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의 김봉남을 추모한다


  설핏 검색어 맨머리에 앙드레 김이 솟았으나 무시했다.

그러나 일출 전, 댓걸음으로 나선 봉화읍의  식당 의자에 놓인 스포츠신문에서 그의 운명을 확인했다.  이토록 유명인 이었던가.  잠이 깬 듯 놀랬다.


  그를 처음 길거리에서 마주치던 때는, 대략 1972~ 1976년 사이 즈음으로 기억한다. 당시 수도육군병원이 있던 자리가 송현동이었고,  동십자각 왼켠 사진관자리 훨씬 못가서 프랑스문화원이 있었고, 삼청공원 방향으로 화랑가가 생기기전, 즉, 모퉁이 구멍가게 수도상회가 있었다.  그 옆에 한옥식 시공화랑과 우리 옆집 국제화랑이 단독주택을 증개축하여 개관하였으며, 아버지의 빗자루 세례를 피하기 위해 피하던 돌담은 그대로 포목점으로 남아있는 그 거리가 삼청동의 입구에 해당하는, 내 고향 소격동이다.

  아마도 경복궁 궁내로 출입하던 무신을 섬기는 일가들이 산 곳으로 추정하며, 어찌하였던, 소격서 혁파가 이루어 진 것도 역사교과서에 줄을 친 기억이 있는 것으로 볼 때, 그에 따른 폐단이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다.


  바로, 은행나무가 가로수로 있는 그 길목에 김봉남과 여러번 조우했었고, 그럴 때마다 그의 국제적인 미소에 어색해 하던 시절로 내 기억은 되돌아갔다. 

  그의 의상실이 그 길목에 있었다.

당시, 또래나, 동년배들에게서 고 김봉남선생과 관련된 어색한 이야기가 빠지질 않았다. 즉, 남색(男色)과 관련된 말들이 대부분이었으며, 그것이 사실인지, 아니면 그의 국제적인 미소 때문에 와전된 이야기인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다만, 고인이 지병으로 일몰하기 까지 동질(同質)의 디엔에이로 구성한 가족은 없었다는 것이 그 해답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것조차 구닥다리 생각으로 넘기고 싶다. 여름 파고다 극장 맨 앞자리에 영화를 보던 내가 오른편에 앉은 남학생이 내 무릎을 더듬던 것에 기함을 지르던 때도 있었지만, 동성애 DNA의 존재를 안 것은 그, 한 참 이후였다.


  엘비스 프래슬리의 구렛나루와 하얀 자켓, 그리고 흰색 나팔바지의 복장에서도 그의  백색영감을 떠올리기도 한다. 우리 집에 맏인 큰형은 한국과학발전에 이바지한 공으로 동백장을 수여 받은 적이 있는데, 그런 훈장만으로도 집안에 큰 경사라 했다. 그것도 살아서.

  고 김봉남 선생에게는 문화훈장이 수여되었다. 한국의 아름다움을 국제적으로 선양한 아주 뛰어난 디자이너, 김봉남. 백의(白衣) 민족의 뒷면에 자리하는 평민의 색을 천사의 색으로 둔갑시킨 김봉남 선생에게.


  서울 상공에 비행기가 날았다고, 삼청공원 뒷산 말바위에서 소세지 같은 불덩이가 날던 곳, 백주에 평양에서 보낸 책자가 하늘에서 떨어지곤 했던 곳, 깔끔한 탱크들이 길 옆으로 서 있던 곳. 우리 집은 대문을 잠굴 필요가 전혀 없던 곳, 팔뚝만한 굵기의 개나리 나무가 한 그루 있던 집 마당이 김봉남의 부고와 같이 깊은 기억의 우물에서 튀어 올라왔다. 우리 집 담벼락은 절대로 우리가 칠한 적이 없던 곳. 마당 빗자루로 혼찌검을 내시던 아버지도 가고 없다.


  한참, 뺀질한 얼굴의 대학 후배가 총리로 지명되었다.

내 둘째형은 그의 밑에서 부지사일을 잠시 하기도 했다. 

나는 어쩐 일인지, 봉화읍에서 아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잊고 싶은 일들을 다시 버리느라 풍기온천에서 목욕재계를 했다.

(옷장 앞에서 옷을 추스르는 중에, 장난끼 넘치는 중년이 그의 또래에게, “어? 봉남이가 작아졌네?” “허, 짓궂기는......”)

앙드레 김은 지병을 알고도 제 몸 보다 일을 더 사랑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납골당의 뼈로, 다시 그의 순백으로 다급하게 돌아갔다.


  병이라는 것은 그만, 쉬라는 몸이 보내는 비상신호이다.

때론, 제 몸을 잊고 사는 것은 명(命)을 재촉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홀리면 저녁 밥상으로 호출하는 어머니의 벼락호통 직전까지 땅 따먹기 하는 아이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제 몸 잊고 하얀 옷을 남기고 간 김봉남 선생을 추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