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리학을 위한 변명 - ‘높은 관념성’과 '공리공론'

                                                                                              양백산인     박 희 용


 다산연구소 소장이자 당대의 석학 중의 한분인 박석무 저 『조선의 의인들』(한길사. 2010) 377쪽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조선 왕조의 통치이념이자 학문의 주조였던 성리학은 이론의 관념성이 높았기 때문에 실천이 어려워 공리공론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

 이 말은 해방 이후 학교 교육을 받기 시작한 세대가 식민지를 겪은 앞 세대로부터 늘 상투적으로 듣고 읽어온 말로서 대부분의 개인 및 집단의식의 근저를 형성하고 있다. 교과서를 다시 읽는 듯한 박석무의 말을 통해서 볼 때, 그는 학문적 이론과 현실적 실천의 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을 갖고 있으며, 그러한 기준에 맞추어 볼 때 성리학은 높은 관념성 때문에 실천이 어려워 공리공론화 되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 문장으로 요약한 평가의 대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미흡하다. 그는 단순히 '성리학'이라 말하였는데, 성리학도 초, 중, 말기에 걸쳐 그 사상의 개요가 다분다기화 되었다. 특히 고려 말 안향 등 관학자들에 의해 명나라에서 직수입된 주자 성리학이 냇물이라면 화담, 율곡, 퇴계가 일군 조선 성리학은 대하장강으로 이미 냇물과는 수량과 강폭을 달리한다. 명확한 개념 정의 없이 그냥 '성리학'이란 어휘 하나에 총평을 담기엔, 주자 성리학과 조선 성리학을 분명히 구별하지 아니하고 뭉뚱그려 총평하기엔 역사적 진실이 너무 무겁지 아니한가.


 이론과 실천의 일관성을 중시하는 그는 성리학 실천이 어려웠던 까닭을 ‘높은 관념성’에서 찾고 있다.

 ‘높은 관념성’이란 추상적인 말이 성리학 이론의 수심을 어느 정도까지 짚는지 모르지만, 성리학 이론의 관념성이 높았기 때문에 실천이 어려워 공리공론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성리학의 관념적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얼치기, 사이비 지식인들이 성리학을 처세의 방편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일상적 만족을 유일 가치로 하는 현실주의 때문에 성리학이 공리공론이라는 누명을 덮어쓰고 있는 게 역사적 진실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한다.

 그 당시의 지자들이 과거용 유학, 지적 현시용 성리학 위주로 자기 합리화를 위한 편협한 시각으로 성리학을 이해했기 때문에 올바른 실천이 어려웠고, 알맹이가 아닌 껍데기에 집착해서 인성과 물성을 재단했기 때문에 시대와 역사가 왜곡, 오도 되었다는 것이 제대로 된 역사적 통찰일 것이다.

 조선후기 이후, 조선망국과 식민지 시대, 분단을 거치면서 그 모든 민족사적 질곡의 원인이 봉건유학에 있고, 그것의 핵심인 성리학에 있다는 게 해방 이후 학자들의 일반적 평론인데, 시대가 흐를수록 쌓이는 사료와 학문성과에 의해 국망의 원인이 반드시 유학-성리학에만 있지 않다는 게 오늘날 학계의 한 작은 흐름이다.

 근대이후에 많은 학자들이 조선조 500년을 지배한 성리학의 부정적인 면과 폐해를 지적하며 그 대안으로 실학을 발굴하여 현양한 결과, 오늘날 실학은 역사적인 조명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으나 성리학은 케케묵은 골동품이 되어 외면, 소외되어 있다. 그들이 실학을 부각하며 실학이 성리학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학문인 줄로 광고하지만, 실학이란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학문의 경향, 즉 성리학이란 알맹이에 덮인 껍데기 이다. 서학을 추구한 학자들도 있지만 그들 역시 성리학적 교양을 이미 체득하였고, 조선 후기 대부분의 실학자들은 성리학적 가치와 사고를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 보태 새로운 사고, 즉 실학을 추구하였다. 그러므로 실학자들도 근본적으로는 유학자요 성리학자인 것이다. 시대 변화에 따라 껍데기는 변화할 수 있지만 알맹이, 즉 본질은 변화하지 않는다. 현상은 상대적이지만 본질은 절대적이다.

 사실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알맹이인 성리학을 왜 공리공론이라 치부하는지. 모든 물체는 알맹이, 즉 본질이 있어야만 존재가치를 갖는다.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는 약하여 금방 부서지고, 썩은 알맹이나 부실한 알맹이가 든 껍데기는 금세 부패하고 만다. 청출어람, 주자 성리학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지평을 연 조선 성리학은 알맹이 중의 알맹이이다. 그 소중한 알맹이를 탓하기보다는 껍데기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먼저 살펴보는 게 지자의 도리일 것이다.

 성리학이 갖는 ‘높은 관념성’이 문제라고 했는데, 관념성은 이론의 속성이다. 관념성이 높다는 것은 이론의 정치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리학은 이론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가진다. 그럼에도 성리학이 ‘높은 관념성’을 가졌기 때문에 ‘실천이 어려워 공리공론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는 말은 이론과 실천의 연관성을 부정하거나, ‘낮은 이론’에 적합한 ‘낮은 실천’을 강조하는 하향 평준화 평가라고 아니할 수 없다. 고려 말에 수입된 주자학을 승화 발전시킨 화담학, 퇴계학, 율곡학의 정수인 그 관념성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이후 시대마다 수두룩한 현실주의자들이 자기 합리화를 위해 편의성 위주로 이용한 ‘경세성’이 오히려 진짜 문제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리학의 ‘관념성’이야말로 얼마나 간단명료한가. 사유 활동을 근간으로 하는 인문학에서 관념성이란 사람에게서 정신이 차지하는 비중만큼 중요하다. 하물며 성리학은 고도한 사고력의 산물인 바, 정치한 눈을 가진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 관념성이 난해하다는 이유로 비판을 면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지극의 학문인 성리학의 관념성을 제대로 이해, 활용하지 못한 시대 상황적 경세성이 비판을 면할 수 없어야 마땅하다.

 성리학이 고질이 되어 쇠퇴하면서 실학이 그 대안으로 부각된 것은 아니다. 면면히 이어진 조선 유학자들의 학문적 업적이 쌓이고 쌓인 바탕 위에서 실학 등 새로운 학문 경향이 일어났다. 서세동점의 화급한 시대적 상항을 맞이하여 철학적인 가치 궁구보다는 현실 타개에 필요한 생활적인 가치를 추구하려고 실학이 발흥한 것이지 실학이 꼭 성리학의 관념성을 비판하고서 성립되는 게 아니다.

 이미 성리학자로서 일가견을 이룬 그 당시의 실학자들이 추구한 목표는 알맹이를 빼고 새 알맹이를 장착하자는 게 아니라 성리학이란 알맹이에 새로운 껍데기, 옷을 입히는 것이었다. 신장개업을 하자는 것이었지 점포를 폐쇄하고 새 사업을 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박석무의 역저인 『조선의 의인들』을 마지막으로 장식하는 화서 이항로, 노사 기정진, 한주 이진상 등이 주리론을 기본으로 척사위정론을 주장하는 것을 볼 때 정통 성리학맥에 가깝지, 주기론을 기본으로 실사구시론을 주장하는 실학자에 가깝다고 할 수는 없다.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학문에서 관념성은 속성이자 촉수 역할을 한다. 물론 지적 유희나 자기과시용 관념성은 당연히 배제되어야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높은 관념성’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박석무의 말대로 ‘높은 관념성’을 가진 성리학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이 어려운 공리공론’이라는 폄훼를 받으며 나라를 망친 주범이라는 누명을 여태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은 우리 학계의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날 일반적인 인식에서는 식민지, 분단, 전쟁의 원인을 조선 망국 때문이라고 한다. 이어서 조선 망국의 원인으로 시대적 가치를 상실하고 고질화한 유학, 주자학을 거론한다. 그러나 망국의 가장 큰 近因은 내적으로는 19세기부터 곪기 시작한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들의 세도정치, 무능한 왕과 신하들이 저지른 수탈과 탐욕의 삼정문란에, 외적으로는 일본을 침략수로 내세운 서양 자본주의 세력, 자본이란 흉기를 든 물신주의자들에게 있다. 그리고 망국의 가장 큰 遠因은 화담, 퇴계, 율곡이 일으켜 세운 조선 성리학이 아니라 기득권을 누리려는 입신양명주의자들과 그에 부화뇌동하는 무리들이 내세운 형식 예론과 탐욕으로 대변되는 사이비 주자학자들에게 있다.


 주자학이라는 껍데기를 뚫고 조선 성리학의 진면목을 보아야 한다. 현실과 유리되어 난해하다는 의미를 갖는 '공리공론'이라는 말 한 마디로 경원하기에는 조선 성리학이 갖는 무게가 너무 무겁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리공론'이란 말은 철저한 신분제도와 허례허식이란 족쇄를 채운 경국대전을 만든 조선 초기 관유학파들, 조선 성리학의 본류와는 무관하게 예론, 당론에 몰두하던 수구보수 주자학자들, 언로를 봉쇄하고 사상을 통제하여 학문의 백화제방을 꺾은 조선 후기의 노론-벽파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15세기 후반기에 발아하여 16세기에 화담, 퇴계, 율곡에 의해 활짝 꽃핀 조선 성리학은 뜻있는 선비들에 의해 면면히 흐르면서 외적의 침략을 극복하고 민생을 다독이며 이후 300년 동안의 조선을 지탱해 온 힘의 원천이었다. 극미로는 인성과 물성의 근본을 궁구하고 극대로는 세상과 우주의 법칙을 통찰하여, 인륜을 바로 세워 사회 구조를 유지하려는 조선 성리학자들의 노력은 시대와 역사를 추동하는 동력이었다. 세속적 부귀영화와 상관없이 청빈 속에서 진리를 궁구한 산림처사들의 정신과 삶의 태도에서 현대병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물질문명의 한계가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한 이 시대에 정신문명의 극치를 보이는 조선 성리학의 의미와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어야 한다. 현학자들이 자기 알음알이 자랑삼아 괜히 어려운 말로 비틀어 나열해 그렇지 성리학은 인간과 우주의 본질을 통찰하는 지혜의 학문이다. 시대와 역사, 인간과 사회를 종횡으로 꿰어뚤어 소통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성리학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문화 발전의 벼리이다. 선현들이 땀 흘려 일으켜 세운 조선 성리학의 학맥이 계속해서 흘러야 한다. 그리하여 주자 성리학이란 사대주의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조선 성리학이란 자주적 관점에서 보는 정당한 평가를 받아 이 땅에 새롭게 우뚝 세워져야만 나라와 生民들의 미래가 아침을 열듯 화창하게 펼쳐질 것이다.


                                                              2010년 9월 18일 열락연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