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 눌 때 정신을 차려라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만공 선사)  

소크라테스는 똥 눌 때 어땠을까. 죽을 때 이성(理性)에 걸림돌이 되는 몸을 이제야 벗어나게 되었다며 좋아했다는 그가 과연 똥을 누는 지극히 육체적 행위를 좋아했을까.
인류사에 흔적을 남긴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은 똥 눌 때 어땠을까. 아마 대다수는 똥 누는 행위를 버거워하지 않았을까. 오! 육체는 슬퍼라!(말라르메 시 구절)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마 똥을 누는 행위를 즐긴(?) 사람들은 주로 하층 사람들이었을 테고, 귀족 중에는 극소수였을 것이다. 그런 귀족들은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귀족은 귀족답지 못했을 테니까.
인간 세상의 지배자들은 육체를 싫어한다. 아니 싫어하는 척한다. 그래야 자신들이 동물성(육체성)을 극복한 다른 인간보다 나은 인간처럼 보일 테니까. 그들은 자연스런 여러 육체적 행위들을 경멸한다.
인류사의 주류철학들은 다 육체를 배제한 정신을 칭송하는 관념철학들이다. 서양의 소크라테스, 플라톤을 시원으로 하는 서양철학은 기독교 사상과 결합되어 육체를 써서 살아가는 노예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쉼 없이 꾸역꾸역 일만하는 노예들은 고상한 정신을 노래하는 귀족들에게 기가 질려 감히 대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귀족들은 노예들 앞에서는 육체를 하찮게 여기는 척하며 뒤에서는 온갖 육체적 쾌락을 누리고 살았다.
동양도 마찬가지였다. 공자의 고매한 사상, 석가의 큰 깨달음은 귀족들이 동양의 피지배계급들을 마음껏 부려먹는 충실한 세뇌의 도구가 되어왔다.
나는 성현들을 존경한다. 그들이 도달한 높은 정신적 경지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의 고상한 정신을 이용하여 지배계급들의 지배를 정당화시켜준 이데올로그들에게 큰 분노를 느낀다.                  
성현들의 사이비 추종자들이 너무나 많다. 고매한 사상은 글자로 전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글자는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달을 자신의 두 눈으로 생생히 볼 수 있을 때만이 그는 진정으로 그들의 사상을 이해한 것이다. 진정으로 달을 본 사람이라면 그들의 사상이 높디높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달은 어디서나 불 수 있다고 우리 주위의 물속에 비친 달들을 조용히 가리킬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손가락을 통해 진흙탕이나 맑은 물이나 아무데나 비치는 달을 보게 될 것이다. 하늘의 달만 얘기하는 그들을 나는 믿을 수 없다. 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리 확신하는가?
나는 하늘을 얘기한 공자의 사상을 근래에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한 최제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새까만 글자만 가득한 관념철학’을 신봉하는 자들을 경멸한다.
인간이란 육체 그 자체다. 육체를 떠난 정신이 어디 있는가? 예수는 말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육신이 행하는 만큼이 마음이다. 육신이 스스로의 위를 채우고 팔다리의 안락을 위해 물욕에 빠져 있다면 그가 아무리 고상한 생각을 하더라도 그는 천박한 존재다. 생각으로야 무엇을 못하나?
육신이 어디 있느냐가 자신의 정신적 위치다. 입으로 들어가는 밥의 출처가 그의 정신 그 자체다.                          
똥 눌 때 정신을 차리면 분명히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내가 내 몸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면, 나는 내 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침에 똥을 누며 이 구절을 생각한다. 하지만 깜빡 정신을 놓고 ‘끙’ 힘을 준다. 후딱 이 육체적 행위를 끝내고 싶은 것이다. 이게 내 정신 수준이다.