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씨만치만 보고 가소


 전철역 계단을 헉헉 올라간다. 몇 계단 앞에서 풍만한 몸의 한 처녀가 올라간다. 그녀는 자신의 엉덩이를 가방으로 가리고 있다. 뒤에서 누가 볼까봐 가리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내 눈은 시야를 잃는다. 눈앞을 똑바로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옆을 볼 수도 없고, 내 자세가 어정쩡해진다. 허적허적 간신히 계단을 다 올라가자 그 처녀는 가방을 옆으로 내린다. 이제 마음 놓고 봐도 된다는 건가. 복작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죄스러워진다. 초라해진다. 

 다른 여자들도 본다. 가지가지의 옷들, 옷을 보면 그 여자가 자신의 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보인다. 자신들의 몸값(?)을 여자들은 정확히 알고 있다. 남자들도 그 몸값을 정확히 알고 있다. 엉덩이를 가린 처녀는 자신의 높은 몸값을 그렇게 은근히 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나 보지 마! 그 처녀가 자신의 몸을 ‘합법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남자’는 따로 있을 것이다.

 시선이란 보이는 것들을 장악한다. 그래서 함부로 보면 ‘눈 내리 깔아!’라고 명령한다. 세상엔 보는 사람들과 보이는 것들(사람을 포함하여)로 나눠진다. 보는 사람들은 강자고 보이는 것들은 약자다. 그래서 ‘마주보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마주볼 수 있을까? 길을 가다 마주치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과 마주 보고 있는 걸까? 분명히 한 사람은 보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시선을 피할 것이다. 나무를 봐도 우리는 마주 보지 못한다. 온 몸을 무장해제하고 서 있는 나무와 ‘만물의 영장’인 사람의 시선은 다를 수밖에 없다.

 TV에서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을 보면서 나는 원시인들의 눈을 주로 봤다. 그들의 눈은 한없이 아름답다. 하늘의 해처럼, 달처럼, 별처럼, 그들의 눈은 그냥 보고 있다. 삼라만상 모두 평등하게 보고 있다. 그들의 눈앞에서 모두 평등하다. 그들은 나무를 볼 때나 벌거벗은 사람을 볼 때나 눈빛이 똑같다. 남녀노소를 볼 때도 똑 같다. 그들의 세상에서는 모두 ‘누드’이기 때문일 것이다.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자야

   연밥 줄밥 내 따 줄게

   이내 품에 잠자 주오

   모시야 적삼에 반쯤 나온

   연적 같은 젖 좀 보소

   많이야 보면 병 난단다

   담배씨만치만 보고 가소

  

   우리 민요 '상주 모내기 노래' 중에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나날들이다. 우리가 시원한 옷차림의 서로를 담배씨만치만 보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