등으로 당선된 내가 아니라 전직 공무원이 되었다거나, 어머니 회장의 입김이 너무 강하다거나, 학교 당국의 힘을 넘기엔 그 벽이 너무 두꺼웠다는 등 여러 핑계를 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내가 운영위원의 역할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학교운영위원보다 지역 신문사 일에 큰 비중을 두었기에 운영위원의 소임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내가 제안해서 학생들을 위한 다채로운 프로그램들(방과 후 수업과 체험 학습의 다양화)을 운영했다거나 학교 신문을 만드는 등 조그만 개혁들은 해냈지만 너무나 미미한 것들이었다. 지금도 학부모님들이 내게 보내준 압도적인 지지를 생각해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내가 만일 그 지역에 평생 터 잡고 살 생각이었다면 아주 많은 일을 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이 크면 다시 도시로 와야 했기에 지역 활동에 온 힘을 쏟지 않았다. 작년 말에 인기 있었던 ‘대물’이라는 드라마를 생각해본다. ‘소신’ 하나로 대통령까지 되는 드라마. 이것이 과연 드라마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말 드라마의 주인공 같은 순수한 마음과 열정을 갖고 밀고 나가면 기적이 일어나리라고 믿는다. 좋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오직 하나의 생각만 갖고 밀고 나가면 실제로 대통령이 될 수 있고, 좋은 대통령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굳게 믿는다. 대선이 곧 다가온다. 나는 ‘대물’을 기다린다. 수구, 보수 세력의 벽이 너무 두텁다느니 현실적으로 그런 인물을 내세우기엔 주객관적으로 시기상조라느니 하는 생각들은 ‘현실’을 모르는 얘기다. 현실은 언제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다. 낮은 곳, 가장 낮은 곳으로 눈을 돌리면 기적은 ‘너무나 당연한 현실’이라는 것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오로지 아래만 보자. 보통 사람들, 낮게 사는 사람들, 평범하게 하루하루 사는 사람들을 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그들은 ‘대물’을 뽑을 준비가 다 되어 있다.  
53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을 보며 /고석근 file
편집자
2073 2011-02-15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을 보며 한 시나리오 작가가 굶어 죽기 전에 이웃집 문 앞에 다음과 같은 쪽지를 붙여놓았었단다. 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 32세, 참 좋은 나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 젊은 나이에 왜 먹고 살 생각부터 하지 않아 굶어 죽었느냐?’고. 나는 먹고 살 생각부터 하며 참으로 오래 살았다. 추잡하고 비루하게 오래 살았다. 어느 게 더 좋은 삶인가? 원시인들은 산과들, 강에 널려 있는 음식들을 먹으며 춤추고 즐겁게 살았다. 먹을 것이 넘치도록 널려 있는 이 현대문명사회에서 왜 우리는 먹고 살 생각부터 하며 살아야 하나? ................................................................................................................................................. 이집트 민중들의 기뻐하는 모습에 내 가슴도 마구 뛴다. 인간으로 태어난 최고의 기쁨을 느끼는 순간이리라. 이 기쁨을 모르는 인간은 삶이 재미없을 것이다. 도박으로 하루에 40억을 날렸다는 사람. 그 사람은 이런 진정한 삶의 기쁨을 몰라서 그렇게 되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삶의 기쁨을 모른다. 그냥 먹고 사는 데만 온 정신을 쏟다보니 삶이 권태롭고 가슴이 허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도박을 하고 돈 버는 재미를 느끼려 애쓰고 일중독에 빠져든다. 그러나 그의 혼은 허하다. 인간은 혼의 기쁨을 느껴야 삶이 즐겁게 되어있다. 나는 지루하고 재미없게 살다 삶이 도대체 이렇게 재미없는 게 아닐 텐데 하고 이것저것 해보고 여러 공부를 해보았다. 그러다 삶의 진수를 느끼게 되었다. 91년 운동단체에서 일하며 데모에 참가했다. 최루탄 가스를 피해 지하도에서 만난 동지들, 그 눈빛들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윽한 신뢰, 사람에 대한 믿음...... 경찰들을 몰아내고 해방구가 된 을지로 일대에서 서로 어깨 걸고 노래 부를 때의 그 벅찬 환희! 인간은 이렇게 위대하다! 그 위대함은 반드시 정치적으로 해방될 때만이 나타난다! 최고은 작가의 죽음에 대한 작가들의 논쟁. 문제는 작가라는 사람이 인간의 깊이를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글 쓰는 잔재주 갖고 작가가 된 사람이 보는 최고은의 죽음은 우리 사회의 모든 아픔이 집약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나도 91년의 경험이 없었다면 인간의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그래서 이집트 민중들이 눈물겹게 위대하다. 그들의 삶은 이제 전과는 다르리라. 사람이 보이리라. 사람의 아픔이 보이리라. 우리 사회가 ‘이집트의 경험’을 미리 했음에도 그 경험을 갖지 못한 작가! 그런 사람이 어떻게 작가인가? 최소한 작가는 시대정신만큼은 가야 한다. 먹을 게 널려있음에도 굶어 죽어야 하는 우리 사회! 최고은 작가의 죽음은 이 처참함을 보여준다.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그에게 먹을 게 주어진다. 먹고 산다는 건 인간(생명체)이기에 갖는 권리이다. 우리는 이 천부적인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 앞으로의 복지 논쟁은 이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사람은 무한히 위대하다. 하지만 그 위대함은 정치적 해방만큼이다.  
52 염치/고석근 image
편집자
2216 2011-02-08
서울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였다. 첫해 1년은 이모님 집에 얹혀 지냈다. 부모님은 내가 지켜야 할 예절 몇 가지에 대해 신신당부를 하셨다. 그중에는 식사를 할 때는 다 먹지 말고 반드시 두어 숟가락 쯤 남기라는 것도 있었다. 우리 집에 오시는 친척 분들도 그러시는 것 같아 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창 때 밥을 남긴다는 것은 고역이었다. 하지만 꼭꼭 실천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생인 사촌누나가 내게 말했다. “왜 자꾸 밥을 남기니?” 나는 ‘배불러서 어쩌고’ 변명을 했다. 그러다 사촌누나에게서 ‘밥을 남기면 설거지하기 힘들어’라는 말을 듣고서야 내 ‘시골 예의’는 끝났다. 임산부가 기다리는 택시를 잽싸게 가로채는 대학생쯤의 남자를 보았다. 붕어빵 포장마차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내 앞을 한 신사가 종종종 앞질러 가 붕어빵 1000원어치를 샀다. 남아 있는 게 세 마리 뿐이라 나는 발을 동동동 굴리며 기다렸다 샀다. 그 신사는 진열대에 놓여 있던 붕어빵이 10마리 정도라는 걸 보고서 그렇게 빨리 걸었을까. 단지 추워서 그렇게 걸었을까. 덜덜덜 떨며 기다리는 시내버스 정류장. 버스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와 달려간다. 끼어들고 서로를 밀치며 탄다. 함께 덜덜덜 떨 때는 서로 따스했는데. 밥을 남기던 ‘시골 예의’가 그립다. ‘염치’가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51 아, 복지 국가여! /고석근 file
편집자
2139 2011-02-01
아, 복지 국가여! 작년에 이빨이 두 개나 부서졌다. 아픈 이를 참고 견디던 어느 날, 이를 닦다가 뭔가 이상해 입 안을 보았더니 아픈 이가 부서져 나갔다. 헉! 이럴 수가! 입안을 헹구고 치과에 갈 채비를 했다. 속으로 치료비 걱정을 하는데, 아내가 한 마디 한다. “자기야, 아무리 비싸도 잘 치료해.”하면서 카드를 준다. “응.”하고 집을 나오는데, 세상이 아득하다. 이때 돈이 없으면 어떻게 되나? 이 닦다가 두 번이나 부서진 이를 치료하며 노후가 걱정이다. 늙으면 아픈 곳이 많아 생활비의 반이 병원비라는데...... . 치과에서 힘겨운 치료를 하며 나는 마음속으로 항상 치료비를 계산했다. ‘얼마나 나올까?’ 나는 그동안 ‘돈 걱정 없이’ 살았다. 아이들에게 그 흔한 해외 연수 하나 보내지 않고 스키니 해수욕장이니 하는 것들하고도 담을 쌓고 사니 생활비가 적게 들어 돈에 쪼들리지 않고 살았다. 내 얄팍한 주머니로도 나는 항상 즐겁게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커가면서 나는 자주 내 얄팍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게 되었다. 아이들이 군대에 갔다가 휴가를 나오면 삼겹살도 사 줘야 하고, 세배 돈의 단위도 커졌기 때문이다. 가장 무서운 건 역시 병원비였다. 한의원에서 약을 짓고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으며 내 머릿속은 항상 돈을 계산하고 있었다. 내 자신이 자꾸만 초라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돈 걱정 없이 살던 어느 날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강의가 끝나고 도서관의 담당 직원이 나를 보자며 구석으로 끌고 갔다. 나는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순순히 따라갔다. 그녀는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수그리고는 내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네?’ 나는 난데없는 그녀의 행동에 얼굴에 웃음을 띠고는 ‘왜 그러세요?’하고 농조로 말했다. 그녀가 더듬더듬하며 말하는 요지는 이랬다. 몇 달이나 내 강사료를 다른 사람에게 부쳤다는 거였다. 전에 강의했던 서예 강사에게 부쳤는데, 그 강사가 왜 자꾸 돈을 부치느냐고 해서 알게 되었단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뭘 그런 것 갖고 그러세요?’ 나는 통장을 확인하지 않고 있었기에 강사료가 입금되지 않은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때 나는 돈이 별로 필요 없던 시절이었다. 그 뒤 그분은 내게 참 잘 해주었다. 나를 꽤 인품이 있는 사람으로 착각한 것 같다. 지금 같으면 내가 먼저 강사료에 대해 물었을 것이다. ‘인품’이란 돈 걱정 없을 때 나오는 게 아닌가? 지금 내 머릿속은 돈으로 가득 차 있어 천박하기 그지없다. 돈이 한 40억 정도 있으면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가능할까? 계산상으론 가능한데 현실적으론 불가능할 것 같다. 그 돈으로 혼자서야 넉넉하게 살 수 있겠지만 자식들은 어떡하나? 사업하다 망한 자식은? 큰 병 걸려 병원에 누워있는 자식이라도 있으면? 또 취직 못한 자식은? 보육비에 허덕이는 며느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영어 유치원에 가려는 손자손녀들은? 사회복지가 안 되면 웬만한 돈이 있어서는 안심하고 살 수 없을 것 같다. 한 100억 넘으면 가능하려나? 요즘 복지가 화두다. 제발 복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최소한 ‘인간으로’ 살 수 있게, 나아가 좀 ‘안심하고’ 살 수 있게. 복지가 되어 세금 폭탄 좀 맞아봤으면 좋겠다. 내 전 재산이 초토화되어 초가삼간만 남았으면 좋겠다. 그 초가삼간에서 안심하고 살 수 있다면 내게 대한민국은 지상낙원이겠다. 복지 국가의 문제점이라고? 지금 막 죽어가는 환자에게 병 나은 뒤를 걱정하라고?  
50 월인천강(月印千江) - ‘보름달의 전설’을 읽고 /고석근 file
편집자
2098 2011-01-25
월인천강(月印千江) - ‘보름달의 전설’을 읽고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가 쓴 그림책 ‘보름달의 전설’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배반당한 뒤 깊은 산의 동굴 속에 은둔하게 된 성자와 사랑하는 여인을 욕보인 남자를 죽이고 허랑방탕하게 살아온 도둑- 이들이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고 함께 생활하던 어느 보름달 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성자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중요한 가치를 두는 사랑과 학문, 신앙을 차례대로 겪으며 모든 것에서 벗어나 지고한 정신세계를 추구한다. 성자는 언젠가부터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대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자 마침내 목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생 방탕하게 살았고 회개할 줄도 모르는 도둑의 눈에는 스승이 본 대천사가 실은 나쁜 정령의 장난임이 선명히 보였다. 성자가 본 것은 그의 집착이 빚어낸 허상이었던 것이다. 성자는 도둑에 의해 완전히 깨닫는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성자를 구원한 것은 한평생 방탕하게 산 도둑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나는 이 글을 읽으며 괴테의 ‘파우스트’를 생각했다. 파우스트는 인생의 궁극적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가를 규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학자이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을 두루 섭렵하였으나 삶의 비의에 도달하지 못한다. 절망에 빠져 방황하는 파우스트 앞에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난다.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메피스토펠레스가 대답했다. “나는 악을 추구하지만 결국은 선을 이룩하는 힘의 일부이다.” 내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 ‘이 힘’ 때문에 힘들어 한 것 같다. 마음은 물과 같이 흐르게 해야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내가 의도적으로 ‘선한’ 방향으로 흐르게 하니 마음은 제대로 흐르지 못해 꾸룩거리며 마구 아우성을 쳤다. 항상 마음이 아팠다. 마음을 더 다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은 더욱더 힘들어하고 나는 지쳐버렸다. 지친 마음을 추슬러 일어나면 세상은 정글처럼 무서웠다. 어느 날부터 내 마음은 둑처럼 터져버렸다. 눈물이 되어 한없이 흘러나왔다. 텅 빈 마음은 시원했다. 헛헛 웃음을 터뜨렸다. 스스로를 비우며 마음은 차츰 노래하기 시작했다. 마음속에 엉켜있던 돌멩이들이 노래의 근원이었다. 흐르는 마음은 맑아지기 시작했다. 내 마음에 비친 수없이 많은 달들도 함께 흘러갔다.  
49 다시 율려(律呂)로 가는 길/ 강태규 file
무궁화
1945 2011-01-18
율려(律呂)로 가는 길 지금 우리가 당장 자가용 자동차를 버릴 수 없으며, 저가 대량생산물 또는 수입상품들의 방송광고를 외면할 수 없는 세상에 있다. 여전하게도 경고 신호음은 축산농가와 강가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때이다. 신자유주의 논리체계에서는 이제, 중국, 브라질,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축산물의 유입으로 우리 농촌에는 강건너 포성(咆聲)으로 들릴 것이 분명하다. 구제역 종식 이외는 이를 멈추게 하는 방법은 없다. 우리의 몸을 국가에 방기(放棄) 당한 채, 스스로 지켜나가야 한다면 치료비 마련을 위해 스스로 악다구니로 살아가는 옹졸한 인생이라면, 우리의 먹거리 또한 국가에 담보 잡힌 채, 스스로 챙겨 먹으며 겨자를 삼키듯 살아야 하는 치졸한 인생이 된다면, 이제는 가진 자만의 의료와 먹거리가 된다면, 결국 우리의 인생이 사육 당하는 동물과 어떤 차이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답은 정해져 있다. 개인 스스로 병나지 않도록 처절하게 관리하여야 하며, 먹거리 조차 스스로 선택하거나 줄이거나 하며 살아야 한다. 모두가 자급이 가능한 심산유곡에 살 수도 없다. 결국은 제대로 된 치료와 음식에 정당한 가격을 스스로 마련해서 취득해야 하는 “고급 상품” 으로 남게 된다. 혼인을 할 수 없으며, 자녀의 교육비를 줄여야 하며, 자녀 수도 줄여야 하고, 책과 음악도 아껴서 보거나 들어야 하고, 자동차를 포기하고 열차와 버스를 타야하며, 술과 담배도 상당히 줄여야 한다. 정성들여 키운 유기축산인증 한우를 기르는 소설가 박兄 목장에서 만든 쇠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두 달 정도 소고기契를 들어서 반 근(半斤)만 사야 할 것이며, 박兄 농장의 축분(畜糞) 한 드럼에 콩 서되를 지불하고선, 집 밭에 뿌리고 오년 남짓 땅을 유기농 밭으로 복구하여 직접 야채농사를 짓고, 남는 것은 전업농 권시인과 합쳐 진짜 유기농 생협에 포장해서 팔아야 할 것이며, 손주를 국립대학 보낼 것이 아니라 유기농 대안학교를 졸업시켜 진짜 농업을 대물림해야 할 것이다. 시절이 흉흉하니, 성경 에스겔 5장 11절, 누가의 복음서 21장 11절의 예언에 맞장구치기도 하고 브라질의 예언가 쥬세리노의 예언, 화성소년의 예언에 눈길이 가기도 한다. 우리에게 지구가 허락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치더라도 여러 사설이나 전문가들의 축산분야 먹거리 진단과 조언은 이러하다. - 생산성위주의 대규모, 집중정책을 친환경적 중소규모 농장지원 정책으로 바꿔야 한다. - 통큰치킨이 지역경제와 무관하듯이 대규모 농장도 그러하다. - 사람들에게도 그러해 왔듯이 동물들에게 너무 많은 화학물질이 처방전도 없이 남용(濫用)되어 면역력이 되살려지지 않는다, 등이다. 지자체의 축산이 권장될 수 있는 지형은 차단방역이 유리한 고립된 지형, 환경오염방지가 관리, 제어될 수 있는 지역, 분뇨처리가 더욱 친환경적으로 순환될 수 있는 체계(특히, 이는 동물에 화학물질이 지극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만 분뇨 또한 유기농업에 사용할 수 있으므로)로 가야한다면 당연 전국토의 지가를 올리는 노력을 줄여야만 경쟁력있는 농장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며 당연한 귀결로서 소수 적정생산 유기축산물의 소규모별 생산과 유통으로의 전환이 당면과제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보다 더 큰 시련들을 벌써 잊고 있듯이 커다란 충격들은 너무 쉽게 잊는 경향이 있다. 절박한 징후를 외면할 수 없는 때가 이미 왔다. 돌이켜보면 자식은 큰아들에게만 몰빵이요, 장사는 큰 판들만 마름잡이로 내세우는 세상에 있(어왔)고 망할 듯한 금융자본은 명(命)이 길고 먹거리생산 농업분야는 목숨만 부지하는 듯하다. 종이돈과 숫자로 돈놀음하는 신자유주의 세상에, 먹거리생산의 농자천하지대본은 점점 균열을 돌파할 여력조차 급속하게 소진하기도 하고 탈진 당하기도 한다. 언젠가 우리 것을 글로발이라는 귀신에게 다 빼앗기기 전에 세상을 바꾸거나 바뀌어 농민이 건강해지는 그런 세상을 꿈꾸어 본다. 결국, 문화(식생활 문화)요, 정치(상생과 율려)요, 섬김의 사상(생물 동등권, 神聖性, 이타주의) 속에 마스터 키(만능열쇠)가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48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자 /고석근 file
편집자
2008 2011-01-18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자 배낭을 메고, 오리털 잠바를 입고, 귀마개를 하고서 허적허적 약수터에 갔다. 멀리서 누군가가 어른거린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낯이 익은 젊은이였다. 서로 인사하고 벤치에 앉았다. 그가 말을 걸었다. 말을 나누긴 처음이었다. 그는 물리치료사라고 했다. 몸이 아파 잠시 쉬고 있노라고 했다. 앞으로 먹고 사는 게 걱정이라고 했다. 해맑은 젊은이의 얼굴에 그림자가 어렸다. 나는 그에게 삶을 길게 보고 살라고 말했다. 앞만 보며 바쁘게 살다 되면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고. 물을 다 받고 그와 나는 각기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섰다. 눈길을 조심조심 걷는데, 그가 “먼저 가겠습니다.”하며 내 옆을 지나 겅중겅중 뛰어간다. 오! 이 눈길을...... . 나는 아이젠을 하고서도 한발 한발 조심조심 걷는데. 나는 그를 눈부시게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는 사라지고 산은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나는 내 젊을 때를 생각하며 빙긋이 웃었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저 젊은이는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할까. 건강이 안 좋은 것도 문제지만 가장 고민스러운 것은 먹고 사는 문제일 것이다. 저렇게 산을 펄펄 나는 몸으로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니! 우리가 젊을 때는 취업이 100%였다. 막노동을 해도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래서 꿈을 꿀 수 있었다. 그 꿈은 차츰 삶의 무게에 짓눌려 바래어갔지만 한 때 꿈을 꾸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꿈도 젊을 때 꾸어야지 나이 들어 꿈을 꾸려하면 어지러운 꿈만 꾸게 된다. 과학자들은 젊을 때 꿈을 꾸지 않으면 꿈을 관장하는 뇌세포가 쇠퇴해버린다고 한다. 삶에 필요 없나보다 하고 사라지겠지.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가 검찰 퇴진이후 법무법인에서 7개월간 7억원의 급여를 받아 전관예우가 아니냐는 의혹 등을 받다가 결국 자진사퇴했다. 그는 심히 억울하다고 말했다. 그의 ‘멀쩡한’ 얼굴에서 나는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사람이 수치심을 느끼는 건 타고난 본성이라고 하는데, 그는 어떡하다 수치심도 모르게 되어버렸을까. 우리나라 거의 모든 고위직들은 정동기 후보자와 비슷한 것 같다. 오랫동안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축재를 하다 보니 그게 당연하게 되고 드디어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진화’한 그들은 과연 행복할까. 나는 결단코 그들은 불행하다고 단언한다. 내가 살면서 회득한 지식들과 살면서 깨달은 지혜들이 그렇게 말한다. 사람은 마음 깊은 속에서 행복을 느껴야 진정으로 행복한 존재다. 그들의 깊은 마음속에서는 불안이 똬리를 틀고 있다. 삼라만상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의 깊은 마음은 어느 누구도 속일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불쌍하다. 불쌍한데 그들이 쌓아둔 돈들이 우리들을 불행하게 하기에 그들에게 분노할 수밖에 없다. 행복이라는 단어로 삶을 보면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데 모두 불행하게 살고 있다. 모두 불행한 이 길을 왜 사람들이 가고 있는 걸까. 그것은 사람들이 아직 행복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MB정부를 통해 많은 걸 깨달은 것 같다. 사람은 돈만으로 행복할 수 없고, 돈만 좇아서는 돈도 벌 수 없다는 것을. MB를 통해서는 부자도 될 수 없고, 행복하게 살 수도 없다는 것을. 돈을 부정한 방법으로 그들의 곳간에 쌓아 둔 그 소수들 때문에 우리 모두 불행하게 산다는 것을 어슴푸레 깨달은 것 같다. ‘정의’가 작년에 우리 마음에 큰 물결을 일으켰다. 올해는 ‘행복’이 파도치기를 고대한다. 정의와 행복이 만나 거대한 역사의 강물을 이루기를...... .  
47 꿈과 직업 /고석근 file
편집자
2304 2011-01-12
꿈과 직업 어느 블로그에서 ‘꿈과 직업’에 대한 글을 읽었다. 아이가 장래 꿈을 경찰이라고 한 것에 대해 어머니가 통탄하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꿈이 직업이야?’ 나는 이 글을 읽는 순간, ‘그럼 직업 말고 꿈이 따로 있나?’하고 새싹처럼 뾰족이 꿈의 잎을 내미는 아이 마음을 생각했다. 어머니 마음도 충분히 이해된다. 이 우주를 다 품어도 남을 큰 가슴을 지닌 아이가 겨우 한 직업을 꿈이라고 하다니! 직업이란 결국 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계 수단’이 아닌가? 이런 것을 꿈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이 너무나 척박하지 않은가?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우주만큼 크고 거대한 아이의 꿈. 아이는 지금 저 산도 옮기고 저 해의 방향도 바꾸는 신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꿈이 이 세상에서 모습을 드러내려면 결국 직업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아이는 아직 추상적인 능력이 부족해 이 세상의 구체적인 것을 통해 꿈을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이가 생각하는 경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경찰과 다르다. 그 어머니는 자신이 생각하는 경찰 이미지로 아이의 꿈을 재단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 ‘박제화 된 경찰’이 아이의 꿈일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나도 한 때 경찰을 꿈꾸었다. 가정 사정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중학생인 나는 학교가 파하면 학교 도서관에서 코난 도일의 ‘홈즈’를 읽었다. 흥미진진했다. 돋보기 하나로 살인범을 잡는 홈즈는 나의 우상이었다. 나는 탐정이 되리라고 마음 먹었다. 그 때 나의 꿈은 탐정이었다. 그렇다고 정말 내 꿈이 ‘탐정’이었을까?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철도공무원으로 취직했다. 부모님이 원하신 월급쟁이가 되었다. 하지만 이 직업은 내 꿈이 될 수 없었다. 애초부터 원한 것이 아니지만, 직장 분위기에 질식할 것 같았다. 상명하복, 한 개인으로서의 존엄성은 전혀 보장되지 않는 직장에서는 그 직업에 내 꿈을 실을 수가 없었다. 결국 튕겨져 나왔다. 우여곡절 끝에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학교 선생이 되었다. 하지만 이 직업도 내 꿈이 될 수 없었다. 역시 숨 막힐 듯한 직장 분위기가 나를 옥죄었다. ‘스승’이 아니라 ‘가르치는 직업인’은 내 꿈이 될 수 없었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기계 부품은 사람의 꿈이 될 수 없었다. ‘언제 그만두나?’ 하지만 교육운동을 하며 직업이 꿈이 될 수 있는 기적을 맛보았다. 교감, 교장 눈치를 보지 않게 되니 내 눈은 학생의 얼굴로 향하게 되었다. 아이들 표정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교사라는 직업이 내 꿈을 오롯이 담았다. 직업이 꿈이 될 수 있는 기적을 맛본 나는 새로운 직업을 향한 여정에 나섰다.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그러다 글 쓰는 일에 정착했다. 내 꿈은 안정을 찾았다. 아직 글 쓰는 일을 직업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많이 미흡하지만 내 꿈을 오롯이 담고 있다는 점에서 글을 쓰는 것은 내 직업이다. 꿈이 경찰이라고 한 그 아이의 꿈을 어머니가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경찰’이라는 까만 두 글자가 품고 있는 아이의 꿈들을 어머니가 다 볼 수 있다면? 그 아이는 이 세상의 바다를 직업이라는 배를 타고 멋진 항해를 할 수 있을 텐데.  
46 성자와 범인 사이 /고석근 file
편집자
2138 2011-01-04
성자와 범인 사이 석가 곁에 오랫동안 머물렀지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아난다는 ‘도대체 부처님은 우리와 무엇이 다른 거야?’하고 ‘스승의 24시’를 관찰해 보았다. 석가도 아침에 일어나고, 공양을 하고, 그릇 씻고, 뒷간에 가고...... 범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설법하는 거야 당연한 거고. 그렇게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던 아난다에게 그동안 보이지 않던 충격적인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아난다는 도끼로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 바로 이거였어!’ 그가 본 것은 스승의 24시는 ‘매순간이 똑같이 중요하다’는 거였다. 보통 사람들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구별하며 산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하고 밥 먹고 차를 타는 것은 직장에서 일을 잘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시간들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달랐다. 아침에 일어나 발을 씻으면서도 석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듯이 했다. 제자들에게 설법하는 것과 그릇 씻는 것의 무게가 같았다. 어떤 일에 온 정신을 집중해 본 사람은 안다. 그 집중이 우리 안의 혼을 깨워 꽃처럼 피어나게 한다는 것을. 석가는 매순간을 이렇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에겐 매순간은 영원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삶과 죽음이 따로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극락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아난다는 ‘오랜 중생 생활’을 끝내고 깨달음을 얻는다. 요즘 가끔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해 본다. 아버지께서는 자주 식전에 논에 다녀오셨다. 물꼬를 보러 가시는 거였지만 꽤 시간이 걸리셨던 걸 보면 자라나는 벼들을 한참동안 들여다보셨음에 틀림없다. 농사짓는 아버지에겐 매순간이 중요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농사는 하늘이 7할을 짓는다 하니 아버지는 항상 정성 가득한 마음으로 일하셨을 것이다. 아침을 드시고 나면 외양간 앞에 쪼그려 앉으셔서 소가 여물을 먹는 것을 바라보셨다. 소를 선(禪)하시는 아버지 모습은 내 앞에 숭고한 그림으로 남아 있다. 며칠 전에 공기업 지점장 자리에서 명퇴한 고교 선배와 술잔을 기울였다. 아침에 일어나 갈 곳이 없다는 게 너무나 큰 고통이라고 했다. 선배의 얼굴엔 권태가 가득했다.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는데 할 일이 없다는 게 고통인 사람들이 주변에 참 많다. 평생을 ‘중요한 일’에만 집중해온 삶의 업보이다. 중요한 일이 사라졌으니 중요치 않은 것들밖에 남지 않았다. 아,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귀중한데! 우리들은 이렇게 되어버렸나! 아버지 세대에 누렸던 ‘살아있음의 신비’를 되찾아야 하는데, 개인 차원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른바 천민자본주의인 우리 사회에서는 일하는 것, 소비하는 것, 과시하는 것, 외에는 다 사소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런 사회 풍토에서는 돈이 있어도 하루하루의 삶이 고역인 사람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향해 줄달음질치는 사람들. 아, 과연 중요한 것이 따로 있단 말인가?  
45 우리는 왜 자꾸만 싸우려 하는가 /고석근 file
편집자
1948 2010-12-28
우리는 왜 자꾸만 싸우려 하는가 오늘 강의 시간에 한 수강생에게서 감동적인 얘기를 들었다. “이웃집 아이가 저희 집에 놀러와 저희 아이랑 재미있게 놀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갑자기 ‘충동적으로’ 비행기하고 로봇 장난감을 혼자서 갖고 놀겠다고 떼를 쓰는 거예요. 저번 시간에 공부한 게 생각났어요. 그래서 그 아이에게 좋아하는 장난감을 다 주었어요. 그랬더니 그 아이가 장난감을 혼자 다 갖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저희 아이하고 잘 놀더라구요.” 이웃집 아이에게 “친구랑 친하게 지내야지 그러면 못 써.”하고 설득하려 했다면 오히려 역작용이 일어났을 것이다. 저번 강의 시간에 공부한 게 ‘인간은 충동적 존재’라는 거였는데, 그 수강생은 그 ‘충동’을 잘 승화시켜 준 것이다. 우리는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고 배워왔다. 그래서 우리는 충동을 억제하며 이성적으로 살려고 노력해 왔다. 그런데 왜 세상엔 충동적인 인간들이 벌이는 엽기적인 사건들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걸까? 아직 ‘이성적 인간’이 덜 되어서 그런가? 그렇다면 이성적 인간이 된 경우는 얼마나 되는가? 평범하게 사는 우리는 과연 얼마나 이성적인가? 인간은 동물에서 진화해왔기에 충동이 강하게 남아 있다. 충동에 따라 살던 인간이 이성을 획득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에겐 이성은 아주 미약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미약한 이성으로 인간을 규정하려 한다. 그러다보니 충동은 무의식 속으로 숨어버린다. 융이 얘기하는 ‘그림자’가 형성된다. 이 그림자는 항상 우리를 따라다닌다. 그 그림자를 빛 속에 내 놓으면 금방 사라지고 마는데, 우리는 이 그림자가 두려워 없는 척 한다. 그러다보니 그림자는 언제 어디서 출몰할지 모르는 괴물로 우리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나도 내 안의 검은 그림자 때문에 너무나 힘겹게 살아왔다. 내 안에서 뭔가 꿈틀 거리는데 그 정체를 몰랐다. 늘 힘들고 불안했다. ‘에고 사는 게 다 그렇지 뭐’하고 바쁜 생활에 나를 맡겼다. 삶은 뜬 구름처럼 지나갔다. ‘이게 사는 게 아닐 거야’ 직장을 그만두고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했다. 문학 공부할 때가 가장 편안했다. 함께 공부하는 벗들과 밤 새워 술을 마셨다.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혼자서 통곡했다. 한강 고수부지에서 듣는 강물소리가 너무나 좋았다. 언젠가는 패싸움도 했다. 학창 시절에 싸움 한 번 제대로 못 해 본 내가 30대 후반에 패싸움이라니! 경찰서에 끌려가는데 그렇게 마음이 편안했다. 훈방 조치되어 온몸에 피를 묻힌 채 새벽 전철을 타고 집에 왔다. 흘긋흘긋 보는 사람들 시선이 좋았다. ‘나도 인간이란 말이야!’ 그렇게 ‘충동적으로’ 몇 년을 보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 안의 충동이 고분고분해지고 있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심우도로 설명한다. 내 안의 소를 길들이는 것! 길들인 소는 너무나 자유롭다. 애들은 싸우면서 커야 하는데 나는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다 커서 그 때 못한 것을 하고서야 어른이 될 수 있었다. 항상 불만 가득한 눈으로 누구 싸울 사람 없나 하는 표정의 어른들을 많이 본다. 싸우면서 크지 않아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전쟁하자는 사람들이 있다. 군인도 아닌데 군복을 입고 설쳐대는 사람들. 나는 그들에게서 ‘철부지 아이들’을 본다. 우리가 왜 전쟁을 해야 하나? 세상에 먹을 것과 재미난 것들이 차고 넘치는데 뭐가 부족해 싸우려고 하나? 그분들에게 필요한 건 ‘자신들에 대한 성찰’이다. 자신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자라면서 제대로 싸워보지 못한 그들은 다 큰 어른이 되어 싸우고 싶어 안달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 싸움이야 성장의 밑거름이 되지만 어른 싸움은 얼마나 무서운가. 그들에게 인문학 공부를 할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 공부를 하여 자신들의 솔직한 속마음을 알게 되면 아마 그들은 아이처럼 엉엉 울 것이다. 자신들이 얼마나 철부지 같은지를 알고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를 것이다. 나는 강의하면서 이런 분들이 성숙해지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우리 안의 ‘충동’은 잘 가꾸면 우리를 아름다운 인간이 되게 한다. 하지만 가꾸지 못하고 억제만 하면 그것은 짓눌린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려고만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마구 날뛰게 한다.  
44 구제역을 되짚어본다 / 강태규 file
무궁화
2232 2010-12-21
구제역창궐이 우리에게 던지는 고민 (산업화, 대량생산, 농가 고소득, 부자 농부, 저 푸른 초원 위에, 한 백년 동안 님과 함께.) 우리의 농업을 다시 되돌아보아야 하는 참담한 때에 놓여있다. 소와 돼지들이 매몰되고 있다. 이 시대가 왜 이런가. 구제역 바이러스는 고전적 축산의 경우에 고작, 1%의 치사율만 보이는, 발굽수가 짝수인 집짐승에게 걸리는 흔한 질병 중의 하나였다. 단지, 유산율이 높다던지 하여 면역력이 약한 어린 발굽동물에게는 사망률이 40 내지 50% 가 되어 최소한의 번식장애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분명하지만, 고전적으로 깊은 골짝 농업이라던지 외진 들녘이라면, 자연치유의 기회가 늘려있(었)다. 문제는 과밀사육과 운동부족, 동물쪽에서 먹거리의 변화, 차와 사람들의 빈번한 왕래와 교역들의 무대가 지구화된 것이 이 지경으로 동물을 매몰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보자. 우리의 환경과 처지가 비정상적이라는 1:29:300 의 확률로 설명하는 경고에서부터 시작하여 큰 재앙을 예고하는 바로 직전의 징후로 본다면 동의할 수 있을까. 소는 물집이 잡히고, 침을 흘리게 되고 혓바닥 껍질이 벗겨지고, 입을 쩍쩍거리고, 돼지는 콧등에 물집이 잡히고 발굽에 물집이 잡힌 후 껍질이 만들어지다가 떨어져 나오며, 걸을 때마다 절뚝거린다. 이 증상들이 대표적인 징후의 발현이며, 면역력 약한 어린 동물은 증상 이전에 죽는 경우가 많다. 기업적 양돈을 하는 이들도 체중 20킬로 까지 키울 시점까지 30%의 어린 돼지들이 죽는 것은 정상범위에 속한다고 한다. 즉, 어린 동물의 사망례도 40~50% 까지 일시적으로 높을 뿐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돼지는 다산의 짐승이 아닌가. 우리가 잘 알지 못한 먹거리의 위해는 진행중이다. 미국과 아르헨티나에서 주로 생산하는 유전자 재조합(GMO) 옥수수와 콩을 수입하여 먹인 가축들의 근육내로 기억되어 우리의 몸 속으로 들어와 우리의 몸구조 일부분으로 자리한다.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이 제품에서 3% 정도 재조합원료가 사용되었다는 발표가 있었으니 동물용 사료에서는 훨씬 높을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지금 상황은, 밭작물 보다 축산을 통해서 지역과 가계를 돕던 체계가 심각할 정도로 벼랑에 몰린 듯 하다. 우리의 소비 또한 되집어 보아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평생 선택의 연속으로 살아온 지난 날 들이었지만, 이런 축산재앙의 상황에서는 개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가속되는 먹거리와 밥상을 복기해 보아야 할 즈음 이기도하다. 우리가 이야기의 주체가 되질 못하고 매일처럼 특정 의도와 목표를 위해 장식되고 연출되는 듯한 뉴스거리에 갇힌 채, 판단조차 흐려지는 세상에 있다. 광우병의 우려기준이 당장 없다면 유럽과 일본이 어찌 대처하는지를 따라만 주어도 면책을 꾀할 수 있듯이, 이제, 구제역 살처분 정책으로 앞으로 한 두달 이내에 확산을 막지 못하면 포기할 상황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2001년 북잉글랜드의 구제역 (소각)살처분 정책으로 200억 달러 이상을 사용하였다(소 일천만 마리의 연간 매출액은 6.5억 달러였다)고 하며, 당시 자살한 농부가 60여명에 달하였다, 한다(앤드류 作, 대혼란). 국내의 수의학자인 강석진의 연구에 따르면, 그가 창안한 압축가열식 방법으로 200킬로의 사체를 처리하는데 10리터의 연료만 소용된다고 하였으며, 이런 가열, 소각법이 환경오염을 유발할 우려가 높은 비닐,생석회 폐쇄공간 매몰법 보다 안전함에도 불구하고 다급한 작금상황에서는 현장적용에 걸림돌이 있음이 아쉽기만하다. (참고: http://www.pnp21.net/gn/bbs/tb.php/gr01_poultry_month/440) 순환적 유기농업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정작, 미국 상류층의 1% 의 부류들은 유기축산물로 호식한다고 한다. 수십년전 이병철 회장이 일본에서 유기농축수산물을 항공편으로 들여와 식사를 하곤했다는 것이 이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 낯설지않다. 마치, 배추농사하는 농가의 안주인이 자기 식구들 먹이는 채소에 약을 치지 않고 손으로 벌레를 잡는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모든 먹거리가 이리 대순환 속에 있음으로, 소규모 자작농으로 돌아가야 멀쩡한 육체를 보전할 수 있는 시대가 된 듯 하다. 부디, 금융구조 속에 메인 노예가 되지 말고, 학벌과 원치않는 직업에 메이지 않는, 백화점 쇼핑, 홈 쇼핑 다이얼을 돌리지 않는 안주인과 고무신 흙털며 사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아 보이건만. 대부분 금융피라미드 구조사슬처럼, 불확실하고도 예측되지 않는 미래를 담보하여 빚내서 잔치를 하는 게 오히려 정상처럼 여기고 있는 우리의 처지는 다름아닌 현대 금융자본가들이 놓은 덫과 올가미에 걸린 신세는 아닌지. 농사꾼 아버지를 둔 시인들은 이제야 더 행복할 것 같다. 그냥 그런 생각이 가득한 12월이다.  
43 죄와 벌 /고석근 file
편집자
2136 2010-12-16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좁고 음침한 하숙방에서 인류를 위해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려는 망상을 키운다. ‘…그는 증오에 찬 눈으로 자기의 조그만 방을 둘러보았다. 조금만 움직이면 벽에 부딪칠 정도로 곳간처럼 비좁은 방이었다. 누렇게 퇴색한 벽지는 먼지가 부옇게 끼었는데 그나마 군데군데 찢겨져서 보기에도 흉했다. 천장은 어찌나 낮은지 키가 큰 사람은 숨이 컥컥 막힐 뿐 아니라, 머리가 부딪치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가구도 방만큼이나 너절했다.’ 그는 끝내 전당포 여주인 알료나 이바노브나와 그의 여동생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를 도끼로 살해한다. 그는 왜 살인자가 되었을까? 사람의 생명만큼 존귀한 게 없는데 그는 왜 가장 극한의 죄 ‘살인’을 하게 되었을까? <죄와 벌>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섬뜩한 전율을 느낀다. 20여 년 전 나도 그런 음침한 골방에서 지냈다. 강화 앞 바다의 한 섬에서 고등학교 교사를 할 때, 나는 누우면 발이 벽에 닿는 좁은 방에서 온갖 공상과 망상에 시달렸다. 좁은 방은 다른 무언가로 태어날 수 있는 자궁이다. 곰은 굴 속에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사람은 이런 굴속에서 무엇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짐승은 인간이 된다지만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라스콜리니코프가 초인이 되고 싶어 했듯이 나도 초인이 되고 싶어 했다. 그는 인간이 만든 법률, 규칙 위를 날아다니는 인간의 고유한 감정인 ‘양심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인간’이 되기로 결심한다. 나도 그런 초인을 꿈꿨다. 나는 대학원 철학과에 진학해 ‘위대한 사상가’가 되고 싶어 했다. ‘불후의 저서’ 제목도 정해 놓았다. 이상 사회 - 이 책대로만 하면 세상은 지상 낙원이 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데이트 할 때 한 여자에게 ‘이상 사회’에 대해 열변을 토해 그 여자(결국 내 아내가 되었다)를 내게 반하게 했다. 인간의 본성이란 세상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는 인간의 본성을 1차 본성과 2차 본성으로 나누어 사회심리학적으로 고찰하고 그 본성에 맞는 사회 구조를 사회철학적으로 탐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일일일대의 무서운 체험을 했다. 학생 한 명을 ‘무자비하게 때려’ 너무도 심각한 우리나라 교육에 대해 경종을 울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천에 옮기진 않았지만 생각만 해도 너무나 섬뜩하다. 연쇄 살인범들하고 너무도 똑같지 않은가? 한 여자를 죽여 이 세상 여자들의 정절에 대해 경종을 울리겠다는 유영철. 그와 내가 너무도 흡사하지 않은가. 다행히 나는 행동에 옮기지 않아 이렇게 멀쩡하게 살고 있다. 인간의 죄는 ‘인간이 인간을 뛰어넘는 인간이 되기로 결심할 때’ 생긴다. 인간은 인간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 명제가 인간을 뛰어 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너무도 쉽게 사라져버린다. 인간을 살과 피가 생생히 도는 존재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볼 때 인간은 죄를 저지르게 된다. 그래서 나는 라스콜리니코프를 이해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심오한 인간 이해에 대해 숙연해진다. 나는 그 뒤 문학을 만나 ‘인간’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했다. 만지면 물컹한 살이 닿는 인간, 가냘픈 숨을 쉬는 인간, 그 한없이 부드러움 속에 너무도 존귀한 혼이 깃든 인간, 이런 인간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가끔 나는 괴물이 된다. 내가 한없이 초라해질 때 나는 초인을 꿈꾼다. 초라한 몸뚱이를 골방에 처박아 놓을 때 이때가 가장 무섭다. 나는 다행히 ‘건전하게’ 살고 있다. 다 행운일 따름이다. 우리 사회는 사람들을 자꾸만 골방에 처박아 넣는다. 무섭다. 우리 사회에 수시로 출몰하는 괴물들은 이렇게 탄생한다.  
42 지금은 공부할 때 /고석근 file
편집자
1958 2010-12-08
지금은 공부할 때 내가 학교 교사를 할 때였다. 몸이 아파 조퇴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나는 그때마다 아이들을 택시에 태워 보냈다. “몸이 최고 중요해. 공부는 다음에 해도 되니까. 몸 조리 잘해. 알았지?”하면서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교사로서 잘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에 다음의 글을 읽고는 가슴을 큰 망치로 얻어맞은 듯 했다. 내(육징=양명의 제자)가 홍려시에 잠시 머물 때 갑자기 집에서 편지를 보내 아이가 병에 걸려 위급하다고 알려왔다. 내 마음은 매우 근심스럽고 번민스러워 감당할 수가 없었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이런 때 바로 공부를 해야 한다. 만약 이런 때를 놓쳐 버린다면 한가한 때의 강학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은 때 연마해야 한다. - ‘견습록’에서 아,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아, 양명 선생. 사람들이 그를 그토록 칭송해 마지않던 이유가 있었구나! 내가 잘한다고 했던 행동들은 얼마나 어리석었나! 내게 배운 제자들은 얼마나 잘못 배웠단 말인가? 지난 23일 오후 저녁 강의를 준비하다 본 TV 뉴스특보. 연평도에 포탄 수백 발이 떨어져 불바다가 되고 있다고. 나는 이 뉴스를 보며 앉아 있을 수 없어 눈을 감고 누워버렸다. 아, 이것은 지금 실제상황이다! 심장은 마구 뛰고 도무지 안정이 되지 않았다. 진짜 전쟁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전방에 있는 작은 아들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잠시 후 호흡을 안정시키며 앉아 TV 뉴스를 보았다. 아비규환이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야 한다. 불안에 떨면 안 돼!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하지 않는가!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양쪽의 통치 권력이 원하지 않을 테니까. 문제는 국지전이다. 이 상황 속에서 피해를 보는 건 약한 우리 국민들. 경제는 또 얼마나 출렁일 것인가? 강의 시간에 연평도 사건을 토론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한다. 불안에 떨지 말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실상을 직시하자. 그러면서 NLL, 평화통일을 향한 그 동안의 노력들, 북한 정권의 권력 승계, 지금 무력 충돌로 치닫는 남북한의 상황, 국제 정세 등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다.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니 힘이 나고 희망이 생겼다. 지금 같으면 나는 아파서 조퇴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살다 보면 항상 위기가 닥친다. 병이 날 때도 있고, 사고가 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눈 감고 회피하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도망 다니다 보면 점점 더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져 평생을 도망만 다니다 일생이 끝난다. 항상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위기를 정면으로 쳐다보면 헤쳐 나갈 길이 보인다. 지금 이 시간에도 네가 아픈 것을 직시하고 아픈 이유가 무엇인지 네 생활 습관이 잘못된 것은 없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 무엇을 해야 가장 좋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 사람은 우주만큼 존귀하다. 한 사람의 생각이 옳으면 인류 전체가 언젠가는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 ‘나’ 속에는 인류 전체, 우주 전체가 담겨 있다. ‘나’ 한 사람이 생각한다는 건 인류, 우주가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불안한 시기에 깨어 있으면 역사는 바르게 흘러갈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무서워 자신 속으로 꼭꼭 숨어버리면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우리들을 짓이기며 지나갈 것이다. 용기 있는 사람은 불안에 떨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불안한 상황을 직시하면서 헤쳐 나갈 길을 찾는 사람이다. 위기 상황에서 불안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자신에게 닥치는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운명 속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긴박한 시간들이 흘러가고 28일 핵 항모까지 동원한 한미 합동 군사 훈련을 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아, 군사 대결로 가는구나! 사람들은 28일이 걱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28일은 무사히 지나가겠지만 그 이후가 걱정이다. 밤 택시를 타고 오며 택시 가사에게 슬쩍 떠 보았다. 그분들은 세상인심을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요즘 전쟁 날까 너무나 불안하네요.” 그분은 여유롭게 말했다. “전쟁은 절대 안 나요. 걱정 말아요.” “그래요? 그래도 전쟁은 우발적으로도 많이 난다고 하던대요.” “남북 다 전쟁을 원치 않기에 절대 안 일어나요.” “근데 전쟁은 안 나더라도 전쟁 대비한다면서 돈을 무기 사는데 다 쓰면 어떡해요? 걱정이네요.” “그런 건 몰라요. 신경 안 써요.” 그렇다! 신경 쓰지 않는 것! 여기에 함정이 있다.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하며 엄청난 국방 예산을 증액하는 것, 이것이 현 권력이 속으로 원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되면 국민은 불안에 빠져 세상사에 신경 쓰지 않으려 하고 그새에 우리나라는 수구세력이 이끌어 갈 것이다. 힘을 가진 자들이 서로 싸우는 척하며 서로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 이런 구도가 형성되면 우리나라의 앞날은 최악이다. 신자유주의를 극복해야 할 시점에 이 무슨 비극인가? 당분간 불안한 시기는 계속될 것이다. 이때가 가장 공부하기 좋은 때. 우리나라 근현대사도 한 눈에 읽을 수 있고, 세계의 경제와 정치의 속성도 훤하게 보이고, 그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일이 선명히 보이는 때. 공부는 가장 절박한 순간에 쓸모 있어야 진정한 공부다. 우리 모두 이 난세를 사는 지혜를 공부해 보자!  
41 겁쟁이, 날다!! /고석근 file
편집자
1903 2010-12-02
겁쟁이, 날다!! - 미하일 엔데의 동화 ‘멋쟁이 용과 맷쟁이 나비’를 읽고 옛날 옛날 시커먼 바위 탑 속에 용이 한 마리 살았는데, 그 용은 온몸이 가시로 덮여 있고 아무 때나 불을 내뿜고 성질도 고약하다. 어느 날 딸국질 박사가 책 한 권을 품고 그 탑을 찾았다. 그는 공부를 많이 한 과학자답게 그 용을 이리저리 재고 조사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쿨쿨 잠자던 용은 깨어나 딸국질 박사를 책과 함께 꿀꺽 삼켜 버렸다. 하지만 책이 어떻게 소화될 수 있으랴. 용은 속이 뒤틀리고 메스꺼워 한참을 괴로워하다 책과 함께 박사를 토해내고 말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박사는 줄행랑을 치고 책만 한 권 남았다. 용은 궁금해 책을 들춰보니 이런 내용이 적혀있는 게 아닌가? ‘용이 불을 내 뿜는 건 사실 겁이 많아서다. 용은 겁쟁이다.’ 불 같이 화가 난 용은 “난 겁쟁이가 아냐! 난 진짜 겁쟁이가 아니란 말이야!”라고 소리치며 책을 갈기갈기 찢고 여기저기 다니면 못된 짓만 하고 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화가 풀리지 않아 용은 결국 어린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그때부터 용은 끙끙대며 앓아 누워버렸다. 그러고는 바위 탑 속으로 들어가서는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여기까지 읽으며 이제는 대학생이 된 내 큰 아이를 생각했다. 큰 아이가 5살 때였다. 아이는 대문 밖에서 어린이집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2층 창가에 붙어 서서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길을 가던 두 여자 아이가 큰 아이 앞에 서더니 그 중 한 아이가 큰 아이 가슴을 꽝 쳤다. ‘아니?’ 나는 당황하고 있는데, 다른 여자 아이도 큰 아이 가슴을 꽝 치는 게 아닌가? 그러자 큰 아이는 조그만 목소리로 “안 아프다!” 했다. 그러면서 그 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찰나, 나는 아이를 도와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장난이야! 괜찮아.’ 나는 씩 웃어주었다. 지금도 그때의 장면이 눈에 선하다. 큰 아이가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여자 아이들을 혼내 주었어야 하나? 걱정은 했지만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힘을 길러야 하는 것! 어린이 집을 다녀온 큰 아이의 표정은 어두웠다. 나는 큰 아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나를 닮아 마음이 섬세하고 겁이 많은 큰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힘들어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만의 방법이 있으리라. 그것이 무엇일지 모르지만 아이 혼자 찾아야 한다. 큰 아이의 소심한 마음 ‘겁쟁이’는 남에게 부끄러운 것이다. 그 ‘겁쟁이’를 숨기기 위해 강한 척 못된 짓을 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만 상해 자기만의 세계에 유폐되어 버린다. 용은 여성성을 비유한다. 서양 동화들을 보면 남자 아이들은 집을 나가 용 같은 괴물들을 물리치고 영웅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남자는 남자다워야지 여자 아이들처럼 눈물이나 질질 짜면 안 돼! 서양에서는 이렇게 ‘남성다움’을 키워낸다. 그렇다면 큰 아이 마음속의 여성성 ‘용’은 사라지게 해야 할까? 아니다. 그 섬세함을 길러야 한다. 타고난 섬세함을 길러 그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해야 한다. 큰 아이가 그 여린 마음을 이기려 태권도를 배운 적 있다. 하지만 천성을 어찌할 수 있으랴. 한 달 정도 다니다 그만두었다. 큰 아이는 강한 척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굴속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큰 아이가 자신의 굴속에서 나올 수 있을까? 파란 풀이 예쁘게 자란 풀밭에서 하얀 나비 한 마리가 춤을 추고 있다. 그 나비는 성격이 워낙 예민해 조금만 시끄러운 소리가 나도 견디지 못한다. 결국 그 하얀 나비는 고요한 숲속으로 들어가 혼자 조용히 지내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벌 한 마리가 나비가 있는 숲속으로 날아왔다. 벌의 윙윙대는 소리를 싫어하는 나비에게 벌은 이렇게 놀려준다. “흥, 겁쟁이 같으니라고!” 하얀 나비는 깜짝 놀라 큰 소리로 말했다. “난 겁쟁이가 아냐! 난 진짜 겁쟁이가 아니란 말이야!” 그날부터 나비는 사뿐사뿐 걸어 다니지도 않고 춤도 추지 않았다. 점점 더 혼자가 된 하얀 나비는 먼 사막으로 들어가서 꼭꼭 숨어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사막에 살고 있는 뱀 한 마리가 나타나 하얀 나비에게 말했다. “내 참 별꼴이야! 매일 같이 나쁜 짓만 골라하던 용이 겁쟁이라는 말이 싫어 저 산꼭대기 바위 탑 속에 혼자 틀어박혀 있대!” 그 말을 들은 하얀 나비는 한참을 고민하다 먹을 것을 싸서 용을 찾아 나섰다. 침대에 누워 끙끙 앓고 있는 용에게 말했다. “당신도 저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이제부터 우리 함께 멋쟁이가 되기로 해요. 나도 ‘멋쟁이 나비’가 될 거예요.” 나비의 말에 용기를 얻은 용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나비 앞에 ‘멋쟁이 용’이 되기로 약속한다. 둘은 “약속!”하고 외치고는 사이좋게 바위 탑 밖으로 나와 훨훨 날아갔다. 자신의 굴속에서 끙끙 앓던 큰 아이는 그림이라는 나비의 도움으로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큰 아이는 집에 오면 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 그리는 재주는 타고 난 듯했다. 어느 날 어린이집을 다녀온 큰 아이의 얼굴이 밝았다. “아빠, 내가 아이들에게 얼굴 그림을 그려줬더니 참 좋아해!” 나는 큰 아이를 꼭 안고 눈시울을 붉히며 크게 웃었다. “그래, 우리 현웅이 참 잘했어!” 그 뒤 아이는 미술대회에 나가 큰 상을 받았다. 이제는 외톨이가 아니라 인기 있는 아이가 되었다. 그렇다! 사람을 구원하는 건 끝내 자신이다. 나비같이 날아오르는 상상력! 장자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는 기적! 그런 상상의 힘만이 인간을 구원한다. 그 힘은 누구나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다. 간절히 기원하면 그 힘은 솟아난다. 성경에서는 이 힘을 성배라고 하지. 영생의 샘물. 큰 아이는 군대에 가서도 이 힘으로 견뎌냈다. 큰 아이가 입대하고서 나는 항상 가슴을 졸였다. 군대의 무슨 사고 소식이라도 들려오면 가슴이 타 들어갔다. 하지만 큰 아이는 잘 견뎌냈다. 이번에도 같은 수법이었다. 고참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었단다. 고참들이 참 잘해준다며 명랑하게 말하는 큰 아이의 전화 목소리에 눈물이 다 났다. 이제는 제대하여 복학을 기다리는 큰 아이. 여전히 친구들에게 초상화를 그려 생일 선물로 주며 잘 지낸다. 섬세한 성격으로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힘겹다. 내가 문학을 만나기 전까진 왜 그렇게도 살기가 힘들었는지, 언제나 얼굴 표정이 굳어 있고, 가슴은 먹먹했는지, 그래서 문학은 내게 생명수다. 나비는 우리가 세상에서 버림받고 혼자 자신만의 굴속에서 끙끙 댈 때 한 줄기 빛으로 나타난다. 그 빛은 우리의 가장 부끄러운 부분을 환하게 밝히며 우리를 빛과 함께 날아오르게 한다.  
40 형제 자매처럼 행복한/고석근 image
편집자
2255 2010-11-25
형제․자매는 냉혹한 경쟁 관계다. 어려서는 어머니 젖을 향한 목숨을 건 생존 투쟁을 해야 하고, 커서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치열한 생존 투쟁을 해야 한다. 이 경쟁심은 우리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다. 인류 최초의 살인도 형제간의 살인이라 하지 않는가? 하지만 아이들을 자기들끼리 놀게 하면 사이좋게 잘 논다. 인간은 서로 사랑하고 돕고 사는 게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외부의 권력이 개입하면 문제가 생긴다. 어른이 끼어들면 아이들은 어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자기들끼리 질시하고 싸우게 된다. 아이들은 형제․자매간에 어떤 경험을 할까? 사랑의 관계를 체험한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겉으로는 사랑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온갖 미움이 가득한 게 솔직한 속마음일 것이다. 우리 사회의 냉혹한 경쟁관계가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수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어떨까? 사람은 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존재다. 서로 협동하는 분위기가 되면 다들 협동하고, 경쟁하는 분위기가 되면 다들 경쟁을 한다. 오로지 입시 경쟁에 내몰리는 아이들. 이런 아이들이 서로를 사랑의 눈으로 불 수 있을까? 이런 아이들을 어떻게 하든지 ‘교육’을 시켜야 하는 학교.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사고치지 말고 무사하기만을 바랄 것이다. 그런 마음이 저 현수막에 펄럭인다. 형제․자매의 거짓 사랑으로라도 오늘도 무사히...... . 게임 중독에 빠진 중학생이 어머니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했다고 한다. 아, 이제 우리 정말 솔직하게 교육을 얘기했으면 좋겠다. 다들 알고 있으면서 눈 감고 아웅 하지 말고. 지금의 우리 사회, 학교로는 이런 엽기적인 사건이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다. 저 현수막은 우리에게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  
39 일천 사백년 나무에 깃대다 / 강태규 file
무궁화
2326 2010-11-17
<일천 사백년 나무에 기대다> 인생이란 참 기묘하다. 10억년 후 쯤이면 태양의 수명이 다해, 지구가 없어진다고 한다. 또, 몇 년 후에는 길을 잘못든 커다란 혹성이 지구의 축을 흔든다 하기도 한다. 생명도 제 나름 대로의 명줄을 가진다 해도 발로 선 자리가 중요하다. 덕수궁이나 삼청동 길의 은행들이 그다지 좋은 자리가 아님을 충북 영동의 천태산을 보고 난 후에야 안다. 그 곳에 젊지않은 시인(『시와 에세이』의 양문규 주간)이 터를 잡고 시인들을 호객했다. 그 조상 대대로의 내공과 텃세만큼의 자긍심으로, 굵으면서, 투박한 듯, 바라고 생각하던 잔치가 무러익었다. 상모잡이가 여여산방의 기를 모아 이 노쇠한 일천사백년의 지친 영혼에 푸른 수혈을 하기도 하였다. 이는, 천태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근간으로 하여 여러 문인들의 작품들을 산과 나무에 최근 헌정한 행사를 말하는 것이다. 가만히, 아주 가만히 시를 읽었다. 그 시에 홀리면 홀릴 수록, 그의 실존들이 일순 정지되어 내게 속삭였다. 울림이 적으면 적은대로, 알 수 없는 이미지가 가운데 있더라도, 독일어가 아닌담에야, 소리내어 읽어 보기도 하였다. 시가 천태산의 햇볕 속에 숨을 쉬었다. 위키피디아 검색을 통하여 우리 한반도에 수령 천년이 넘는 은행나무를 대략 알아보니, 영동을 제외하고는 영월, 금산, 양평 만이 존재한다. 뿌리 기준의 둘레는 양평 용문의 둘레가 2,3미터 더 굵게 보이지만, 어디 허리 둘레와 나이가 비례하라는 법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양산면의 은행나무가 최고령이라 해도 누가, 아니라고 대뜸, 반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장보고가 다국적 해상무역으로(재야 史家들의 일단은 '다국적 해적'이라고도 한다) 한창의 패권을 유지하며, 요즘과는 사뭇 달리 제법 대등한 수준의 문물과 문화교류가 가속되던 시절, 그러한 시절 전후에, 중국 대륙 천태산의 화엄정신이, 당시 영국사(寧國寺)의 창건과 더불어 영동으로 옮겨온 것과 국가의 위기가 절정으로 달렸던 것들이 시대배경이 아닌가 한다. 9 세기 쯤의 왕건의 참모였던 도선대사는 풍수가 밝았다 하고 태조 이성계의 참모였던 무학대사는 경복궁터 점지 전에 도선대사의 현현을 보아 북악산 아래에 도읍을 정했다, 한다. 원각국사는 천사백년 전, 나라가 어려울 시기였던 , 절박한 때, 기도도량으로 점지하여, 나라의 흥망과 온라인으로 연결시켰던 영험의 "터"에 은행나무가 자리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괄하여 최고령으로 버티고 있는 사연인즉, 몹쓸 할큄으로 강들이 울고 있는 울음을 어찌 이 나무가 몰랐겠느냐,는 것이다. 눈물 대신, 일순에 온 몸(은행잎)을 흘림으로, 빈 몸으로, 시제(詩祭)를 열 수 있었던 사연이 깊게 읽히기도 하였으며, 우리의 지금, 형국이 그만큼, 처절하다는 것으로 해석해 보기도 하였다. 적지 않은 시인과 작가들이 천사백세의 나무를 위로했다. 무슨 큰 응답을 바라고 올린 시가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를 위한 시를 걸었다고 보았다. 결국은, 사람이다. 한 시인이 이 소리를 들었고, 문학인, 지식인으로서의 소명으로 일천 사백년 묵은 나무에 깃드는 영혼과 교감하는 시제를 발원했다. 지방 문단에 이런 흡인력을 가진 작가를 가진 우리의 좌표가 차라리 다행이다. 소생은 흉내도 낼 수 없는 문학정신을 이토록 수십년 일궈온 저력에 감탄을 감추고 싶지않다. 필자는 그리 우아하지 못하며 나아가 까칠하기까지 하다. 그런 모자란 점이 글쓰기를 하면서 스스로 위무할 수 있어 덜 까칠해지고, 욕심도 줄어들고, 자신의 게으름까지 관대해지기도 한다. 덤으로, 작가를 뜨겁게 바라보는 시선이 빈약하나마 생기다 보니, 사진의 형태로 담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올 해는 소생에게도 이상한 해였다. 지난봄에 찍은 사진이 작가의 시서전 바이오그래피 (작가소개) 쪽에 저작권이 표기된 채로 올랐다. 졸지에 ‘사진작가’가 되었다. 희한하고 뿌듯하기도 하다. 베껴쓴 울산바위 시의 흥취에 내리 날밤으로 그린, 아크릴 혼합재료 그림이 ‘추천화가’ 대접을 받고 스리랑카 수교33주년 대통령 초청 기념전으로 작품만 갔다 왔다. 놀랠 일이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였다. 한국어로 문학작품을 창작하며 발표하는 공간이 많은 듯하여도, 다 솎아 드러내 볼랴치면, 그리 많지 않은 시대, 하루하루의 희망이 절망으로 가라앉는 이 때에, 벼랑으로, 강으로, 목줄을 내놓기 전에 다시 우리 주변에 있는 느긋한 나무에 깃대어 위로 받으며, 바랄 수 없는 꿈을 계속 꾸게하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끊임없이 바라는 그런 해원(解怨)의 시를, 작품을 하나라도 써야 되겠다는 발원을 해본다. 깃댈만한 나무, 깃들만한 공간, 깃댈만한 우리들의 멘토들이 하는 긴 이야기들로 위안 삼아, 뿌리깊은 나무가 곁 생명에 힘을 주듯, 우리 또한 서로 상생하는 잃어버린 낙원을 이 추운 겨울 다시 생각해 본다. 지구가 사라지기 전까지.  
38 아뿔싸 /고석근 file
편집자
2283 2010-11-10
올해 50살인 셋째 아우는 같은 연배의 친구들과 모임을 만들었단다. 모임 이름을 뭐로 할까 고민하다가 ‘아뿔싸’로 정했단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생각난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앞만 보며 줄달음치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보니 ‘아뿔싸’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년을 눈앞에 둔 50대.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그 이름을 지었을 사내들의 쓸쓸함이 선히 보인다. 이게 인생일까? 한바탕 꿈인 인생. 이게 우리 삶의 실상일까? 동화 ‘어린 왕자’에 보면 ‘길들이기’에 대해 나온다. 사람과 사람은 서로 길들여간다. 부부들을 보면 ‘어쩌면 저렇게 닮아갈까?’ 신기할 때가 많다. 그런데 부부들은 대체로 나쁜 쪽으로 많이 닮아가는 것 같아 닮은 부부들을 보면 마음이 슬퍼진다. 착하지만 약한 남자와 현실에 약삭빠르고 강한 여자가 만나면 대체로 남자는 약삭빠른 쪽으로 닮아간다. 그게 살아가기 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 뒤에는 든든한 이 세상이 받치고 있어 부부는 그렇게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소위 ‘신자유주의’다. 모든 게 돈이고 돈을 향한 무한 경쟁이 이 시대의 유일한 율법이다. 이 율법을 잘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이 시대의 적자(適者)다. 심성이 착하더라도 약한 사람은 이 율법을 좇는 사람에게 길들여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들 신자유주의에 맞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 끝까지 저항하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소수가 된다. 먹고 살만한 사람들은 신자유주의에 잘 적응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세속적인 것들은 어느 정도 가졌지만 혼을 잃어버렸기에 결국엔 ‘아뿔싸’ 비명을 지르게 된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헉헉대는 사람들은 이런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생명의 문은 좁다. 신자유주의가 열어주는 넓은 문을 거부하고 생명의 좁은 문을 간다는 건 너무나 어렵다. 하지만 재물과 하느님은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재물을 섬기면 재물에 길들여진다. 하느님을 섬겨야 하느님에게 길들여져 혼을 지킬 수가 있다. 하느님은 우리 안의 존재의 힘을 끌어올려준다. 이 힘이 커져야 행복해진다. 신자유주의는 이 힘을 고갈시키고 밖에서 끌어주는 대로 살게 한다. 끌려가는 삶. 이 삶의 끝은 ‘아뿔싸’ 낭떠러지가 우리를 기다린다. 한 개인이 좁은 길로 갈 수 있을까? 그것은 너무나 큰 결단이다. ‘다 버리고 가는’ 길이라 아무나 갈 수가 없다. 하지만 서로 어깨 걸고 아픈 다리 서로 일으켜 주며 가면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다. 힘겹지만 이 좁은 길을 가야 ‘아뿔싸’의 낭떠러지를 만나지 않게 된다. 지난 일요일 비보이 공연을 보러갔다. 강한 음악과 야성적인 몸의 움직임이 좋았다. 우리는 몸 하나로 즐거울 수가 있다. 누구나 갖고 있는 몸. 나는 비보이의 유행을 이 시대의 새로운 화두로 읽는다. 많이 갖게 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거부! 맨몸으로 증언하는 행복의 비결! 이 비보이를 자본은 ‘좋은 상품’으로 계속 변형시켜 낼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좋은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신자유주의에 길들여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끈질긴 소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또 새로운 ‘맨몸의 행복’을 만들어 낼 것이다. ‘아뿔싸’ 비명지르는 우리의 몸은 아직 희망이 있다. 우리 몸 깊은 곳의 혼이 비명을 지르기 때문이다. 아직 혼이 죽지 않았다는 증거. 혼은 그 자체로 무한히 행복하다. 재물의 독버섯들 속에서 말갛게 돋아나는 혼들이 세상을 가득 덮기를 두 손 모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