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는 것을 줄 수 있는 세상

 

 옆집에 유치원 다니는 여자 아이가 있다. 아침마다 아이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집 앞에서 유치원 차를 기다린다. 나는 길을 가다 그들과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눈다. “안녕하세요?” 하지만 그 시간은 아주 짧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내 얼굴은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간다.

 가끔 혼자 집에 오는 아이를 만날 때가 있다. 아이는 큰 가방을 메고 고개를 수그리고 앞만 보며 걸어간다. 나는 아이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말을 걸지 않아야 할 것 같아서다. 아동 성폭행범의 다수가 아는 사람이라는 단어들이 그 순간 뇌리 속에 떠오른다. 아이를 모르는 체 묵묵히 가는 게 맞는 것 같다. 가슴이 쓰라리다. 어깨를 툭 치고 장난이라도 치고 싶은데, 그렇게 하면 아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중에 엄마는 뭐라고 할까? 나는 ‘잠재적 범인’이라 조용히 내 길을 가야 한다.

 조용히 내 길을 가는 것, 이것이 이 시대의 도(道)다. 길을 벗어나게 되면 나는 ‘이 시대의 정상적 인간’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디서 비명 소리가 들려도 못 본 체 못 들은 체 한다. 그들에게 양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들이 자신의 길만 가는 것이 이 시대의 도(道)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로지 묵묵히 자신의 길만 간다. 그래야 이 세상이 잘 돌아간다. 세상은 거대한 기계다. 우리 각자는 부품. 부품이 할 일은 그저 기계가 돌아가는 대로 같이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런데, 나는 사람이라 내게 남는 것을 남에게 나눠주고 싶다. 내게는 넘치는데, 남에겐 부족한 게 너무나 많다. 그리고 내게 부족한 것들을 남에게서 받고 싶다. 집에 혼자 오는 옆집 여자 아이는 혼자서 집에 오는 길이 얼마나 심심하고 두려울까. 옆집에 사는 내가 반겨하며 장난쳐주면 얼마나 좋아할까? 둘 다 신나게 갈 수 있는 길을 둘 다 심심하게 길을 가야 하다니!

 전철역에서 무거운 짐을 든 노인들에게도 그냥 묵묵히 지나친다. 내겐 그 정도의 힘과 시간이 있는데. 저번에 약수터에 갔을 때 한 할머니는 내게 긴 라이프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시간이 남는’ 나는 그 이야기를 즐겁게 들었다. 그 할머니는 얼마나 이야기가 하고 싶었을까? 하지만 들어줄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들어 줄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1억 연봉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억! 했다. 그런데 지금은 10억 연봉이라는 말이 들린다. 내 목소리는 아예 나오지 않는다. 10억 연봉자들은 어떻게 사나?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쓰고 사나? 하지만 곰곰이 따져 보니, 늘 허덕허덕 살 것 같다. 10억을 벌기 위해 항상 촌음을 아껴 써야 할 테고, 또 그 돈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써야 할까? 그들은 나눔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사람은 적게 가질수록 나눠 줄 게 많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많이 가지려 혈안이 된 사회다. 그러니 점점 더 우리는 나눔을 잊어버리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상적인 세상을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세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누가 능력껏 일하겠냐고 되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때 나는 말한다. 당신 집에서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지 않느냐고? 집에서는 아빠가 돈을 최고 많이 벌지만 아빠가 가장 많이 쓰는가? 돈 한 푼 벌지 않는 어학연수 간 막내둥이가 최고 많이 쓰지 않는가? 가족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모든 인간이 한 가족이 되면 왜 안 되는데? 힘이 남아 돌 때 열심히 일해 남에게 나눠 주고 힘이 없을 때 남의 도움을 받고 사는 게 서로 ‘이익’ 아닌가?

 남는 것을 나눠 줄 수 없는 세상은 너무나 불행하다. 남아도는 것이 넘칠 때는 그것들을 처치 못해 몸이 늘 부글부글 끓고, 정작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는 받지 못해 몸이 오그라들고 찌그러드는 세상. 모두 한 세상 불행하게 살다 간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이 조금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처럼 순진한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이 단단히 미친 세상으로 보일 것이다. 동화 ‘벌거숭이 임금님’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