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여 피어나라


 우리나라 10대~30대의 사망 원인 중 가장 큰 것이 자살이라고 한다. 참으로 어이가 없다. 아, 꽃 같은 그 나이에 스스로 죽어야 하다니! 얼마나 좋은 나이인가? 나는 보리 고개를 힘겹게 넘으며 그 시절을 보냈지만 회상해 보면 만면에 웃음이 번진다. 마을 동무들과 산으로 냇가로 쉼 없이 뛰어놀았고, 가슴 벅찬 연애들도 있었고, 영혼이 목말라 애타게 신을 찾은 적도 있었다. 청춘! 다시 한 번 온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스스로 그 많은 것들을 버리다니!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며 얼마나 많은 말을 했을까? 그 소리는 너무나 커 우리들 귀에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가슴으로 조용히 들으면 가슴이 터질 듯 아파온다. 그들의 목소리들이 똑똑히 들린다. 한 사람 한 사람 얼굴도 선명히 보인다. 나도 가슴을 닫아야 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는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제는 경기도의 한 사립고등학교 여든 한 살의 교장이 남녀교사들을 교실 바닥에 엎드려뻗쳐를 시켜놓고 매로 엉덩이를 때렸단다. 반항하는 교사는 어깨를 마구 때렸단다. 아득해진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교직에 한 때 몸담았던 나는 사람들 앞에 발가벗고 선 듯 부끄러워진다. 이 사건을 어떤 언어로 해석해야 하나? 하지만 잠시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사건’ 아닌가? 우리들은 사실 평소에 힘 있는 자들한테 얻어터지고 까이며 살고 있지 않는가? 그 교장은 힘 있는 자들을 대표하여 우리들에게 적나라하게 우리 사회의 실상을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너무나 리얼해 우리들은 환상을 본 듯 잠시 멍해졌던 것이다.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큼 위대한 풍자는 없는 것이다.                       

 여든 노인의 그 교장을 생각해 본다.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을 것이다. 죽음의 얼굴이다. 그는 ‘죽음’에 취해 있다. 죽음은 딱딱하게 굳어 있다. 법, 규범, 질서, 그는 이런 것들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굳어 있는 것들은 죽음이다. 삶은 한없이 부드러운 것이다.

 그 교장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제국주의를 내면화하며 살아왔다. 그러다 해방이 되었지만 '삶'은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 미군정기, 이승만 독재, 박정희 독재시대를 거치며 그는 완벽한 ‘죽음의 인간’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에게 삼라만상은 살아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죽어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 그에게 교사가 사람으로 보일 리가 없다.

 우리 주변엔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경제성장’ 앞에 모두 무릎을 꿇는다. 경제가 마구 굴러가며 성장하다 누가 그 거대한 바퀴에 깔려죽어도 아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것은 경제발전에 따른 불가피한 일이다. 선진국이 되기 위해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경제성장을 왜 해야 하나? 하지만 이런 질문은 우문이다. 경제발전의 고급 부품이 되기 위해 고액 과외를 하고 특목고를 가고 명문대를 가고 유학을 간다. 아무도 그런 ‘엘리트 코스’를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죽음에 취해 있다. 죽음에 취한 세상에서 세계 제1의 자살률이 나온다.     

 오늘 아침에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가 여자였다. 내게 상냥히 웃으며 말했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해요.” “네?”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 얘기를 들으니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얼굴은 아니에요.”하고 말했다. 그런데 그 택시 기사는 내가 정말 웃는 표정이라고 우겼다. 정말일까?

 몇 년 전에 한 동화 작가가 내게 말했다. ‘웃을 때 보면 얼굴 표정이 소년 같아요.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 데드마스크예요.’ 그렇다. 내 얼굴은 너무나 오랫동안 굳어있었다. 죽음에 취해 살아 왔다. 문학을 만나고 내 얼굴 표정은 풀리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본질은 춤이다. 한없는 떨림이다. 아, 내게 정말 삶이 피어나고 있는 건가? 내 죽음의 늪에서 정녕 삶의 꽃이 피어나고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