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6호...
   2020년 02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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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아, 대한민국 남자여!/고석근 file
편집자
1994 2011-07-29
아, 대한민국 남자여! 후배 아내가 내게 도움을 청했다. ‘남편과 화해하고 싶은데 대화가 잘되지 않는다’고. 나는 처음에 사소한 부부싸움이라고 생각했는데, 다 듣고 보니 너무나 심각했다. 후배 아내는 몇 년 동안 암 투병을 하다 이제 포기한 상태였다. 그녀는 이제 남은 삶을 잘 정리하고 싶은데, 남편하고 대화하려 하면 남편이 자꾸만 자신을 피한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장례식장에서 대성통곡을 하는 한 여인을 본 적이 있다. ‘할 말이 남았는데...... .’ 이 말을 반복하며 그녀는 서럽게 울었다. 망자에게 할 말이 남았다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망자는 입과 귀가 없으니 할 말이 남아도 말을 할 수가 없지 않는가. 그러니 그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아 갈 수밖에 없는 남은 사람은 얼마나 마음이 아플 것인가. 나는 후배에게 전화를 하여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어쩌다가 후배는 죽어가는 아내의 소원(겨우 대화하자는 건데)도 못 들어주게 되었는가. 한적한 호프집에서 후배와 만났다. 나는 후배에게 생맥주를 권하며 아내 때문에 얼마나 힘드냐며 위로의 말을 했다. 그러자 후배는 대뜸 ‘이제 마음이 다 정리되었다’면서 좋은 여자 만나 재혼할 거라는 말을 했다. ‘마음이 다 정리되었다니!’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아, 이래서 아내가 남편이 자신을 피한다고 했구나!’ 하지만 정말 후배의 마음이 다 정리되었을까. 나는 연거푸 술잔을 기울여 나를 술에 취하게 했다. 그래야 후배에게 내 말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술에 취하자 그의 손을 감싸 쥐고 진지하게 말했다. “ㅇㅇ아, 내 말 잘 들어. 너는 지금 자신을 속이고 있어. 너는 아내의 죽음을 피하고 싶은 거야. 너무나 힘들어서....... 하지만 이건 현실이야! 너무나 기막힌 일이지만 어떡해? 엄연한 현실인 걸. 아무리 무섭고 힘들어도 현실을 받아들여야 해. 이런 말 있잖아. 물에 빠진 사람은 아예 자신을 포기해 버려야 한다고. 그러면 그는 물살을 따라 다시 물 위로 떠오른다고. 너도 지금 그래야 해. 너는 안 슬픈 척 하고 있어. 충분히 슬퍼해야 해. 그래야 네가 갈 길이 보여. 지금은 그냥 슬퍼하는 거야! 아내가 죽은 후는 생각하지 마. 충분히 슬퍼하면 그때 길이 보여!” 후배는 한 달에 두 번씩 혼자 술을 마시고 취한다고 했다. 사람들 있는 데서는 절대 취하지 않는다고. 나는 그의 표정 없는 얼굴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나는 다시 그의 손을 잡고 호소했다. “왜 혼자 울어? 아내와 함께 울어야 해. 아내가 바라는 게 뭔지 알아? 마음이야! 남자들은 어떤 일이 닥치면 해결책부터 찾으려고 해. 하지만 여자는 달라. 죽는 사람이 남편에게 뭘 바라겠어? 살려주길 바라겠어? 자기 마음을 다 나누고 싶은 거야. 그런데 넌, 이 힘든 시기가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잖아. 아무리 네가 힘들어도 죽는 사람보다 힘들어? 네 아내의 마음을 함께 아파해. 지금 힘들다고 빨리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바라다가 네 아내가 죽고 나면 네 마음이 어떨 것 같아? 사람은 이별을 잘 해야 해. 충분히 아파하지 않으면 그 아픔이 가슴 깊이 멍 자국으로 남아서 너를 계속 아프게 해.” 대한민국 남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항상 숨기며 살아왔다. 감정을 숨기면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마음이 다른 사람들과 살갗처럼 닿아 서로 희로애락을 나눠야 하는데, 남자들은 마음을 나눌 줄 모른다. 그들의 마음은 항상 돌덩이처럼 굳어있다. 그래서 남자들은 왜 아픈 줄도 모르고 항상 마음이 아프다! 흐르지 않는 마음은 고인 물처럼 썩는다. 나는 오랫동안 고인 물의 시절이 있었기에 썩은 마음속에 돌덩이가 가득한 남자들의 마음을 잘 안다. 나는 후배와 헤어질 때 그를 꼭 안았다. “ㅇㅇ아, 집에 가면 아내 말을 무조건 다 들어 줘. 아무리 힘들어도 다 듣고 네 마음을 그냥 다 드러내.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너를 믿어. 네 마음을 믿어. 네 마음을 풀어 놔. 그럼 네가 갈 길이 보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 평생 힘들어져. 너를 믿어. 너 교회 나가잖아. 인간 예수가 신이 되었잖아. 네 속에도 그런 신성이 있어. 그 신성을 믿어. 알지?” 나는 그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66 노인/고석근 file
편집자
2024 2011-07-19
노인 지난 27일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젊은 사람이 나이 많은 노인에게 욕을 하네요’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올라왔다. 공개된 영상 속에는 한 젊은 남자가 노인을 향해 “너 오늘 사람 잘못 건드렸어. 개xx야.”라고 욕설을 퍼붓다 “나이 처먹고 씨X. 뭐하는 거야 나와.”라고 큰 소리를 치며, 이를 말리는 중년 남성에게도 “잡지 말라.”고 하는 등 큰 소리를 치며 행패를 부리고 있다. 노인은 20대 남자에게 “신발이 옷에 닿으니 다리 좀 치워 달라.”고 말했다가 봉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도 노인에게 유감이 많다. 초임교사시절 국립중앙도서관에 갔다가 노인에게 봉변을 당했다. 피곤해서 눈을 감고 로비의 의자에 앉아 있는데, 뭔가 눈앞에서 휙휙 움직이고 큰 소리가 들려 왔다. 눈을 게슴츠레 떠 보니, 앞에 한 노인이 내게 지팡이를 휘두르며 뭐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는 후닥닥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이유를 묻고 말고가 없었다. 노인은 내게 피해야 하는 존재였다. 아마 그 노인은 ‘젊은 놈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어’ 버르장머리를 고치려 지팡이를 휘둘렀을 것이다. ‘쯧쯧 나 선생인데 이렇게 도망을 가다니.’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른 곳으로 갔었다. 내게 노인은 ‘헛기침의 권위만 부리는’ ‘상대하면 손해만 보는’ 그런 존재였다. 나만 그랬을까. 나처럼 노인에게 당한 젊은이들이 참 많았을 것이다. 그들이 이제 노인들에게 반역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완승 같다. 여기저기서 노인들이 패하는 소식들만 들려온다. 이제 내가 노인을 향해 가는 나이가 되니 자연스레 노인의 입장이 되어 본다. 참 불쌍하다. 이 세상을 참으로 열심히 사셨는데, 전혀 인정은 받지 못하고 그냥 허약한 사람들이다. 농경사회에서는 노인들은 공경을 받았다. 농경 사회는 경험이 중요한 사회라 나이가 많은 노인이 공경을 받았다. 또 공동체 사회라 노인을 공경하면 나중에 노인이 되었을 때 공경을 받게 되니 자연스레 노인을 공경하는 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다. 하지만 산업사회는 경험보다 새로운 기술이 중요한 사회이다. 그러다 보니 노인은 차츰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다 보니 이제 노인을 공경한다는 건 도덕 교과서에나 나오는 죽은 도덕률이 되어버렸다. 이제 노인들은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아무런 힘이 없는 약자가 되었다. 하지만 노인을 이 사회가 내팽개쳐버린다고 문제가 ‘노인 문제’로 끝나 버릴 수 있을까. 누구나 결국엔 노인이 되니 결국 노인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된다. 그래서 노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 사회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수 없다. 노인이 되면 천대받게 될 텐데 어느 누가 행복할 수 있겠는가? 다들 아득바득 ‘노인이 안 되는 길’을 찾아 나선다. 힘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가 많이 들어도 노인이라 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노인 문제가 없다. 노인을 다른 호칭으로 부르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 호칭은 또 금방 색이 바래져 누렇게 되어 버릴 것이다. 문제의 해결책은 노인이 될 수밖에 없는 대다수 사람들이 노인 문제를 해결하는 길밖에 없다. 그들을 우리의 따스한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복지사회를 예비 노인들이 힘을 합쳐 만드는 길밖에 없다. 노인에게 행패를 부린 그 젊은이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혹시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X 같은 세상! 이렇게 아득바득 살아도 결국 늙어 추하게 살게 될 텐데. 노인들을 보면 꼭 내 미래 모습을 보는 것 같단 말이야! 에이, 더러운 세상. 나도 막가는 거야!’  
65 용서/고석근 file
편집자
1841 2011-07-14
용서 영화 ‘밀양’의 여주인공 신애는 어린 아들을 유괴로 잃는다. 슬픔을 못 이겨 그녀가 찾아간 곳은 교회였다. 차츰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그녀는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녀는 살인범이 수감된 교도소로 찾아간다. 면회소에서 그녀는 살인범에게 말한다. “당신을 용서해 주겠다.” 아,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하나님이 제 죄를 이미 용서해 주셨다. 하나님이 제 기도를 들어주셔서 지금 너무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 신애는 면회소를 뛰쳐나와 울부짖는다. “어떻게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먼저 용서할 수 있느냐?” 이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은 선한 여주인공과 악한 범인을 대비해 보며 큰 분노와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분법의 망상’ 속에 빠져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정말 여주인공은 선한가? 범인은 악한가? 이렇게 선명하게 이 두 사람을 나눌 수 있는가?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가르친 예수는 치열한 수행 끝에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하지만 신애는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기에 그럴 능력이 없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동안엔 잠시 그럴 것 같은 생각이 들 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아 팽창’이다. 그 범인도 마찬가지다. 교도소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두 사람 다 ‘진정한 자신 이상으로 자신을 부풀려 보게 된 것’이다. 인류의 근원적 비극은 ‘이분법적 사고’라 한다. 삼라만상을 선악으로 나눠 보는 것. 신애가 진정 자유로워지려면 이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가능할 것이다. 잠시 부풀려진 자신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이 커질 때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진정한 자신의 수준을 높이는 일일 것이다. 용서란 ‘진정한 자신’의 수준만큼 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64 악마의 덫/고석근 file
편집자
2236 2011-07-04
악마의 덫 고석근 이른바 ‘함바 비리’에 연루된 의혹을 받고 출국 금지된 장관 출신의 대학총장이 자살했다. 그는 유서에서 “악마의 덫에 걸려 빠져나가기 힘들 듯하다. 잘못된 만남과 주선의 결과가 너무 참혹하다. 금전거래는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얼마나 막막했을까. 사람이 얼마나 끔찍하게 두려웠을까. 그 막막한 고독 속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그 적막감. 가까운 사람들을 떠나 혼자 쓸쓸히 죽어가야 했던 그의 아픔이 가슴 저리게 와 닿는다. 산길을 가다 거미줄에 걸려 파닥거리는 나비를 본 적이 있다. 몸부림칠수록 점점 더 칭칭 감겨오는 거미줄. 서서히 힘이 빠지고 헉헉거리며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나비의 고독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비는 결국 운명을 받아들였다. 자연의 순리 앞에 그는 복종했다. 아,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하다고 했던가!(한용운 시 ‘복종’에서) 나는 성자 같은 나비를 눈이 시리게 바라보았었다. 그렇다면 ‘악마의 덫’에 걸려 죽어간 그 총장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는 ‘금전 거래가 없었기에’ 자신의 죽음이 너무나 억울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 세상엔 왜 ‘악마의 덫’이 생겼을까? ‘인간의 덫’이면 몰라도 ‘악마의 덫’이라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간답게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 세상에 ‘악마의 덫’이 그득하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 왔나? 거의 모든 시간을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보내지 않았나?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 혼자 깨끗할 수는 없다. ‘불법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깨끗하게 산 게 아니다. 하늘의 망은 너무나 촘촘해 어느 누구도 빠져 나갈 수 없다(天羅之網 천라지망)고 한다. 이 세상에 ‘악마의 덫’을 만드는 데 알게 모르게 일조한 우리는 어느 누구도 이 덫을 빠져 나갈 수 없을 것이다.  
63 십자가의 예수 file
편집자
1931 2011-06-22
십자가의 예수 문경의 한 채석장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죽어 있는 한 남자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예수의 죽음’을 모방한 자살 사건이라고 한다. 세상을 위해선 자신의 터럭 하나라도 뽑지 않을 인간이 이렇게 숭고하게(?) 죽을 수 있다니!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죽어갔을까. 그는 스스로 예수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십자가에 못 박히는 엄청난 고통을 감내한 그가 예수라고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왜 사람들은 예수의 죽음처럼 열광하지 않는가? 만일 그가 하늘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다면 이 무서운 침묵에 대해서 경악할 것이다. 다시 한 번 그는 이 세상의 ‘매정함’에 대해서 치를 떨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더 이상 희망이 없으니 불의 심판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가 간절히 원한 건 무엇이었을까? 택시 기사를 하며 동료들에겐 그냥 평범한 중년 사내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속에선 용암처럼 들끓는 ‘그만의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혼자 외로이 살아가는 그가 간절히 원한 건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 엄청난 고통을 감내하게 한 것은 그의 사랑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었을 것이다. 그 평범한 택시 기사가 예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성자처럼 큰 사랑을 품고 있다. 그 사랑을 이 세상에서 표출할 수 없으니 그 큰 사랑이 미움으로 화한다. 길을 가다 사람들 표정을 보면 무섭다. 사랑이 미움으로 화한 것이다. 조금만 누가 자신의 길을 방해하면 죽일 듯이 달려든다. 그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랑이 죽일 수 있는 미움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의 큰 사랑이 ‘예수의 죽음’으로 나타났는데, 왜 세상은 그를 불쌍한 자살자로 보고 마는 건가? 그의 잘못은 ‘자신의 자리’에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데에 있다. 그는 택시 기사이다. 그런데 그는 택시 기사라는 직업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마 그는 동료 운전사들을 피상적으로 대하고 은밀히 찾아가는 사이비 종교 집단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정체성이란 가짜이다. 자신만의 망상이다. 그는 자신이 택시 기사임을 냉철히 봤어야 했다. 그의 입에 들어가는 밥, 그의 몸을 감싸주는 옷, 그의 고단한 몸을 누이는 따스한 잠자리는 그의 택시 기사라는 직업에서 나온다. 그런데 그 직업이 하찮다니! 자신의 진정한 고민을 동료들에게 얘기하고 고민을 해결할 길을 함께 찾아갈 때 그는 진정한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로또 복권 당첨되듯이 인생을 한방에 역전시키고자 했다. 단 한 번에 성자가 되어 그의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해결책이 인간 세상에 가능한가? 그런데 이 세상은 우리에게 부추긴다. ‘인생은 한방이야!’ 차분히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을 우리 사회는 용인하지 않는다. 그는 이런 교언영색에 속은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신이 선 자리에서 모든 것을 찾아야 한다. 자신이 머무는 자리에서 진리를 찾지 못하면 그는 어디에서도 진리를 찾을 수 없다.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그 자리가 그의 모든 것이다. 그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죽었다. 인생을 로또 복권으로 보는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  
62 변태가 되어버린 문학/고석근 file
편집자
2657 2011-06-14
변태가 되어버린 문학 배우 김승우가 심리학 박사 김정운 교수의 돌발질문에 당황해 진땀을 흘렸다. 김승우는 지난 24일 KB2TV 예능프로그램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출연한 김정운 교수에게 “내가 스킨십을 하는 건 좋은데 누가 나를 만지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내 김남주가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고민을 털어놨다. 이에 김정운 교수는 “김승우는 스킨십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며 “김승우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전문 용어로 ‘변태’라고 한다”고 진단해 김승우를 충격에 빠트렸다. 이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본인이 하는 건 좋은데 다른 사람이 하는 건 싫다니 말이 안 된다. 혹시 채찍 좋아하나”라고 질문해 스튜디오를 초토화시켰다.- 서울신문에서 발췌 ... 버스를 타고 가다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집에 와 검색해 보았다. 인터넷 여기저기에 이런 내용의 글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스킨십을 하는 건 좋은데 누가 나를 만지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김승우 배우의 말에 김정운 교수는 ‘변태’라고 순발력 있게 진단을 내렸다. 맞다! 스킨십은 누구나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도 김정운 교수는 ‘변태’라고 진단을 내릴 것이다. 사람은 소통을 원한다. 피부 접촉은 사람의 가장 원초적인 소통 방식이다. 그런데 이걸 싫어한다고 하면? 그는 변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슨 콤플렉스가 있어 그런 소통을 거부하게 된 그는 정상적인 인간일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스킨십은 좋은데 남이 해주는 스킨십은 싫다고 하는 것도 변태다. 자신의 몸을 우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몸은 스킨십을 원한다. 자연스러운 몸이 아니기에 스킨십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건 변태다. 이 프로에 나온 배우들이 쩔쩔맸다고 한다. 그만큼 배우들 몸이 변태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만큼’ 그들의 몸은 변태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진짜 몸이 원하는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김정운 교수는 학문의 힘에 의해 ‘다른 사람들보다 자연스러운 몸’을 만든 것 같다. 사람의 몸은 소통을 원한다! 소통의 가장 원초적인 방식은 접촉이다! 이 두 가지 전제는 사실 어려운 게 아니다. 인문학 책에 나오는 상식이다. 그런데 이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을 몸이 구사할 수 있느냐는 ‘상당한 경지’를 요한다. 온갖 비인간적인 사회적 규범에 의해 우리 몸은 변태가 되어버렸기에 이 상식도 책 속에서 활자의 미라가 되어 있다. 문제는 변태를 재치 있게 얘기한 김정운 교수에게서도 ‘자연스러운 몸’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몸을 배우는 게 아니라 또다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몸을 배울 것이다. 몸은 또다시 상품이 되고 만다. 이게 이런 프로들의 한계다. 그래서 자본가들이 이런 프로를 좋아한다. 상품의 이노베이션. 자본가들은 날로 진보한다. 그런데 자본가들의 입인 TV가 우리 사회의 ‘전위’에 서 있을 때 문학은 무엇을 하고 있나? 사람들이 변태라는 단어 하나에 열광하고 있을 때 문학은 무엇을 하고 있나? 이 시대의 문학은 너무나 뒤처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변태가 되어버린 것 같다.  
61 ‘선생 김봉두’를 보고/고석근 imagefile
편집자
2296 2011-05-26
‘선생 김봉두’를 보고 고석근 ‘돈봉투’를 좋아하던 김봉두 선생은 오지의 시골 분교로 발령이 난다. 물 좋고 공기 좋고 인심 좋은 그 곳에서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갈 기회만 노린다. 그러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참교사로 거듭나게 된다. 그는 시골 아이들의 찌질한 모습을 통해 어린 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결국은 자신과도 화해하게 된다. 사람은 자신의 전존재를 긍정할 때 그는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 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김봉두 선생이 자연과 사람이 하나로 어울려 사는 공동체 사회 속에 있었기에 이런 기적이 가능했던 것이다. 공동체 사회는 모든 것을 정화시킨다. 그 안에서는 어떤 더러운 것도 깨끗하게 정화되고 만다. 선하게 살려는 사람이나 악하게 살려는 사람이나 모두 선하게 된다. 모든 것을 깨끗이 정화시키는 대자연처럼. 자연과 사람이 산산이 조각나 있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악하게 사는 사람이나 선하게 살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이나 결국은 모두 악하게 되고 만다.  
60 그들은 진보를 떠날 수밖에 없었을까? /고석근 file
편집자
1953 2011-05-12
그들은 진보를 떠날 수밖에 없었을까? 1. 한 민주노총 조합원의 이야기 그는 KT의 말단 기술직 직원이다. 전봇대에 올라가 전화선을 가설하고 수리한다. 노조를 하기 전에는 전봇대에 올라가는 게 창피했는데, 민주 노조를 하고부터는 자신이 하는 일이 당당해지더란다. 자신이 수리하는 전화선을 통해 사람들이 마음을 주고받는다는 게 자랑스럽더란다. 그는 민주 노조 활동을 통해 ‘인간이 되는 기적’을 체험한 것이다. 2. 어느 유명 진보인사에 대한 이야기 어느 날 그는 대학시절에 함께 운동했던 동창 집에 갔다. 밤 새워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 얘기도 나누고 심신도 달랬다. 누구나 이렇게 한다. 문제는 아내였다. 아내는 그들의 시중만 들었다. 끼워주지 않더란다. 그녀는 종년 같은 기분이 들었단다. 정말 그들이 아내를 무시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민에 빠져’ 아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얘기를 들으며 가슴이 아팠다. 진보는 큰 것에 대해선 민감하지만 작은 것에 대해선 너무나 둔감할 때가 많다. 왜 그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왜 그녀의 마음과 공감이 되지 않았을까?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픈 그녀는 왜 그들의 관심 밖이었을까?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참으로 슬프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진보를 원하지만 구체적인 진보의 모습을 보고선 실망할 때가 많다. 3. 내가 빈민 단체에서 경험한 이야기 철거 지역에서는 치열한 투쟁이 일어난다. 삶의 터전을 잃은 그들은 그야말로 가열찬 생존 투쟁을 한다. 그때의 그들은 너무나 아름답다. 함께 싸우며 그들과 나는 인간의 짙은 향기를 맡았다. 그러나 문제는 투쟁이 승리로 끝나고 나서 삶의 터전을 쟁취했을 때다. 포근한 아파트에 살게 된 그들은 차츰 소시민의 삶 속으로 빠져든다. 자녀 교육도 시켜야 하고, 아프면 병원에도 가야 하고 여가 생활도 해야 하는 그들에게 진보적 삶이란 어떤 것일까? 소시민으로 전락해가는 그들을 보며 나는 절망했다. 4. 왜 지하철 노조가 민주노총을 떠났을까? 한때 중요한 민주 노조의 큰 축이었던 지하철 노조가 떠났다. 그들이 가는 길은 분명 죽음의 길이다. 자본주의에서 어떻게 자본과 투쟁 없이 행복한 삶이 주어지겠는가? 하지만 마냥 그들을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진보가 그들에게 주지 못한 것들이 과연 불가능한 것들이었을까? 진보는 그들에게 삶의 구체적 비전을 보여줄 수 없었을까? 변혁 운동하는 사람들과 대안 운동하는 사람들이 결합할 순 없는 건가? 아직 우리 운동의 역량이 약해 그들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건가? 그들은 결국 천민자본주의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함께 투쟁해야 한다고 그들을 설득할 순 없는 건가? 삶의 구체적 진보도 함께 찾자고 설득할 순 없는 건가? 5. 자본을 넘어서는 대동 세상을 향해 진보의 아름다움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손잡을 순 없는 건가? 각자 삶의 터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진보적 삶을 살며 모두 하나가 될 순 없는 건가? 자본주의에서는 진보적 삶이 아니고서는 어떤 삶도 올바른 삶일 수 없다. 대기업 노조들이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정신이 없는 물질이 과연 그들의 행복을 담보해 줄 수 있을까? 우리가 바라는 아름다운 세상은 먼 훗날 오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지는 아름다운 삶은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변혁과 대안이 하나 되는 우리의 운동을 간절히 소망한다.  
59 ‘소오강호(笑傲江湖)’를 보고 /고석근 file
편집자
2987 2011-04-23
‘소오강호(笑傲江湖)’를 보고 TV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중국 무협 드라마 ‘소오강호’를 접하자마자 나는 홀린 듯이 이 드라마에 빠져 들어갔다. 나는 꿈 많은 고등학교 시절을 무협지와 함께 보냈다. 졸업하면 취직이 100% 보장되는 국립학교라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학생들은 노는 일에 몰두했다. 나는 노는 축에 끼지 못해 무협지를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만화가게에 들어서는 순간 내 온 몸은 전율했다. 와룡생 작품들은 내게 무궁무진한 세상을 보여주었다. 나는 ‘무협 세상’을 직접 만나기 위해 태권도를 배웠다. 무협 영화도 몰래 자주 봤다. 나는 대학에 진학하고 싶은 열정을 이렇게 식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미래의 꿈이 없는 소년은 참으로 슬펐다. 헤르면 헷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는 내가 그 수레바퀴에 깔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무협지를 통해 청소년기를 ‘보람 있게’ 보냈다고 생각한다. 분명 무협지는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게 한다. 무협지가 보여주는 세상은 사실 얼마나 허황된 세상인가! 하지만 무협지에는 ‘인간 세상의 궁극적인 문제’가 담겨 있다. 특히 나는 무협지의 멋있는 부분이 선과 악을 다룸에 있어서 이분법을 넘어서는 그 통쾌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유식하게 얘기하면 대극합일이다. 무협지에는 정파를 표방하는 선 쪽에서 항상 진짜 악이 나온다. 이것이 그 당시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소년의 눈에는 이 세상의 가식이 훤히 보였나 보다. 소오강호의 주인공 영호충도 정파인 화산파의 촉망받는 제자다. 그의 스승 악불군은 군자검이라 불리는 ‘군자’다. 항상 점잖은 그의 모습에서 나는 그의 악을 예감한다. 역시 그는 비급 규화보전을 온갖 사악한 방법으로 얻어 무림지존에 등극하려 한다. 그의 악행의 그림자에 그의 제자 영호충이 갇힌다. ‘선’은 언제나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악의 대표인 마교 일월신교 교주의 딸 임영영은 우여곡절 끝에 영호충과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선과 악은 통합되어야 진정한 선이 된다. 심층심리학의 대가 융의 말이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 보이는 악들은 진짜 악이 아니지 않는가? 온갖 잡범들이 어찌 이 세상의 악을 대표할 수 있겠는가? 우리 주변의 선들도 진정한 선이 아니다. 선을 행한다고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온갖 선행들은 진정한 선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지 않는가? 이 세상의 진짜 악은 우리를 악하게 살 수밖에 없게 하는 ‘자본주의’ 아닌가? 따라서 진정한 선은 이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속에 사는 한 돈을 최고로 섬기는 우리는 진짜 악에 놀아날 수밖에 없다. 진짜 악이 만든 매트릭스 안에서 우리는 선과 악을 구분하며 결국은 악하게 살게 되는 것이다. 선을 표방하는 진짜 악, 악불군을 제거하고 영호충과 임영영은 피리와 금으로 소오강호(강호를 비웃다)를 합주하며 하나가 된다. 세상의 본질은 떨림, 영원한 音(음)인 것이다. 선과 악의 대극을 극복해야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영원한 音(음)의 세상. 그 세상은 그야말로 젖과 꿀과 음악이 흐르는 지상낙원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프로그래밍하고 있는 ‘자본’은 선을 표방하며 우리를 선과 악의 쳇바퀴 속에 가둔다. 선과 악의 굴레는 영원한 형벌이다. 이 굴레를 벗어나면 음악만이 가득한 세상인데.  
58 우화1 - 태풍이 불던 날 /고석근 file
편집자
2062 2011-04-15
우화1 - 태풍이 불던 날 고석근 우화1 - 태풍이 불던 날 원시사회에서는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해주면 도와준 사람이 도움을 받은 사람 에게 빚을 지게 된다 태풍이 몹시 불던 날, 계곡의 흙들이 갑자기 불어난 물에 마구 쓸려 내려갔다. 산허리의 흙들은 이 광경을 안타깝게 지켜보아야만 했다. ‘아, 어떻게 해?’ 산허리의 흙들은 발을 동동 굴렸다. 계곡은 점점 더 깊이 패어갔다. 나무들의 뿌리가 앙상하게 드러났다. ‘아, 저러다간 계곡의 나무들이 다 죽을 거야.’ 산허리의 흙들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의 손을 잡고 일제히 계곡으로 굴러갔다. 깊게 패인 계곡을 자신들의 몸으로 채워갔다. 하늘이 쩍쩍 갈라지며 비가 마구 쏟아졌다. 계곡의 흙들은 서로의 몸을 더 힘껏 부둥켜안았다. 몸이 찢겨져 나가는 고통을 이를 악물고 견뎠다. ‘힘내자.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이 계곡의 나무들은 다 죽어!’ 다음 날 아침, 언제 그랬냐는 듯 태풍이 멎고 비가 그쳤다. 하늘엔 햇빛이 쨍쨍 비쳤다. 세상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계곡은 처참했다. 마구 파헤쳐지고 크고 작은 돌들이 앙상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 계곡의 나무들은 무사했다. 산허리의 흙들 덕분에 간신히 목숨들을 구했다. 산허리의 흙들은 계곡의 나무들을 보며 너무나 기뻐 눈물을 글썽였다. ‘아, 우리가 해냈어.’ 산허리의 흙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계곡의 나무들은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가는 숨만 간신히 내쉬고 있었다. 산허리의 흙들은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갔다. 그들의 얼굴엔 깊은 평화가 감돌았다. 햇살이 그들의 얼굴을 밝게 비추어주었다. 바람도 그들의 얼굴을 곱게 쓰다듬으며 지나갔다. 산허리의 흙들은 악몽을 꾸었다. 자신들의 몸을 요상하게 생긴 괴물들이 갉아먹는 꿈이었다. 아삭... 아삭... 그들은 생시처럼 그 소리를 선명하게 들었다. ‘아... 아...’ 그들은 신음을 토해냈다. 신음하던 산허리의 흙들은 너무나 몸이 아파 잠에서 깨어났다. ‘아니? 이럴 수가!’ 그들은 꿈에서 일어난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 것을 알고 경악했다. 자신들이 목숨을 바쳐 도와준 계곡의 나무들이 자신들 몸 깊숙이 뿌리를 박아 놓고 자신들의 피를 빨아 먹고 몸을 갉아 먹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피가 거의 빠져나가고 몸이 너덜너덜 찢겨져 나간 산허리의 흙들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신음소리만 토해냈다.  
57 자연과 어머니/고석근 file
편집자
1919 2011-03-28
자연과 어머니 天地不仁 천지는 어질지 않다 - 노자 우리는 자연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다. 흡사 철부지 아이가 어머니를 대하듯이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릴 적에는 어머니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시는 사랑 가득한 어머니로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착한 어머니와 악한 어머니 사이의 갈등을 해소해주기 위해 옛이야기에서는 계모가 등장한다. 계모는 어머니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렇게 어머니를 둘로 갈라 아이는 자신의 어머니 상을 훼손시키지 않고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 품 안의 자식은 언젠가는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그래서 원시인들은 성인식을 혹독하게 치른다고 한다. 아이는 죽음을 체험하며 그때까지의 ‘아이’는 죽고 ‘어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고 한다. 이 ‘어른’의 눈에는 비로소 어머니가 한 ‘여인’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자연은 삼라만상의 어머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연-어머니’를 아이의 눈으로 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자연을 사랑의 화신으로 보는 환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어머니에게 마구 발길질하며 떼를 써도 통하리라는 생각을 은연중 하고 있는 것 같다. 산과 강을 마구 파헤치고, 도시를 아무 데나 만들고, 방사능 같은 물질을 함부로 만들어도 ‘어머니-자연’은 오로지 사랑을 주실 거라는 환상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일본 대지진’을 겪으며 사람들은 절대 자연은 어질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이 언제 어질고 어질지 않았나? 그것은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아이’의 눈을 볼 때 어머니는 어질기도 하고 어질지 않기도 한 것이다. ‘어른’의 눈으로 보면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사시는 것 뿐이다.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 노자 자연은 ‘스스로 그러할’ 뿐이다. 아이처럼 응석받이로 살면 언제고 자연은 인간에게 가혹할 것이다. 스스로의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어른의 마음으로 자연을 대할 때 자연은 ‘스스로 그러할’ 것이다. 우리도 함께 스스로 그러하게 살아갈 때 까지 우리 인간은 ‘어머니-자연’에게 수시로 버림받는 아이가 될 것이다.  
56 일본 대지진’을 보며 /고석근 file
편집자
1966 2011-03-15
‘일본 대지진’을 보며 고향에 다녀오느라 뉴스를 못 봤는데, 일본에 대지진이 일어났다고 한다. 시장에서도, 기차역에서도, 기차 안에서도, 전동차 안에서도, 평시와 똑 같았는데 지구 한 켠에 대재앙이 있었다. 사망자만 수천 명, 수만 명이 될 거라고 한다. 온 몸에 공포감이 음습해 온다. 누군가는 그런다. “이제 아등바등 살고 싶지 않다”고. TV에서도 “자연의 대재앙 앞에 숙수무책인 인간, 어쩌고저쩌고...... .” 한다. 작은 인간이 큰 자연 앞에 경외감을 느끼는 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도 자연 아닌가? 작은 자연이 큰 자연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이상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긴 어린 시절을 부모에게 의탁해서 산다. 그래서 커서도 자신보다 더 강한 것 앞에 의존하려는 ‘유아 콤플렉스’가 있다. 어른이 되면 스스로의 삶을 이끌어가는 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힘든 상황에 부닥치면 떼쓰거나 부모 앞에 용서를 구하듯 위기 상황 앞에 무조건 무릎 꿇고 빌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조금 마음에 위안은 되겠지만 결국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마음만 점점 약해진다. 이번 대재앙에서도 우리는 지혜를 얻어야지 아이처럼 응석을 부려서는 안 된다. 대지진도 자연이고 우리도 자연이다. 우리는 무한히 자연에 대해 경외감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자신이 자연인 건 잊어버리고 재앙을 일으키는 자연만 자연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번 대재앙을 맞이하면서 자연에 대해 우리가 잃어버렸던 경외감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자연을 함부로 대하는가? 거기엔 인간의 몸을 함부로 대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런데 언론을 위시하여 많은 사람들은 ‘자연의 힘 앞에 속수무책인 인간’만 언급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이번 대재앙에서 아무런 지혜도 얻지 못하고 큰 상처만 안고 살게 될 것이다. 자연에 맞지 않는 도시 구조, 주택 구조, 삶의 형태, 이 모든 것이 이번 기회에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인류의 많은 지혜들을 서로 죽고 죽이는데 써오지 않았는가?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사람이 사람을 제외한 모든 자연을 약탈하는 구조로는 이런 대재앙은 이제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인류가 언제 대재앙 앞에서 지혜를 얻었던가? 마지막까지 가지 않았던가? 우리가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은, ‘자연 앞에 숙수무책인 인간’을 벗어나는 것이다. 조금만 인류사 자료를 찾아보면 자연과 더불어 잘 살아온 인간의 경험은 무수히 많다. 인간은 ‘자연 앞에 숙수무책인 인간’이 절대 아니다. 이런 말을 유포하는 사람들은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지금의 ‘자연스럽지 못한 세상’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이거나 그들에게 세뇌된 사람들이다. 인간도 자연이다. 큰 자연의 재앙 앞에 ‘자연스럽게’ 삶의 지혜를 찾아내야 한다. 이번 기회에 아주 조금이라도 ‘자연스러운’ 지혜를 찾아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55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고석근 file
편집자
2068 2011-03-03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한 ‘유망한’ 시나리오작가의 죽음이 나에겐 지독히도 낯설었다. 국회의원과 정부까지 나선 사회적 관심은 더 낯설었다. 학비 때문에 피자 배달을 하다 차에 받혀 죽은 아이들의 죽음 속에서 그의 죽음은 아주 특별했다. 그는 이웃집 문에 쪽지를 붙일 게 아니라 문을 두드려야 하고, 친구들에게 전화라도 걸어야 했고 피자 배달이라도 해야 했다. 게다가 그의 죽음이 다른 이들의 사회적 죽음을 가려버리는 건 참기 힘들었다. 위 글은 2011년 3월 2일자 한겨레신문 칼럼 <아주 낯선, 죽음의 풍경들- 곽병찬 편집인 씀>의 일부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참으로 아팠다. <아주 낯선, 죽음의 풍경들>은 우리 사회의 사회적 죽음들,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들의 죽음에 대해 분노하고 아파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한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건가? 그의 죽음이 사회적 이슈가 되어 기층 민중들의 사회적 죽음을 묻어버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이 시대 지배세력들의 지배전략이지 그의 죽음이 사회적 죽음이 아닌 것은 아니다. ‘피자 배달이라도 하라’는 말은 내 가슴을 너무나 아프게 한다.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 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먹고 살 권리를 타고 난다. ‘좋은 학교’ 나오고 시나리오도 잘 쓰는데도 먹고 살 수 없다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나리오를 잘 쓰는 사람은 시나리오만 써도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 그가 피자 배달해서 먹고 살면 우리는 좋은 드라마를 볼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많은 시간을 TV를 보며 사는데 말이다) ‘진보 신문’에서 이런 글을 읽는다는 건 참으로 슬프다. 진보는 우리 모두 함께 힘을 모아 그 힘이 보수, 수구를 능가할 때 가능하다. 단지 기층 민중들의 죽음에 대해 분노하고 아파하는 것으로 진보의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 같아 이 칼럼은 내게 슬프기 그지없다. 글에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이 녹아나고 그 사랑의 힘으로 이룩하는 진보가 진정한 진보일 텐데 말이다. 어디선가 읽은 얘기다. 한 노시인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니까 후배 시인이 충언을 했단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시지 마십시오. 건강을 생각하셔야죠.” 그러자 그 노시인은 이렇게 대답했단다.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술 마시는 것도 중요하네.” 몇 년 후에 그 노시인은 돌아가셨다. 아마 그 동안 계속 술을 마셨을 것 같다. 위 칼럼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죄! 다만 희생자를 타자화한 것은 잘못이다. 이웃은 우리이지, 타인이 아니다.’라고 끝을 맺는다. ‘피자 배달이라도 하라’는 말은 희생자를 타자화한 사람의 목소리 같다.  
54 ‘대물’을 기다리며 /고석근 file
편집자
1918 2011-02-22
‘대물’을 기다리며 시골에 살 때였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학교운영위원을 뽑는다는 가정통신문을 가져왔다. ‘한번 출마해볼까?’ 나는 그 당시 아이들을 시골에서 기르고 싶어 큰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에 가까운 시골로 이사를 갔다. 아이들을 분교에 보내어 신나게 뛰어놀게 했다. 학교가 파하면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거나 산과 들로 뛰어 다니며 놀았다. 집 앞에는 개울물이 졸졸졸 흐르는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그때만 해도 시골에 빈집이 없었다. 옛 마을의 정취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빈 땅들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이런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분교가 폐쇄되었다. 마을 분들이 폐교에 앞장섰다. 우리 가족은 본교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갔다. 어설프게 농사를 짓던 나도 지역 신문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지역 신문사에서 일을 하며 자연스레 지역 운동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정치가 민주화될 때라 사회 분위기도 많이 부드러웠다. 나는 교육은 교사와 더불어 학생, 학부모가 함께 교육의 주체가 되어야한다는 주제의 글을 신문에 많이 썼다. 운영위원 선거하는 날 아이들 학교에 갔다. 선거 유세는 1분으로 제한한다고 했다. ‘세상에, 1분이라니!’ ‘학교에서는 교육의 민주화가 두려울 거야.’ 나는 출마 의사를 밝혔다. 세 명을 뽑는데 네 사람이 출마를 했다. 한 명은 떨어져야 했다. 나는 1분이라는 짧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방인이고 다른 분들은 다들 본토박이라 내가 가장 불리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떨어지겠구나!’ 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하리라는 결심을 했다. 나는 1분 동안 이런 말을 했다. ‘저는 학교 교사로 9년 동안 근무했습니다. 그래서 학교교육의 문제점을 잘 압니다. 학부모 입장에서 이런 문제점을 고쳐 우리 아이들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개표가 진행되는 동안 내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쳤다. ‘분명히 떨어질 텐데 괜히 출마했나 보다. 이 무슨 망신인가?’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내가 1등으로 당선되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출마한 사람들은 다들 그 지역의 유지들이었다. 오랫동안 그 지역에서 공무원을 하며 신망을 쌓은 분, 어머니 회장을 하며 탄탄한 지지 기반을 가진 분, 이 분들을 제치고 내가 어떻게 1등으로 당선되었단 말인가? 지금 생각해도 기적이다. 학부모님들이 내게 압도적으로 보내준 성원의 의미는 무엇일까? 불과 몇 년 동안 그 지역에 산 내게 그 분들은 무슨 기대를 걸었을까? 나는 그 분들의 기대를 생각해보면 지금도 눈시울이 붉혀진다. 나는 그 기대에 별로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운영위원장이 선거에서 1등으로 당선된 내가 아니라 전직 공무원이 되었다거나, 어머니 회장의 입김이 너무 강하다거나, 학교 당국의 힘을 넘기엔 그 벽이 너무 두꺼웠다는 등 여러 핑계를 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내가 운영위원의 역할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학교운영위원보다 지역 신문사 일에 큰 비중을 두었기에 운영위원의 소임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내가 제안해서 학생들을 위한 다채로운 프로그램들(방과 후 수업과 체험 학습의 다양화)을 운영했다거나 학교 신문을 만드는 등 조그만 개혁들은 해냈지만 너무나 미미한 것들이었다. 지금도 학부모님들이 내게 보내준 압도적인 지지를 생각해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내가 만일 그 지역에 평생 터 잡고 살 생각이었다면 아주 많은 일을 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이 크면 다시 도시로 와야 했기에 지역 활동에 온 힘을 쏟지 않았다. 작년 말에 인기 있었던 ‘대물’이라는 드라마를 생각해본다. ‘소신’ 하나로 대통령까지 되는 드라마. 이것이 과연 드라마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말 드라마의 주인공 같은 순수한 마음과 열정을 갖고 밀고 나가면 기적이 일어나리라고 믿는다. 좋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오직 하나의 생각만 갖고 밀고 나가면 실제로 대통령이 될 수 있고, 좋은 대통령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굳게 믿는다. 대선이 곧 다가온다. 나는 ‘대물’을 기다린다. 수구, 보수 세력의 벽이 너무 두텁다느니 현실적으로 그런 인물을 내세우기엔 주객관적으로 시기상조라느니 하는 생각들은 ‘현실’을 모르는 얘기다. 현실은 언제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다. 낮은 곳, 가장 낮은 곳으로 눈을 돌리면 기적은 ‘너무나 당연한 현실’이라는 것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오로지 아래만 보자. 보통 사람들, 낮게 사는 사람들, 평범하게 하루하루 사는 사람들을 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그들은 ‘대물’을 뽑을 준비가 다 되어 있다.  
53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을 보며 /고석근 file
편집자
2144 2011-02-15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을 보며 한 시나리오 작가가 굶어 죽기 전에 이웃집 문 앞에 다음과 같은 쪽지를 붙여놓았었단다. 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 32세, 참 좋은 나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 젊은 나이에 왜 먹고 살 생각부터 하지 않아 굶어 죽었느냐?’고. 나는 먹고 살 생각부터 하며 참으로 오래 살았다. 추잡하고 비루하게 오래 살았다. 어느 게 더 좋은 삶인가? 원시인들은 산과들, 강에 널려 있는 음식들을 먹으며 춤추고 즐겁게 살았다. 먹을 것이 넘치도록 널려 있는 이 현대문명사회에서 왜 우리는 먹고 살 생각부터 하며 살아야 하나? ................................................................................................................................................. 이집트 민중들의 기뻐하는 모습에 내 가슴도 마구 뛴다. 인간으로 태어난 최고의 기쁨을 느끼는 순간이리라. 이 기쁨을 모르는 인간은 삶이 재미없을 것이다. 도박으로 하루에 40억을 날렸다는 사람. 그 사람은 이런 진정한 삶의 기쁨을 몰라서 그렇게 되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삶의 기쁨을 모른다. 그냥 먹고 사는 데만 온 정신을 쏟다보니 삶이 권태롭고 가슴이 허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도박을 하고 돈 버는 재미를 느끼려 애쓰고 일중독에 빠져든다. 그러나 그의 혼은 허하다. 인간은 혼의 기쁨을 느껴야 삶이 즐겁게 되어있다. 나는 지루하고 재미없게 살다 삶이 도대체 이렇게 재미없는 게 아닐 텐데 하고 이것저것 해보고 여러 공부를 해보았다. 그러다 삶의 진수를 느끼게 되었다. 91년 운동단체에서 일하며 데모에 참가했다. 최루탄 가스를 피해 지하도에서 만난 동지들, 그 눈빛들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윽한 신뢰, 사람에 대한 믿음...... 경찰들을 몰아내고 해방구가 된 을지로 일대에서 서로 어깨 걸고 노래 부를 때의 그 벅찬 환희! 인간은 이렇게 위대하다! 그 위대함은 반드시 정치적으로 해방될 때만이 나타난다! 최고은 작가의 죽음에 대한 작가들의 논쟁. 문제는 작가라는 사람이 인간의 깊이를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글 쓰는 잔재주 갖고 작가가 된 사람이 보는 최고은의 죽음은 우리 사회의 모든 아픔이 집약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나도 91년의 경험이 없었다면 인간의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그래서 이집트 민중들이 눈물겹게 위대하다. 그들의 삶은 이제 전과는 다르리라. 사람이 보이리라. 사람의 아픔이 보이리라. 우리 사회가 ‘이집트의 경험’을 미리 했음에도 그 경험을 갖지 못한 작가! 그런 사람이 어떻게 작가인가? 최소한 작가는 시대정신만큼은 가야 한다. 먹을 게 널려있음에도 굶어 죽어야 하는 우리 사회! 최고은 작가의 죽음은 이 처참함을 보여준다.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그에게 먹을 게 주어진다. 먹고 산다는 건 인간(생명체)이기에 갖는 권리이다. 우리는 이 천부적인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 앞으로의 복지 논쟁은 이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사람은 무한히 위대하다. 하지만 그 위대함은 정치적 해방만큼이다.  
52 염치/고석근 image
편집자
2303 2011-02-08
서울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였다. 첫해 1년은 이모님 집에 얹혀 지냈다. 부모님은 내가 지켜야 할 예절 몇 가지에 대해 신신당부를 하셨다. 그중에는 식사를 할 때는 다 먹지 말고 반드시 두어 숟가락 쯤 남기라는 것도 있었다. 우리 집에 오시는 친척 분들도 그러시는 것 같아 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창 때 밥을 남긴다는 것은 고역이었다. 하지만 꼭꼭 실천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생인 사촌누나가 내게 말했다. “왜 자꾸 밥을 남기니?” 나는 ‘배불러서 어쩌고’ 변명을 했다. 그러다 사촌누나에게서 ‘밥을 남기면 설거지하기 힘들어’라는 말을 듣고서야 내 ‘시골 예의’는 끝났다. 임산부가 기다리는 택시를 잽싸게 가로채는 대학생쯤의 남자를 보았다. 붕어빵 포장마차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내 앞을 한 신사가 종종종 앞질러 가 붕어빵 1000원어치를 샀다. 남아 있는 게 세 마리 뿐이라 나는 발을 동동동 굴리며 기다렸다 샀다. 그 신사는 진열대에 놓여 있던 붕어빵이 10마리 정도라는 걸 보고서 그렇게 빨리 걸었을까. 단지 추워서 그렇게 걸었을까. 덜덜덜 떨며 기다리는 시내버스 정류장. 버스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와 달려간다. 끼어들고 서로를 밀치며 탄다. 함께 덜덜덜 떨 때는 서로 따스했는데. 밥을 남기던 ‘시골 예의’가 그립다. ‘염치’가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51 아, 복지 국가여! /고석근 file
편집자
2215 2011-02-01
아, 복지 국가여! 작년에 이빨이 두 개나 부서졌다. 아픈 이를 참고 견디던 어느 날, 이를 닦다가 뭔가 이상해 입 안을 보았더니 아픈 이가 부서져 나갔다. 헉! 이럴 수가! 입안을 헹구고 치과에 갈 채비를 했다. 속으로 치료비 걱정을 하는데, 아내가 한 마디 한다. “자기야, 아무리 비싸도 잘 치료해.”하면서 카드를 준다. “응.”하고 집을 나오는데, 세상이 아득하다. 이때 돈이 없으면 어떻게 되나? 이 닦다가 두 번이나 부서진 이를 치료하며 노후가 걱정이다. 늙으면 아픈 곳이 많아 생활비의 반이 병원비라는데...... . 치과에서 힘겨운 치료를 하며 나는 마음속으로 항상 치료비를 계산했다. ‘얼마나 나올까?’ 나는 그동안 ‘돈 걱정 없이’ 살았다. 아이들에게 그 흔한 해외 연수 하나 보내지 않고 스키니 해수욕장이니 하는 것들하고도 담을 쌓고 사니 생활비가 적게 들어 돈에 쪼들리지 않고 살았다. 내 얄팍한 주머니로도 나는 항상 즐겁게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커가면서 나는 자주 내 얄팍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게 되었다. 아이들이 군대에 갔다가 휴가를 나오면 삼겹살도 사 줘야 하고, 세배 돈의 단위도 커졌기 때문이다. 가장 무서운 건 역시 병원비였다. 한의원에서 약을 짓고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으며 내 머릿속은 항상 돈을 계산하고 있었다. 내 자신이 자꾸만 초라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돈 걱정 없이 살던 어느 날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강의가 끝나고 도서관의 담당 직원이 나를 보자며 구석으로 끌고 갔다. 나는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순순히 따라갔다. 그녀는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수그리고는 내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네?’ 나는 난데없는 그녀의 행동에 얼굴에 웃음을 띠고는 ‘왜 그러세요?’하고 농조로 말했다. 그녀가 더듬더듬하며 말하는 요지는 이랬다. 몇 달이나 내 강사료를 다른 사람에게 부쳤다는 거였다. 전에 강의했던 서예 강사에게 부쳤는데, 그 강사가 왜 자꾸 돈을 부치느냐고 해서 알게 되었단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뭘 그런 것 갖고 그러세요?’ 나는 통장을 확인하지 않고 있었기에 강사료가 입금되지 않은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때 나는 돈이 별로 필요 없던 시절이었다. 그 뒤 그분은 내게 참 잘 해주었다. 나를 꽤 인품이 있는 사람으로 착각한 것 같다. 지금 같으면 내가 먼저 강사료에 대해 물었을 것이다. ‘인품’이란 돈 걱정 없을 때 나오는 게 아닌가? 지금 내 머릿속은 돈으로 가득 차 있어 천박하기 그지없다. 돈이 한 40억 정도 있으면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가능할까? 계산상으론 가능한데 현실적으론 불가능할 것 같다. 그 돈으로 혼자서야 넉넉하게 살 수 있겠지만 자식들은 어떡하나? 사업하다 망한 자식은? 큰 병 걸려 병원에 누워있는 자식이라도 있으면? 또 취직 못한 자식은? 보육비에 허덕이는 며느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영어 유치원에 가려는 손자손녀들은? 사회복지가 안 되면 웬만한 돈이 있어서는 안심하고 살 수 없을 것 같다. 한 100억 넘으면 가능하려나? 요즘 복지가 화두다. 제발 복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최소한 ‘인간으로’ 살 수 있게, 나아가 좀 ‘안심하고’ 살 수 있게. 복지가 되어 세금 폭탄 좀 맞아봤으면 좋겠다. 내 전 재산이 초토화되어 초가삼간만 남았으면 좋겠다. 그 초가삼간에서 안심하고 살 수 있다면 내게 대한민국은 지상낙원이겠다. 복지 국가의 문제점이라고? 지금 막 죽어가는 환자에게 병 나은 뒤를 걱정하라고?  
50 월인천강(月印千江) - ‘보름달의 전설’을 읽고 /고석근 file
편집자
2179 2011-01-25
월인천강(月印千江) - ‘보름달의 전설’을 읽고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가 쓴 그림책 ‘보름달의 전설’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배반당한 뒤 깊은 산의 동굴 속에 은둔하게 된 성자와 사랑하는 여인을 욕보인 남자를 죽이고 허랑방탕하게 살아온 도둑- 이들이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고 함께 생활하던 어느 보름달 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성자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중요한 가치를 두는 사랑과 학문, 신앙을 차례대로 겪으며 모든 것에서 벗어나 지고한 정신세계를 추구한다. 성자는 언젠가부터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대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자 마침내 목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생 방탕하게 살았고 회개할 줄도 모르는 도둑의 눈에는 스승이 본 대천사가 실은 나쁜 정령의 장난임이 선명히 보였다. 성자가 본 것은 그의 집착이 빚어낸 허상이었던 것이다. 성자는 도둑에 의해 완전히 깨닫는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성자를 구원한 것은 한평생 방탕하게 산 도둑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나는 이 글을 읽으며 괴테의 ‘파우스트’를 생각했다. 파우스트는 인생의 궁극적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가를 규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학자이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을 두루 섭렵하였으나 삶의 비의에 도달하지 못한다. 절망에 빠져 방황하는 파우스트 앞에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난다.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메피스토펠레스가 대답했다. “나는 악을 추구하지만 결국은 선을 이룩하는 힘의 일부이다.” 내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 ‘이 힘’ 때문에 힘들어 한 것 같다. 마음은 물과 같이 흐르게 해야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내가 의도적으로 ‘선한’ 방향으로 흐르게 하니 마음은 제대로 흐르지 못해 꾸룩거리며 마구 아우성을 쳤다. 항상 마음이 아팠다. 마음을 더 다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은 더욱더 힘들어하고 나는 지쳐버렸다. 지친 마음을 추슬러 일어나면 세상은 정글처럼 무서웠다. 어느 날부터 내 마음은 둑처럼 터져버렸다. 눈물이 되어 한없이 흘러나왔다. 텅 빈 마음은 시원했다. 헛헛 웃음을 터뜨렸다. 스스로를 비우며 마음은 차츰 노래하기 시작했다. 마음속에 엉켜있던 돌멩이들이 노래의 근원이었다. 흐르는 마음은 맑아지기 시작했다. 내 마음에 비친 수없이 많은 달들도 함께 흘러갔다.  
49 다시 율려(律呂)로 가는 길/ 강태규 file
무궁화
2031 2011-01-18
율려(律呂)로 가는 길 지금 우리가 당장 자가용 자동차를 버릴 수 없으며, 저가 대량생산물 또는 수입상품들의 방송광고를 외면할 수 없는 세상에 있다. 여전하게도 경고 신호음은 축산농가와 강가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때이다. 신자유주의 논리체계에서는 이제, 중국, 브라질,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축산물의 유입으로 우리 농촌에는 강건너 포성(咆聲)으로 들릴 것이 분명하다. 구제역 종식 이외는 이를 멈추게 하는 방법은 없다. 우리의 몸을 국가에 방기(放棄) 당한 채, 스스로 지켜나가야 한다면 치료비 마련을 위해 스스로 악다구니로 살아가는 옹졸한 인생이라면, 우리의 먹거리 또한 국가에 담보 잡힌 채, 스스로 챙겨 먹으며 겨자를 삼키듯 살아야 하는 치졸한 인생이 된다면, 이제는 가진 자만의 의료와 먹거리가 된다면, 결국 우리의 인생이 사육 당하는 동물과 어떤 차이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답은 정해져 있다. 개인 스스로 병나지 않도록 처절하게 관리하여야 하며, 먹거리 조차 스스로 선택하거나 줄이거나 하며 살아야 한다. 모두가 자급이 가능한 심산유곡에 살 수도 없다. 결국은 제대로 된 치료와 음식에 정당한 가격을 스스로 마련해서 취득해야 하는 “고급 상품” 으로 남게 된다. 혼인을 할 수 없으며, 자녀의 교육비를 줄여야 하며, 자녀 수도 줄여야 하고, 책과 음악도 아껴서 보거나 들어야 하고, 자동차를 포기하고 열차와 버스를 타야하며, 술과 담배도 상당히 줄여야 한다. 정성들여 키운 유기축산인증 한우를 기르는 소설가 박兄 목장에서 만든 쇠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두 달 정도 소고기契를 들어서 반 근(半斤)만 사야 할 것이며, 박兄 농장의 축분(畜糞) 한 드럼에 콩 서되를 지불하고선, 집 밭에 뿌리고 오년 남짓 땅을 유기농 밭으로 복구하여 직접 야채농사를 짓고, 남는 것은 전업농 권시인과 합쳐 진짜 유기농 생협에 포장해서 팔아야 할 것이며, 손주를 국립대학 보낼 것이 아니라 유기농 대안학교를 졸업시켜 진짜 농업을 대물림해야 할 것이다. 시절이 흉흉하니, 성경 에스겔 5장 11절, 누가의 복음서 21장 11절의 예언에 맞장구치기도 하고 브라질의 예언가 쥬세리노의 예언, 화성소년의 예언에 눈길이 가기도 한다. 우리에게 지구가 허락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치더라도 여러 사설이나 전문가들의 축산분야 먹거리 진단과 조언은 이러하다. - 생산성위주의 대규모, 집중정책을 친환경적 중소규모 농장지원 정책으로 바꿔야 한다. - 통큰치킨이 지역경제와 무관하듯이 대규모 농장도 그러하다. - 사람들에게도 그러해 왔듯이 동물들에게 너무 많은 화학물질이 처방전도 없이 남용(濫用)되어 면역력이 되살려지지 않는다, 등이다. 지자체의 축산이 권장될 수 있는 지형은 차단방역이 유리한 고립된 지형, 환경오염방지가 관리, 제어될 수 있는 지역, 분뇨처리가 더욱 친환경적으로 순환될 수 있는 체계(특히, 이는 동물에 화학물질이 지극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만 분뇨 또한 유기농업에 사용할 수 있으므로)로 가야한다면 당연 전국토의 지가를 올리는 노력을 줄여야만 경쟁력있는 농장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며 당연한 귀결로서 소수 적정생산 유기축산물의 소규모별 생산과 유통으로의 전환이 당면과제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보다 더 큰 시련들을 벌써 잊고 있듯이 커다란 충격들은 너무 쉽게 잊는 경향이 있다. 절박한 징후를 외면할 수 없는 때가 이미 왔다. 돌이켜보면 자식은 큰아들에게만 몰빵이요, 장사는 큰 판들만 마름잡이로 내세우는 세상에 있(어왔)고 망할 듯한 금융자본은 명(命)이 길고 먹거리생산 농업분야는 목숨만 부지하는 듯하다. 종이돈과 숫자로 돈놀음하는 신자유주의 세상에, 먹거리생산의 농자천하지대본은 점점 균열을 돌파할 여력조차 급속하게 소진하기도 하고 탈진 당하기도 한다. 언젠가 우리 것을 글로발이라는 귀신에게 다 빼앗기기 전에 세상을 바꾸거나 바뀌어 농민이 건강해지는 그런 세상을 꿈꾸어 본다. 결국, 문화(식생활 문화)요, 정치(상생과 율려)요, 섬김의 사상(생물 동등권, 神聖性, 이타주의) 속에 마스터 키(만능열쇠)가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48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자 /고석근 file
편집자
2082 2011-01-18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자 배낭을 메고, 오리털 잠바를 입고, 귀마개를 하고서 허적허적 약수터에 갔다. 멀리서 누군가가 어른거린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낯이 익은 젊은이였다. 서로 인사하고 벤치에 앉았다. 그가 말을 걸었다. 말을 나누긴 처음이었다. 그는 물리치료사라고 했다. 몸이 아파 잠시 쉬고 있노라고 했다. 앞으로 먹고 사는 게 걱정이라고 했다. 해맑은 젊은이의 얼굴에 그림자가 어렸다. 나는 그에게 삶을 길게 보고 살라고 말했다. 앞만 보며 바쁘게 살다 되면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고. 물을 다 받고 그와 나는 각기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섰다. 눈길을 조심조심 걷는데, 그가 “먼저 가겠습니다.”하며 내 옆을 지나 겅중겅중 뛰어간다. 오! 이 눈길을...... . 나는 아이젠을 하고서도 한발 한발 조심조심 걷는데. 나는 그를 눈부시게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는 사라지고 산은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나는 내 젊을 때를 생각하며 빙긋이 웃었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저 젊은이는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할까. 건강이 안 좋은 것도 문제지만 가장 고민스러운 것은 먹고 사는 문제일 것이다. 저렇게 산을 펄펄 나는 몸으로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니! 우리가 젊을 때는 취업이 100%였다. 막노동을 해도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래서 꿈을 꿀 수 있었다. 그 꿈은 차츰 삶의 무게에 짓눌려 바래어갔지만 한 때 꿈을 꾸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꿈도 젊을 때 꾸어야지 나이 들어 꿈을 꾸려하면 어지러운 꿈만 꾸게 된다. 과학자들은 젊을 때 꿈을 꾸지 않으면 꿈을 관장하는 뇌세포가 쇠퇴해버린다고 한다. 삶에 필요 없나보다 하고 사라지겠지.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가 검찰 퇴진이후 법무법인에서 7개월간 7억원의 급여를 받아 전관예우가 아니냐는 의혹 등을 받다가 결국 자진사퇴했다. 그는 심히 억울하다고 말했다. 그의 ‘멀쩡한’ 얼굴에서 나는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사람이 수치심을 느끼는 건 타고난 본성이라고 하는데, 그는 어떡하다 수치심도 모르게 되어버렸을까. 우리나라 거의 모든 고위직들은 정동기 후보자와 비슷한 것 같다. 오랫동안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축재를 하다 보니 그게 당연하게 되고 드디어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진화’한 그들은 과연 행복할까. 나는 결단코 그들은 불행하다고 단언한다. 내가 살면서 회득한 지식들과 살면서 깨달은 지혜들이 그렇게 말한다. 사람은 마음 깊은 속에서 행복을 느껴야 진정으로 행복한 존재다. 그들의 깊은 마음속에서는 불안이 똬리를 틀고 있다. 삼라만상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의 깊은 마음은 어느 누구도 속일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불쌍하다. 불쌍한데 그들이 쌓아둔 돈들이 우리들을 불행하게 하기에 그들에게 분노할 수밖에 없다. 행복이라는 단어로 삶을 보면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데 모두 불행하게 살고 있다. 모두 불행한 이 길을 왜 사람들이 가고 있는 걸까. 그것은 사람들이 아직 행복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MB정부를 통해 많은 걸 깨달은 것 같다. 사람은 돈만으로 행복할 수 없고, 돈만 좇아서는 돈도 벌 수 없다는 것을. MB를 통해서는 부자도 될 수 없고, 행복하게 살 수도 없다는 것을. 돈을 부정한 방법으로 그들의 곳간에 쌓아 둔 그 소수들 때문에 우리 모두 불행하게 산다는 것을 어슴푸레 깨달은 것 같다. ‘정의’가 작년에 우리 마음에 큰 물결을 일으켰다. 올해는 ‘행복’이 파도치기를 고대한다. 정의와 행복이 만나 거대한 역사의 강물을 이루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